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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의원-56화 (56/350)

56화

“솔직히 무당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쉽지 않은 일이네. 너무 상심하지 말게나.”

[그거 봐요! 한 의원도 그러잖아요!]

“뭔가 아는 게 있으세요?”

“낮에 시험이 끝나고 비무장에 다녀왔다더니 그 모습은 못 봤나 보군. 비무가 끝나면 각 의문에서 나온 사람들이 환자들을 싣고 간다네.”

아아, 그러면 우리 쪽으로 환자가 올 리가 없지.

갑작스러운 가면도둑의 등장이며 셋째 형의 모습 등 이런저런 것에 눈을 뺏겨 미처 못 봤다.

[……아.]

뭐야. 봤어?

[보긴 했는데……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어서 말 안 했거든요. 내가 누군데요!]

아이고 두야.

하여간 이 귀신은 나한테 심심하면 세상 물정 모르는 철부지 도련님이라고 놀려먹으면서 어떨 때 보면 나보다 더하다니까.

“말을 할까 했네만 어차피 우리가 사람을 보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니 가만히 있었네.”

“자리 경쟁이 심한가요?”

“그렇다네. 태청의문은 말할 것도 없고, 다른 의원들도 각기 무인들을 고용해 환자들을 데려온다네. 금왕표국의 표사들 정도라면 모를까, 그들도 계약이 끝나지 않았나. 남은 이들은 전부 의원이나 하인들이니 그 사이에 끼긴 어려울 걸세.”

방법을 아는데도 굳이 말을 안 한 이유가 있었군.

어쩐다.

화산지회 중이라 무인은 넘쳐날 테지만 대회에 참가하는 이들이 대다수일 거다.

개중 실력이 좋은 이들은 앞으로 남은 대회를 대비해야 하고 그게 아닌 이들은 부상을 입었을 거고.

남은 사람 중에서 쓸 만한 사람들은 이미 다른 의원들이 채갔겠지?

[실력에 비해 값만 비싼 쭉정이만 남았겠네요.]

이건 내 실수다.

미리 알아보고 준비를 했어야 했는데.

짝―!

내가 내 뺨을 시원하게 치는 소리에 앞에 있던 한 의원이 놀라 눈을 떴다.

“갑자기 왜 그러나?!”

“정신 좀 차리려고요. 하늘이 무너져도 사는데, 뭔가 방법이 있을 거예요.”

그래. 잠깐 대비 못 한 거 가지고 앓는 소리 하기엔, 대회는 오늘 시작했다.

아직 방법이 있을 거다.

뭔가 획기적인 발상으로 이 난국을 타개한다면―

그때 문 밖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의원 님! 환자예요! 치료 좀 해주세요!”

[신생! 신생이 환자를 부축해오고 있어요!]

환자!

환자를 기다리고 있던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막대한 보수를 약속받고 할 일 없이 밥만 축내고 있어서 양심이 콕콕 찔리던 의원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환자 하나를 헹가래 하듯이 받쳐 들고 달려왔다.

“금 의원님! 환자입니다!”

“맥은 다소 가라앉았지만 큰 이상은 없군요.”

“상처는 꿰맬 정도는 아닌 거 같지만 일단 준비는 해놓겠습니다. 다들 수술 준비해!”

“수, 수술이라니? 그 정도로 내가 심각하오?”

하루 종일 환자만 기다렸던 의원들의 호들갑에 다리를 절면서 온 환자가 화들짝 놀랐다.

[좀 삔 거 같은데요. 다들 호들갑은.]

그러는 홍령 너는, 호들갑 안 떤 것처럼 말한다?

[크흠, 내가 언제요?]

“다들 진정하고, 따뜻한 물수건 하나 갖다 줘요. 뜸 뜰 준비도 해주시고. 고약도 발라야겠네.”

“알겠습니다!”

한껏 의욕에 찬 의원들이 부산스럽게 흩어지자 환자가 뭔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물었다.

“진짜 수술해야 하는 거요? 그냥 삔 것 같소만……,”

“네, 환자분 그냥 삔 겁니다. 그 외에 자잘한 상처는 약 발라 드릴 거고요. 저희 의원들이 좀 의욕이 과한 거뿐이니까 안심하세요. 침 좀 놔드릴게요.”

환자는 그제야 좀 안심한 듯 상처 부위를 드러냈다.

