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사실 방법 자체는 크게 어렵지 않으니까요. 양양에서도 따라 하는 사람들이 생겼다면서요.]
며칠 전 양양에서 생산한 물량을 다 판매하고 태양의원으로 복귀한 왕 씨가 투덜거린 얘기였다.
탕약을 밀봉을 통해서 상품으로 판매할 수 있다는 걸 본 의원들이 같은 방식으로 밀봉된 탕약을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고.
특히 우리의 주력상품인 활명탕은 아예 태청의문에서 <태청활명수>라는 이름으로 비슷한 제품을 만들어 팔기 시작했단다.
썩어도 준치라고 태청의문인데, 기존 제품하고 같아서야 밀릴 게 당연하지 않은가? 그렇다고 소화제라는 이 좋은 시장을 놓칠 수도 없고.
“그건 장 의원님이 고민하실 문제죠. 선조의 비기를 잘 살펴보세요. 거기에 답이 있을지 누가 알아요?”
“이잉, 고얀 놈. 크으―, 맛 하나는 시원하니 좋구나.”
“소화가 잘될 거 같은 기분이 들죠? 자, 어서 옮겨주세요!”
탄산을 넣어 업그레이드를 할 수 있다면 태청의문이라는 브랜드에 비벼볼 만하지. 이제 제약방이라는 작은 공장을 세웠으니 활명탕 말고 다른 것도 만들 거고.
“그러고 보니, 그건 이번에 없었어요? 아직 홍보가 덜 됐나?”
“아, 그거 말입니까?”
곽 표두가 웃으며 다가왔다.
“저기 보이십니까? 저 뒤에 줄을 선 어미와 아이, 그리고 그보다 뒤에 선 노인이 저희 표마차를 타고 온 환잡니다. 특히 저 노인은 다리를 절어서 혼자서는 도저히 여기까지 올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는데 말입니다.”
내가 금감양에게 요구한 두 번째.
그건 표국이 태양의원으로 오는 환자들을 옮겨달라는 거였다.
물론 지금 제7 표행단이야 내가 부리는 사람들이니까 표마차에 얼마든지 사람을 실을 수 있지만 그건 홍보를 겸한 거고.
그러기 위해서는 이곳으로 오는 표행이, 특히 정기 표행이 있어야 하는데 그게 바로 세 번째 요구였다.
관도를 닦아 놓을 테니, 표행이 기존에 빙 돌아가던 길 대신 북촌을 지나가게 만들어달라는 것.
“오며 가며 열심히 홍보를 했으니, 정기 표행이 다니기 시작하면 조금씩 이용자가 늘어날 겁니다. 혹시 몰라 금왕표국에서 쓰는 증표까지 나눠주고 왔습니다.”
“고마워요, 곽 표두.”
이 세 가지 제안은 셋째 형 금감양에게도 나쁜 제안이 아니었다. 제7 표행단이야 금왕표국 전체 규모를 생각하면 그중 일부에 불과하고, 내 곁에 제 사람을 두면 안심도 될 테니까.
정기 표행의 경로를 옮기고 환자를 실어 나르는 일도 그랬다. 애초에 이쪽을 지나가는 게 지름길이지만 길이 험해서 그러지 못했던 걸 잘 깔린 관도를 통해 지나갈 수 있게 되었으니까.
관도는 이름에서 보다시피 아무나 깔 수 있는 게 아니다. 금왕표국쯤 되면 작은 지현에 돈을 찔러넣고 관도를 깔아달라고 하는 건 일도 아니지만 그렇게 자잘한 경로 하나까지 신경 쓸 정도는 아니니까. 말하자면 손 안 대고 코 푼 격이지.
정기 표행을 이용해 의원을 찾는 자들에게 약소하지만 이용비도 받으니까.
솔직히 거기까진 금감양도 대놓고 손해네, 하며 너털웃음을 지었지만…….
[나중에 가서도 그런 소리가 나오나 보자구요~!]
내 계획을 알고 있는 귀신이 킥킥대며 웃었다. 요새 아주 기분이 좋은 귀신이었다.
[자, 그럼 이제 환자 보러 가요! 환자다, 환자!]
제약방이 차곡차곡 정리되는 것까지 확인한 후 나도 오후 진료에 들어갔다. 환자 숫자가 많긴 했지만 난해한 환자가 없어서 진료는 일사천리였다. 환자들을 고루 배분해주긴 하지만 더 기다려서라도 내게 치료를 받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환자가 많은 탓에 일이 끝나면 항상 늦은 밤이었다.
