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영의원-57화 (57/350)

57화

[금 의원이 잠든 듯한데. 목표물은 보이지 않는군. 목표가 오늘 비무에서 절상(折傷)을 입은 게 확실한가?]

[네, 확실합니다. 저 말고도 두 명이 더 확인했습니다. 긁힌 거나 다름없지만 분명 피가 난 것을 봤습니다.]

[피를 봐서는 안 되는 자가 피를 봤다. 헌데 이를 치료할 수 있는 의원에게 찾아오지 않았다?]

[이미 그 정도 상처는 나을 수 있을 정도로 체질이 개선되었다거나, 아니면 다른 수를 썼겠지요. 어느 쪽이든 저 태양의원의 금 의원이 했을 것이고.]

무엇을 숨기랴. 그들은 무당파의 무인들이었다.

이곳 양양에서 무당이 아닌 다른 이들이 어둠 속을 자유롭게 다닐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처음 그들은 청운진인의 명으로 금태양의 동태를 살피고 있었으나, 지금은 갑자기 가면을 쓰고 화산지회 예선에 등장해 무위를 선보인 창천을 좇기 위해 이곳에 있었다.

‘필시 그 금가의 어린 의원이 비밀을 발견한 것이다.’

창천, 청면검의 선전에 청운진인은 그리 추측을 했다.

금태양이 남궁세가의 유전병을 해결할 방도를 알아냈다!

혹은, 그게 아니더라도 창천의 체질과 그가 익힌 무공의 유래를 알아차렸다…….

그렇다면 무당과 의맹에 거부감을 가지는 것도 이해가 가지 않는가?

보통의 의원이었다면 벌써 태청의문, 아니 저 높디높은 무당산 태청봉 꼭대기로 붙들고 가 아는 것을 전부 말하라며 당근과 채찍을 흔들었을 것이다.

[뒷배가 있는 자라는 게 번거롭군요.]

[그조차도 확실치는 않지만. 어쨌든 이곳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하나도 빠짐없이 살피고 보고하라는 것이 진인의 뜻이시다.]

[그렇다고 계속 이렇게 보고만 있어야 하는 겁니까?]

흑의인 중 한 명이 지루함과 불쾌함을 가득 담아 전음을 보냈다.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다.

그들은 정파의 한 축을 담당하는 대 무당파의 그림자. 그들이 나서는 일은 상상 이상의 사안일 경우가 많았다.

물론 이 경우도 사안의 중대성이 떨어지는 건 아니었다.

창천의 일은 무당 내에서도 비밀로 부치는 일이었고, 그만큼 조심스럽게 다뤄져야 했으니까.

그러나 이 정도로 대책 없이 지켜만 보는 일에 쓰이기엔 그들은 좀 과했다.

[금가장의 핏줄이라는 저 어린 의원을 직접 건들지는 못해도, 저 안에 들어가 그 흔적을 찾아보는 정도는 괜찮지 않습니까?]

누군가가 제안했다.

[혹시 모릅니다. 우리가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 벌써 목표가 안에 들어갔을지도.]

[목표의 실력이 그 정도일 거라 생각하나?]

[그건 아닙니다. 모든 상황을 고려해보자는 겁니다.]

좀이 쑤신다는 뜻이었지만 그 말도 일리는 있었다. 그들은 저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확인하고 청운진인에게 보고할 의무가 있지 않던가?

신호는 달리 없었다. 한 명이 몸을 은신하고 있던 처마 밖으로 발을 뻗는 순간 다섯 명의 흑의인이 전부 몸을 날렸다.

아니, 날리려고 했다.

팟, 팟, 팟, 팟, 팟―

다섯 개의 비수가 정확히 흑의인들의 손발을 하나씩 꿰뚫었다.

그림자보다 더욱 그림자처럼 녹아 있던 그들은 졸지에 자신들이 은신하던 곳에 박제처럼 처박혔다. 공격을 알아채자마자 뽑아내려 했지만 쉽게 뽑을 수 없게 특별한 날을 가진 비수였다.

전음 한 마디 나누지 않았지만 다섯 명의 흑의인 모두가 알았다.

이것은 보통의 무인이 쓰는 무기가 아니었다.

그들처럼 그림자를 자처하는 자.

그중에서도 탁월한 실력을 지닌 자의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무당에서 키운 자신들이 이렇게 기척도 눈치채지 못한 채 습격을 허용할 리가 없었다.

