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자자, 다들 비키게! 음식 나가신다!”
마을 사람들이 흩어지고 객잔 주인 내외가 양손에 묵직한 음식 보따리를 들고 들어왔다. 이에 질세라 다른 사람들도 각기 해온 음식이며 막 따온 채소와 과일 따위를 들고 우르르 안으로 들어왔다.
꼬꼬댁! 꼬꼬꼬꼬!
……아직 음식이 안 되고 살아 있는 닭도 있는데?
“아픈 분은 없습니까? 일단 치료부터―”
“의원 님이 왔다는 소식에 앓던 이도 나을 지경입니다. 게다가 무슨 걱정입니까? 오늘만 날이 아닌데.”
객잔 주인이 수더분하게 웃으며 자리를 깔았다.
의원의 어디에 뭐가 있는지 빠삭하게 아는 이들이 상을 꺼내왔다. 저 멀리 장원을 수리하던 목수들과 짐을 임시 창고에 갖다 둔 포쾌들이 무슨 일인가 싶어 기웃거렸고, 환자를 받을 준비를 하고 나온 의원들은 당황해 나와 눈을 마주쳤다.
그러다가 하나둘 마을 사람들의 기세에 휘말려 상다리가 부러지게 차려진 상 앞에 앉았다. 이미 분위기는 잔치집이었다.
“금 의원님도 어서 오십셔! 주인이 안 오고 뭘 하십니까!”
[오늘 영업은 텄네요.]
홍령도 실실 웃었다.
그래. 바쁘게 일하다가 이제 왔으니, 오늘 하루쯤은 괜찮겠지.
“건배합시다! 돌아오신 금 의원님을 위하여! 태양의원을 위하여!”
“위하여!”
* * *
지현이 빌려준 목수들은 장원의 수리를 끝낸 후 빈 공터에 새로운 건물을 올리기 시작했다.
기존 건물들과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은 크기에 옆에는 전용 창고까지 딸린 물건. 옆에 있는 담장을 허물어 마차가 드나들 만한 크기의 곁문까지 만들자 마을 사람들의 관심이 쏠렸다.
사람들이 저게 뭐냐고 물어댔지만 난 일부러 완공될 때 와보라고 하며 말을 아꼈다.
그리고 완공 당일.
호기심을 자극한 덕분에 꽤 많은 사람들이 만사를 제치고 와 있었다.
“활명탕을 비롯해 태양의원의 이름을 단 제품들을 만들 제약방입니다.”
“제약방? 그냥 약방이랑은 다른 건감?”
“예. 일반적인 탕약이 아니라 대량으로 만들어서 판매할 물건들만 만드는 곳입니다.”
사람들은 신기하다는 듯 들어와 안을 구경했다.
나도 제대로 기물을 다 갖춰놓고 들어 와보는 건 처음이었다.
양양의 장인에게 주문한 약탕기, 전약용구(煎藥用具)며 약재를 썰 때 이용하는 작두, 정확한 무게를 재어 줄 저울 따위를 잔뜩 구비해 놨다. 평범한 것에 비해서 크기들이 커서 대량 주문을 소화하기에 좋았다.
바로 옆에 창고를 둬 재료 운반에 드는 품을 최소화했고 전용 출구도 놓았다. 만들어진 제품의 품질이 일정하게 유지되도록 창고 지하에는 토굴을 파서 서늘한 기운이 도는 보관소도 따로 만들었다.
“물맛도 괜찮구만. 네놈이 한 일 치곤 쓸 만해.”
제약방 전용으로 파놓은 우물의 물맛을 본 장 의원이 꼬장꼬장한 투로 말했다.
“많은 양을 만들어야 하는데 일일이 산속 깊은 곳에 샘물 뜨러 갈 수는 없으니까요. 산비탈 밑에 있는 곳이라 다행이죠.”
“흥, 그래서 여길 내게 맡기겠다?”
제약방의 책임자로 장 의원을 내정했다. 지난번에 활명탕을 만들어보면서 느낀 건데, 대량생산 제품은 최대한 원가를 줄이는 게 중요하긴 하더라. 그러면서도 효능을 유지할 적정선을 정하는 게 필수인데 장 의원은 그걸 가능케 하는 야비한(?) 재주를 가지고 있다.
“저자에게 제약방을 맡길라구? 금 의원, 괜찮겠우?”
“영 염려되네요. 전적이 있는 분이다 보니…….”
