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맞다, 너 무림인 아니었지? 독은 삼류 무인에게 통함. 어느 정도의 경지만 넘어서도 독기는 몸 밖으로 배출하면 그만. 그래서 우리 집안은 이런 실력을 겨루는 대회에 잘 나오지 않아.”
[엄밀히 말하면 고수를 중독시키는 것도 가능해요. 고수의 내공이 감당하지 못할 정도의 독을 퍼부으면 되죠. 하지만 그 정도 양을 중독시킬 준비를 하는 것부터가 엄청나게 번거로운 일이 되니까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다 이거군.
“그러니까 나랑 손을 잡고, 일류 무인에게도 통할 독을 만들고 싶다? 내 실력이 뛰어나니까?”
“응!”
“무슨 말이 되는 소리를…….”
“말 됨! 산공독을 만들면 되니까!”
산공독(散功毒)?
[……내공을 흐트러트리는 독이에요. 절대고수도 결국 그 힘은 내공에서 나오는 법. 그 내공을 흐트러트릴 수 있다면 범부나 다름없는 존재가 되죠.]
“일반인 상대로는 효과가 미미하지만 무인을 상대로 그만한 독도 없음! 우리 집안 어른들은 그런 건 만들면 안 된다고 하지만, 웃기지 말라지. 다들 못 하니까 변명하는 거임!”
사천당가의 어른들을 입에 올리며 당당은 표정을 있는 대로 찌푸렸다.
이 녀석, 지 가족이랑 사이가 별로 안 좋은가 본데?
하긴 그러니까 이 먼 호북까지 와서 화산지회 예선에 나왔겠지.
“아무튼! 너뿐임! 당가의 독을 처방도 없이 해독할 만한 의원 흔치 않아! 너랑 내 지식이면 만들 수 있음!”
“너는 그렇다 치고, 나는 그걸 왜 만들어야 하는데?”
“최고의 독은 최고의 약! 무인은 최고의 무인이 되고자 하고, 의원은 신의가 되려고 하잖아? 만들고 싶지 않음?”
“일단 내공을 흐트러트린다는 독이 어떻게 쓰면 약이 될지는 모르겠고, 넌 그거 만들면 또 아무 데나 뿌리고 다니려고?”
산공독이라는 거에 흥미가 없는 건 아니었다.
솔직히 그거, 같은 무림인보다는 나 같은(?) 일반인에게 더 필요한 거 아닌가?
중원 무림에서 무림인의 행사에 휩쓸릴 일은 자연재해를 겪는 것보다 흔한 일이다.
위기 시에 고수의 내공을 무력화 할 수 있는 독이라니.
일반인은 물론이고 나처럼 무림인을 상대하거나 때론 위협을 받을 수도 있는 입장에선 만들 수 있다면 만들고 싶은 물건이었다.
하지만 하필 그 말을 꺼낸 상대가 눈앞의 당당이다.
앞선 비무 대회에서 무차별적으로, 그것도 손에 꼽히는 의원이 아니면 해독할 수 없는 독을 뿌려대고 다닌 녀석.
이 녀석 때문에 하마터면 큰 장애가 남을 뻔한 환자도 있었고, 그게 아니라도 많은 환자들이 중독 증상으로 큰 고생을 했다.
중독 환자를 받기 위해서 수술 환자를 받지 않겠다고 결정 내린 것도 내겐 엄밀히 말해서 손해였고.
“내가 듣기로 사천당가는 독을 함부로 쓰지 않는다 했어. 자신들의 영역을 침범하는 자들에게만 그들의 독술이 신묘한 경지에 다다랐다는 것을 알려준다고 했지.”
사천당가의 어른들이 산공독을 만들지 않는다는 것도 꺼림칙하다.
존재하지 않는 환상의 독이 아니다.
이름이 있고 뚜렷한 효과가 알려져 있다는 건, 지금은 아니더라도 언젠가 누군가에 의해서 만들어진 적이 있다는 것.
독을 쓰는 데 신중하다는 이들이 만들지조차 않는 독이라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게다가 너, 보통 사천당가 하면 암기를 쓰지 않아? 검에 독을 묻혀 휘두르다니. 정말 당가의 사람은 맞는 거냐? 당가 인물의 독을 훔쳐다 그 행세를 하는 건 아니고?”
“……뭐라고?”
당당의 표정이 굳었다.
