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영의원-58화 (58/350)

58화

“간밤에 잘 잤나?”

“다들 일찍 나와 있네요. 피곤할 텐데.”

“오늘부터 128강이 시작되지 않나. 준비해놔야지.”

“128강이면 뭐 특별한 게 있나요?”

나는 하루 종일 의원에 틀어박혀 환자를 보느라 이렇다 할 정보를 얻을 수가 없었다.

반면 임시 소장을 맡고 있는 한 의원은 나 대신 환자를 진찰하고 분류하는 일을 맡은 덕에 환자들로부터 이런저런 얘기를 주워듣는 게 많았다.

그런 거 맡기려고 일부러 수술 경험은 일천하지만 나이도 있고 의원들 사이에서 명망도 있는 한 의원을 뽑은 거니까.

“자네는 못 들었나 보군. 128강부터는 진짜 강자들이 등장한다네.”

[그야 그렇겠죠? 슬슬 쭉정이들이 다 털려 나갔을 테니까요.]

하지만 한 의원이 그런 당연한 말을 대단한 정보처럼 얘기할 리가 없는데?

“기존에 이미 실력으로 명성을 쌓은 이들 말이네. 그들은 특별히 처음부터 예선을 안 거치고 128강부터 특별 참가한다네. 그래서 기대를 모으는 게지.”

축구로 치자면 손에 꼽는 강팀 몇에게 시드를 배정해주는 거군.

“그렇다면 이렇게 부산스러울 이유는 없지 않아요? 강자들은 깔끔하게 한 방으로 상대를 꺾는 걸 선호하던데.”

“손에 꼽히는 강자인 것 외에도 특별 참가하는 이들은 특징이 있지. 바로 손속이 잔혹하다는 거라네.”

[손속이 잔혹한 자들이 너무 일찍 등장하면 삼류 무인들이 심하게 부상을 입을 테니까요. 그거 하나 유일하게 마음에 드네요.]

“그래도 의외네요. 그런 사람도 출전하나요? 정파 무림맹 주최인데.”

“정사를 가리지 않고 강자를 가려보겠다는 거 아니겠나. 뭐, 무림맹의 높은 사람들은 이걸 기회 삼아서 정파가 사파보다 위에 서 있음을 과시하려는 거겠지.”

무림맹이 그런 식으로 주최하는 이유가 뭐든 중요한 건 우리에게 닥친 일이다.

“아무튼, 그 때문에 지금까지보다 오늘부터 나오는 부상자 수가 많을 게야. 무인들이 얘기하는 걸 들어보니 오늘부터는 죽는 사람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거 같다더군. 마음 준비를 단단히 하게.”

[왔어요. 환자예요!]

한 의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홍령이 말했다.

무인으로 보이는 자가 사람들의 부축을 받으며 출장소의 정문으로 들어왔다.

[안색이 나빠요. 출혈이 심한가?]

“환자분, 어디를 다치셨어요? 말이 가능합니까? 이분 어디가 아픈지 아시는 분?”

나는 분주하게 안색과 눈동자의 초점, 경동맥의 맥을 짚었다.

낯은 파리하고 눈에는 초점이 없었으며 뭐라 말을 하려고 하는 거 같았는데 혀가 꼬였는지 제대로 된 소리를 내지 못했다.

“다친 곳은 없는 거 같은데, 저희도 잘 모릅니다. 지나가다가 사람이 쓰러지면서 의원을 가야 한다기에 데리고 온 것뿐이라.”

“상처는 몇 군데 있지만 깊지 않아. 출혈도 다 멎었네.”

상처가 깊지 않은데 상태가 심각한 환자.

화산지회 참가증을 가지고 있는 걸 봐선 참가자가 분명한데?

[설압자(舌壓子)! 설압자를 물려 봐요!]

갑자기 홍령이 뭘 깨달았다는 듯 설압자를 꺼내라 했다.

목구멍이 아플 때 병원에 가면 혓바닥을 누르는 넓고 긴 막대기.

이번에 수술도구를 주문제작 하면서 맡긴 도구 중 하나가 이거였다.

“……보라색인데?!”

그리고 내가 주문한 도구들 중 일부는 향균을 위해 은으로 되어 있었다.

[독이에요. 어서 환자를 안으로! 독 감별지를 꺼내요!]

