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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의원-59화 (59/350)

59화

“……내가 실수했네. 자네를 존경하는 마음이 커서 본분을 망각했던 모양이야.”

“한 번만 넘어가겠습니다. 두 번 다시 이런 식으로 말씀하시면 저와 방식이 맞지 않는 걸로 생각하고 이곳을 떠나 달라 부탁할 겁니다. 제게는 이런 소모적인 논쟁이 오히려 시간 낭비예요.”

“명심하겠네.”

한 의원은 굳은 표정을 지었다. 후, 이 정도면 앞으로 큰 잡음은 없겠지.

혹 한 의원과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한 의원이 중간에서 잘 처리할 것이다.

[와요, 환자예요! 이번엔 세 명. 얼굴이 보라색!]

얼굴이 보라색으로 물들 환자라면 이번에도 독이다.

아까와는 종류가 다른 독인가?

“의원들을 준비시키세요! 오늘은 아무래도 하루 종일 중독 환자를 봐야 할 거 같으니까 다들 가죽 장갑을 지참하라 하시고!”

“알겠네!”

“그리고 오늘 끝나면 저한테 한번 들르시고요!”

“……얘기는 끝난 거 아니었나?”

물론 그 얘기는 끝났다. 나는 피식 웃어 보였다.

“너무 피곤하면 머리가 안 돌아가기 마련이죠. 침 한번 놔드릴 테니 섭섭하신 건 그걸로 잊어버리시는 겁니다.”

“허, 금 의원의 치료를 받다니. 영광으로 알겠네. 그럼 서둘러 준비하지.”

한 의원도 허탈하게 웃어 보이고는 의원들이 있는 진료실로 뛰어갔다.

나는 환자들에게로 달려갔다.

“환자분, 들리세요? 대답하실 수 있겠어요?”

그리고 지옥이 시작됐다.

종류가 각기 다른 독에 중독된 환자들이 물밀듯이 태양의원으로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 * *

양양 시내의 한 객잔.

웬만큼 돈이 많지 않고서는 물 한 잔 시킬 수 없을 것 같은 고급스러운 객잔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단 한 명의 손님이었다.

물론 중원 무림에서 이런 일은 드물지 않다.

비밀이나 보안유지 때문에, 혹은 단순히 여러 사람과 부대끼는 것을 싫어한다는 이유로 고급 객잔을 통째로 빌리는 이들은 드물지 않으니까.

다만 사소한 차이가 있다면 지금 앉아 있는 유일한 손님은 객잔을 대절하는 데 돈을 내지 않았다는 것이다.

“음식 멀었음? 이 몸은 배고파 죽겠다고!”

“예! 갑니다, 소협!”

그나마 그 손님이 상이 부러져라 음식을 시켜대는 것이 객잔 주인에게 유일하게 위로가 되는 부분이었다.

기존에 숙박을 하던 손님들부터 객잔을 찾던 이들까지 한순간에 사라진 것은 이 유일한 손님의 정체가 사천당문의 식솔이라는 것이 밝혀진 후였다.

화산지회 예선 비무장을 발칵 뒤집어 놓은 독검(毒劍)의 자하신룡이 바로 그였으니까.

제아무리 대단한 무인이라도 독을 쓰는 자는 두려운지 뒤에서 치사한 수법이다 욕을 하면서도 그의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그 결과가 이 전세 낸 것 같은 텅 빈 객잔이었다.

“흥, 겁쟁이들. 화산지회에는 온갖 용봉이 모인다고 하더니 순 거짓부렁이었나 봄?”

자하신룡은 볼을 가득 부풀리며 불만스럽게 음식을 입에 집어넣었다.

이래서야 자신을 제대로 증명할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집안 어른들에게 자신이 앞으로 무엇을 해낼지 그 눈과 귀로 똑똑히 보고 들어라 전했는데 이런 잡졸들을 상대로는 위명은커녕 허명도 퍼지지 않게 생겼다.

자하신룡은 그 점이 몹시 불쾌했다.

“그래도 앞으로 두어 번 비무를 거치면 제법 이름 있는 자들과 싸우지 않겠습니까요. 예를 들면 십 수(十數)의 청면검이라던지요.”

십 수의 청면검.

그자는 자하신룡도 조금 기대하고 있었다.