장 의원에게 제약방을 맡긴단 얘기를 들은 마을 사람들 몇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가와 속닥거렸다. 홍령도 [장 의원이 장중경의 후손이고 상한잡병론의 비전을 갖고 있는 건 둘째예요. 저 사람 인품의 뭘 봐서 일을 맡겨요?]라고 했었지.
“걱정되시면 제약방에 와서 일하시는 건 어떠세요? 장 의원도 감시해 주시고, 겸사겸사 돈도 벌어 가시고요.”
“사람을 쓰겠단거유?”
“그럼요. 이 정도 규모를 장 의원님 혼자 어떻게 해요. 처음부터 사람을 쓸 생각이었어요. 보수는 섭섭잖게 드릴 겁니다. 여기서 일하시면 우리 의원 가족이니까 진료 받으실 때 더 저렴하게 봐드릴 거고요.”
그 말에 모인 사람들이 저들끼리 쑥덕거리더니 순식간에 열 몇 명이 저가 하겠노라 나섰다. 나는 평소에 봐둔 그들의 성격이나 손재주 같은 걸 고려해 몇 명을 뽑았다. 손끝이 야무지거나 성격이 꼼꼼한 이들이었다.
“쩝, 그럼 그렇지. 나는 올 해도 비싼 돈 내고 소작이나 지어야겠구만.”
“우리가 농사일 말고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나. 헛꿈 꾸지 말고 전주 댁이 약재 부스러기라도 얻어오면 그거나 좀 나눠 먹자고 함세.”
“그리고 의원에서 힘 좀 쓰실 분도 필요하고요, 식사와 청소, 세탁을 도와주실 분이랑, 그리고 또―”
구인공고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말에 사람들의 눈이 번뜩였다.
나는 손을 든 사람들을 순조롭게 뽑아 여기저기 배치했다. 순식간에 지출할 인건비가 왕창 생겼지만 걱정은 없었다.
“금 의원님, 슬슬 의원 문을 열까요?”
포두 곽만용이었다. 일전의 일 이후 지현은 곽 포두와 8조를 아예 내게 보내버렸다. 명목상으로는 북촌의 치안 유지를 위해서지만 사실상 이들이 하는 건 태양의원의 경비와 질서유지. 객잔에 장기 숙박을 하면서 지내는데 그 비용도 지현이 냈기 때문에 나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는 일이었다.
“오늘은 얼마나 왔어요?”
“말도 마십쇼. 하필 오늘이 또 장날이잖습니까? 다른 녀석들이 보고 왔는데 마을 어귀까지 줄을 섰답니다.”
태양의원에 오는 환자들이 폭발적으로 늘었다. 이게 내가 아낌없이 사람을 고용한 이유였다. 수입에 여유가 생겨서도 있지만 그런 자잘한 일을 맡아 줄 사람이 없으면 안 될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여봐라! 금태양이라는 의원이 있는가!”
누가 또 이렇게 지엄한 목소리로 날 부르지? 문 밖에서 들린 소리에 나가보자 웬 중년인이 심기가 불편한 얼굴로 화려한 가마에 앉아 있었다.
“제가 금태양입니다만.”
“그래, 그대가 그 용하다는 의원인가? 지현의 소개를 받고 왔네만.”
지현의 소개를 받았다는 이는 고깝다는 눈으로 부채를 팍팍 부치면서 옆에 선 포쾌를 흘겼다.
“헌데 여기 이 포쾌가 말하길 나도 줄을 서야 한다고?”
“네, 그렇습니다.”
“지현의 소개로 왔는데도?”
“어르신의 소개여도 급병이 아닌 이상 먼저 봐드릴 수는 없습니다. 줄을 서는 게 힘드시다면 번호표를 받으시고 근처 객잔에서 기다리거나 하시지요.”
“이래도 말인가?”
중년인이 품에서 비단으로 된 전낭을 꺼내 살짝 흔들었다. 소리는 작았지만 맑고 청아했다. 동전이나 은전 따위가 아니라 금이 분명했다.
나는 웃으며 전낭을 받았다.
“선금인가요? 치료비 정산 후 잔금은 돌려드릴게요. 큰돈을 소지하고 계시면 불안할 수 있죠. 여기 지현께서 보내준 포쾌들이 밤낮으로 경비하고 있으니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이, 이자가!”
내가 기조를 바꾸지 않자 중년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나는 그에게 살짝 손짓한 후 작게 귀엣말했다.
“대동한 가마꾼들 정도로 저기 줄 서 있는 무림인들을 꺼꾸러트릴 수 있는 게 아니라면 그냥 줄을 서시는 게 좋을 거예요.”
