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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의원-55화 (55/350)

55화

[그래도요, 재미로 한번 해보면 좋잖아요! 아, 저 사람은 어때요?]

홍령이 제일 활기와 광기가 넘쳐 보인다고 찍었던 중앙의 비무대에 도착하자 비무장 한가운데에 오만한 자세로 서 있는 사람이 보였다.

이미 그의 주변으로는 예닐곱 명이 넘는 무인들이 바닥에 쓰러져 피를 흘리고 있었고, 남은 단 한 명만이 부들부들 떨며 대치 중이었다.

“이야, 강하다!”

“청년부에서는 적수가 없을 거 같은데?”

“손속이 좀 거칠긴 하지만 절도가 있고, 좋은 검이다. 어디서 저런 후기지수가 튀어나왔지? 누구 아는 사람 있나?”

“글쎄다. 저런 가면을 쓴 자는 처음 보는데.”

가면.

홍령이 찍은 도박 대상은 가면을 쓰고 있어서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늘어트린 검에서 여유가 넘쳐흘렀다.

가면의 사내가 검을 들지 않은 손으로 마지막 상대를 향해 손을 까딱였다.

“이익!”

그것이 도발이었는지, 상대는 박도를 들고 덜덜 떨다가도 이내 기합을 내지르며 그에게 달려들었다.

서걱―

비무장을 둘러싼 수많은 인파의 응원과 외침, 도박사들이 목청이 터져라 판돈을 올리는 소리, 술과 간식을 파는 아이들이 돈을 세는 그 요란함 속에서도 검을 휘두르는 소리는 또렷하게 귀에 들어왔다.

이내 박도를 든 사내가 무릎을 털썩 꿇었다.

그의 온몸의 근맥과 주요 요혈에서는 적잖은 피가 흘렀다.

“백삼십이조 승자! 청면검(靑面劍)!”

청면검이라 불린 사내는 지나가는 길에 먼지를 좀 치웠다는 듯 대수롭지 않은 태도로 비무대에서 내려갔다.

[대단하네요! 상대가 피투성이가 되긴 했지만 근맥과 요혈이 상할 정도는 아니에요! 정확히 겉피부만 긁었어요! 상대를 배려할 줄 아는 좋은 무인이네요! 저 사람에게 걸죠!]

아니, 좋은 무인이고 자시고.

대체 저 가면은 뭔데?

[가면이 어때서요? 자기 신분을 드러내기 싫으면 그럴 수도 있죠.]

아니. 저 가면 어디서 많이 본 거 같지 않아?

[어, 그런가요? 좀 낯이 익긴 한데.]

내 가면이잖아.

거기에 파란 염료로 색깔만 입힌.

[어? 어라? 아!]

양양으로 오면서 어쩐지 하나가 안 보인다 했더니. 저걸 언제 가져갔담.

[설마, 저거 창천이에요?!]

내 가면. 늘 소지하고 다니던 검. 그리고 이제 슬슬 내 눈에도 익은 검법까지.

정체를 들키지 않으려고 약간 변형을 한 모양이긴 한데…….

나도 알아봤는데 홍령이 눈치를 못 챈 게 더 의외다.

[세상에, 어느 순간 기척이 사라졌다 싶었더니! 왜 저기에 있는 거죠? 당신은 어떻게 알고 있었던 거예요?!]

녀석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

그건 둘째치고, 장 의원도 그렇고 창천 녀석도 그렇고.

왜 자꾸 남의 가면을 탐내는 거냐고!

“형씨! 비무대회를 제대로 즐기려면 역시 응원하는 참가자가 있어야지! 어디, 괜찮은 후보 골랐어? 한번 걸어봐!”

비무대 근처에 차려진 도박판에서 도박사가 크게 외쳤다.

살펴보니 금왕전장의 표식이 붙어 있었다.

뭘 숨기랴, 전장의 돈놀이는 단순히 돈을 빌려주고 보관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 법이다.

금왕전장의 도박판이라면 돈을 떼어먹힐 염려는 없을 테니 한번 걸어볼까?

“청면검의 다음 경기에 돈을 걸죠. 이거 다 걸어주세요.”

나는 품 안의 전낭 하나를 꺼내 던졌다. 전낭을 풀어본 도박사가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이내 분주하게 움직였다.

