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영의원-68화 (68/350)

68화

“계속 누워계시면 촌각마다 이자를 올릴 거예요.”

“일어나면 되잖느냐! 이 고약한 놈!”

장 의원은 눈물을 머금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놈이 가면을 벗었다. 오랜만에 보는 낯짝이었다. 물론 율법당에 끌려갔을 때도 보긴 했지만 그때는 경황이 없어서 제대로 보진 못했다.

“……얼굴이 좀 상한 거 같으다?”

“장 의원님만 하겠어요?”

“이잉, 고얀 놈. 어른이 말을 하는데 꼭 말대답을 해요. 그래, 무슨 일이냐?”

“무슨 일이긴요. 제 돈 갚으실 분이 건강을 회복하셨다니 찾아뵈어야 하지 않겠어요?”

“……정말 그게 다냐?”

“뭐 그거 말고도 몇 가지 물어볼 게 있긴 한데요. 하나는 장 의원님의 선조에 대해서고요. 하나는 창천 녀석에 대해서인데요.”

휴우. 장 의원은 속을 쓸어내렸다. 금태양을 의맹에 고발한 건을 따지려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크흠, 우리 위대한 장중경 어르신에 대해 말이냐?”

“네. 상한잡병론, 갖고 계시죠?”

“크흠, 흠.”

장 의원은 제대로 대답하지 않고 헛기침만 해댔지만 금태양은 직감했다.

‘갖고 있네.’

“만약 제게 넘기신다면 제게 갚아야 할 빚은 탕감해드리죠. 거기에 금왕전장에 진 빚도 상당 부분 감해드리고요.”

“뭐, 뭐라?!”

“저 그 정도 능력은 있어요.”

물론 금태양도 맨 입으로 탕감을 해주는 건 아니었다. 장중경의 유실된 비전인 <상한잡병론>의 일부인 <상한론>은 현 한의학의 바탕을 이룬다. 일부만으로도 그 정도인데 원본인 상한잡병론에는 얼마나 대단한 내용이 있겠는가? 금태양은 그 안의 내용을 기반으로 금왕전장주 금진양과 거래를 할 생각이었다.

장 의원은 눈을 가늘게 뜬 채 한참 동안 침묵했다. 금태양은 그것을 기다려주었다. 의원을 저당 잡히면서까지 지키려고 동분서주했던 선조의 비전이 아닌가? 아무리 매력적인 조건을 제시했어도 그걸 넙쭉 넘겨줄 리가 없다. 그래도 조금만 기다리면―

“……안 되겠네.”

“네?”

“미안하네. 자네가 얼마나 큰 호의를 베푼 건지 아네. 그렇지만, 안 되겠네.”

장 의원은 아직 성치 않은 몸을 추슬러 금태양 앞에 머리를 박았다.

“나도 그래도 양심이 있는 자라 이러는 게 도리에 어긋난다는 건 알아. 허나 그럴 수 없네. 선조의 유훈이 있는바, 이 비전을 돈에 눈이 멀어 넘길 수는 없네.”

호오. 금태양은 속으로 감탄했다. 장 의원의 사람 됨됨이가 사실 대단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래서 돈으로 유혹하면 넘어올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오히려 만족스럽기도 했고.

“그럼 어쩔 수 없죠. 돈은 일하면서 갚으시고, 상한잡병론은 제가 장중경 어르신의 기준에 맞으면 그때 전수해주세요.”

“으응? 이, 이렇게 쉽게 물러나는 건가?”

“하나는 확실해졌으니까요. 갖고 계시는 비전이 가짜가 아니라는 건.”

돈에 눈이 멀어 목숨같이 지켜내던 비전을 넘겼다면 의심할 만하지만, 이런 상황에도 돈에 흔들리지 않았다면 장 의원이 가지고 있는 건 확실히 진짜다.

“위로는 임금과 부모의 병을 고치고, 아래로는 가난하고 천한 사람들의 재난을 구제하고, 중간으로는 스스로의 몸을 보살펴라. 상한론에 나오는 구절이죠. 혈육이 아닌 자에게 전하려면 그만한 재목이 되는 사람을 찾아야 한다는 뜻이겠죠?”

“그, 그렇네.”

“그러면 계속 곁에서 지켜봐 주시죠. 제가 장중경 어르신의 비전을 이어받을 재목인지, 아닌지.”