“무, 무림인?”
중년인이 대경실색하듯 주변을 돌아보았다. 이쪽을 보며 대놓고 눈을 부라리는 몇몇이 있었다. 검이며 도, 곤봉 따위를 패용한 이들이었다.
“줄을 서서 기다리겠네. 크흠, 그 돈은 내 작은 성의라고 생각하시게나.”
“이러신다고 다른 환자들과 다르게 대우해드리진 않아요.”
“알고 있으니 그냥 받으시게. 크흠.”
중년인을 태운 가마가 얌전히 줄의 끝으로 돌아갔고 이쪽을 사납게 노려보던 무림인들도 다시 눈빛을 거두었다.
[소문이란 게 참 무서워요. 꾸준히도 오네.]
무림인들은 주로 화산지회 예선에서의 소문을 듣고 찾아온 이들이었다.
무당이 고독 중독사태를 자기들이 해결했다고 선전하고 다녔지만, 전에도 말했다시피 그건 한계가 있다.
내 손을 거친 환자들이 그걸 믿겠냐고.
내가 무당에 치료비를 받아낸 덕분에 그들은 돈 한 푼 안 내고 고독을 치료했을 뿐 아니라 평소에 있던 다른 지병도 관리받았다.
예선전 주관처의 책임배상이 조항에 들어 있다고 해도 뒷배가 없는 무인들이 무당파를 상대로 그걸 받아낼 엄두나 냈겠는가?
그걸 내가 나서서 받아낸 거나 마찬가지다 보니 내 환자였던 이들은 전부 내 편이었다.
왕 씨에겐 무당이 약소 의원의 공을 가로챈 게 아니냐는 소문을 은근히 흘려놓으라고 했으니, 마른 짚에 불이 붙은 격.
그 결과가 이처럼 많은 환자들이었다.
“172번 환자분, 들어오세요!”
“이보게, 기왕이면 그 가면을 쓴 의원께 치료를 받고 싶은데 안 되나?”
“오늘 금 의원님은 오후 진료십니다. 대신 다른 분들도 최선을 다해 봐주실 거예요.”
의원을 여럿 데리고 온 덕분에 돌아가면서 진료를 볼 수 있게 됐다. 피로 누적은 치료 실수로 이어질 수 있으니까 미리 예방해야지.
오후 진료지만 그렇다고 마냥 쉴 수는 없었다.
“금왕표국이다! 뭔가 잔뜩 싣고 왔는데?”
“어째 표국이 꾸준히 오는 거 같군. 정기 표행이라도 계약한 건가?”
사람들의 수군거림과 함께 금왕표국 제7 표행단이 곁문 쪽으로 들어왔다.
“도련님, 부탁하신 물건들을 가져왔습니다.”
“내리면서 하나씩 확인해보죠.”
대부분 제약방에서 쓸 약재였다. 그건 장 의원이 검수하게 내버려 두고 나는 마지막 수레에 실려 있는 큰 물동이를 열었다. 타닥타닥, 청량한 소리가 나는 물을 떠 한 모금 마시자 입 안에서 탄산이 시원하게 부서졌다.
“여기까지 왔는데도 초수의 탄산이 하나도 안 죽었네요.”
“활명탕처럼 밀봉을 해서 그런가 봅니다. 초수를 안정적으로 길을 기반을 잡아놨으니 주기적으로 표행길에 들러 실어오겠습니다.”
우물을 파고 우물을 지키는 건 금왕표국 제7 표행단의 표사들이 돌아가면서 맡기로 했다.
셋째 형님, 금감양과의 화해조건으로 내건 세 가지 중 하나로 제7 표행단을 얻었으니까.
완전 내 밑으로 들어온 건 아니라 금감양이 요구하면 다른 표행에 내줘야 하지만, 포쾌들과 마찬가지로 이들도 정주 비용을 금왕표국이 내는 데다가 웬만해선 금감양이 이들을 부를 일도 없을 테니 사실상 내가 마음대로 부려도 되는 팀이 하나 생긴 거다.
“이게 그 초수냐? 활명탕을 다 끓인 다음에 넣으라고? 근데 팔팔 끓는 물에 이걸 넣으면 기포가 다 사라질 거 같은데 어찌 하라는 게냐?”
약재를 검수한 장 의원이 와서 초수에 관심을 보였다. 그래, 이건 활명탕에 섞을 거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탄산활명탕을 만드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