“내가 검을 쓰는 게, 뭐 잘못됐음? 당가도 검 가르쳐! 암기를 다 썼을 때를 대비해서! 기본으로 배운다고!”
뭐야? 이 녀석, 왜 울먹거려?
게다가 화내는 포인트도 이상하다.
보통 이렇게 얘기하면 ‘감히 내 신분을 의심하는 거냐!’하고 화를 내지 않나? 명문가 자제라면 특히나 더 그럴 텐데?
“……흥이 깨졌음. 갈래.”
파들파들 떨면서 화를 내던 당당은 이내 토라진 다람쥐처럼 문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올 때나 갈 때나 한결같이 갑작스럽네요.]
그러게 말이야. 사춘기인가.
씩씩거리며 태양의원 정문으로 향하는 녀석을 보아하니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저런 성격의 소유자는 깔끔하게 물러나는 법이 없는데 말이지.
“최강의 독이든 산공독이든 같이 만들자고 몇 번이고 귀찮게 매달릴 거 같은데…….”
매달리기만 하면 차라리 다행이다.
보복한답시고 비무에서 더 강한 독을 써서 골치 아프게 하는 거 아냐? 솔직히 지금까지의 환자도 겨우 해결한 수준인데.
[너무 걱정하지 마요. 한 명이 상비할 수 있는 독의 양에는 한계가 있어요. 그렇게 펑펑 써댔으니 남은 건 얼마 없을 거예요.]
“그건 해독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문제잖아.”
녀석이 사용한 독을 분석하는 건 미리 준비한 감별지며 홍령의 지식으로 어찌해냈다.
문제는 파악한 독을 해독하는 일이었다.
그나마 여기가 의원 천국인 양양이라 귀한 약재까지 쉽게 구할 수 있어 다행이었지만, 그걸 해독약으로 만드는 시간이며 필요한 양만큼 만들어내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계약직 의원들까지 침식을 잊어가며 최선을 다해주지 않았다면 꽤 많은 이들이 영구적인 손상을 남긴 채로 태양의원을 떠났을 것이다.
움찔―
[왜 그래요?]
자리에서 일어나다가 머리를 짚고 다시 주저앉았다.
“머리가 좀 어지러워서. 손도 좀 저리고. 피곤해서 그런가?”
나는 깊게 심호흡하며 양 손을 몇 번씩 쥐었다 폈다. 어제오늘은 수술도 거의 하지 않았는데.
[그 전에 백 건이 넘는 수술을 해치웠잖아요. 중요한 부분만 했다고 해도, 피로가 누적됐을 거예요. 갑자기 중독 환자들도 돌봐야 했고요. 해독하면서 독기에 미약하게나마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어요. 맥은 크게 이상이 없는 거 같지만, 독이란 게 원래 작용하는 지점에 다다르기 전까진 크게 티가 안 나기도 하니까요. 오늘은 일찍 쉬어요.]
아무래도 홍령의 말을 따르는 게 좋겠다.
한 의원에게 오늘은 일찍 쉬겠다는 의사를 전하자 그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좀 쉬게나. 중독된 환자들도 내일이면 거의 다 완치되니까 다시 수술을 해야 할 만큼 상처가 심한 환자를 받아도 될 거네.”
“다른 분들도 가급적 일찍 쉬라고 하세요. 내일은 침상이며 도구, 의원들의 옷 등 여기저기에 독기가 남아있을 수도 있으니 일찍 일어나서 전부 환기하고 소독하고, 바쁠 거예요.”
“바쁜 건 이제 다들 익숙하다네. 그래도 내일부터는 일대일 비무가 될 테니 지금보다야 덜 바쁘겠지. 자네를 생각하면 더 바쁜 게 좋기야 하겠지만……,”
수술 삼백 건.
수술의 자격을 따는 조건을 얘기하는 거다.
다치는 사람이 줄어들면 자연 수술 집계도 다 채울 수 없을 터.
“괜찮습니다. 어떻게든 되겠죠.”
화산지회 예선이 끝날 때까지 수술 삼백 건을 채우는 건 무리다.
솔직히 오십 건을 넘게 채운 것도 대단한 일이었다.
돌아가는 상황을 봐서는, 청운진인은 화산지회 예선 동안 벌어지는 모든 수술 건수를 내 이름으로 달아주려고 했던 거 같지?