[도망쳐라. 살 수 있다면 살고, 그럴 수 없다면 알고 있겠지?]

이미 몇몇은 자신들의 손발을 꿰뚫고 벽에 처박은 비수를 어떤 식으로든 끊어내고 도주했다. 박혀버린 비수째로 벽면과 지붕을 뜯어낸 자도 있고 즉각 손을 잘라낸 자도 있었다.

그렇게 도주에 성공한 것은 넷.

붙들린 것은 하나였다.

‘놓아줬나?’

정체불명의 그림자에게 붙잡힌 한 명의 흑의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가 도망친 나머지 네 명의 동료들에 비해 실력이 뒤떨어지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실력의 고하를 따지자면 두 번째 정도는 되었을 것이다.

허나 이 그림자는 처음부터 한 명만을 노렸다는 듯 자신을 짓밟고는 나머지 동료들이 도망치는 것을 묵인했다.

대체 정체가 무엇인가?

무당이 심혈을 기울여 키워낸 이들이 기척조차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의 실력자라니.

“―설마, 그림자들 사이에서 소문으로만 떠도는 ‘그림자의 왕’인가?”

“홀홀. 어린 것이 잔머리 굴리는 소리가 요란하구나.”

“당신이 진짜 ‘은막’―!”

콱.

벌레를 무심히 짓밟는 것 같은 발짓에 흑의인의 목이 꺾였다.

“어린 도련님 깰까 걱정이니 고만 잠들어 있거라.”

경추를 건드리긴 했지만 죽지는 않을 것이다. 다시 끼워 맞추고 처치를 하면 정신을 차리겠지. 혈도만 짚으면 될 일을 좀 과하게 처리하기는 했다.

이 버릇없는 놈이 금태양이 붙여준 제 이름을 함부로 부른 것이 짜증이 나서일 것이다.

은막(銀幕).

금가장의 이들에게는 다소의 친근함과 비교할 수 없는 경외를 담아 은 파파라 불리는 이가 어둠에 잠겨든 태양의원을 따스함을 담아 훑어보았다.

안 그래도 짊어진 게 많은 도련님에게 이런 짐까지 쥐여 줄쏘냐.

어른들의 일은 어른들끼리 해결하면 될 것이다.

물론 이런 그림자라는 것들이 한 번 쫓아낸다고 다시 안 오지는 않는다.

특히나 정파의 개들은 그렇다. 내리쬐는 태양 아래 그림자가 더욱 짙듯, 정파의 개들은 사파나 마교의 개들보다 더 추잡하고 질긴 경향이 있다. 은 파파의 경험상 그랬다.

“허면 뒤처리를 하러 가볼까. 어이구, 허리야. 다 늙은 노파가 하기에는 버거운 일이로구만. 다 끝나면 몰래 들러서 침이라도 한번 맞고 가야지.”

일전에 분장을 하고 들렀을 때 맞았던 침을 생각하며 은 파파가 흑의인을 짊어지고 몸을 날렸다.

은 파파의 그림자가 환한 달빛이 드리운 금왕표국 양양지국 아래 드리웠다.

아니, 사실 말이 그렇다 할 뿐이지 은 파파는 그 어디에도 자신의 그림자를 남기지 않았다.

은색의 달빛 아래에서도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는다 하여 은막.

평생 이름이라는 것을 갖지 않고 살아왔던 은 파파에게 그 이름을 붙여준 것은 겨우 걸음마를 하기 시작했던, 어린 시절의 금태양이었다.

철푸덕.

들고 있던 흑의인을 대충 집어던지자 안에서 우당탕 소리가 들렸고 이내 금감양이 깜짝 놀란 얼굴로 뛰쳐나왔다.

“은 파파? 이건 뭐야?”

“태화산(太和山)의 꼬리가 막내 도련님을 살피고 있더군요. 신경 좀 쓰시지요. 아무리 형제가 그리 헤어졌어도 한 곳에 있는데 얼굴 한 번 살피지 않으면 금왕께서 저승서 슬퍼하실 겁니다.”

“그 영감님이 슬퍼하긴 뭘 슬퍼해? 은 파파가 신경 쓸 일 아냐.”

“막내 도련님 보기 정 면구하시면 이 쇤네가 다리라도 놓아드릴까?”

“시끄러! 내 할 일은 내가 알아서 해. 은 파파까지 잔소리하기야?”

