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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의원-70화 (70/350)

70화

세간에 금왕이 비밀리에 숨겨놓은 유산 같은 게 있을 거라는 소문은 나도 들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괜히 금왕이라는 이름을 얻었겠는가? 그런 유산 같은 거 안 남겨놓게 깔끔하게 처리했을 거라는 얘기가 아니다. 그런 걸 숨겨놨다면 웬만해선 어디 숨겨놨는지 눈치도 못 챌 거라는 뜻이다.

두 분이 작정하고 들쑤셨는데도 못 찾았다고 하는 걸 보면 나는 꿈도 못 꾸겠군.

아니면 이미 찾았는데 셋째 형님에게는 비밀로 했다던가.

[당신 큰 형님 생각하면 충분히 그럴 만하죠.]

“아무튼, 해서 나는 무당하고 좀 더 거래를 터보려고 했다. 그건 큰 형님도 마찬가지야. 아버지 대에는 무당하고 좀 소원했잖아? 가서 얘길 좀 해보라 하더라고. 근데 왔더니 뜬금없이 네가 있는 거야.”

아하. 그래서 청운진인이 더 헷갈렸나 보군. 내가 경쟁자가 되려고 하는 건지 손을 잡으려고 하는 건지 말이다.

청운진인 입장에선 내가 끈 떨어진 연 행세를 하면서 무당과 태청의문을 간 보는 거 같았겠지.

덕분에 난 꽤 유리한 입장이 됐지만.

“오, 간다.”

[간다, 가요!]

비무대로 시선을 돌리자 그 거대한 비무장을 빙글빙글 돌며 탐색전만 하던 두 사람이 드디어 움직임을 보였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정중앙으로 빠르게 뛰어와 검과 검을 맞부딪쳤다. 동시에 군중들의 경탄하는 함성이 터져 나왔다.

한 번 검을 맞댄 후 다시 거리를 벌렸지만 그 다음 수를 펼치기까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무당파의 유려한 검이 바람처럼 창천을 향해 쇄도했고 창천은 그 자리에서 검을 비스듬히 세워 응수했다.

[가라 창천! 이겨라! 지면 더 이상 치료 같은 거 없을 줄 알아!]

치열한 공방이 시작됐다. 두 검이 맞부딪치는 요란한 소리가 주변의 함성보다 더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이야, 잘하는데? 넌 누가 이길 거 같냐?”

“어차피 누가 이기든 본선에 진출할 텐데. 그게 중요한가.”

[그거 때문에 좀 김이 새요. 떨어지면 끝이지 뭘 또 본선까지 기어간대요?]

거 야박하기는.

화산지회 예선은 각 지역에서 열여섯 명의 본선 진출자를 배출한다. 그러니까 창천이 여기서 이기든 지든 본선에 진출하는 것은 확정이다.

물론 그럼에도 승자를 가리려고 하는 마음을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지만…….

“어?”

[어!]

“호오?”

무공에 대해 문외한인 나도 그 격돌의 남다름을 알 수 있었다. 뭐가 달랐냐고? 창천이 달랐다. 반경 일 장 너머로 벗어나지 않던 창천이 움직였다. 그의 검도 따라 움직였다. 비바람이 몰아쳐도 태산은 그 자리에 묵묵히 서 움직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태산이 움직이면 어떻게 될까?

“……와씨.”

창천의 검은 산사태였다. 그 어떤 풍파에도 움직이지 않던 산이 움직이자 현민은 그대로 휩쓸렸다. 겉으로 보기엔 지금까지 잘하던 현민이 갑자기 어설퍼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쓰나미와 같은 재해를 보라. 영상으로 볼 때는 왜 사람들이 바보같이 피하지 않나 싶지만, 실제로 그 재해가 닥쳤을 땐 아무 전조도 없다가 집채만 한 파도가 겹겹이 몰려와 사람들을 단숨에 집어삼킨다고 했다. 알아차린 순간 덫에 걸린 새처럼 옴짝달싹못한 채 죽음을 맞이한다고.

현민이 그랬고, 현민의 검이 그랬다.

쨍그랑―

화려하진 않지만 중압감을 가진 검이 현민의 검을 쳐내자 현민은 중심을 잃고 주저앉았다. 동시에 검도 놓쳤다. 무당이 혼신을 다해 벼려낸 검이 부서진 연무장 바닥에 내팽개쳐졌다.

