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신생은 착한 애라 곧 납득하고는 내일 보자며 자리를 떴다.
“그럼 오늘은 어디부터 함? 호갈독을 꺼낼까?”
“아니, 오늘은 궁금한 게 있어서 뭘 좀 물어보려고 하는데.”
“궁금?”
녀석이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물었다. 이렇게 보면 그냥 사춘기 나이 대의 명랑하고 밝은 녀석인데 말이지. 이 녀석과 화산지회에서 내 골치를 썩인 자하신룡이 같은 사람이라는 게 가끔 기분 이상할 때가 있다.
“너희 집에 대해 물어봐도 돼? 사천당가 말야.”
“우리 집?”
그 말에 당당의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전부터 느낀 거지만, 당당은 자신이 사천당가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못내 자랑스러워하면서도 집안 얘기가 나오면 기분 나빠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그와 피를 나누고 당가타에서 독술을 수련하며 살아가는 그의 가족들 말이다.
“무림의 명가는 독특한 체질이 있다고 들었어. 그 체질을 극복하기 위해 양생을 연구하다가 무공을 창안하게 됐다고 했고.”
“맞아. 나도 그렇게 들었음.”
무림에서는 나름 비사에 가까운 일이지만 녀석은 내가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게 아무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혹시 당가도?”
나는 그 말을 하며 바짝 긴장했다.
오대세가가 유전적으로 치명적인 약점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거랑, 그래서 네가 가진 체질적 약점은 뭔데? 라고 묻는 건 전혀 다르지 않은가.
제 가족에게 불쾌감을 드러내면서 나에게는 호의적이고, 하나의 목표를 향해 연구하는 동료가 됐지만 예민한 주제인 건 분명했다.
“그런 거 없음!”
“……없어?”
“거짓말 아님. 우리 당가는 그런 거 없음.”
[거짓말은 아닌 거 같긴 한데. 하지만 말도 안 돼요.]
홍령의 말이 옳다.
왜냐하면,
“하지만 그 넓은 사천 땅에서 사천의 독을 다루는 데 성공한 게 당가뿐인데?”
사천당가의 체질적 특징은 다른 무림명가와 달리 무림 전체에 가장 널리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당가의 직계는 갓난아이일 때부터 기본적으로 백독불침을 타고난다지? 그것도 당문의 거짓말인가?”
“그, 그건 진짜임!”
녀석이 얼굴이 새빨개져서 항변했다.
말하자면 이렇다. 당가의 유전적 특징은 이들에게 단점이 아니라 오히려 장점으로 개화한 것이다.
[체질 자체가 독이 잘 듣지 않는다면, 자연독이 넘치는 그 땅에서 패자로 살아남을 수 있는 완벽한 조건을 갖춘 셈이죠.]
아무리 유전적으로 어떤 특징이 이어진다고 해도 그게 단점이 아니라 장점이라면 오히려 여기저기 떠벌리고 다녀도 나쁠 건 없다.
부럽구만. 남들은 그놈의 체질 때문에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사는데.
“근데 그건 갑자기 왜? 그게 우리 연구에 무슨 관련이라도 있음?”
“우리 연구까지는 아니지만 내가 이런 몸이라 특이한 체질에 관심이 많거든.”
나는 가면을 벗었다.
창천과 신생, 그리고 장 의원.
그 셋을 제외하고는 처음―
[나도 있거든요?!]
하아, 넌 내가 일부러 보여준 게 아니잖아.
[아무튼요. 그런 식으로 빼면 괜히 섭섭하다고요.]
알았다고.
“뭐야, 무슨 독에라도 당했어?”
이런 반응은 또 처음이네.
오히려 조금 긴장하고 가면을 벗은 내가 김이 샐 정도로 시큰둥한 태도였다.
하긴 당가 사람이니까 독에 당한 이들의 일그러지고 엉망이 된 얼굴 정도는 많이 봤겠지.
“독이 아니라 체질이야. 어떤 명가의 체질은 오행 중 특정한 기가 부족해서라는데, 나는 오행의 기가 다 부족한 사람이지.”
“흐응, 선천지기만으로 버티는? 내부의 흐름이 엉망이겠네. 얼굴이 그럴 만도 함. 얼굴만 그럼?”
“아니. 원래는 온몸이 문제였어. 그나마 좀 나아진 거지.”