장 의원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창천 녀석에 대해서 말인데―”

“그 녀석에 대해서라면 난 자세히 아는 게 없네. 매번 놈들이 알려달라는 걸 알려주었을 뿐. 나머지는 자네가 아는 것보다 못할 거야.”

장 의원도 금태양이 창천을 치료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 일도 청운진인한테 고할까 했지만 왠지 그건 말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어떤 치료를 하는지 자세히 모르기도 했고.

“하지만 그걸 아시잖아요. 무당이 창천의 무얼 집중적으로 알려고 했는지.”

“자네 내 나이가 몇인지 아나? 그걸 어떻게 일일이 다 기억해!”

“어, 그렇긴 하죠? 창천을 담당하신 것도 거의 십 년이긴 하니까. 좀 기대하긴 했는데, 기억 안 나시면 어쩔 수 없고요.”

그 말에 장 의원이 입을 꾹 닫았다.

정말 기억은 안 나지만, 사실 그간 무당에 보고하는 내용을 두 장씩 작성해두었다. 그리고 한 장은 무당으로 보내고, 다른 한 장은 심처에 보관했다. 만약을 대비한 보험 같은 거였다.

‘그걸 정말 이놈에게 넘겨도 될까?’

아직은 확신할 수 없었다. 금태양이 다른 의원들에 비해 가진 바 재주가 훌륭하고 인성도 나름 젊은 놈치곤 아주 되먹지는 않은 놈인 건 알았다.

그래도 장 의원에겐 확신이 필요했다.

‘조금 더 두고 보자. 조금 더 두고 보고, 정말 괜찮은 놈이란 확신이 든다면…….’

“다녀올 데가 있어서 이만 가볼게요. 정양 잘 하시고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금태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금태양이 떠난 자리에는 보자기가 하나 놓여 있었다. 풀어보자 따끈따끈한 김이 올라오는 닭죽 한 그릇이 있었다.

“……고얀 놈.”

장 의원은 메는 목을 달래며 닭죽을 먹기 시작했다. 배는 불렀지만 이상하게도 아까 먹었던 호화로운 음식들보다 이 심심한 닭죽이 더 맛있게 느껴졌다.

* * *

장 의원과 면담을 끝낸 후 내가 향한 곳은 화산지회 예선 비무장이었다.

마지막 날이라 슬슬 한가하기도 하고, 뭣보다 자리가 생겼기 때문이다.

[그 호랑말코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 자리를 내준 걸까요?]

청운진인이 직접 보낸 초대장은 비무장 전체가 잘 보이는 특등석이었다. 내가 첫날 예선을 구경하러 갔을 때 셋째 형 금감양이 앉아있던 그 자리 말이다.

심지어 특등석 중에서도 단체석이 아니라 몇 명이 앉아 술과 음식을 늘어놓고 먹으며 구경하기 좋은 개별석이었다.

돈 주고 사려면 백만금은 줘야겠는걸. 전생에서 월드컵이나 올림픽 암표 가격을 생각하면 정말 그 정도 할 거 같다. 심지어 오늘은 그냥 비무도 아니고, 화산지회 호북 예선의 승자를 가리는 날이니까.

“진인께서 보내신 겁니다.”

[호오, 호랑말코가 당신 호감을 사려고 엄청 노력하네요.]

뜬금없이 온 선물은 다른 게 아니라 잘 차려진 주안상이었다. 나도 오늘 의원들에게 수고했다고 비싼 음식을 쐈지만 이건 차원이 달랐다. 금가장에서나 구경할 수 있던 진미들이 가득했다. 심지어 내가 술을 못 먹는다는 걸 알아서인지 차와 다과상도 따로 준비했다.

이 호랑말코가 무슨 속셈이야?

[왜요? 맛있어 보이기만 하는데. 독이 들었을까 봐 그래요?]

내가 술을 못 먹는다는 걸 아는 인간이 주안상을 보냈잖아.

그것도 술 몇 병까지 세트로.

심지어 술잔도 놓여 있다.

[누구 불러서 같이 먹으라는 거 아니에요?]

아니, 손님은 이미 와 있다.

청운진인은 날 초대한 게 아니라 자리를 깔아준 것이다.

“흠흠, 오랜만이다.”

뒤에서 남자다운 목소리가 인사를 건넸지만 나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기분이 착 가라앉았다.