확실히 큰 부상은 아니었다. 누가 봐도 삼류 무인 같은 차림새를 보아하니, 비무대회에 참가했다가 다쳤나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침을 놓고 맥을 짚어보고 있는데 환자가 입을 열었다.

“아까 낮에 화산지회 예선에 참석했을 때 삔 겁니다.”

“네, 그럴 것 같더라고요.”

“제가 비무 대회에 참가할 만큼 강해 보이오?”

나는 애매하게 미소지었다. 기왕 받은 첫 환자인데 굳이 ‘누가 봐도 삼류 같은데요’라는 말로 상대의 기분을 나쁘게 하고 싶진 않았다.

“그렇게 보지 않아도 되오. 내 실력이 별로인 건 잘 아오. 그래도 한 번쯤 내 실력을 확인해보고 싶었소. 헌데 일 검에 지레 겁을 먹고 제 풀에 넘어졌지. 나와 편을 먹은 놈은 그래도 좀 나았는데, 하마터면 팔이 날아갈 뻔하고.”

“큰일을 치르셨네요.”

“우리 조의 승자는 정말 강했소. 아마 그라면 못해도 64강까지는 갈 거요. 거기부터는 호사가들 입에 오르내리게 된다고 하더군.”

“그래요? 어떤 사람인데요?”

전이었다면 크게 관심 없을 주제였지만 적잖은 돈을 창천에게 투자한 지금은 달랐다. 창천이 저중에서는 64강을 장담할 정도로 강하다는 건 알지만, 만에 하나 대진운이 좋지 않아 강적을 만나면 떨어질 수도 있다. 투자가 도박이 되지 않으려면 적어도 제 발로 굴러들어온 정보는 받아먹을 줄 알아야 했다.

“청면검이라는 자였소. 오늘 중앙 비무대에서 가장 화제가 됐던 참가자지. 비무가 끝나고 뒤쫓아가 당신처럼 강해지려면 어떡해야 하냐 물었더니, 태양의원으로 가보라고 하더군.”

“네?”

[엥?]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창천은 자신을 옥죄고 있던 체질과 잘못된 내공심법의 뒤틀림을 홍령 덕분에 약간이나마 해소했으니까. 녀석 입장에서는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

그치만 보통 사람들에겐 아니잖아! 이 멍청이가!

“너무 그렇게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지는 마오. 나도 의원에 온다고 강해질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으니까. 허나 그런 강자가 추천한 의원이라면 뭐가 달라도 다를 거라고 생각했지.”

환자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다행이지만……

“이보게, 이보게! 환자가 왔네!”

[이번엔 왕 씨네요. 환자! 피 흘리는 환자예요!]

눈앞의 환자에게 양해를 구하고 달려가 보니 진짜 피를 철철 흘리는, 당장 처치가 급한 환자였다.

대충 사정을 들어보니 오늘 예선전에서 탈락하고 분에 못 이겨 술을 마시다가 객잔에서 싸움이 붙은 자들이라고 했다.

“내 호사가 친구들이 서둘러 알려준 덕분에 이쪽으로 데리고 왔다네. 어떤가? 내 친구들이 술값은 톡톡히 한다네.”

“네, 네.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만 해주시죠.”

“여부가 있겠는가? 수술 수고하게나.”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다.

화산지회 예선에서 떨어진 일 때문에 격화된 무인들이 양양 시내 곳곳에서 싸움을 벌였고, 왕 씨의 호사가 친구들과 근처에서 술을 마시던 금왕표국 제7 표행단의 표사들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태양의원 양양 출장소로 환자들을 옮겼다.

그런 싸움들이 전부 피를 부른 것은 아니었으므로, 분풀이로 한 싸움에서마저 패배한 자들은 놀랍게도(!) 청면검의 말을 듣고 왔다며 어떻게 하면 강해질 수 있느냐 물으며 찾아왔다.

그들 또한 자잘한 상처를 달고 있는 환자였기에 경증 자상이나 부러진 손발톱을 꿰매는 등의 수술이 하나둘 집계가 되었다.

“낮에는 하나도 안 오더니 밤 되니까 이렇게 많이 오네.”

[다른 곳들은 밤에 쉬는 게 아닐까요? 아니면 낮에 몰려서 줄을 오래 서야 한다든가요.]