나는 간단하게 내 몸의 상태와 어디에서 힌트를 얻어 두 팔을 회복했는지 얘기했다.
상단전을 연 얘기는 뺐지만 그것만으로도 당당은 흥미를 보였다.
누가 봐도 죽을 거 같은 체질의 환자가 목숨을 연명한 걸로도 모자라 일부를 치료했다니, 의원이라면 구미가 돋지 않을 수 없는 얘기였으니까.
“―그래서 네 체질도 좀 참고하고 싶었거든. 내가 알고 있는 사례는 하나뿐이라.”
그 알게 된 사례가 남궁세가의 것이고 창천의 체질이라는 사실은 숨겼다. 녀석은 그것까지 꼬치꼬치 캐묻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건 내 의견인데. 기허(氣虛)라는 거 말이야, 네가 말하는 산공독의 증상하고 비슷하지 않아?”
“……!”
“아니, 그렇잖아. 결국 생기(生氣)도 기란 말이지. 산공독도 내공이랄까, 내기랄까. 그걸 없애버리는 거잖아?”
“으음, 발상은 좋음. 하지만 내기와 생기는 엄연히 다르긴 한데, 듣고 보니 꼭 다르지만은 않은 거 같고…….”
“그리고 이거. 기억하지?”
내가 내민 건 손바닥만 한 목갑이었다. 당당은 그걸 열어보곤 눈이 휘둥그레졌다.
“고독이잖음!?”
이걸 그 짧은 시간 안에 까먹을 리 없지.
맞다. 내가 내민 것은 고독이었다. 양양의 수많은 이들을 죽음으로 몰아갔던 그 지옥 같은 벌레.
나는 천산오공의 갑린과 당당이 썼던 독을 배합해서 놈들을 반죽음 상태로 만들어 놓았다.
“이거 말이야. 생각해보면 이상하지 않아? 딱 무공수위가 삼류 정도인 자들의 상태가 가장 심각했다는 게 말이야. 게다가 죽은 이들의 시신 상태가 말이지, 이랬다고.”
죽은 이들 중 신분이 명확한 자들은 연고가 있는 지역으로 보내졌지만 일부는 그렇지 못했다.
당당이 화산지회 예선의 마지막을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있을 때, 나는 홍령과 함께 죽은 이들의 시신을 모아 장사를 지내기 전 부검을 시도했다.
“……그림 못 그림.”
“나도 알거든. 기록한 특징만 봐. 죽은 지 삼 일이 지난 사체의 오장육부가 말라비틀어진 채였어.”
말라 비틀어졌다는 건, 뭐랄까. 일종의 비유다. 건어물처럼 말라 비틀어졌다는 게 아니라 푸석푸석하고 쪼그라들었다는 거다.
시신이 부패하지 않게 처리해 두긴 했지만 그건 뭐랄까, 산 자라면 누가 봐도 기이함을 느낄 만한 모습이었다.
고독이 파고든 자리는 어김없이 생기가 사라졌다.
“시신이니까 생기가 없는 건 당연하겠지만, 미라 같다고 해야 하나.”
“미라? 그게 뭐임?”
아, 미라가 영어던가? 나는 잠시 적절한 단어를 찾기 위해 골몰했다.
“……강시?”
“아, 강시!”
“아무튼, 내 가설은 이거야. 이 고독, 내기를 빨아먹고 자라는 놈이 아닐까?”
“그놈이 산공독?!”
당당이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는 내가 내린 결론을 차근차근 풀어놓았다.
“너무 강력한 내공을 지닌 몸에는 침투하지 못하지만, 삼류 무인들의 몸에서는 급속도로 번식해나갔지. 일반인은 금왕전장이나 도박사들처럼 노출이 많이 된 경우에만 해당됐고. 기본적으로 내기를 빨아먹지만 아쉬운 대로 생기를 빨아먹기도 하는 거지.”
“그거랑 너랑 나 체질이랑은 무슨 상관?”
“약과 독은 종이 한 장 차이잖아. 이 고독이 기를 갉아먹는다면, 이 녀석들을 근본적으로 치료할 방법은 기를 보충해줄 거고, 그게 내 체질에도 도움이 될 거고. 반대로 내 체질이나 다른 명가들의 특정 기허에 대해서 알게 된다면 산공독을 만드는 원리를 알아낼 수도 있을지 모른단 얘기지.”
“아하, 그래서!”
그것도 있고 겸사겸사 정보 좀 얻으려고 한 거지만.