사람들이 돈을 많이 건 무인들은 특별히 커다란 게시판에 이름이 붙어 있었다. 워낙 많은 사람이 참가한 비무대회라 이름이 붙은 이들도 한둘이 아니었다.

웬만한 실력이나 유명세로는 저기에 이름 하나 붙이는 것도 어려워 보였다. 그리고 방금 전 내 배팅으로 청면검, 즉 창천의 가명도 그 위에 올라갔다.

“누가 저런 후보에 돈을 걸었어?”

“아까 중앙 비무대의 비무를 본 모양이지. 내비둬. 그래야 우리도 수지가 맞지.”

“다음 경기까지는 나름 할 만하겠지만, 128강부터는 쉽지 않을걸?”

좀 전의 비무에서 창천이 압도적인 실력을 선보였지만 돈을 만지는 스케일이 다른 도박사들에게는 성이 찰 정도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럴 수밖에. 녀석은 제 실력을 반도 안 꺼냈으니까.

주변의 비무도 슬쩍 둘러본바, 다수의 싸움으로 진행되는 64강까지는 딱히 창천의 적수가 없을 거 같았다.

32강쯤 되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그 전에 적당히 벌고 빠져야지.

원래 투자는 그런 거니까.

적당히 구경도 했으니 슬슬 가볼까? 지금쯤이면 딱 결과가 나왔을 거 같다.

[그런데, 저기 보여요? 자꾸 당신을 째려보는 사람이 있는데.]

으음, 신경 안 쓰는 척하려고 했는데.

결국 홍령의 눈에도 들어갔군.

사실 비무장에 들어왔을 때부터 간지러울 정도로 시선이 날 쫓아서 모르는 척하는 것도 일이었다.

상단전을 열고 난 후 시야가 보통 이상으로 발달한 것을 들키고 싶지 않았으니까.

[엄청 크네요. 일어서면 팔 척도 넘겠어요. 생긴 것도 우락부락한 것이…… 잠깐, 저 사람이 혹시 당신 셋째 형이에요?]

그렇다.

금왕표국주 금감양.

모든 비무대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높은 누대 위에 마련된 상석에 앉아있는 저 사람이 나를 궁지에 몰려고 비적단을 사주했던 내 셋째 형이다.

[제7 표행단의 계약기간이 왜 어제까지인가 했네요. 그냥 갈 거예요?]

셋째 형과는 그 건에 대해서 얘기를 해야겠지만, 지금 이 자리는 아니다.

좀 더 대화를 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후에 만나야 한다.

돌아가자.

나는 미련 없이 고개를 돌렸다.

셋째 형의 시선은 내가 비무장을 벗어날 때까지 끈질기게 따라붙다가 이내 사라졌다.

* * *

[말도 안 돼!]

말이 돼.

결과가 말해주잖아.

나는, 아니 우리는, 정확히 너는 틀렸다고.

[그치만 수비전에 왜 원지를 안 쓰냐고요! 아악! 무당의 이 돌팔이들!]

하아. 홍령은 온갖 욕을 해대며 무당파와 태청의문을 저주했다. 그런다고 결과가 바뀌는 것도 아닌데.

비무대회를 구경하기 전 봤던 시험은 무사히 통과했다.

정규 수련과정 없이 다른 곳에서 의술을 익히고 수련을 한 의원들을 대상으로 한 시험이라 커트라인이 꽤 빡셌는데, 통과 기준이 백점 만점에 95점 이상이었다.

내가 괜히 괴질에 대한 치료법을 써서 추가점수를 받을까 고민했던 게 아니다.

홍령이 자신만 믿으라며 자신만만해 했기에(더불어 무당 같은 돌팔이들에게 괴질 치료법 같은 걸 넘겨줘서는 안 된다고 하도 고집을 피우기에) 그대로 답안을 제출했고 그 결과 전체에서 딱 한 문제를 틀렸다.

사람을 일대일 비율로 그린 그림에서 온몸의 수백 가지 경혈을 정확하게 찍는 문제와 진맥, 침구 실연 등 갖가지 어려운 과제를 전부 만점으로 해결했는데 딱 하나.

[이럴 수는 없다구욧! 이건 한약학의 붕괴야!]

홍령이 납득을 못하고 있는 저 문제 하나를 틀린 것이다.