거기에 창천이 곁들인 어이없는 소문도 있겠지.

이유가 뭐가 됐든 환자가 하나도 없는 상황이 해소되어서 다행이었다.

뒤늦게 들이닥친 환자들과 수술 때문에 태청의문에서 보낸, 내 수술 횟수를 기록하기 위해 파견된 의원이 눈으로 갑작스러운 야근을 욕하고 있긴 하지만. 초과근무수당은 태청의문에서 알아서 챙겨주겠지?

[그래도 한참 멀었어요. 그래봤자 다섯 건이니까요.]

수술 삼백 건.

처음 들었을 때도 엄청나다 생각했지만 정말 아득하군.

무슨 새로운 방도를 마련해야 할 거 같은데…….

[일단은 있어 봐요. 내가 생각하기에는, 당신 그런 거 안 어울려요.]

응? 어떤 거?

[무슨 제갈공명처럼 사전에 모든 걸 다 계획하고 착착 움직이게 만드는 거요. 성격에도 안 맞는 거 같고, 뭣보다 당신이랑 안 맞아요.]

나도 내가 철두철미하고 냉철한 타입이 아니라는 건 안다.

그래도 기본은 해놔야 할 거 아냐.

[그렇긴 하지만, 방향을 조금 바꿔보라는 거예요. 오늘도 봐요. 결국 당신이 뿌린 씨앗들이 알아서 넝쿨째 들어오잖아요.]

내 가면을 도둑질 해 가서 화산지회 예선에 나가더니, 자신이 때려눕힌 사람들에게 ‘강해지려면 태양의원에 가라’라고 한 창천.

나를 윽박질러 사기를 치려다 맹장이 터져서 내 환자가 된 후, 나와 거래를 하게 된 왕 씨.

왕 씨는 활명탕의 가격 문제로 한 번 더 마찰이 있었지만 이내 내 방식을 납득하고 나와 손을 잡았다.

거기에 이제 의뢰한 표행도 끝났는데 싸움으로 부상을 입은 무인들을 척척 날라다 준 제7 표행단의 표사들까지.

[말하자면 운이 좋달까. 인복이 좋다고 봐야겠네요. 모든 걸 혼자 하려고 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당신 편이 되어줄 사람들이 있으니까.]

……음. 그렇게 말해주니 쑥스러운데.

하긴, 의술을 펼치는 것부터가 나 혼자 하는 일이 아니니까.

그래도 아무것도 안 할 수는 없잖아?

[아무것도 안 하긴요? 준비를 철저히 해서 갑자기 몰아닥친 환자들을 잘 해결했잖아요. 1조와 2조, 3조도 한 몸인 것처럼 유기적으로 잘 움직였고요. 솔직히 나라면 그런 조직력을 보이진 못 했을 거예요.]

계속 얼굴에 금칠해도 뭐 안 나와. 오늘따라 왜 이렇게 칭찬에 헤퍼?

[그러니까 그만 고민하고 자라는 거예요. 다른 의원들이 보조해도 제일 중요한 건 직접 해야 하잖아요. 전에 비해서야 체력이 많이 나아졌다지만, 내가 빙의하는 것도 당신의 체력에 부담이 가요. 오늘도 마지막 환자 때는 다리에 힘이 좀 풀리던데.]

들켰네.

양팔의 경혈을 열고 상단전을 열고, 꾸준히 수련하고 있지만 아직 몸이 온전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오늘 환자가 그거밖에 안 와서 다행일 정도로.

내일부터는 짬짬이 스쿼트라도 해야 하나?

[고민 그만! 피로에는 잠만 한 게 없어요.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자고요.]

* * *

마침내 금태양 마저 불을 끄고 잠을 청한 새벽.

어둠보다 더 어두운 그늘 아래 흑의를 뒤집어쓴 이들이 모습을 감춘 채 태양의원 양양 출장소를 살피고 있었다.

사실 그들은 처음부터 이곳을 감시하고 있었다.

금태양이 금왕표국을 통해 빈 장원을 구하고 그곳에서 사람을 모으고 임시 현판을 내걸 때부터.

물론 그때는 지금처럼 사람이 여럿이지 않았다. 오직 한 명, 한 명이 이 작지 않은 장원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빠짐없이 보고 관찰해 윗선에 보고했다.

그러던 것이 오늘 오후를 기점으로 다섯으로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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