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남쪽으로 두세 달을 꼬박 내려가면 대륙을 반으로 가로지른다는 황하라는 큰 강이 있단다. 그 아래로는 땅이 기름져 한 해에도 곡식을 두 번 거두고 바다라는 넓은 강에서는 매일같이 어선이 만선을 이룬단다.
한때는 황 노인의 조상도 그런 땅에 살았다는 얘기를 어릴 적에 들었다.
그런 땅을 두고 이 척박한 북녘 땅에 와 자리를 잡았다는 데는 다 이유가 있지 않겠는가.
필시 그 땅에서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이유가 있었겠지. 황 노인은 그렇게 생각했고, 노인의 생각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그나마 근래엔 마을에 조금 활기가 돌았다.
노인에게 근래란 몇 달간의 얘기가 아니다. 거의 십 년을 넘어서는 얘기다.
웬 부유한 이들이 이 마을에 장원을 세우고 이름을 태청이라 붙였을 때, 그곳엔 무공을 익힌 이들이 들락거렸고 한 부부가 아이를 낳았다.
지금은 다들 그 아이를 경원시하지만 그때만 해도 그저 동네 사람들 모두 어여뻐 하던 도련님이다.
그 도련님의 무공이 일취월장할 때 마을 사람들은 제 일처럼 기뻐했고, 태청장원은 종종 마을을 기웃거리는 산적이나 비적 놈들을 치워주곤 했다.
즐거운 날들은 오래 가지 않았다. 태청장원이 습격을 당해 불타오르고 만인의 귀여움을 받던 도련님은 상처 입은 맹수가 되어 모두에게 이빨을 드러냈다.
보잘것없는 동네에 있던 무가(武家)가 사라지자 왈패들은 다시 고개를 디밀었고 장원에 일자리를 얻었던 젊은이들은 마을을 떠났다. 원래도 보잘것없던 동네가 더욱 쇠락했다. 주기적으로 장이 설 정도로 아직 마을의 형태는 유지하고 있었지만 젊은 치들이 빠져나간 마을의 수명이 길면 얼마나 길겠나.
황 노인은 자신이 평생 살아왔던 마을의 죽음과 함께 죽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랬던 마을에 갑자기 볕이 들었다. 금태양이라는 이름을 가진, 가면을 쓴 젊은이가 의원이랍시고 나타나더니 비어 있던 장원에 의원을 열었다.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던 창천도 그에게 힘을 보태는 것 같았다.
그것만으로도 마을에는 활력이 돌았다. 아픈 사람들을 합리적인 가격에 치료해주니 마을에 앓는 표정으로 다니는 이가 없었다. 다들 활기차게 인사를 건넸고 서로에게 필요한 일이 있다면 발을 벗고 나섰다. 아픈 곳이 없다는 게 이렇게 좋은 건 줄 몰랐다며 웃고 떠들었다. 황 노인도 그 수혜를 입은 사람 중 하나였다.
이전이었다면 무릎이 아파 나뭇짐을 질 엄두도 내지 못했을 텐데, 지금은 이렇듯 나뭇짐 하나는 거뜬히 짊어지고 산에서 내려오고 있지 않은가?
“금 의원님은 언제 돌아 오실런고.”
비적의 습격으로 화재를 입어 곳곳이 타버린 태양의원에 한눈에 들어왔다. 마을에 활력을 가져다주었던 젊은 의원은 그날 이후 의원의 문을 닫고 출장을 떠났다.
“바랄 걸 바라게. 그 젊은 사람이 뭐가 좋아 이 작은 마을에 붙어 있겠나. 안 좋은 일도 있었으니 벌써 장원을 팔고 다른 데로 떠났을 게야.”
황 노인과 함께 나무를 하러 온 범 노인이 핀잔을 주었다. 그러나 황 노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분이 아니라는 건 자네도 알지 않는가. 금 의원님 없었으면 지금쯤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했을 사람이. 의원님이 출장을 갔다 돌아오신다 했으니 믿어드리게.”
“믿어서 돌아온다면야 백 번이라도 믿겠네. 하지만 벌써 몇 달이나 흐르지 않았나? 이 근방을 다 순회한다 해도 벌써 돌아왔을 시간이야.”