가면을 쓰고 있는 데다가 비무가 끝나면 어디론가 사라져 말 붙여본 자들도 극히 드물다는 신비의 사내.

매 비무를 십 초식 내로 끝내 호사가들이 십 수의 청면검이라는 별호를 붙였다 했다.

“아니면 백 침의 가면신의, 아니, 요새는 백침의 가면의룡이라고 불린다더군요. 그 청년이 아주 유망하다 말이 많지요. 자하신룡께서도 그렇지만 젊은 유망주들에게는 별호에 용봉의 이름이 붙지 않습니까?”

점소이마저 독에 중독되어 죽고 싶지는 않다며 일을 관둔 탓에 객잔 주인은 열심히 음식을 나르며 자하신룡의 비위를 맞췄다.

“가면의룡? 그런 이름은 난 못 들어봄? 게다가, 뭐야 그 이상한 별호는?”

“하하. 자하신룡께서 못 들어보셨을 만합니다. 청면검처럼 근래에 등장했으니까요. 물론 가면의룡은 그 전부터 작게나마 명성이 있었다는 점이 다릅니다만, 어쨌든 무인이 아닌 의원이니 모르실 수도 있지요.”

“의원이 명성을 날렸으면 뭐, 죽은 사람이라도 살림?”

자하신룡은 시큰둥하게 물으며 음식을 입에 욱여넣었다.

북쪽의 음식은 사천에 비해 밍밍하고 싱겁기 짝이 없어서 양껏 먹기라도 하지 않으면 짜증만 날 뿐이었다.

당가의 식솔의 심기를 거스를까 노심초사하며 음식에 공을 들인 조리장이 알면 슬퍼할 일이겠지만.

뛰어난 의원이라는 건 자하신룡에게 그런 심심한 음식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는 사천당문의 사람이다. 무당의니 소림의니 하는 건 다 멋모르는 북쪽 놈들이 자화자찬을 하는 격에 지나지 않았다. 당문의 의술이야말로 그들의 독에 못지 않은 신기(神技)가 아니던가?

그런 자하신룡의 심심한 입맛에 객잔 주인이 화끈한 양념을 들이부었다.

“그, 자하신룡께서 쓰셨잖습니까. 당가의 독물 말입니다.”

“어, 썼음. 그게 왜?”

“그걸 전부 해독했다고 합니다. 이름도 없던 의원인데 요 며칠 이름난 무당의들도 해독하지 못한 독을 해독해서 지금 그 앞에 장사진을 이뤘다지요.”

탁!

젓가락을 내려놓는 소리가 아니었다. 젓가락이 날아가 벽에 처박히는 소리였다.

순간 심장이 덜컹했지만 객잔 주인은 태연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여기는 무당의 앞마당. 반대로 말하면 항시 저 정도 무위를 선보이는 무림인들이 들락거리는 곳이다. 익숙한 일이었다.

“거기가 어디?”

“태, 태양의원이라고 합디다. 대로에서 좀 떨어져 있지요.”

물론 익숙하다고 스스로 되새기는 것과 달리 말은 좀 떨었지만.

“다녀올 때까지 파리 시체는 치우셈. 난 벌레가 있는 곳에서 밥을 먹고 싶진 않음.”

자하신룡이 객잔 문을 벌컥 열고 객잔 주인이 일러준 방향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의 신형이 보이지 않을 만큼 멀어졌을 즈음 객잔 주인은 휴 한숨을 내쉬며 벽에 박힌 젓가락을 뽑아냈다.

“에라이, 사천 당가가 명가라고 지껄이던 놈들은 다 눈이 삐었나. 자식교육을 어떻게 시켰기에 이런 망나니가―”

파리라도 씹은 것처럼 오만상을 쓰고 젓가락을 뽑아낸 객잔 주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젓가락 두 개의 끝에 정확히 파리 두 마리가 꿰뚫려 죽어 있었다.

“……내가 앞길이 창창한 의원한테 큰 잘못을 저지른 건 아닌지 모르겠구만.”

* * *

[야! 이 머저리야!!!!!]

홍령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어찌나 목청이 큰지, 나 외의 사람들이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면 양양 시내의 절반이 태양의원 쪽을 쳐다봤을 거다.

“그래서 내 상태는 어떻지. 빨리 처리하고 오늘 얻은 깨달음을 내 걸로 만들어야 한다.”

