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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의원-54화 (54/350)

54화

“크흠, 이 정도는 무림에 어느 정도 발을 들인 자들은 기본으로 알고 있는 상식입니다. 도련님께서도 의업을 하시는 이상 무림과 아주 인연이 없다 할 수 없으니 머리에 넣어두시는 것이 좋을 겁니다.”

“신경 써줘서 고마워요. 외워둘게요.”

사실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 같은 거보다는 충격이 가시지 않은 홍령의 상태가 걱정이었다.

“특히 그들 앞에서 함부로 화산에 대해 말하지 마십시오. 이곳 양양에서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때문에 일부러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구성에 대해 말씀드린 겁니다.”

“……만약 그들에 대해 궁금하다면 어떻게 해야 하죠?”

대충 감이 잡힌다.

무당파 태청의문의 문주 청운진인에게 지독한 적개심을 품고 있던 홍령.

과거 구파일방의 일원이었지만 어떤 연유에선지 멸문해 지금은 입에 올리는 것조차 쉽지 않아진 화산파.

그리고 그 일에 충격을 받은 홍령.

아마 생전에 홍령은 화산파의 인물이었던 거겠지.

“왜 그 일에 관심을 가지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십 년도 더 지난 일이기도 하고, 무림의 비사니 보통 사람들은 자세히 모를 겁니다. 저도 아는 것이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 적어도 이곳을 벗어난 후에 알아보십시오.”

지부장은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전장으로 돌아가 봐야 한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짜 일이 바빠서라기보단 이 이상 화산파에 대해 얘기하는 걸 꺼려 하는 것 같았다.

금왕전장의 지부장쯤 되는 인사가 나에게 정보를 말하기 꺼려 할 정도라면 다른 사람들은 물어봤자다.

한동안은 이곳에서 해결해야 하는 일들에 집중해야겠군.

괜찮아, 홍령?

[……네, 괜찮아요.]

안 괜찮은 거 같은데.

[당신 말처럼 여기서 해야 하는 일들이 있으니까요. 일단 그걸 먼저 생각하기로 해요. 자세한 것은…… 차차 떠올리면 되겠죠.]

고마워. 마음이 심란할 텐데.

[고맙긴요. 당신이 더 단단한 발판을 가져야 내게도 도움이 될 테니까요. 어서 당신 큰형님이든 무당파든 신경 쓰지 않을 정도로 큰 힘을 가져보자고요.]

좋아. 홍령도 기력을 차렸으니, 이제 다음 단계를 밟을 때다.

* * *

화산지회 호북 예선이 시작됐다.

수천의 무인들이 쉴 새 없이 무공을 겨루고 구경꾼들은 화제로 떠오른 비무를 구경하러 다니느라 바빴으며 장사치들도 이 기회를 놓칠세라 목청을 드높였다.

당연히 우리 태양의원 양양지부 출장소도 이에 맞춰 발 빠르게 움직였다.

금왕표국을 고용해 공수한 재료로 활명탕을 대량으로 생산해 합리적인 가격으로 판매하기 시작하자 의원 앞에는 긴 줄이 생겼다.

무공을 증진시켜 주는 약이 아니라고 입이 닳도록 설명했지만, 어쨌든 긴장으로 소화가 안 되는 위장을 달래 컨디션을 회복시키는 데 도움을 주는 건 사실이다 보니.

왕 씨가 책정한 비싼 값을 치르고 활명탕을 샀던 무인들이 이게 어찌 된 일이냐, 내공을 증진시켜 준다고 하지 않았냐, 그냥 소화제를 이렇게 비싼 가격을 받고 판 거냐 하면서 따지러 오는 해프닝도 있었지만, 금왕표국의 표사들 선에서 막아낼 수 있는 선이었다.

역시 금왕표국. 표국 중 표비가 제일이라지만 그 표비 이상의 실력을 보여준다니까.

활명탕 외에도 무인들의 필수품인 금창약이며 천왕보심단 등 비무대회 특수를 탄 물품들이 불티나게 팔려가고 있을 무렵.

나는 태양의원 양양 출장소가 아닌 태청의문에 와 있었다.

“다음 문제는 제약이오! 주어지는 환약, 산제, 탕약을 맛보고 그 이름과 특징, 제조법, 어디에 처방해야 하는지를 적어 제출하시오! 시간은 한 식경!”