금감양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바닥에 널브러진 흑의인을 발로 차 화풀이를 했다.

“볼일 다 봤음 후딱 돌아가질 않고 여기서 밍기적대는 것이 보기 안쓰러워 그러우. 셋째 도련님도 내겐 귀여운 도련님이니까.”

“흥. 씨알도 안 먹힐 소릴.”

금감양은 콧방귀를 뀌었다. 저 잔혹한 그림자가 오로지 금태양의 앞에서만 살가운 옆집 할머니인 척한다는 것을 모르는 형제는 없었다.

아, 금태양 그놈은 평생 가도 모르겠지만.

“무당에겐 내가 따지도록 하지. 감히 금가장의 식솔에게 꼬리를 붙여? 어차피 그 꼰대들에겐 다른 일로 볼 일이 있으니까.”

“그 무패도라는 작자 말입니까? 그놈을 잡아다 바친다고 해서 막내 도련님의 화가 쉬이 풀리진 않을 거 같은데, 홀홀.”

“그만 간섭하고 꺼져. 태양이 놈 기저귀나 갈아주러 가든가.”

“홀홀, 그렇게 계속 툴툴거리면 원하는 걸 얻지 못할 겁니다요. 그럼 쇤네는 이만.”

은 파파는 처음 그렇게 나타났던 것처럼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다.

금감양은 한창 무공을 수련할 당시 은 파파가 그렇게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이 부아가 나서 눈을 안 감고 버텨본 적도 있었는데, 그런 노력이 허무하게도 은 파파는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게 십수 년도 더 전의 일이니 지금은 말할 필요도 없다.

저건 괴물이다.

그러나 틀린 일은 안 하는 괴물이기도 했다.

금태양의 기분을 풀어주려면 그 정도로는 모자란다라……

“젠장, 새꺄! 일어나! 야! 다들 눈 떠라!”

국주의 노기 어린 외침에 잠에 들었던 금왕표국의 표사와 쟁자수들이 찬물을 얻어맞은 것처럼 벌떡 일어났다. 밤은 이제야 깊어졌지만 양양의 밤거리는 다시금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 * *

“요 며칠 아침이 상쾌한걸?”

[원래 일이 잘 돌아가면 기분이 좋은 법이니까요.]

홍령의 말대로였다.

첫날은 환자가 너무 안 오다가 밤에 겨우 환자를 받기 시작했지만, 며칠이 지난 지금은 아침부터 환자가 줄을 섰다.

대회는 해가 떠 있는 시간에 열리지만 무인들이 이처럼 많은 동네니 밤마다 가볍게 싸움이 일어나는 건 예사였으니까.

그 외에도 다른 의원에서 치료나 수술을 받았는데 덧나서 찾아온 사람, 소문을 듣고 오래된 고질병을 진찰받으러 온 사람 등 다양한 사람들이 태양의원을 찾았다.

[신경 쓰이던 시선도 사라진 거 같고, 오늘이면 이백 명 정도는 집계될 거 같죠?]

처음 이곳에 출장소를 낼 때부터 홍령이 투덜거렸다.

누군가 감시를 하는 시선이 느껴진다고.

홍령의 기감에도 잘 걸리지 않는 걸 보면 굉장한 실력자인 모양이었지만 귀신의 눈은 속일 수 없는 법.

처음에는 하나였다가 여럿으로 늘었다고 해서 조금 긴장하던 차였다.

그런데 며칠 전부터 그 감시의 눈들이 갑자기 전부 사라졌단다.

누가 보냈는지는 대충 감이 잡히지만 왜 사라졌는지는 모르겠어서 신경 쓰였는데. 며칠이나 보이질 않는 걸 보면 이제 신경 꺼도 되겠지.

수술 집계가 확확 늘어나지 않는 것이 조금 걱정이긴 한데……

정 뭐하면 화산지회 예선 동안 채울 만큼 채우고 몇 달 정도 더 머물러야지.

마음이 급하긴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걸 뭐 어쩌겠는가?

내가 비무장에 폭탄을 떨어트려서 환자를 왕창 만들어낼 수도 없는 노릇이고.

할 수 있다고 해도 그러지 않을 거지만.

청운진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지금쯤 편하게 화산지회 예선전 구경이나 하며 노닥거리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지금이 좋았다. 몸은 힘들고 집계가 생각만큼 빨리 차지 않아 초조하지만 다른 쪽으로는 마음이 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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