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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의원-53화 (53/350)

53화

“저기, 잠깐만요!”

“왜 그러십니까?”

내 외침에 곤장을 치던 이들의 움직임도 멈췄다.

장 의원은 여덟 번째에서 기절했는지 곤장이 멈췄는데도 미동도 없었다.

“제가 장 의원님에게 받아야 할 돈이 있는데 말이죠.”

“그렇습니까.”

“만약 장 의원이 여기서 죽으면, 제게 빚진 건 누가 갚나요?”

“……글쎄요. 장 의원에게 자식은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큰일이네. 저한테 갚을 돈도 그렇지만 다른 데도 빌린 돈이 많은 걸로 알고 있거든요. 예를 들면 금왕전장이라든가. 대충 얼마더라?”

나는 일부러 과장되게 손가락을 꼽았다.

“그러면 만일의 사태가 생길 경우 이 돈은, 태청의문이 대신 갚아주나요?”

“예?”

“……?!”

율법당 사람과 현건의 눈이 동시에 커졌다.

“아니, 그렇잖아요. 장 의원이 지금 처벌을 받는 것도 무당의라서인데. 그러면 장 의원의 빚도 무당파가, 태청의문이 책임을 지셔야죠.”

“그, 그게 그렇게 됩니까.”

양양으로 오면서 한 번도 흔들리는 기색을 보인 적 없던 현건도 말을 더듬었다.

“도의상 그렇지 않아요? 그러면 태청의문과 무당파는 무당의가 진 빚을 나 몰라라 하는 건가요?”

물론 지금 내가 말하는 부분은 순전히 억지다.

무당이 일개 무당의의 빚을 대신 갚아주어야 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무당파와 태청의문이 가지고 있는 이름값 때문에, 누군가 말을 꺼내는 순간 한 번은 고려해봐야 할 문제가 된다.

여태 이런 문제제기를 한 사람이 없었을 테니 내부에서 고민 좀 때려야겠지.

보통 사람이 태청의문에 대신 빚을 갚으라 운운한다면 가벼이 묵살되겠지만, 지금은 그 돈을 받아내야 하는 주체가 나, 그리고 절대 무시 못 할 존재인 금왕전장이니까.

“……그 부분은 청운진인께 먼저 여쭤보아야 할 사안인 듯합니다.”

“역시 그렇죠? 한번 물어봐주세요. 뒤늦게 아니라고 하면 저나 금왕전장은 닭 쫓던 개 되는 거잖아요.”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현건이 서둘러 자리를 벗어났다. 올 때는 걸어서 오더니 지금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사라지는 걸 보면 어지간히 당황하긴 했나 보다.

“율법당주님이라고 하셨죠? 태청의문은 빚을 갚을 수 없는 상태의 사람은 노비로 부리거나 이런 건 없어요? 장 의원님, 태청의문에도 빚을 많이 졌다고 들었는데.”

나는 율법당주에게 괜한 말을 걸며 장 의원 옆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슬쩍 손을 대 맥을 짚었다.

“크흠, 금 의원님은 본문에서 수학하지 않아 잘 모르시는 듯합니다만. 무당의 가르침을 기반으로 세워진 곳이기에 노비를 두고 있지는 않습니다. 되레 도망친 노비들을 풀어주는 편이지요.”

[와, 이상한 데서 양심을 챙기네요. 맥은 좀 위험하긴 한데 바로 숨이 넘어갈 거 같진 않아요. 빨리 치료할수록 좋긴 하겠는데…….]

그때 현건이 돌아왔다. 그는 먼저 율법당 사람에게 가서 뭔가를 속삭였고 이내 내게 다가왔다.

“진인께서 이것을 전하라 하셨습니다.”

현건이 내민 것은 한 장의 서찰이었다.

서찰을 펼치자 휘갈긴 서체로 다섯 글자가 적혀 있었다.

절화불이개(折花不二開).