“벌써 와 있었어? 안 피곤해?”
그렇게 진료가 끝나면 밤에는 신생의 공부를 봐줬다.
“안 피곤해요! 의원님도 바쁘신데 제가 피곤하긴요!”
“또 의원님이랜다.”
“아차, 스, 스승님……! 죄송해요, 아직 의원님이 입에 익어서 그만…….”
[아유, 이뻐라! 내가 요새 얘 가르치는 재미에 산다니까요?]
신생이 무려 귀신의 두 번째 생(?)을 책임지게 된 일은 한 달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데리고 온 의원들이 여럿이다 보니 바쁘기 전까지는 잡일을 분담해 했는데, 그러다 보니 의원에서 신생의 일이 없어진 것이다.
나도 달리 일을 시키지 않고 내버려 두었다. 어린애도 밭일을 도우는 게 당연한 세상이라지만 역시 내게는 ‘애는 좀 애다울 때 실컷 놀아야지.’ 같은 전생의 생각이 박혀 있기도 했고, 원래는 거지로 마을을 떠돌던 녀석이 아닌가.
나이에 걸맞지 않은 사정이 있는 것도 같고. 그간 보여준 놀라운 몸놀림을 보면 그조차도 절대 예삿일은 아니었을 거다.
[암살자들의 문파에서는 애를 아주 어릴 땐 납치해서 키운다고 하니까요. 그런 데서 탈출한 게 아닐까요?]
홍령의 의견은 그랬다. 어쨌든 그런 애가 기껏 자기 맘대로 할 수 있는 시간이 생겼으니 이것저것 해보게 할 생각이었다.
[신생이 의술에 흥미를 보일 줄은 몰랐어요. 그날 연구회 때도 깜짝 놀랐다니까요.]
이번에 데려온 의원들과 보름에 한 번씩 연구회를 시작했다.
……잠깐, 늘어놓고 보니 요새 나 왜 이렇게 바빠? 여기에 새벽마다 창천과 체력단련에 내공수련까지 하고 있는데!
[우는소리 말아요.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죠!]
물론 이런 스케쥴을 소화할 수 있는 몸이 됐다는 게 기쁘긴 한데.
……역시 노는 게 무섭긴 해. 전생에는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닐 정도로 바쁘게 살았는데 말이지.
하여튼 날 따라온 의원들은 근무조건이나 급여조건도 그렇지만 본질적으로는 홍령의 의술에 반해서 쫓아온 이들이다.
때문에 보름에 한 번씩 연구회를 해 의술을 전수하거나 그들이 무당에서 익힌 의술을 홍령이 역으로 배우기도 하는 등 시간을 보냈는데, 신생이 문 밖에서 이를 귀동냥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홍령도 그때만큼은 토론이며 홍령이 죽은 뒤 새로이 발견된 지식과 치료법 등에 넋이 팔려서 눈치를 못 챘는데, 밖에서 중얼중얼 외우는 소리를 들은 내가 신생을 찾아냈다.
홍령이야 신나지만 나는 못 알아듣는 내용이 더 많아서 집중이 안 됐으니까.
어쨌든 그래서 신생에게 왜 그러고 있었냐 물어봤더니 ‘의술을 배우고 싶은데 모르는 말이 너무 많아서, 연구회의 대화 내용을 통째로 외우고 의서를 뒤져보고 있었다’라고 하지 않는가!
“그래, 황제내경은 어디까지 읽었어?”
“소문(素問)편은 다 읽었고 영추(靈樞)편을 보고 있어요.”
“소문을 다 읽었다고?!”
황제내경은 소문편 9권과 영추편 9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지금까지 간단한 기초를 알려주고 황제내경을 읽어보라고 준 게 어제였는데?! 이 나이 대 애라면 만화책 아홉 권도 하루 안에 읽기 힘들 텐데, 그걸 다 읽었단 말이야?!
“문답 내용이라서 읽기는 쉬웠는데 다 이해는 못 했어요. 어려운 얘기가 많아서…… 영추편은 침술이랑 양생법이 나와서 훨씬 재밌어요!”
[그거 봐요, 내가 그랬죠? 얘는 천재라니까요!]
홍령은 아주 이뻐 죽겠다는 듯 신생을 쓰다듬었다. 저게 귀신 손이 아니라 진짜 손이었으면 신생은 대머리가 됐을 거다.
그날도 들은 걸 달달 외어서 의서를 찾아봤다는 말에 홍령이 천재라고 호들갑을 떨었지. 물론 그건 나도 동의한다.