[어디 보자, 이 맛은?]

홍령은 아예 내 몸에 빙의해서는 직접 맛도 보고 답을 술술 써내려 가기 시작했다.

기분전환 겸 아예 집중하고 싶다나.

나야 이상한 약 맛을 상세히 느끼려고 애쓸 필요도 없고 홍령이 말하는 걸 틀리지 않게 받아 적으려고 노력할 일도 없어서 편하긴 하다.

그편이 점수도 더 잘 나올 테고.

그렇다. 나는 지금 의맹의 의원자격시험장에 와 있다.

원래는 단계별로 초급, 중급, 고급 시험을 치르고 중간에 무당의 자격이 있는 스승에게 연수를 받아야 한다.

하지만 세상 모든 것에는 예외가 있는 법.

나나 장 의원, 한 의원처럼 기본이 되는 의술을 무당이 아닌 다른 곳에서 익히고 수련 또한 충분히 거친 이들을 위해서 한 번에 자격을 딸 수 있는 통합시험이 있었다.

운 좋게도 그게 화산지회 예선 첫날이었고.

원래는 청운진인이 그냥 자격을 내준다고는 했지만…….

[안 그래도 언짢을 텐데 자격증 달라고 하면 또 무슨 수작을 부릴지. 걱정 마요. 내가 깔끔하게 통과시켜 줄 테니까요!]

홍령이 깃든 손이 일필휘지로 답안지를 작성해갔다.

쉽지 않은 내용인지 주변에서는 몇 번이나 맛을 보기도 하고 시험지를 쫙쫙 찢고선 다시 쓰기도 하는데, 쓱쓱 써내려 가는 내가 신기한지 시험관이 와서 호오, 오오! 하는 감탄사를 내뱉으며 지켜보기까지 했다.

시험 과목은 기본적인 혈의 위치나 침술, 뜸, 제약 등부터 시작해 각종 병증에 대해서도 물었고, 아직까지 치료법이 알려지지 않은 괴질의 새로운 치료법을 창안해보는 문제도 있었다.

후자는 배점도 높았다. 전자에서 상당 부분 감점을 당하더라도 후자에서 점수를 얻는다면 충분히 뒤집을 수 있는 수준이었다.

이 시대의 괴질들 중 다수는 현대에 극복된 것이 많아서 쓰려면 제법 그럴싸한 답변을 쓸 수 있겠지만……

[너무 자신을 드러내는 것도 좋지 않아요. 뭣보다, 저 녀석들에게 그런 치료법이 손에 넘어가는 건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못 봐요!]

이미 눈에 흙 들어가고도 남았잖아.

전이라면 [의원들이 새로운 치료법을 알게 된다면 더 많은 환자를 구할 수 있을 거예요!]라며 적극 찬성 했을 텐데.

홍령과 화산, 그리고 무당파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대체 어떤 일이기에 천상 의원인 홍령이 괴질의 치료법을 가르쳐주지 말라고 하는 건지.

어쨌든 그 때문에 마지막 문제의 답안은 포기하고 나왔다.

결과 발표는 두 시간 후.

시험 보는 사람이 적어서 그런가 이런 규모의 시험 치고는 결과가 꽤 빨리 나오는 셈이다.

그때까지 뭐 하지?

태양의원 양양 출장소로 돌아가는 건 패스.

거리가 은근 먼데다 지금은 화산지회 예선 때문에 거리에 사람이 너무 많아서 오고 가는 데 시간도 시간이요, 꽤나 진이 빠질 게 분명했다.

예선전 첫날인 오늘은 대회가 그렇게 불이 붙지 않아서 수술이 필요할 정도의 환자는 안 나올 거라고도 했고.

이 근처에서 적당히 시간을 보내면 딱인데.

[예선전을 구경하는 건 어때요?]

화산지회 예선을?

예선전은 태청의문 바로 옆에 있는 거대한 연무장에서 열린다.

바로 옆에 있으니 오가는 거리를 생각하면 딱이긴 한데.

[봐두면 공부도 될걸요? 다양한 무인들의 다양한 무공을 구경할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아요.]