승부를 결착 지은 그 순간을 모두가 볼 수 있었던 건 아니다. 나도 상단전을 개방한 덕에 그 움직임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은 인지에 혼란을 느끼고 침묵했다.

그것도 잠시.

와아아아아!

우레와 같은 함성이 비무장 일대를 울렸다.

“스, 승자는 청면검!”

무당에서 나온 심판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창천의 승리를 고했다.

[와, 이겼어요! 창천이 이겼어요! 이겼다, 내가 이겼다!]

홍령은 마치 자신이 이긴 것처럼 기뻐했다. 하긴, 홍령이 이겼다고 해도 이상하진 않지. 창천은 무당파가 쓰고 버린 실패작이다. 그런 창천의 체질을 어느 정도 보완해낸 것이 홍령이고. 현민은 현자 배의 막내지만 무당의 이름을 등에 업고 나온 기대주다. 홍령과 창천이 한 팀이 되어 무당에게 제대로 한 방을 먹인 것이다.

[당신도 한 건 해냈잖아요. 솔직히 당신이 해낸 게 제일 클걸요?]

그러면 우리 모두 무당에게 한 방 먹인 걸로 치자고.

[태양의원이 한 방 먹인 걸로 하면 되죠. 태양의원 만세!]

창천 녀석도 한편으로 묶이는 데 동의할진 모르겠지만, 그래.

우리가 이겼다―

“뭐야, 저 녀석?”

금감양의 중얼거림에 비무대를 보자 승자로 호명된 창천이 아직 비무대에서 내려가지 않고 있었다. 현민은 이미 검을 수습하고 내려갔는데 말이다. 심판도 사람들도 의아하다는 듯 그를 보고 있었다.

저 녀석, 설마?

[에? 여기서요?]

녀석은 몸을 돌려 이쪽을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내 쪽이 아니라 내가 있는 특별석을 말이다. 이쪽엔 특별석을 돈 주고 살 만큼 돈이 많거나 무당으로부터 초청장을 받은 이들이 앉아 있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특별석의 정중앙은 무당파가 자리했다. 첫 날 개회식을 주관한 이후로 처음 모습을 드러낸다는 무당의 장문인과 장로들도 그곳에 있었다.

창천은 그곳을 똑바로 쳐다보며 가면을 벗어 던졌다.

아 진짜, 맞춤제작이라고! 살살 다루란 말이야!

내 진짜 이름은 창천. 일찍이 창천룡이라는 이름으로 무림에 이름을 알렸으나 불미스러운 일로 은거한 지 십여 년. 집안의 비사를 밝히고 부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이 자리에 섰다.

내가 투덜거리거나 말거나 창천은 있는 힘껏 내공을 담아 웅혼한 목소리로 주변을 울렸다.

이 검으로 혈채를 받아내고자 하니 십여 년 전 태청장원의 비사에 대해 아는 바 있는 자, 그 말에 가치가 있다면 천금으로 보답할 것이요 거짓이라면 피로 응징할 터.

그대 태양의원으로 오라. 기다리고 있겠다.

창천 저 녀석이 무슨 돈이 있어서 천금으로 보답한대?

[당신한테 내달라고 하는 거 아니에요? 우리는 한 배를 탄 몸이다 하면서.]

녀석이 태양의원을 언급한 이상 한 배를 탄 건 맞는 말이고 나도 딱히 이를 부정할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돈 문제는 아니지!

“저 녀석이랑 아는 사이냐?”

“어. 우리 집 식충이.”

“……너 아까부터 점점 말이 짧아진다?”

“싫어요? 그러면 다시 막내답게 공손하게 대해드리고.”

나랑 제일 친한 진양 누님에게도 말을 편하게 하지 않았는데, 다시 만난 금감양에게는 이상하게 말을 툭툭 내뱉게 됐다. 금감양이 한 짓도 있고, 전처럼 그에게 위압감을 느끼지 않아서 그런 걸지도.

금감양은 잠깐 흠, 하며 생각하더니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너 편한 대로 해라. 남동생이면 바락바락 기어오르는 맛도 있고 좀 그래야지. 짜식, 다 컸네.”

그러면서 금감양은 그 솥뚜껑만 한 손으로 내 등을 퍽퍽 내리쳤다. 아프라고 때린 게 아니라 저 기분이 좋아서 하는 행동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 손바닥으로 때리면 아프다고!

“창천룡이라…… 들어본 적 있는 거 같기도 하고. 네 친구라니까 나도 한 번 알아봐주마.”