참고로 하나 틀렸지만 등수는 1등으로 합격했다.

하여간 잘하는 것들이 더 난리라니까.

물론 이십 점 배점인 문제를 만점 받아놓고 너무 간단해서 절대 틀릴 리 없다고 생각한 문제를 틀렸다고 하면 좀 억울하긴 하겠지만…….

[하지만 들어보라구욧! 수비전은 경약전서에 나오는 처방이라구요! 말하자면 공식, 상식 같은 건데!]

원지 공급이 잘 안 되어서 요새는 다른 걸 쓴 대잖아. 상황이 바뀐 걸 어떡해?

[하, 그치만! 나 때는 말이에요!]

이제 하다 하다 라떼를 시전하기 시작한 귀신을 뒤로하고 나는 합격 통지서를 좋은 비단에 발라 표구했다.

그간 맹의 자격이 없다고 하도 귀찮게 구는 사람이 많았으니까. 아예 대놓고 붙여놔야지.

진료를 보는 방에 표구를 걸어놓고 나자, 할 일이 없었다.

“이건 말도 안 돼.”

이젠 귀신이 아니라 내가 그 말을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합격 결과가 나온 지 벌써 두 시진이 지났다.

슬슬 저녁 시간이 되어간다는 뜻이다.

밖에서는 해가 지고 멀리서 사람들의 소란이 들려왔지만 낮처럼 시끄러울 정도는 아니었다.

화산지회 예선 첫날의 일정이 끝났고, 수천의 무인들이 쌈박질을 한 끝에 승자가 가려졌다.

그렇다면 패자가 있을 거 아닌가?

아까 창천만 해도 비무 상대들을 거침없이 베어 넘겼다.

위중한 환자는 많지 않았지만 다른 비무대를 보니 뼈가 부러지거나 팔이 날아가는 일 정도는 예사였다.

그렇다면 환자가 있어야 한다.

태청의원과 이곳의 거리가 꽤 되고 그 사이에 다른 의원들이 많은 만큼 대부분의 환자는 우리 의원에 오기 전에 다 빠지겠지만, 거기도 수용 인원이라는 게 있을 거 아닌가?

그럼 우리도 환자가 와야지!

적어도 한 명은!

“금 의원, 어쩔 텐가? 예정대로 조를 나누어 당직을 설 건가?”

태양의원 양양 출장소에서 임시로 소장을 맡은 한 의원이 와 물었다.

원래는 첫날부터 죽어라 바쁠 것을 예상하고 당직 순서까지 정해놓았다.

미리미리 해두지 않으면 그때 닥쳐서 모두들 체력이 축났을 때 배로 고생하게 될 테니까.

근데 그것도 환자가 와야 말이지.

“처음 의원을 열었을 때가 생각나네요.”

태양의원을 처음 열었을 때도 그랬다.

몇십 년간 출장을 오는 단골 의원이 있는, 작디작은 마을.

그때는 의원으로서 명성도 없어서 이름을 알리려고 시장 좌판에서 환자를 치료하는 쇼를 하기도 했다.

그래도 첫날엔 한 명도 안 왔었지.

[한 명도는 아니죠. 신생이 왔잖아요.]

아, 맞다.

돈을 안 받아서 환자로 생각을 안 하고 있었네.

[그때랑은 조건이 많이 다르긴 하죠. 장 의원과는 비교도 안 되는 경쟁자가 한가득이죠. 우리는 입지도 별로고요. 좌수검을 수술한 일화가 널리 퍼졌다곤 해도 태청의문의 앞마당에서 경쟁을 하는 건 쉽지 않네요.]

화산지회가 시작되기 전, 활명탕을 팔면서 일부러 좌수검을 수술한 일에 대해서도 입소문을 퍼트렸지만 역시 현청이 있던 작은 마을에 비할 바는 못 되나 보다.

[……그렇다고 해도! 이건 해도 해도 너무했어요. 내가 말했죠? 그 망할 호랑말코가 우리가 환자를 못 받게 방해하고 있을 거라니까요!]

청운진인에게는 직접 해보겠다고 이미 전달했다.

그쪽도 그러라며 순순히 답변을 보냈고.

물론 그쪽에서 방해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지만, 설마 그렇게까지 하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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