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그래서 한동안 자리를 비울 겁니다.”
며칠의 준비를 거친 후 나는 태양의원의 식솔들을 모두 모아놓고 말했다.
이번 출장은 출장이되 의원의 문을 닫진 않는다. 내가 없어도 다른 의원들이 충분히 교대로 돌아가며 환자들을 치료할 수 있으니까.
창천 녀석은 이번에는 정말 깨달음을 제 걸로 만들어야 한다며 나에게 수련을 빼먹지 말라고 강조하곤 빠졌다.
신생은 홍령에게 계속 가르침을 받아야 하니 함께하기로 했다. 어차피 공부 외에 할 것도 없고 나 혼자 가면 누가 보조를 맡으냐며 따라붙었다.
장 의원도 남기로 했다.
장중경의 상한잡병론은 내 예상대로 구전으로 전해지고 있었지만, 장 의원은 자신이 그 많은 내용을 까먹을까 두려워 필사본을 만들었다고.
그리고 슬프게도(?) 그 예상은 적중해 장 의원은 중요한 많은 부분을 잊어먹은 상태였다.
거기에 창천의 상태를 보고한 기록도 있다고 하니까, 장 의원에게 위치는 들어놓았으니 일이 해결된 후 가서 내가 찾으면 된다.
사실 장 의원은 방통의원이 하는 짓을 듣고는 자기가 가서 본때를 보여주겠다며 난리를 쳤지만 내가 안 된다고 만류했다.
제약방의 일도 일이지만, 내 계획에 장 의원의 자리는 없었으니까.
“혹 수술을 할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최 의원이 물었다. 좋은 지적이다.
“저는 갔다가 한참을 안 돌아오는 게 아니에요. 저기 금왕표국의 표행 있죠?”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제7 표행단이 아닌, 나도 얼굴이 낯선 표사들이 태양의원의 대문 밖에서 표마차를 멈추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금감양에게 요구했던, 태양의원의 앞을 바로 지나가는 정기 표행이다.
“정기 표행을 이용해 마을과 마을 사이를 오갈 겁니다. 그러면 칠 일에 한 번은 여기로 돌아오게 되어 있어요. 응급처치는 여러분께 부탁하겠습니다. 제가 돌아와 수술에 임할 수 있게 준비해주세요.”
“그렇다면야, 알겠습니다.”
“그래도 정말, 이건 당장 수술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싶은 상황이 온다면.”
나는 최 의원을 바라보았다. 양양에서 데려온 이들은 누구 하나 빠지는 것 없이 실력이 월등했지만, 수술에 관해서라면 최 의원의 실력이 단연 뛰어나다.
“책임은 내가 질 테니 환자를 우선으로 생각해주세요.”
“하지만 저희는 점혈을 할 수가 없는데…….”
“창천 녀석에게 먼저 도움을 청해보시고, 녀석이 없거나 부탁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마비산을 쓰세요.”
양양 사태가 있을 때, 당당 녀석이 만든 사천당가 특제 마비산은 덧나지도 않고 효과 또한 탁월해 청운진인의 인정을 받았다.
그거라면 유사시 수술을 했을 때 책잡힐 일은 줄어들겠지.
[애초에 점혈 없이 마비산만 써도 수술을 할 수 있게 바꿔주면 좋을 텐데 말이에요.]
그 부분은 태청의문이 이권을 유지하는 방식과 연계가 되어 있으니 쉽게 바뀌진 않겠지만, 앞으로 그럴 수 있도록 노력해야지.
“외람되지만 저희가 보유한 사천당가 특제 마비산은 양이 얼마 되지 않습니다. 수술 외에도 쓸 곳이 있을 텐데, 수술을 우선시 해야 합니까?”
마비산은 그 특징이 마취에 있는 만큼 수술 외 격통을 겪는 환자에게 처방하는 경우가 있다. 아니, 사실 수술보다는 그쪽에 사용할 일이 더 많지.
“그건 걱정 말아요. 올 때가 됐는데.”
[아까 마을 어귀에 도착했어요. 곧 모습이 보일 거예요.]
나는 대문 밖으로 나갔다. 과연, 홍령의 말마따나 누군가의 신형이 이쪽을 향해 빠르게 달려오고 있었다. 저게 바로 경신법이라는 건가?
“오랜만! 잘 지냈음?”
당당 녀석이 내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늦었잖아. 어제는 도착했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미안, 미안. 생각보다 구경이 재밌어서 늦었음! 이건 부탁한 거임!”