장 의원과 태청독 해독 대결을 한 이후, 언제 필요할지 모른다며 홍령과 짬짬이 만들어놓은 것이 있었다.

중독된 사람의 피를 떨어트리면 어떤 독성을 가졌는지 검출해낼 수 있게 약재를 먹여 말려놓은 종이들이다.

매번 태청독처럼 독 원물을 먹어보고 해독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감별지로 빠르게 성분을 파악해서 해독을 하면―

“금 의원! 일단 내가 응급처치를 하고 다른 의원에 기별을 넣겠네. 다른 환자들이 올 걸 대비 하게나!”

다른 환자?

환자가 지금 눈앞에 있는데 무슨 소리야?

“자네는 수술을 해야 하지 않나. 해독은 다른 의원들도 할 수 있으니 그곳으로 보내세.”

[저 사람 한 의원 맞아요?! 왜 저런 말을―]

“지금 환자가 급하니까 나중에 얘기하고. 이 환자, 제가 치료합니다. 어서 안으로 들여 주세요!”

감별지에 환자의 피를 떨어트리자 몇 가지 감별지가 순식간에 시커먼 색으로 변했다. 몇몇 개는 지독히 타는 냄새도 났다.

“점혈과 침으로 독이 더 돌지 못하게 막을 테니 이 처방대로 해독약을 부탁합니다.”

상처에는 고약을 바르고 일부는 다시 소독한 칼로 상처를 째 피를 짜냈다.

상처 입은 자리가 심장보다 아래로 가게 환자를 눕히고 조금 정신이 든 환자에게 해독약을 먹이자 환자의 눈에 조금씩 초점이 잡혔다.

“환자분, 들리세요? 대답하실 수 있겠어요?”

“……내, 내가 살아있나?”

“예, 살아계시고요. 이제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여긴 태양의원입니다.”

환자가 안도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한숨을 쉴 정도로 얼굴 근육의 마비가 풀렸으면 됐네요. 아까는 정말 깜짝 놀랐어요.]

그러게 말이야.

지금까지 일반적인 병증이나 무인들 간의 다툼으로 벌어지는 상해 등은 종종 다뤄왔지만 독을 다루는 것은 처음이다.

물론 산에서 나무를 하다가 독사에 물린 나무꾼들을 치료한 적은 있지만, 이것과는 궤가 달랐다.

[이건 사람의 손으로 배합한 독이에요. 이런 걸 쓰는 곳은 많지 않죠. 좀 전의 환자가 당했던 독은 사천팔경독이에요.]

사천?

무림에 대해 무지한 나도 사천, 그리고 독 하면 떠오르는 곳이 하나 있다.

[맞아요. 사천당가에서 다루는 대표적인 독 중에 하나죠. 사천지역에서 나는 독초와 독사의 독 여덟 가지를 배합해 만든다고 해서 그런 이름을 가지긴 했는데…….]

홍령이 말을 흐렸다. 왜지? 잘 해독했잖아.

나는 독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세상에는 분야를 불문하고 통하는 한 가지 법칙이 있다.

이름을 알 수 있다면 두렵지 않다.

이름이 있다는 것은 그 특성과 세부적인 것에 대한 분석이 끝났다는 것이다. 이름을 안다는 것은 그 내용을 찾아 파훼할 수 있다는 것이다.

독이 아니라 그 자리에 병(病)을 놓고 봐도 그렇다.

난치병이나 불치병으로 불리는 것도 있지만, 그것들도 이름이 붙을 정도로 증상이 충분히 관찰되고 연구된다면 훗날에는 치료 방법이 밝혀지기 마련.

진짜 무서운 병은 이름조차 알 수 없는 증상의 나열이다. 독이 그런 것처럼.

[이름을 알면 두렵지 않다, 맞는 말이에요. 하지만 이 경우는 이름을 알기에 더욱 헷갈리네요. 사천당가의 식솔이 비무대회에 나와서 이 독을 썼다고요?]

홍령이 궁금해하는 점도 확인할 겸, 당부할 것도 있어 다시 한 의원을 불렀다.

“그렇다네. 당가의 후기지수가 출전했다더군. 꽤 묘한 검을 쓰는 자라던데 그 검에 독을 발라 휘두르는 탓에 꽤 실력 있는 자들도 꼼짝 못 하고 쓰러졌다 하네.”