“친구는 무슨. 식충이라니까.”

거기에 이제 대놓고 무당에게 선전포고를 하기까지 한 식충이지.

고개를 돌려 무당의 요인들이 앉아 있는 자리를 살피자 나이가 지긋한 몇몇 도인들이 심각한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고 있는 게 보였다. 창천에 대한 내용은 몇 명만 아는 비밀일 테니 전음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 거겠지.

[그래도 당분간은 두고 보지 않을까요? 저렇게 대놓고 선언을 해놨는데 누가 손을 쓰면 그 사람이 범인이라고 천하에 알리는 꼴이잖아요.]

무당의 이름을 더럽히는 자가 있을 때는 가만 두지 않겠다던 청운진인이 떠올랐다. 속이 구리긴 하지만 겉으로는 정파 무문의 면피를 하려는 거 같긴 했지. 사파라면 그런 거 신경 안 쓰고 손을 썼을 거고.

[창천의 상태를 계속 지켜보고 싶기도 할 거고요. 우리가 어디까지 할 수 있나 두고 보겠죠.]

손 안 대고 코 풀 기회를 놓칠 인간들은 아니지. 아마 우리의 성취를 지켜보다가 우리가 벽에 막히거나 자기들에게 진짜 위협이 될듯하다 싶으면 그때 칼을 뽑을 것이다.

거인의 발에 압사당하기 전에 힘을 키워야겠다.

단시간에 발로 밟기엔 큰 존재가 되진 못하겠지만, 차마 함부로 밟을 수 없는 압정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난 슬슬 가야겠다. 화산지회 예선도 끝났으니 슬슬 이 동네 일 정리하고 무한으로 돌아가야지.”

“금왕전장도 신경 써 줘. 이번에 양양 지부장이 죽었어. 정신없을 거야.”

“진양이한테 빚 하나 지울 수 있겠구만.”

“출발하기 전에 나한테 잠깐 들러.”

“왜? 나도 침 놔줄라 그러냐?”

[있는 사람들이 더 한다더니. 어디 하나 쑤시는 데도 없을 텐데 말이에요.]

“설마 천하의 금표(金鏢)가 사과 몇 마디로 퉁 치려는 건 아니지? 논의하고 싶은 게 있어. 일 얘기야.”

“일? 그래, 알았다. 뭐가 오고 가야 나도 마음이 편하지. 가기 전에 기별하마!”

금감양은 한 번 더 내 등을 팡팡 소리 나게 때리고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자리를 떠나 태양의원으로 향했다. 앞으로 며칠간 환자들의 상태를 더 보고 이곳을 떠날 것이다.

긴 출장이 드디어 끝이 났다.

* * *

산으로 둘러싸인 마을, 현의 북쪽에 위치했다 해서 마을 이름도 북촌인 이곳.

황 노인은 이곳에서 평생을 살아왔다.

그의 일평생 북촌은 보잘것없는 곳이었다.

지대가 고르지 않아 농사를 지을 수 있는 평지는 드물었고 그나마도 토질이 좋지 않아 작황이 나쁠 때면 꼬박 배를 곯아야 했다.

마을을 둘러싼 산도 소출이 형편없었다. 어느 동네의 산은 장작으로 쓸 만한 나무가 쑥쑥 자라고 또 어느 동네는 건축에 쓰기 좋은 곧고 두꺼운 나무가 잘 자라 몇 년에 한 번은 큰돈이 되고, 또 어떤 산은 귀한 약재들이 있어 심마니를 하면 삼대가 먹고 살 수도 있다고 하는데.

강이라도 크면 낚시라도 해먹고 살겠지만 이놈의 물줄기는 강은커녕 하천이라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로 빈약해 척박한 농토에 물을 대는 것도 버거워할 지경이었다.

해서 이 마을 사람들의 먹고사는 수단은 잡다했다. 농사도 지어야 했고 부족한 소출을 메우기 위해 산에도 올라야 했으며 가끔은 도랑을 쳐 가재를 잡았다.

그나마 이 정도 할 수 있는 것도 다행인 해였다. 한 번 날이 가물거나 태풍이 오거나 하면 그 해는 이 작은 마을에 죽어 나가는 이가 숱했다.

왜 이런 먹고살기도 힘든 땅에서 평생을 살았냐 하면 그저 조상이 이 땅에 터를 잡았으니까, 그 말 외엔 달리 할 게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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