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내 체질은 어느 한 부분이 극도로 부족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일 거라고 했지. 각 세가의 무공은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만들어진 거라고.”
그것은 홍령의 이론이었다.
그리고 내 체질은 그 기가 전부 없는 기허(氣虛)일 거라고 했고.
“나는 내 체질, 즉 남궁세가의 핏줄들이 토(土) 기운이 극단적으로 부족한 거라고 추측하고 있다.”
[……! 토 기운이 부족하다면 그럴 수 있죠. 피가 멎지 않는 것, 그것은 물의 흐름을 막아서는 기운의 부족함을 말하니까요!]
나는 한의학에 큰 조예가 없지만 두 사람이 말하는 바를 이해할 수는 있었다.
홍령이 창천의 체질을 관찰한 것만으로 내 몸을 치료할 작은 돌파구를 찾아낼 수 있었던 이유도 깨달았다.
피도 기도 결국 본질은 흐름.
때문에 홍령은 내 몸에 작은 웅덩이를 만들어 기가 잠시나마 머물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렇다면 남궁세가의 내가기공 또한 부족한 토 기운을 채우는 방식일까?
[아뇨, 그렇게 단순하지 않아요. 오히려 그 방식은 무당파가 창천에게 가르친 것에 가깝죠.]
“그리고 녀석들이 내게 가르친 것 또한 부족한 토 기운을 채우는 방식이라고 본다. 내게 붙은 별호를 들은 적 있나?”
“십 수의 청면검? 십 초식 내로 끝낸다고 그런 이름이라던데.”
“정확히는 십 보(步)다. 나의 검은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서 모든 공격을 받아내며 동시에 그 자리에서 적을 꺾는다. 이동을 최소화하는 것이 특징이며 내가기공도 그러한 특징에 맞는 기를 다스리게 되어 있지.”
“듣기에는 그럴싸한데.”
빈 곳이 있으면 채우면 된다. 그것은 간단한 이치다. 하지만 창천은 지금 그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기에 무당이 가르친 내가기공으로는 창천의 혈우병이 완벽하게 낫지 않는 것이다.
“그 이상은 더 고민해보고 말해주지. 그보다, 밖에 널 찾는 손님이 있군.”
창천은 다시 청색의 가면을 뒤집어쓰고는 창문을 뛰어넘었다. 바람같이 왔다가 또 바람같이 사라지는군.
그나저나 날 찾는 손님이라니?
내게 치료를 받아야 하는 많디많은 환자를 개무시하고 나를 불러낸 녀석이 말하는 손님이라면 보통 손님은 아닐 게 분명했다.
“소, 손님! 거기 가시면 안 돼요!”
신생의 당황한 목소리와 함께 누군가 문을 벌컥 열었다.
“네가 금태양임?”
쾌활하고 개구진 인상의 청년이었다. 무례하게 다짜고짜 반말을 하는데도 그게 하나도 어색하지 않은 태도였다.
아니, 반말 이전에 말투가 좀 이상하긴 하지만.
“예, 그렇습니다만. 그쪽은 누구신지?”
“네가 내 독을 다 해독했다지?”
그 말에 나는 상대가 누군지 알았다.
[당가의 그 후기지수군요? 생각보다 어리네요. 열다섯? 열여섯?]
그러게. 생각보다 어리긴 하군.
그래서, 나를 잠도 못 잘 정도로 바쁘게 만들어주신 우리 vip 고객님이 여긴 무슨 일이실까.
“정식으로 소개함! 나는 독검의 자하신룡이라 불리는―”
[누가, 누가 멋대로 자하신룡이라는 별호를 써!?]
아악, 제발! 홍령!
갑자기 무턱대고 아무한테나 출수하려는 그 버릇 좀 고쳐!
“―너 왜 그럼?”
당당하게 자신을 소개하다가 내가 손을 맞잡고 파들파들 떠는 것을 본 상대가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
[그치만! 쟤는 당가의 식솔이라면서요! 자하신룡은 화산에서도 가장 뛰어난 후기지수에게만 허락된 별호였다고요!]
알았으니까 침착해. 지금 화산은 없다잖아. 그럼 그 이름을 다른 사람이 쓸 수도 있지.
“몸이 좀 안 좋아서요, 가끔 이래요. 그래서 이름이?”
“그래, 나는 사천당가 23대손 당당임!”