[깨달음이 어쩌고 저째? 몸 상태를 이따위로 만들어놓고 와서는 한다는 소리가, 깨달으음―?!]

“지금까지는 어설픈 놈들뿐이었지만 이름을 날린 놈들은 확실히 달랐다. 이렇게 깊은 상처를 입은 것은 오랜만이야. 과감하게 움직일 수 있으니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더군. 앞으로가 기대된다. 이곳에 오길 잘했어.”

[아오, 속 터져! 당신도 뭐라고 좀 해요! 왜 가만히만 있는데요! 손 내놔 봐요, 저 머저리 머리라도 쥐어박게!]

“너도 이곳에 온 보람이 있는 것 같더군. 밖에 늘어선 환자의 줄을 보았다. 무당이 나와 네 녀석을 연관 짓지 못하게 돌아갈 때는 조심해서 돌아가도록 하지.”

머릿속에선 홍령이, 눈앞에서는 창천이 시끄럽게도 조잘거렸다.

하아. 그냥 나 빼고 둘이 얘기하면 안 될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 하지 말고 제대로 전해요. 그리고 당신도 저 머저리에게 할 말이 있잖아요?]

그래, 할 말 많지.

“우선 고맙단 인사부터. 너 덕분에 많이 벌었다.”

“너도 걸었나?”

“확실히 오를 주식, 아니 이길 사람한테 안 걸면 바보지.”

그 부분만큼은 고마울 일이 맞았다. 갑작스럽게 출장소를 차리느라 부족한 부분을 메울 정도로 벌었으니까.

“근데 대체 내 가면은 언제 쌔벼간 거야? 내가 말 안 했어? 그거 나한테 특별히 맞춘 수제품이라고. 몇 개 없는 귀한 거란 말이야.”

“사내가 가면 하나 가지고 쪼잔하게 굴지 마라.”

“쪼잔함의 문제가 아니잖아. 고작 가면 하나 가지고 네 검이 드러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나는 침으로 녀석의 상처를 쿡쿡 쑤셨다. 놈이라고 안 아픈 건 아닌지 창천이 얼굴을 찌푸렸다.

“며칠이나 여길 감시하는 눈이 있었다는 건 알지?”

“안다. 그래서 한동안은 과감한 수를 피했다.”

“허이고, 그러다가 철수한 거 같으니까 대놓고 상처를 입으셨다? 너 저번에 습격 때도 그러다가 남 물먹여 놓고. 사람이 실수를 했으면 반성하고 발전을 해야지. 왜 나아지는 게 없어?”

“……깨달음을 얻었다.”

이건 뭐 고장 난 기계도 아니고. 계속 같은 말만 하고 있네.

원래부터 녀석과 대화가 잘 통하던 것도 아니긴 했다.

무당파가 감시의 눈을 거뒀으니 적당히 하다가 비무대회에서 빠지라고 말하려던 찰나.

“내 체질과 내가 익힌 내가기공. 본질적으로 어떤 부분이 충돌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뭐라고요?!]

“그걸 확인하기 위해서 실전과 같은 싸움이 필요했다. 미리 전하지 않은 점은 미안하게 됐지만, 내 진전이 네게도 도움이 될 테니 잔소리는 그만하지.”

“그게 뭔데? 빨리 말해봐.”

처음에는 몰랐지만 이제는 안다.

녀석의 체질은 일부분 나의 체질과 닮아 있다는 것을.

때문에 녀석의 체질을 분석한 홍령이 내 양팔에 경혈을 열어 보통 사람과 같이 팔을 움직일 수 있게 해주었다.

그뿐인가? 어설프지만 내가중수법이며 미약하지만 검기를 피워 올릴 수도 있게 됐다.

헌데 녀석이 한 발짝 더 나아갔다면, 이번에는……!?

“네놈은 의원이니 오행에 대해서는 알고 있겠지?”

“오행? 목화토금수?”

당연히 알고 있었다.

음양오행 사상은 동양사상의 기본일 뿐 아니라 한의학에서도 주요하게 다루는 부분이니까.

전생에서는 취업이나 승진이 걸린 중요한 시기에 사주를 보러 다니기도 했고.

……병에 걸렸을 때 운명이니 뭐니 웃기지 말라며 철학관을 뒤집어엎고 나온 이후로는 안 갔지.

뭐, 어쨌든 그런 곳에서도 오행을 다루니 모르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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