범 노인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그래도 황 노인은 희망을 놓지 못했다.
“어라, 저건 또 뭐지?”
산비탈을 내려왔을 때 범 노인이 무언가를 가리켰다. 일단의 무리들이 잘 닦인 도로를 따라 마을로 들어오고 있었다.
“무기를 들지 않은 걸 보아하니 산적이나 비적 패거리들은 아니고. 수레에 뭔가 가득 실어 나르고 있군. 나무와 돌? 목수들인가?”
“질 좋아 보이는 목재구만. 이 동네에 또 별장을 짓나보이. 먹고 살기엔 보잘것없는 땅이지만 산세 하나만큼은 보기에 수려하지 않나.”
“그래서 얼마 전부터 현에서 도로를 깔고 있는 건가?”
“어지간히 윗분께서 오시나 보오.”
두 노인은 목수들과 짐수레를 지나쳤다. 무거운 짐을 나르는 수레가 잘 닦인 관도를 매끄럽게 굴러갔다.
산이 많다는 것은 이동하기가 어렵다는 뜻이다. 해서 이곳에는 그간 관도가 놓이지 않았다. 나를 만한 산물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동하기 편한 것도 아니니 인구 유동이 적었다.
그랬던 곳에 갑자기 관도가 깔렸다.
며칠 전 현청에서 사람들이 나오더니 길을 닦고 돌을 깔았다. 길을 닦는 일은 꽤 오랜 시간이 걸린다고 들었는데 현에서 나온 인부들은 뭐가 그리 급한지 자고 일어난 사이에 깔끔하게 도로를 다 닦았다. 급하게 했다고 마무리가 허술한 것도 아니었다.
“도로가 닦여서 달구지를 끌기도 편하겠어.”
“에잉, 사람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군. 이건 현에서 깐 관도일세. 우리 같은 무지렁이들이 그냥 사용하게 둘 거 같은가? 돈을 내지 않으면 쓰지 못하게 할 걸세.”
“늘 지켜보는 것도 아닌데 슬쩍 이용할 수도 있지.”
“저길 보게.”
범 노인이 길의 끝을 가리켰다. 목수와 수레가 지나가고 뭐가 또 있나, 흐릿한 눈에 힘을 주어 보니 포쾌로 보이는 이들이 오와 열을 맞추어 마을로 진입하고 있었다.
“포쾌들까지 온다니? 대체 어떤 귀인이 오시는 겐가.”
“저 마차에 타고 있는 이들 아닌가?”
포쾌들은 일단의 마차를 호위하고 있었다. 대여섯 명이 탄 마차, 그리고 뒤에 따르는 수레까지.
“이보시게, 노인장들!”
선두에 선 포쾌가 노인들을 불렀다. 포쾌가 별 대단한 직업은 아니지만, 이런 시골 동네에서는 이유 없이 사람을 잡아다가 곤장을 때려도 항변을 못 할 정도로 위세가 있었다. 노인들은 고개를 푹 수그리고 다가갔다. 이유 없이 얻어맞는 거야 어쩔 수 없지만 그 맞은 상처를 봐줄 의원도 지금 마을에 없지 않은가?
“부르셨소이까?”
“길을 좀 물으려 불렀네. 이 마을에 태양의원이라는 곳이 정확히 어디 있는가?”
휴, 황 노인은 속으로 안도를 삼켰다. 다행히 아는 것을 물어보았다.
“이 관도를 따라 가면 있소이다.”
그러고 보니 신기한 일이었다. 태양의원이 있는 곳은 수려한 산세를 감상하기 좋은 위치에 있다. 다니기 좋은 길목이 아니라 산이 시작되는 입구, 외진 곳에 있다는 뜻이다. 헌데 신기하게 새로 깔린 관도는 태양의원의 앞으로 지나갔다.
“헌데 그곳은 지금 주인도 없고 반쯤 불에 탔소만…….”
“그 주인의 부탁으로 여기 이분들을 모시고 있는 것이니 괜찮네. 먼저 간 목수들도 있고.”