당당하게 자기소개를 한 당당이 신발을 벗고 들어와 내 손을 덥썩 잡았다.
“왜, 왜 이러세요?”
“너, 나랑 독 하나 만들자!”
“……뭘 만들자고?”
사람이 당황하니까 존댓말 대신 절로 반말이 나왔다.
“독!”
“독?”
“그래, 독! 우리 집안 독보다 더 끝내주는 독!”
미치겠군. 머저리 가고 나니 또라이가 왔네?
* * *
“저기 있는 의원한테 다 들었어. 너 태청독도 해독했다며?”
“그 가면은 중독 방지용? 화산지회도 안 나올 거면서 그건 왜 써?”
“이 감별지 직접 만든 거? 쩐다! 우리 집에서 쓰는 거보다 더 좋은 듯?”
진짜 저 말투는 대체……
중원무림이든 21세기 현대든 저 나이 대 애들이 이상한 말투 쓰는 건 시대공통 인류공통인가?
“적당히 방해하고 가라. 나 바쁜 거 안 보여?”
그리고 바쁜 이유의 팔 할은 너다, 너!
그러나 당당은 그 정도 말로 쉽게 떨어지는 존재가 아니었다.
알았으니까 나중에 얘기하자고 해도, 며칠 동안 날 쫓아다니면서 말을 붙여서 사람을 거슬리게 하는 것 이상으로 치료에 방해가 됐다.
지금 내게 치료를 받고 있는 환자들은 다른 비무에서 상처를 입고 온 게 아니라면 대부분 당당과의 비무에서 중독돼 치료를 받으러 온 사람들이다.
자신을 중독시킨 인물이 제 옆에서 어슬렁거리는데 그 누가 마음 편하게 치료를 받을 수 있겠는가?
당당이 계속 주변에서 어슬렁거리자 증세가 호전되고 있던 환자 중 하나는 갑자기 상태가 악화되어 비상이 걸리기까지 했다.
아무리 해독을 해도 중독된 시간 동안 몸이 상하는 건 어쩔 수 없는데 거기에 마음이 불편하기까지 하면 컨디션이 나빠질 수밖에 없다.
[얘기나 한번 들어보자고요. 어차피 쟤가 여기 있는 동안은 중독되어서 오는 환자는 더 없을 거 아니에요?]
그렇다. 화산지회는 참가자가 많은 만큼 매일같이 비무를 치러도 모자라서 한 사람이 계속 이겨나가도 이삼일에 한 번 비무에 임한다.
창천도 지난번 다친 비무가 화산지회 예선에서 세 번째 비무였고.
이런 토너먼트식 대회는 시간이 지날수록 경기 간 간격이 좁혀지지만, 그간은 다수간의 비무였던 것이 이제 일대 일 비무가 되어 경기 속도에는 큰 차이가 없다.
마지막 8강 정도나 되어야 하루 안에 치른다고 하니까.
홍령의 말마따나 눈앞의 당당 요놈이 엊그제 만들어낸 중독 환자는 하루이틀 정도는 볼 일이 없다는 뜻이다.
“하, 따라와. 나도 너한테 묻고 싶었던 게 있으니까.”
“야호!”
녀석을 데리고 가장 구석진 곳에 있는 방을 찾아 들어갔다. 녀석이 눈에 띄지 않으면 환자들도 회복이 좀 더 빨라지겠지.
“그래서, 묻고 싶은 건 뭐?”
“네 얘기를 먼저 할 줄 알았는데. 내가 먼저 얘기해?”
“병이 있어야 약이 있음! 원하는 걸 얻으려면 먼저 내어줘야 하는 법!”
원래 병 주고 약 주고 아닌가? 하긴, 다짜고짜 같이 독을 만들자고 한 또라이였지. 독술을 익히다가 약간 맛이 갔나? 당가 사람은 원래 다 이런가?
어쨌든 궁금한 게 많은 참이었으니 잘됐다.
[빨리 그거부터 물어봐요, 그거!]
이 귀신도 진짜 질기네.
“그래, 너 말야. 왜 별호가 자하신룡이야? 자하신공이라도 익혔어?”
자하신공은 화산의 자랑인 내가기공이다.
그 내공심법을 익히면 내공이 순식간에 몇 갑자가 늘어나고 천기를 읽을 수 있으며…… 어쩌고는 나도 잘 모르겠고.