꺾인 꽃은 두 번 피지 않는다라.

[쓸데없이 문장 쓰네요. 더는 안 봐주겠다는 거예요. 하여간 정파 무인들이란 다 그렇다니까요. 좀 고상한 척하는 깡패죠.]

그러는 홍령도 반쯤은 무림인 아닌가? 그냥 의원이라고 하기엔 좀.

[우린 좀 다르거든요?]

“큼흠, 진인께서 전하시길 죄인의 죄가 적잖으나 살아 그 죄를 갚는 것이 널리 이득이니 이만 풀어주라 하셨습니다.”

곤장을 치던 무인들이 곤장대에 묶여 있던 장 의원의 포박을 풀어주었다.

“기왕 하는 거 태양의원까지 날라주시죠. 혼자 나르기엔 아시다시피 몸이 좋지 않아서.”

“……알겠습니다.”

현건이 다소 못마땅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태양의원 양양 출장소에 도착하자 기다리고 있던 의원들이 응급처치에 나섰다.

나도 서둘러 준비를 끝내고 합류했다. 피부와 근육이 패인 상처라 수술로 모든 처치를 다 할 순 없었지만 뭉개진 근육과 터진 혈관을 정리하는 정도는 가능했다.

현대였다면 여기에 피부를 이식한다든지 보형물을 넣어 모양을 맞춘다든지 하는 일이 가능하겠지만 여기서 그 정도 수준까지는 불가능할 터.

[짝궁뎅이가 되겠지만 살아남은 게 어디에요. 앞으로 추이를 지켜보긴 해야겠지만.]

예정에 없던 환자지만 덕분에 조원들과 손발을 맞춰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솜 인형으로만 연습해왔던 조원들은 다소 긴장한 듯했지만 처치가 끝나자 서로를 보며 자신감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음, 이 정도면 당장 내일부터 환자가 찾아와도 능숙하게 처리할 수 있겠어.

아직 예선이 열리기까지 시간은 남았으니 지금의 연습에서 합이 잘 안 맞았거나 하는 부분들을 세세하게 수정해가면 될 것이다.

“도련님 덕분에 목숨은 건진 모양입니다.”

씻고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금왕전장 양양 지부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글쎄요. 나보단 지부장님 덕분이겠죠.”

지부장이 와서 얘기를 해주지 않았으면 나는 장 의원에 대한 일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을 테니까.

사실 청운진인이 내 억지 협박을 받아준 것도 내가 금왕전장을 언급했기 때문이 더 컸을 것이다.

무당이 금가장과 별로 친하지 않다고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상거래나 후원 측면에서 그런 거고, 무당파쯤 되는 규모가 되면 전장과 거래하지 않기는 힘들다.

구파일방도 오대세가도 생계를 위해 상단이나 여러 사업장을 낸다고 하지만 전장을 꾸리는 경우는 없고 말이지.

그 이유가 뭔진 모르겠지만 일단 내 알 바는 아니고, 중요한 건 그런 사업장을 운영하는 데도 전장을 이용해야 한다는 말씀.

나는 명분이었고 금왕전장이 실체였다는 말이다.

[그걸 가지고 당신에게 두 번째 기회가 없다고 한 건 정말 쪼잔하네요.]

“뭐, 어쨌든 저희 둘 다에게 좋은 거죠. 안 그래요?”

“맞습니다. 제가 무턱대고 큰돈을 융통해준 것이 장주께 보고가 들어가도 채무자가 죽은 것과 살아있는 것은 차이가 크니까요. 그래도 저보다는 도련님께 좋은 결과가 아니겠습니까?”

“저요?”

지부장은 다 안다는 듯이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장 의원의 비전을 전수받게 되실 거 아닙니까. 그가 지니고 있는 비전이 실전되었다는 상한잡병론 원본이라면 천금의 가치가 있지요. 축하드립니다.”

“무슨 소리예요. 장 의원이 저한테 가르쳐준다고 한 것도 아닌데.”