내가 본다고 뭐 아나. 무공에 관심이 있긴 하지만 기초부터 탄탄히 다진 게 아니라 그런지 엄청난 무공을 봐도 와, 그렇구나. 정도로 끝나는걸.

[그래도 본 거랑 안 본 거랑은 다르죠. 혹시 알아요? 수술을 할 때도 도움이 될지? 검을 쓰는 도를 쓰는 거랑도 상처가 다르고, 조(爪)나 특이한 암기 같은 게 있을 수도 있다고요. 창촉도 종류가 얼마나 다양한지 알아요? 미리 알아보고 대비를 할 수 있으면 좋잖아요!]

알았다, 알았어.

화산파에 관한 내용을 기억해내더니 의술 외에 무공 쪽으로도 관심에 불이 붙었는걸.

어느 쪽이든 분노에 차 있거나 축 쳐져 있는 것보단 낫다.

나도 아주 관심이 없는 건 아니니…….

“……와, 이건 대단한데?”

태청의문에서 반 각 정도 걸어서 도착한 연무장은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사람만 많을 뿐인가?

여긴 강남역이나 코엑스처럼 그냥 오고 가는 사람만 많은 게 아니었다.

“우와아아아! 쓰러졌다!”

“미친, 저 기세대로라면 이 조는 저자가 다 해치우겠는데!”

“가라! 너한테 전 재산을 걸었다!”

“화주 팝니다, 화주! 속이 홧홧하게 타시는 분들 한잔하세요!”

여긴 콘서트장, 아니 콘서트장의 활기에 도박장의 광기, 그리고 그 옛날 한일 월드컵 당시 거리응원을 하던 이들의 열기까지. 온갖 감정이 뒤섞인 광란의 도가니였다.

[아홉 개의 대형 비무대로 나뉘어져 있네요. 한 비무대에 수십 명이 올라와서 한 명의 승자를 가리는 방식인가 봐요.]

나보다 넓은 시야를 가진 홍령이 비무장 주변을 훑어보고 와서는 말했다.

비무라고 해서 일대일 방식을 상상했더니. 일대다의 싸움이야?

[즉석에서 편을 먹어서 싸우는 곳도 있고, 그러다 몇 명이 안 남으면 그제서 일대일로 승부를 겨루기도 하고. 다양하네요. 이렇게 참가자가 많으면 숫자를 줄이는 데 그만한 방법도 없긴 하죠.]

하긴, 그만큼 사람이 많았다.

참가자가 수천 명인데 토너먼트를 한다면 최소 몇천 경기고, 리그전이 된다면 수만 번의 경기를 치러야 할 테니.

[그리고 보는 입장에서도 저게 재밌죠. 자고로 싸움 구경은 패싸움 아니겠어요? 우리도 환자를 치료해야 하는 입장이니까 그편이 낫고요.]

패싸움이 되면 확실히 싸움이 격해져서 수술을 해야 할 만한 상황이 나오기도 쉽겠지.

사람으로서는 영 꺼림칙한 방식이지만 내게 나쁠 건 없다.

[저기 가운데 연무장에 가 봐요. 저기가 재밌어 보여요. 사람도 많고, 판돈도 크네요. 당신은 안 해요?]

보아하니 운만 좋으면 한 방에 수십 배를 벌어들일 수도 있는 판인 거 같긴 하지만, 투자라면 모를까 도박은 하는 게 아니다.

투자와 도박의 차이?

투자는 가격이 오르는 근거가 있고 내가 그 근거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을 때 그게 투자다.

아무것도 모른 채 돈을 넣는다면 그게 도박이고.

카지노에서 슬롯머신을 굴려도 내가 잭팟을 터트릴 걸 계산했다면 그걸 도박이라고 보긴 어렵잖아?

반면 상대적으로 안전한 주식이나, 하다못해 예적금 통장도 정보를 모른 채 돈을 집어넣어서 주식이 떨어지거나 제2금융권이 도산하는 등의 피해를 입는다면 그건 투자보다는 도박에 가까운 거고.

드래O볼에 나오는 스카우터 같은 게 있어서 여기 있는 무인들의 실력을 수치로 알 수 있다든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초절정 고수의 정체를 나만 알고 있다든가 하는 확실한 정보 없이 하는 도박은 그냥 도박이지. 돈 낭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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