“그럼 이거 한 마리는 내가 가짐. 이리저리 뜯어봄.”
“그래. 너희 집안 체질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고.”
단점 없이 장점만 있다고 해도 그 체질이 보통과 다른 건 분명하니까. 당가의 체질에도 분명 내 몸을 개선할 수 있는 힌트가 있을 거다.
“스승님!”
음, 이제 신생이 저렇게 부르는 것도 익숙해졌다. 환자군.
[환자가 아니에요.]
환자가 아냐?
문을 열자 신생이 누군가와 함께 있었다. 놀란 듯 낯이 새하얗긴 하지만 확실히 환자로 보이진 않았다.
“늦은 시간에 미안해요! 여기 무당의가 아닌데 실력 있는 의원이 있다고 들었어요!”
“무슨 일이십니까?”
“아버지, 아버지가 쓰러지셨어요! 제발 살려주세요!”
나는 곧바로 왕진가방을 챙겨들었다.
환자를 의원까지 데리고 올 수 없는 상황이라 의원이 가야 하는 상황, 드물긴 했지만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때를 위해 항상 침과 비상약, 간단한 수술도구 등을 챙겨둔 가방을 항상 곁에 두고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합니까? 서두르죠. 신생, 말을 빌려 갈 테니 표사들에게 말해줘!”
“아뇨! 제가 의원님을 업고 갈게요! 그게 빠를 거예요!”
업고 간다고? 무림인인가? 다시 살펴보니 허리에 검을 패용하고 있었다.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른 경신법이라면 웬만한 말이 뛰는 것보다 빠르겠지만―
“그럼 앞장서 주세요. 따라가겠습니다. 가자, 당당!”
“예? 하지만―”
“신법으로 따라가겠단 얘기예요. 서두르죠.”
“아, 네!”
“저도 갈게요, 스승님!”
무슨 상황일지 모르니 신생이 따라온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나는 한 번 깊게 심호흡했다.
태양의원으로 빠르게 달려오는 당당의 신법을 보고 이를 배우기 시작한 지 한 달여.
“그, 그럼 출발할게요! 잘 따라와 주세요!”
내 발이 앞서가는 사람을 따라 지면을 박찼다. 갈라지는 밤바람이 내 뺨을 빠르게 스쳤다.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주변의 풍경이 휙휙 바뀐다.
내가중수법이나 점혈도 신기했지만, 경신법이 주는 기이한 느낌은 또 다른 종류의 것이다.
정말로 고수의 경지에 오르면 한달음에 중원 대륙의 끝에서 끝을 오고 갈 수 있다지만 난 아직 그 정도 경지도 아닌데도 경신법을 펼칠 때면 기이한 고양감이 차올랐다.
전생의 올림픽에는 수많은 종목이 있었지만 그 대미를 장식하는 건 항상 육상이었다.
달리기, 높이뛰기나 멀리뛰기, 원반과 포환, 해머던지기 등. 그 단순한 종목이 올림픽에서 가장 권위 있는 종목인 이유는 ‘누구나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누구나 할 수 있는 일들 중 인간의 범주를 뛰어넘은 자를 가리는, 인류 제일을 뽑는 싸움.
달릴 수 있는 사람이라면 100m 금메달리스트의 한계를 뛰어넘는 속도와 마라토너들의 경이로운 체력에 경외가 생길 수밖에 없다.
그런 경이로움이 내가 발을 땅에 디딜 때마다 펼쳐진다―
일전에는 무림인들의 무공과 힘에 대한 집착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사람들이 무림인에게 보이는 은근한 경외도 이해할 수 없었다. 내심 야만적인 풍습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제는, 그걸 이해할 수 있다.
[집중! 아직 딴생각을 할 정도는 아니라고 했죠?]
신법이 주는 고양감에 빠져 있던 내 정신을 홍령이 한 번에 건져냈다. 그렇다. 사실, 내 신법이 그렇게 완숙한 건 아니었다.
[두 다리를, 근육과 뼈의 움직임을, 발가락 하나까지 세밀하게 느껴야 한다니까요! 길의 상태에 따라, 방향에 따라 보법의 기초를 응용하는 것도 잊지 말고요! 경신보(輕身步)는 하나의 길이라고 누누이 말했죠?]
네네, 선생님.
나는 다시 홍령의 말에 따라 달리는 두 다리에 정신을 집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