아무튼 홍령의 말에 따르면 무엇보다도, 검을 휘두를 때 새빨간 매화를 닮은 자줏빛 기운이 넘실거린다고 한다. 자하신공을 극성까지 익힌 무인이 검을 펼치면 그 일대가 붉게 물들다 못해 자줏빛 석양이 내리는 것 같다 해서 자줏빛 자에 노을 하를 쓴다고.
홍령의 생전, 화산에서는 당대를 이끌어갈 후기지수에게만 이 자하신공의 전수를 허락했다고 한다. 그래서 화산 제일의 기재를 자하신룡이라 불렀다고.
그런 배경이 있는데 갑자기 엉뚱한 녀석이 자하신룡이라고 불리는 걸 보면 내가 홍령이라도 순간 울컥하긴 하겠지만……
[알았어요, 알았다고요. 앞으로 수양 좀 할게요.]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째라 밤이 새도록 잔소리를 늘어놨더니 귀신도 좀 기가 죽었다.
하여간, 그렇게 배경 설명까지 듣고 나니 나도 좀 궁금해졌다.
과거 멸문한 문파에서 제일 기재에게 붙여줬던 이름을 왜 당가의 사람이 쓰고 있는지.
“그거, 내 검! 볼래?”
별호의 유래를 물었더니 녀석이 덥썩 검을 뽑아 휘둘렀다.
홍령이나 이놈이나! 하여간 무림인들이란!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나는데 눈앞에 무언가가 보였다.
짙은 보라색의 기운.
이런 또라이를 봤나!
“야, 문 열어! 뒤에 문! 환기!”
[독을 바른 검, 독검. 휘두르면 독기가 풀풀 흐르는 게 그렇게 보여서 자하신룡이라…….]
홍령이 뭐라고 중얼거리든 나는 실내에서 독기 흐르는 검을 휘두른 또라이 때문에 숨을 참고 방 안의 모든 문을 열어젖혔다. 또라이는 그게 뭐가 그리 재밌는지 깔깔 웃어대다가 이내 검을 갈무리했다.
“이건 기본 독이라 그렇게 안 강한데. 너 다 해독 가능함!”
……또라이를 상식인의 기준에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침착하자.
“그래서 이 독기운의 색 때문에 다들 너를 자하신룡이라고 부르는 거라고?”
“응, 그럴걸? 다 또라이들이야. 이게 어딜 봐서 자주색임?”
“야! 또 휘두르면 너 진짜 쫓아낸다!”
어딜 봐서 이게 자주색이냐며 검을 또 뽑으려는 녀석에게 기겁을 하자 당당은 장난이었다는 듯 씩 웃고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두 번 자주색이면 사람 잡겠네.
“그래, 뭐 그 부분은…… 사람에 따라 다르니까. 자주색과 보라색의 경계는 좀 애매하긴 하지.”
[…….]
그렇게 물어보라고, 물어보라고 매달리던 귀신은 그제야 궁금증이 풀린 건지 입을 닫고 조용해졌다.
홍령이 이러면 불안한데. 일단 그 이유는 나중에 물어보고.
“그래서 보라색 독기를 뿜어대는 자하신룡 소협. 나랑 독을 만들고 싶으시다?”
“응. 너 우리 집안 독 비전도 모르는데 다 해독했음. 너라면 누구보다 뛰어난 독을 만들 수 있음!”
“그걸 왜 만드는데?”
당당은 내가 너무나 이상한 것을 물었다는 듯 표정을 찌푸렸다. 지구는 왜 둥그냐, 아니지. 이 시대는 지구가 둥그네 평평하네 같은 논의가 그렇게 활발하지 않은 시기니까.
그래, 뭐 말하자면 내가 물은 왜 물이냐 물은 것과 같은 표정이었다.
“최고로 좋은 독, 만들 수 있으면 만들어야 함! 당연한 거 아냐?”
뭐지. 이 물어본 내가 바보가 되는 것 같은 기분은?
“……최고로 좋은 독이 뭔데? 너 사천당가잖아. 당가의 독이 중원 제일 아냐?”
“당가의 독은 중원 제일. 하지만 당가는 중원제일이 아님. 한 번도 그런 적 없어. 왜인 줄 몰라?”
알면 내가 너랑 이러고 드잡이를 하고 있겠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