[당가의 후기지수가 검을? 거기에 독을 발라요?]

“당가는 원래 암기로 유명하지 않아요? 거기에 독을 잘 쓰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그 부분은 잘 모르겠네. 사천은 먼 곳이잖나. 나도 독의 종주라는 이름만 들었지 그 가풍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네. 허나 독의 종주로 불리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겠나?”

홍령이 놀란 이유가 이거였다.

주 무기가 비수나 검이냐는 둘째치고서, 당가는 독의 종주라 불리곤 하지만 실제로 독을 잘 쓰지는 않는단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죠. 독이라는 게 생각보다 만들기 까다롭거든요. 보관도 어렵고, 들고 다니기는 더 까다롭고요. 게다가 소모품이잖아요? 자주 쓰기엔 아무래도 귀찮죠.]

약이랑 비슷하네.

처음 팔 만한 약을 만들어보겠다고 했을 때 내가 봉착했던 문제와 여러 부분이 흡사했다.

이래서 약과 독은 한 끗 차라는 건가?

[게다가 당가는 원래 독보다는 해독으로 유명해요. 사천지역이 워낙 자연독이 널리고 깔린 곳이라. 그러다 보니 독도 자연스레 발달한 거고요. 폐쇄적인 곳이라 침입자들로부터 자신을 지킬 때가 아니면 잘 사용하지 않죠. 그건 중원에 나온 가솔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방식이에요. 혹시 당문을 사칭하는 사람 아닐까요?]

흐음.

사천당문에 대한 내용은 잘 들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홍령의 지식이다.

홍령이 생전에 알고 있던 내용이라는 거다.

구파일방과 화산파에 대해서도 그렇고 홍령의 지식은 내가 지금 살고 있는 현재와 약간씩 다른 부분이 있다.

그 지식의 간극을 좁히는 게 내가 할 일이겠지.

그것도 중요하지만 우선은―

“아까 하던 얘기를 마저 하죠. 한 의원님. 왜 환자를 다른 곳으로 돌리려 한 겁니까?”

“자네가 여기 출장소를 차린 이유가 수술 삼백 건을 채우기 위해서라고 알고 있으니까. 방금 전 상처를 째고 독혈을 뽑아냈지만 그것은 수술로 쳐주질 않지. 자네에게 득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네.”

한 의원은 덤덤히 말했다. 그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내겐 목적이 있었고 그걸 위해서라면 중독된 환자를 치료할 시간에 한 명이라도 수술할 환자를 찾아 집계를 채워야 했다.

“당가의 식솔이 비무대에 섰으니 독에 당한 환자는 더 늘어나겠지. 솔직히 말하면 이곳 양양에 당가의 독을 해독할 수 있는 의원은 태청의문을 포함해도 몇 되지 않을 걸세. 아마 미어터지고 있겠지. 저 환자도 그곳에 줄을 서 있다 받아주는 의원을 찾아다닌 걸 테고.”

“제가 태청독을 해독한 적이 있다는 건 전에 술자리에서 말씀드린 적 있을 텐데요.”

“자네 실력을 의심하는 게 아니네. 더 중요한 것을 생각하라는 게야. 자네는 이런 곳에서 시간 낭비를 할 사람이 아닐세.”

“시간 낭비 아닙니다.”

나는 딱 잘라 말했다.

“환자를 보는 일이에요. 제가 수술의 자격을 따려고 하는 이유도 결국은 환자를 보기 위해서고, 수술을 하는 이유도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서입니다. 수술 외에 다른 좋은 방도가 있다면 그걸 했겠죠. 중요한 것을 착각하고 있는 건 한 의원님입니다.”

“금 의원.”

“당가의 독을 볼 수 있는 의원이 적다고 하셨지요. 제가 저 환자를 보지 않았으면 환자는 아직도 고통받고 있었겠군요. 사천팔경독은 고통과 마비증상이 심할 뿐 해독만 성공하면 목숨에 큰 지장이 없지만 해독에 시간이 오래 걸리면 결국 사지의 기능을 잃기도 합니다. 한 의원님께는 그게 중요한 일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제가 한 의원님을 잘못 봤군요.”

진심으로 그랬다.

내가 봤던 한 의원은 실력이며 인품 그 어느 면에서나 존경받을 만한 의원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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