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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의원-79화 (79/350)

79화

사실 홍령에게 더 혼나도 할 말이 없는 게, 내 두 다리는 원래 이렇게 움직일 수 없었다.

창천의 새로운 깨달음을 기반으로 다리에도 경혈을 확장하고, 그 길을 잇고, 지속적인 수련으로 길을 만든 후 상단전의 기를 흘려보내는(홍령의 말을 빌리자면 위험천만한) 과정을 통해 팔처럼 다룰 수 있게 되었다.

[당신이 두 팔의 경혈을 이용할 때는 내가중수법이라든가, 점혈이라든가, 검기라든가. 아무튼 짧고 굵게 힘을 쓰는 경우가 많았어요. 하지만 경신보의 생명은 꾸준함이에요. 안정적으로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요.]

전에 기를 사용하던 방식과는 전혀 다른 방식이니까 항상 정신을 집중해야 한다.

솔직히 말이 쉽지, 내가 지난 한 달여간 계속 수련한 게 그 부분이었다.

단번에 집중하는 것보단 오랜 시간 꾸준히 신경 쓰는 게 더 어렵단 말이지.

“둘 다 너무 느림! 답답해!”

“참아라. 저분이 제일 답답하시겠지.”

함께 신법을 펼치던 당당이 불퉁거렸다. 녀석은 훨씬 빠르게 달릴 수 있었지만 우리에게 맞추는 중이었다. 녀석이라도 빨리 도착하면 훨씬 나을 텐데.

“혹시 찾아갈 수 있는 표식 같은 거 없나요?”

“북서쪽이고, 큰 소나무가 있어요! 삼십 리 정도 가면 되는데, 아!”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당당 녀석이 “먼저 감!” 하고는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 속도가 어찌나 빨랐는지 아버지가 쓰러져 마음에 경황이 없는 사람마저 깜짝 놀라 걸음을 멈출 정도였다.

“저, 저도 먼저 따라갈까요?”

“갈 수 있으면 가. 옆에서 당당 녀석이 하는 거 먼저 기록해놓고.”

“네!”

신생도 뒤따라 속도를 올렸다. 당당처럼 눈앞에서 휙 사라질 정도는 아니었지만 눈을 몇 번 깜빡하자 곧 지평선 사이로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대, 대체 무슨, 뭐 하는 분들이에요?!”

“의원이에요. 우리도 서두르죠.”

나도 다시 발을 내디뎠다. 이번에는 정신을 집중하고, 좀 더 신중하게.

[경신보의 시작은 보법이에요. 자신을 둘러싼 아홉 개의 방위를 오고 가는 방법이죠. 당신이 익힌 건 기초적인 거지만, 그 정도만 충실히 익혀도 보법의 기반은 확실히 다지는 거예요. 신법은 그 상태로 나아가는 일이죠. 당당이 전수해준 당가의 신법은 당신에게 잘 맞아요. 좀 신기할 정도로요. 솔직히 이렇게 다양한 갈래의 무공을 하나하나 익히는 게 별로 좋은 일은 아니긴 한데…….]

홍령의 말처럼 지금 내 상태는 다소 기묘했다.

우선 천소와공. 이건 내 상태를 안정시키는, 호흡처럼 지속해 온 내가기공이다. 듣기로는 도가계열의 무공이라는데 자세한 것은 모르겠다.

여기에 홍령이 내 상단전을 여는 데 사용했던 무명의 내가기공. 아마도 멸문한 화산의 것으로 추정되는 것이 현재 내가 주로 수련하는 내가기공이다.

거기에 보법은 창천에게 배웠다. 홍령은 도무지 생각나는 게 없다고, 기왕이면 같은 계열의 무공을 익히는 게 좋지만 어쩔 수 없다며 이를 허락했다. 양양에서 태양의원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다리가 엿가락이 되도록 연습하며 돌아왔던 게 바로 그것이었다.

모든 것을 십 수, 아니 십 보 안에 끝내는 창천의 검은 솔직히 감명 깊었으니까.

비록 체질적인 문제나 익힌 무공의 차이 때문에 내가 창천처럼 움직이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보법은 나름 익히기 어렵지 않았다. 내내 수련해온 오금희에도 기본적으로 발놀림이 가미되어 있었으니까.