당당이 어깨에 멘 묵직한 망태기를 내려놓았다. 이런 작은 시골에서는 볼 수 없는 귀한 약재들이 가득 담긴 망태기였다.
[제대로 가져왔어요. 물건 보는 눈은 확실히 당가의 핏줄답네요.]
이건 신약을 만들기 위한 재료다.
아, 정확히는 신약이 아니라 신독(新毒)인가?
우리는 녀석이 만들어 보자고 했던 산공독, 그걸 만들 계획이었다.
[구전으로만 떠도는 이야기니까 만들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지만요. 만에 하나라도 성공한다면 엄청난 일이 되겠죠.]
홍령의 말마따나 말이 만들 계획이지 말하자면 연구를 해본다는 거에 가깝다.
양양에서의 화산지회 예선이 끝나고, 이번에는 내가 당당에게 역으로 제안했다. 산공독을 만들어보자고 말이다.
한번 거절했던 제안을 다시 역제안을 하게 된 이유에는 몇 가지 계산이 있었다.
첫째, 산공독은 내게 큰 무기가 된다.
나 개인이 터무니없이 강한 무림인을 상대할 때 목숨을 구할 용도로 쓰일 수도 있겠지만 솔직히 그건 가능성이 낮다.
그만큼 무공이 고강한 무림인이 내가 산공독을 쓰게 내버려 두겠는가?
독을 쓰는 사천당가가 독가(毒家)가 아니라 무가(武家)인 건 다 이유가 있는 거다.
[하지만 그걸 만들 수 있다면 그 자체로 의맹에 한 다리를 걸칠 때 필요한 무기가 되겠죠.]
사천당가도 못 만들 독, 거기에 무림인들에게는 치명적일 수 있는 독.
무림인들을 상대로 충분한 협상 카드가 되겠지.
둘째, 산공독을 연구하는 동안 당당을 붙잡아놓을 수 있다. 그것도 공짜로!
[이곳 북쪽과는 발병하는 질병의 종류부터가 다르니까요. 사천은 얼마나 색다른 처방을 할까요? 듣도 보도 못한 약재도 있겠죠? 생각만 해도 설레네요!]
참고로 이 귀신은 당당에게 역제안을 했을 때부터 이 난리였다. 태양의원으로 돌아와서도 [그래서 당당은 언제 온대요? 빨리 오라고 하면 안 돼요? 빨리 의술에 대해 논하고 싶어 죽을 지경이라구욧!] 하면서 나를 수시로 들볶아댔다.
“그리고 네 심부름도 다 했음. 네 누님이 전해달라던 것도 있음. 이거랑 이거. 그리고 이것도.”
사실 당당과의 협업은 단순히 공짜가 아니다. 오히려 돈을 버는 일이었다.
조급한 건 당당 쪽이니까, 태양의원에 머무는 동안 숙식비 대신 환자도 봐달라고 했지.
그리고 지금은 내 심부름을 다녀오는 길이다. 양양에서 헤어지면서 산공독 연구에 쓸 만한 약재를 죄다 사오라고 했으니까.
[이 지역에서 그런 걸 살 만 한 동네는 중원 물류의 집산지인 무한 뿐이죠.]
양양도 약재로는 알아주지만 거긴 태청의문이 쓰는 약재만 구비해 놓아서 종류가 다양하지 않았다.
금왕표국을 이용하면 편하겠지만 표물장부에 기록을 남기는 걸 피하기 위해서 녀석을 직접 보낸 거다.
무한에 가는 길이니 누님, 금왕전장주 금진양에게 보내는 편지 심부름도 시켰다.
[그냥 편지 심부름이 아니잖아요. 솔직히 난 당당에게 그 큰돈을 들려 보내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니까요.]
그래. 당당에게 부탁해 누님에게 전달한 것은 금 백 냥짜리 전표였다.
누님이 빌려주었던 돈, 갚지 않아도 된다고 했던 그 돈을 갚은 거다. 무당의 책임 배상 덕분에 그 정도는 여유롭게 갚을 수 있었다.
갚지 않아도 된다고는 했지만 그걸 갚아야 누님과 나의 신뢰 관계가 더 탄탄해질 테니까.
은행의 신용은 공고히 해둬서 나쁠 게 없지.
[그냥 당당해지고 싶었다고 해요.]
아, 당당 말인데. 녀석에게 큰돈을 맡긴 건 일종의 테스트였다.
우리가 앞으로 진행할 프로젝트는 외부에 흘러나가면 위험해지는 일이다.