그 정도가 아니라면 삼백 건이나 되는 횟수를 단기간에 채울 수 없다.
[후회돼요?]
아니. 대신 마음에 한 점 거리낌이 없으니까.
그게 중요하다. 그런 방식으로 수술의 자격을 땄다 한들, 나는 당당하게 금가장으로 향하지 못했을 것이다.
큰 형님도 절대 나를 인정하려 들지 않겠지.
그러니까 괜찮다.
……라고 생각했는데.
그 수술 삼백 건을 전혀 생각지 않은 방식으로 달성하게 될 줄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 * *
이변은 그날 밤부터 시작됐다.
이유 모를 통증에 깬 건 깊은 새벽녘.
홍령을 만난 뒤로 거의 통증을 느낀 적이 없었는데, 자다가 갑작스럽게 닥친 통증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젠, 장……!”
정신은 혼미하고 호흡은 가빴다. 식은땀이 비처럼 쏟아지고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홍령이 빙의해 움직이려고 해도 팔다리가 물에 젖은 솜처럼 말을 듣지 않았다.
[당신, 괜찮아요? 정신 차려요!]
몸에 뭔가 문제가 있다.
독인가?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표정이 굳은 채 떠났던 당당이었다.
중독 환자들에게 나타났던 증세와 내 몸에 일어난 증세가 비슷하다.
녀석, 비무에서 지독한 독을 써서 나를 골탕 먹일 줄 알았는데 대놓고 나한테 독을 쓸 줄은……!
[맥이 좋지 않은 건 확실한데, 그 증세만으로 독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어요. 일단 할 수 있는 걸 해볼게요!]
홍령은 침착하게 행동했다. 임시처방으로 침을 놓자 조금 정신이 또렷해졌다.
당당 때문에 밤새도록 해독제 연구를 하느라 내 방에도 독 감별지와 약간의 해독약이 있었다.
지난 이틀 간 연구한바, 당당이 사용하는 독은 전부 몇 가지 독의 혼합물이다.
그러니까 지금 이 독도 여기 있는 걸로 일부는 해독할 수 있을 거다.
서둘러 손을 따 감별지에 피를 떨어트렸지만―
[마, 말도 안 돼. 아무 반응도 없어요!]
침착하자. 내가 아픈 게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나는 한동안 찾지 않았던 비상약을 꺼냈다. 아버지가 돈을 아끼지 않고 구해온 귀한 약들이었다. 증상에 맞는 몇 가지 약, 거기에 죽은 사람도 한 번은 삼도천을 건너기 전 멱살을 잡아끌고 온다는 신선단까지 복용했다.
[잠깐 맥이 돌아오는 거 같았는데, 다시 서맥이 잡혀요. 뭐가 문제지?]
웬만해선 신선단을 복용하면 반 시진 내로 상태가 돌아오는데.
조금 정신이 돌아온 것을 제외하면 여전히 식은땀을 흘리느라 몸이 덜덜 떨리고 온갖 곳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정말 독이 아닌 건가?
[나도 이런 현상은 처음이에요. 대체 어떡해야 할지―]
홍령마저 패닉에 빠질 정도라면 보통 현상은 아닌 게 확실했다.
일단, 내 체질 때문이 아닌 건 확실한가?
[그 부분은 평소와 큰 차이가 없어요!]
그렇다면, 지금 이 상황이 파악할 수 없는 독 때문이라고 가정해보자.
신선단으로 몸의 기력을 끌어올렸지만 체내의 독이 해독되지 않아서 계속해서 기운이 빠져나간다면…….
“독은 삼류 무인에게만…… 크윽, 어느 정도의 경지만 넘어서면 독기는 몸 밖으로 배출할 수 있다고 했어.”
최고의 독을 만들고 싶은 이유를 물었을 때 당당이 했던 대답.
일단 체내로 배출한다면 정체를 알 수 없는 독이라도 괜찮지 않을까?
[위험해요! 당신은 아직 그 정도 경지에는 오르지 못했다고요!]
하지만 내가중수법도, 검기를 발출하는 것도 그래!
둘 다 내 경지에는 불가능했지만 필요한 만큼, 편법으로 가능하게 했다.
뭣보다 이걸 해결하지 않으면 죽는 건 매한가지일지도.
다른 사람이라면 모르겠지만, 홍령의 인도가 있는 나는 할 수 있을 거다.
그러니까, 도와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