하지만 제대로 의술을 배워볼 생각 없냐고 물어본 건 나란 말이지.
“재밌다니 다행이구나.”
“빈말이 아니라 정말 재밌어요. 억지로 안 해도 되고, 스승님은 못 한다고 혼내지도 않으시잖아요. 그리고 의술은, 남을 해치는 게 아니라 살리는 거니까…….”
신생의 목소리가 흐려졌다. 나는 신생을 쓰다듬는 홍령의 손에 내 손을 얹었다. 작은 머리통을 살살 쓰다듬어 주자 아이의 얼굴이 다시 밝아졌다.
“그래. 오늘은 소문을 읽으면서 궁금했던 게 있으면 설명해줄게. 어디가 잘 이해가 안 갔어?”
“일단 17장이랑, 31장이랑…… 그리고…….”
후, 식은땀 난다.
사실 신생에게 의술을 배워보라 권유한 건 내 공부를 위해서기도 했다.
홍령에게 의술을 배우려고 했지만 생각처럼 시간을 따로 내기가 어려웠는데, 마침 홍령이 신생을 직접 가르치고 싶다고 한 게 내게도 기회가 됐다.
기회가 되긴 했는데……
신생이랑 계속 비교되는 거 같은 기분이 든단 말이지.
[어머, 눈치챘어요? 그럼 좀 더 열심히 하라고요. 머리에 쏙쏙 집어넣으란 말이에요.]
신생은 하루 종일 책 보고 공부하잖아, 나는 일도 하고 수련도 해야 한다고!
[다 핑계인 거 알죠? 상단전이 열렸으니까 기억력도 훨씬 좋아졌을 거라고요. 자, 신생에게 따라잡히기 싫으면 어서 외우라구요!]
그래도 여태 홍령과 함께해오며 주워들은 짬밥이 있어서 아직까진 신생에게 밀릴 정도는 아니긴 했다. 전생의 의학드라마에서 인턴들이 왜 그렇게 기를 써가며 수술에 참여하려고 했는지 알 거 같달까? 눈앞에서 매일매일 보고 듣는데 못 하기도 쉽지 않다.
“요새 공부하다가 힘들면 나가서 환자분들을 도와드리거든요. 그것도 공부가 될 거 같아서. 그러다 들은 얘기가 있는데요.”
크으……
좀 전까지 어린애랑 경쟁해야 한다고 투덜거렸던 나 자신을 반성한다.
공부하다가 힘들면 나와서 환자를 도와주는 마음씨도 예쁜데 그게 공부가 될 거 같아서라니.
전생이었다면 모든 선생님의 예쁨을 독차지 할 만한 학생이다.
“건넛마을에 이상한 의원이 있대요.”
“이상한 의원?”
“네, 방통의원이라구. 새로 문을 열었다는데 치료비가 싸서 장사가 잘 된다나 봐요. 의원도 많아서 오래 기다릴 필요도 없고요.”
여기까지만 들으면 별로 이상한 거 같지 않은데. 박리다매를 기조로 내세운 의원 아닌가? 그런 의원이 근처 마을에서 영업을 한다면 좀 신경 쓰이기야 하지만.
“근데 뭔가…… 이상하대요.”
그러니까 뭐가.
[그보다 그 이름, 어디서 들어본 거 같지 않아요?]
“별거 아닌 병도 잘 안 낫고요, 오늘 오신 환자분 중에 자기가 환자 노릇은 전문가라는 분이 있었거든요.”
뭔가 익숙하군. 내가 평소에 프로 환자라고 할 때의 그 기분인걸.
전생에서는 진짜 프로 환자들이 많아서 의사들이 고역이라는 얘길 들었다. 인터넷과 정보가 발달하고 의학서적에 대한 접근은 물론 수술 시연을 올려둔 너튜브까지 얼마든지 볼 수 있는 시대였으니까. 자기 병에 대해서 해외 논문과 신약 정보까지 찾아오는 건 좋은데, 어디서 약간 이상하고 잘못된 정보를 찾아오는 바람에 의사 말을 안 들어서 고역이라나.
“요통 때문에 침을 워낙 많이 맞으셔서, 요통 침놓는 자리 정도는 다 기억한다고 하셨거든요.”
이곳도 그런 건 크게 다르지 않은 모양이지.
“평소랑 다른 데 침을 놨대? 의원이 다른 치료법을 시도해봤을 수도 있지.”
“아뇨, 그게…… 그 얘기를 했더니 의원으로 일할 생각이 없냐고 했대요. 요통 침만 놓으면 된다고.”
엥? 그건 또 무슨 소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