수십 년 쌓은 내공을 흩어버리는 독이라니, 그런 걸 개발한다는 소문이 무림에 퍼진다면 태양의원은 쑥대밭이 될 테니까. 나름 적잖은 돈으로 녀석을 시험해 본 거지.
만약 녀석이 돈을 떼어먹고 튀면 사천당가에서 받아낼 수도 있고.
[쑥스러우니까 말 돌리기는.]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장점이 많다. 당당과의 대화를 통해 홍령이 새로운 지식을 얻게 되는 건 물론이고, 나 외에도 탁월한 의원이 태양의원에 상주하는 것, 그리고 거기서 다른 의원들이 보고 배우는 것까지. 산공독을 개발하는 데 실패해도 내게는 이득뿐이다.
“맞다, 마비산은 여기 있음!”
그리고 지금은 방통의원을 탈탈 털어버리는 수단 중에 하나가 될 것이다.
당당이 품 안에서 마비산을 몇 첩이나 꺼냈고 나는 그걸 최 의원에게 안겼다.
“이 정도면 비상시 쓸 정도는 되겠죠? 그럼 이만 가볼게요.”
“다, 다녀오십시오!”
“살펴 가세요!”
태양의원의 식솔들이 나와 당당, 그리고 신생을 배웅했다.
“이제 출발하시는 겁니까?”
“네, 사전에 얘기했던 대로 움직이죠. 약간 시간이 늦었네요. 미안하지만 속도를 좀 올려줘요.”
“알겠습니다, 도련님.”
우리가 금왕표국의 표마차에 올라타자 곧바로 표행이 이동하기 시작했다. 관도를 깔아놓은 덕분에 속도도 괜찮았고 덜컹거림도 참을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근데 우리 어디 감? 연구하려던 거 아님?”
아, 이 녀석에게 설명을 안 했지.
녀석은 내가 방통의원과 관련된 일을 해결하러 가는 걸 모른다. 가면서 미리 설명해두는 게 좋겠지.
“……같은 의원이 있어. 사람을 낫게 하기는커녕 병만 주고 있는데. 가만히 둘 순 없잖아?”
“당연함!!! 어떻게 가만둘 수 있음! 그것들은 인간이 아님!”
예상대로 방통의원의 행태를 설명하자 당당이 길길이 날뛰었다.
비무대에서 거침없이 독을 쓰던 녀석의 반응이라고 보긴 어렵지만, 같이 지내다 보니 녀석에게도 나름의 룰이란 게 있었다. 비무대에서 자길 상대하기로 한 이들에게만 독을 쓸 뿐이었으니까.
그런 점에선 꽤 정정당당하달까. 사천당문도 정파라서 그런 건지 아니면 어려서 그런 건진 모르겠지만.
“그래서 어떻게 할 거? 쳐들어감? 다 쳐부수는 거?”
[역시 당당이랑은 생각이 통한다니까요. 봐요, 당당도 가서 다 때려 부수자고 하잖아요!]
이래서 무림인들이란.
나는 손짓으로 표사에게 표국의 일과 표행에 대해 호기심을 해소하고 있는 신생을 불렀다.
다들 어린애의 질문이 귀찮을 수도 있을 텐데, 내 이름값 덕분인지 신생의 질문에 대부분 대답을 해주고 있었다.
의술을 배우기 시작하면서부터 다른 것에도 관심이 커졌단 말이지.
“표사들 얘기는 재밌었어?”
“네! 상단이 있는데 왜 표국이 따로 필요한지, 물건 호송 외에 다른 일들은 뭘 하는지 들었어요!”
“표사가 되고 싶으면 말해. 이런 말 하긴 뭐하지만 그런 쪽으론 만만찮은 연줄이 있으니까.”
[아니, 왜 의술 신동인 애한테 헛바람을 넣어욧! 그 재능으로 표사는 무슨 표사예욧!]
표사가 어때서? 심지어 내가 소개해 준다고 하면 금왕표국의 표사인데. 표국 업계에서는 전생의 O성그룹 급이라고. 게다가 신생은 무공에도 재주가 있으니까 의술보다는 그쪽이 더 맞을 수도 있지.
“아뇨! 아니에요! 표사분들은 특별히 어떤 곳이 더 아플까 궁금해서 물어본 거예요! 아무래도 남들하곤 다른 생활을 하시니까.”
[그것 봐요! 애한테 질투하지 마요!]
질투라니.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지.
됐고, 일 얘기나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