그 주인의 부탁이라고? 황 노인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러고 보니 마차에 탄 이들의 차림새가 낯이 익었다. 등에 맨 약 가방이며 허리에 맨 침통 같은 것 말이다.
“그 주인이라면 혹시……?”
황 노인은 반신반의하며 물었다. 혹시 아는가? 범 노인의 말처럼 금태양이 의원을 다른 의원에게 팔았을지도? 마차에 타고 있는 의원들의 소매나 옷깃에 무당의의 문양이 새겨져 있는 것도 불안감에 부채질을 했다.
“금태양 의원님이시네. 우리 지현 어르신께서 금 의원님의 의술로 큰 도움을 받으셨지. 때문에 이 마을에 관도도 깔리지 않았던가?”
“아아! 금 의원님이 돌아오셨구료! 헌데 의원 님은 어디 계시오?”
지붕이 없는 마차 안에는 금태양으로 보이는 이가 없었다. 항상 가면을 쓰고 다녀 눈에 띄는 이가 아닌가? 황 노인은 그 가면 아래 얼굴을 본 적도 있다. 마차 안에 그런 얼굴은 없었다.
“이미 도착해 계실 거요. 의원을 오래 비운 탓에 정리할 것이 많다 하셔서 먼저 가셨지. 우린 우선 다른 의원님들과 약재들을 나르느라 조금 늦었고. 길을 알려주어 고맙소이다.”
포쾌는 노인들에게 인사를 하고는 다시 길을 재촉했다. 황 노인은 그 자리에서 멍하니 그들이 사라지는 모습을 보았다.
대체 출장을 나가서 무엇을 했기에 지현이 이 별 것 없는 땅에 관도를 깔아주었단 말인가? 치료로 돈을 얼마나 벌었기에 그 질 좋은 목재와 돌, 그리고 실력 있는 목수들을 구하고? 게다가 저 의원들은 무언가. 이 작은 동네에 대여섯이 넘는 의원이 상주하게 된다는 건가?
황 노인은 제 볼을 꼬집었다. 일단 꿈이 아닌 건 확실했다.
그보다 더 확실한 게 있었다.
“금 의원님이 돌아오셨단다! 아범아, 닭을 잡거라! 며늘아가 너도 당과를 만들고! 금 의원님이 주전부리를 좋아하시지 않더냐! 허허, 이보게! 금 의원님이 돌아오셨다네!”
그 소문은 순식간에 마을로 퍼져나갔다. 모두들 며칠간 일어난 마을의 이변이 금태양 때문이라는 사실에 놀라고, 또 금태양이 돌아온다는 사실에 기뻐하며 호들갑을 떨었다.
* * *
“……으아. 힘들어 뒈지겠네.”
다시 태어난 이후 이런 쌍스러운 말을 써본 게 언젠지 기억도 안 났다. 몸이 아플 때? 아플 때 욕지기 대신 욕지거리가 튀어 나오면 살 만한 거지.
지금 힘든 건 아픈 거 때문이 아니다. 현청에서 이곳으로 오는 최단거리를 쉬지 않고 주파한 탓이다. 이 일대는 산이 많고 평지를 택해 걸으면 한참을 돌아야 해서 시간이 꽤 걸린다. 그렇다면 최단거리는 어떻게 구성되어 있을까? 나는 살면서 사람이 몸을 고정하는 장치도 없이 바위를 기어오를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아직 살 만한가 보군. 내일부터 묘시 전에 일어나라. 지금까지 오면서 한 수련을 계속 진행할 거니까.”
하루만 쉬면 안 되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이 모든 건 내가 해달라고 한 거니까 말이다.
[와, 벌써 관도가 다 깔렸네요? 저기 봐요! 목수들이 터를 잡고 있어요! 빨리 가 봐요!]
아니지, 정확히는 이 귀신이 해야 한다고 강권한 거지만.
창천 녀석이 얻은 깨달음을 기반으로 귀신과 창천이 머리를 맞대고 이리저리 토론을 하더니(물론 홍령의 말은 내 입을 거쳤다) 나온 결론이 이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