기본 보법이라지만 그걸 가르칠 때 내 습득 속도를 본 창천도 결국 끝에는 칭찬 비스무리한 걸 한 마디 했었지.

그리고 신법.

이건 당당에게 부탁해 당가의 신법을 익혔다. 이름이 뭐라더라?

[이름 같은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어차피 당가 비전 신법도 아닌걸요.]

맞다. 당당이 내게 가르쳐준 건 당가의 비전이 아니라, 당가에서 그들과 인연이 있는 이들에게 가르친다는 신법이었다.

당가가 위치한 사천의 지리는 무척이나 험한데, 그런 곳을 다니기에 적합한 신법이라고 했다.

아무나 가르쳐주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가르침에 인색할 정도는 아닌 신법. 당당이 내게 서슴없이 가르쳐줄 수 있는 정도여서 나도 배우는 데 부담이 없었다.

[그래도 당가의 신법을 이루는 기본이니까요. 험한 곳을 다니기 위해 만들어진 거라 이런 평지에서는 몸을 움직이기가 더 편하고요. 기운을 적게 소모하면서 효율이 좋도록 만들어진 거죠.]

설명만 들으면 거의 최고의 신법이 아닌가 싶지만, 대신 신중하고 느린 단점이 있단다.

내게는 충분히 빨라서 그게 단점인가 싶을 정도긴 하지만.

지금도 보라.

저쪽은 나와 나이가 비슷해 보이지만 척 봐도 태어났을 때부터 검을 쥔 천상 무인처럼 보이는데, 지금 나와 거의 비슷한 속도를 유지하고 있지 않은가?

[사천당가잖아요. 기준이 높은 거겠죠.]

“거의 다 왔어요!”

한 걸음 한 걸음에 집중하며 달리자 어느새 작은 장원으로 들어서는 길에 접어들었다.

저 멀리 아까 들었던 큰 소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과연 표식으로 지정할 만큼 한눈에 들어오는 커다란 나무였다. 적어도 수십 년은 됐으리라.

[청화문?]

장원의 활짝 열린 대문 앞에서 홍령이 중얼거렸다. 청화문이라니, 그거 우리가 상대하는 무당의 속가문 이름 아닌가?

[아뇨, 현판을 봐요. 청화문이라고 적혀 있어요.]

홍령의 말마따나 낡아서 곧이라도 폭삭 무너질 것 같은 장원의 대문에는 청화문이라 적힌 낡은 현판이 걸려 있었다. 발음뿐 아니라 한자도 정확히 청화검문과 일치하는 이름이다.

[별일이네요. 보통 문파는 자기랑 이름이 겹치는 문파가 주변에 있는 걸 용납하지 않는데 말이에요. 게다가 청화검문은, 당신이 하오문의 조사서로 확인한 바에 의하면 자기들이 이 근처 동네들의 주인인 것처럼 구는 문파였잖아요?]

거기에 저 오래된 소나무도 신경 쓰인다.

장원이야 관리를 잘못하면 지은 지 얼마 안 되는 것도 폐가처럼 낡기 마련이지만, 소나무가 저 정도로 자라려면 수십 년 세월이 필요한데.

그 말은 청화문이 그 이름으로 이 자리에서 수십 년을 이어왔다는 거다.

뭔가 사연이 있어 보이는군.

[하오문에서 보낸 서찰에는 그런 얘기 없었잖아요?]

그들이 주는 정보가 전부는 아니겠지. 애초에 그 끈을 누가 만들어 준 건지 생각해보라고. 내게 정체를 들킨 은 파파가 할머니가 그 대가로, 어린 손자에게 용돈 주듯 만들어준 끈이다.

그 이상은 스스로 해보라는 뜻이겠지.

“우선 환자부터, 어디 계십니까?”

“아, 진짜 못해 먹겠음!”

일단 대문을 들어가 환자를 찾으려는데 당당의 짜증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들린 쪽으로 가보니 웬 등이 굽은 노파와 당당이 눈싸움을 하며 대치 중이었다.

“할머니!”

“이 가시나야! 의원을 데려오겠다더니 이 반편이는 뭐꼬!”

“의원님한테 반편이라니, 무슨 무례야!”