“뭐냐, 오랜만에 보는데 이 형님 인사도 안 받아주기냐?”

거구의 사내가 주안상의 맞은편에 앉았다. 거리를 두고 털썩 앉았을 뿐인데도 그 덩치와 분위기에서 오는 위압감이 압도적이었다.

[아! 산도적!]

“오랜만이에요, 셋째 형님.”

부리부리한 눈에 억센 턱수염, 어디 유명한 산의 녹림채주라고 해도 믿을 것 같은 관상까지.

이 사람이 바로 내 셋째 형, 금왕표국주 금감양이다.

남매 중에서 제일 동떨어진 생김새라, 내가 아니라 셋째 형이 배다른 자식인 게 아니냐는 뒷소문도 종종 돌았지.

그 때문인지 나를 꽤 험악하게 대해서 어릴 때는 늘 피해 다녔더랬다.

아니지, 말은 바로 해야지. 그 시절의 내가 피하긴 어떻게 피해. 그냥 셋째 형이 날 보러 오면 하루 종일 자는 척을 하거나 아픈 척을 했을 뿐이다.

그게 관심의 표현이었다는 건 알지만 솔직히 아픈 내게는 부담이었다고.

에너지가 넘쳐서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기운이 쭉쭉 빨렸던 상대다. 그런데 지금은 근거리에서 묵묵히 기 싸움을 하고 있는데도 별로 힘들지 않았다.

“요번 일은 아주 잘해냈다. 곽 표두놈이 너한테 아주 단단히 빠진 거 같더라.”

“곽 표두는 좋은 사람이에요. 성실하고, 윗사람과 아랫사람 둘 다에게 충실하죠. 곽 표두가 다쳐서 더 이상 표행을 못 가는 표사와 쟁자수들을 사비로 챙기는 거 알고 있어요?”

“어, 그러냐? 그건 몰랐네.”

“천하제일 표국이라고 내세울 거면 퇴사한 사람들도 좀 챙기시죠. 금가장 사람들은 전부 가족이라면서 다치면 내쫓는 거 안 이상해요?”

크흠, 금감양은 헛기침을 크게 하더니 술잔이 아니라 대접에 술을 콸콸 따라 원샷했다. 나도 찻물을 따라 마셨다. 아, 나도 술 먹고 싶다.

“그건 생각해보마. 진양이가 말하길 네가 전보다 건강해졌다고 해서 안 믿었는데, 내 말에 따박따박 대답하는 거 보니 네가 예전의 태양이가 아니긴 하구나.”

“나도 아버지 아들이니까요.”

“그래! 말 잘했다. 너도 금왕의 아들이지. 안 그래도 말이다, 여기 무당 놈들이 감히 금가장이라는 이름을 우습게 보는 거 같아서 내가 가서 몇 마디 했다.”

그건 또 뭔 소리람.

“그 의원에 잔챙이들이 어슬렁거리지 않았냐. 내가 쫓아가서 감히 금가장을 뭐로 보고 이딴 짓을 하냐며 엄포를 놓았지. 놈들은 우리 금왕표국 없으면 독 안에 든 쥐나 다름없다. 너도 무당이란 이름에 꿀리지 말고 당당히 굴어. 아버지의 아들은 그럴 자격이 있다.”

아하. 어쩐지 청운진인하고 거래를 할 때 생각보다 깔끔하게 처리된다 했다. 내 뒤에 금가장의 그림자를 보고 그랬다고 생각했는데, 금감양이 뒤에서 엄포를 놓은 덕도 있었나 보다.

“흐음, 그걸 셋째 형님이 했다고요. 아닌 거 같은데.”

“뭐야? 이 녀석이 보자보자 하니까―”

“비적들에게 돈 찔러주면서 막내 집 탈탈 털어먹으라고 한 게 어디의 누구시더라.”

그 말에 금감양이 두꺼비 같은 입을 탁 소리 나게 다물었다. 이빨 부러지겠다. 이 동네는 임플란트도 안 되는데.

“……아, 알고 있었냐?”

“네, 뭐. 다 잡아다가 배후를 캤거든요. 그런 분이 하는 말이라 솔직히 안 믿기네요.”

나는 느긋하게 다과를 먹으며 차를 마셨다. 그 사이 금감양은 한 마디도 덧붙이지 않고 내 눈치를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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