“야! 나 감! 여기 있기 싫음! 알아서 와!”

꼬장꼬장해 보이는 노파가 있는 대로 성질을 낸 데 더불어 당당까지 있는 대로 신경질을 내며 홱 몸을 돌렸다.

뭐야, 진짜 가려고? 여기까지 와놓고?

하지만 당당은 내가 붙잡을 새도 없이 왔던 길을 향해 바닥을 박찼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예요?!]

나도 모르겠다.

그래도 다행히 내겐 이 상황을 설명해줄 사람이 있었다.

“대체 무슨 상황이야, 신생?”

당당을 먼저 따라갔던 신생이 안절부절못하다가 내게 다가왔다.

“그게, 당당 님이 환자를 진맥하려고 했는데요. 저 할머님이 갑자기, 당당 님이 맥을 짚으면 부정 탄다고 진맥을 거부하셨어요.”

부정 탄다고?

정황을 보니 저 노파는 환자의 어머니인 모양인데.

당당이 사천당가라는 걸 알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긴 하겠지만……

허억, 헉……!

그때 안에서 누군가 숨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자리에 있던 모두가 재고 따지고 할 것 없이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파리한 낯의 중년인이 누워 있었다. 서둘러 맥을 짚었지만, 그래, 홍령이 아니라는 말을 하기도 전에 알아차릴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았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도리는 해야겠지.

이심전심, 말하지도 않았는데 홍령이 몇 군데에 침을 놓았다. 그 즉시 환자가 깊은숨을 토해냈고 이내 숨이 고르게 변했지만, 그뿐이었다.

“마음의 준비를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맥이 많이 상했어요. 임시방편으로 붙들어놓은 것뿐, 어떤 의원이 와도 무리일 겁니다.”

“아까 그 짝째비도 그러더니, 이놈은 또 무엇이여!”

“할머니, 그만해!”

한숨이 절로 나왔다. 솔직히 뛰어난 실력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항상 환자를 낫게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전생의 그 뛰어난 의학기술과 의료체계에도 사람은 항상 죽어나갔는데, 이곳이라고 다를까. 더하면 더했지.

하물며,

[……사람의 생이 다하는 것은 어떤 신의도 해결할 수 없는 일이죠.]

귀신인 홍령이 이렇게 말할 정도로 생기(生氣)를 잃은 사람이라면 말이다.

“간화(肝火)가 심하고 심음(心蔭)이 허한데 비위도 상해있는 걸 보니 평소 걱정거리가 많고 항상 긴장한 상태였던 거 같군요. 고달프게 살아오셨으니 가는 길만이라도 편하게 해주세요.”

이 정도면 중증의 신경쇠약이었던 거 같다. 스트레스는 아무리 건강한 사람도 말라비틀어지게 하기 마련이니까.

내 말이 옳았는지 심통을 부리던 노파가 털썩 주저앉아 곡을 하기 시작했고 나를 데리고 온 이는 침통한 낯으로 고개를 숙였다.

“……연이, 연이냐.”

“아버지!”

“의원을 불러온 게냐. ……이건 회광반조겠구나.”

[우린 나가 있죠.]

홍령의 침 덕분에 정신을 잃었던 환자가 잠깐이나마 눈을 떴다. 가족들끼리 마지막 시간을 보낼 수 있게 자리를 뜨고 잠시 후, 안에서 노파가 곡을 하다못해 오열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 밤중에 뛰어온 보람이 없네요, 스승님.”

신생이 떨떠름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 아이가 뭔가에 대해서 이렇게 투덜거린 적이 있던가?

하긴, 누군가를 살릴 수 있다는 사실이 좋아서 의술을 익히기 시작했으니 누군가가 손 쓸 도리 없이 죽어 나갈 수도 있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진 않겠지.

“그래도 우리가 온 덕분에 평화롭게 마무리를 하실 수 있게 됐지. 그건 생각보다 큰 의미를 가진단다. 일전에 양양에서 돌아가신 분들을 생각해 봐.”

“아……!”

“나이가 들어 가족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생을 마감할 수 있다는 건, 생각보다 큰 행운이란다.”

그 말을 이 어린 아이가 얼마나 이해할지는 모르겠지만, 신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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