게다가 장 의원은 나에 대한 감정이 썩 좋지 않은 거 같고. 나도 그렇게 좋지는 않지만.

“목숨을 구명한 데다가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는 젊은 의원이시지 않습니까. 제가 장 의원이라면 바짓자락에 매달려서라도, 돈을 주고서라도 제발 비전을 전수받아 명맥을 이어달라고 할 겁니다.”

뭐, 그런 계산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냥 알고 지내던 사람이 피투성이가 되는 꼴이 영 불편했을 뿐이에요.”

“예, 알겠습니다. 역시 장주의 동생분다우시군요.”

욕이야, 칭찬이야?

설마 내 앞에서 누님 욕을 할 리는 없으니 칭찬이겠지?

“그래도 저는 그 집안에 도움을 받은 입장에서, 도련님이 꼭 그 집안의 비전을 이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또 이런 일이 벌어질 테니까요.”

[아까랑은 좀 다른 얘기 맞죠?]

응. 아까는 장 의원이 내게 전수를 해줄 거라고 생각하는 거고, 이번엔 전수를 해주지 않는다고 해도 내가 비전을 이었으면 좋겠다는 말이다.

“태청의문이 유독 장 의원에게 회원비를 가혹하게 책정했다는 말은 이미 했지요. 무당은 그런 방식으로 대대로 내려온 타 의원의 명맥을 죽이거나 흡수해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버리곤 합니다. 하지만 도련님 손에 있다면 무당도 함부로 그런 일을 하진 못하겠지요.”

“……그 얘길 들으니까 전부터 궁금하던 게 있는데요.”

“예. 뭐든 물어보십시오. 제가 답할 수 있는 것이라면 답해드리겠습니다.”

“무당파는 왜 그렇게 시정잡배 같은 짓을 하는 거예요? 정파의 대문파라면 나름 절도가 있는 곳이라고 들었는데.”

금가장을 나와 의업에 투신하면서부터 내내 들었던 의문이다.

모든 정파가 이렇지는 않을 것이다. 당장 옆 동네 소림만 해도, 소림의들은 무료로 의술을 제공하는 등 나름 ‘정파’라는 이름에 걸맞은 일들을 하지 않는가?

그 기조가 소림의를 업으로 삼은 이들의 밥벌이에 얼마나 도움을 주는지는 일단 차치하고.

“으음, 도처에 무당의 눈과 귀가 있는 양양에서 쉽게 할 수 있는 말은 아닙니다만.”

지부장이 난감하게 웃어 보였다.

아무리 무당파의 앞마당이라고는 하지만 여긴 태양의원 양양 출장소고, 내가 뽑은 사람들만 있는데.

그 정도로 조심해야 하나?

“우선 정파의 거두들이라고 해서 모두들 의협심이 넘치고 그런 것은 아닙니다. 문파마다 성향이 각기 다르긴 하지요. 구파일방 중에서는 무당이 좀 유별나긴 합니다. 오대세가 중에서는 모용세가와 비슷하달까요.”

[화산은요?]

내내 조용히 듣고만 있던 홍령이 갑자기 끼어들었다.

화산? 그건 또 어디야?

“화산, 화산파는 어떤가요?”

일단 홍령이 의술 이외에 뭘 궁금해하는 일이 잘 없으니 물어는 봤다.

헌데 지부장의 표정이 영 이상했다.

“화산 말입니까? 허허, 그 이름은 또 어디서 들으셨는지. 도련님이 태어나기도 전에 멸문한 문파가 아닙니까.”

[……뭐라고?]

온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홍령의 떨림이 내게 전달되는 건가?

빙의를 하지 않았는데도 이 정도로 감정이 전이되는 것은 처음이었다.

당황, 슬픔, 그리고 분노.

……분노?

“옛 서적에서 그 이름을 들으셨나 보군요. 현 구파일방은 무당과 소림, 종남, 아미, 공동, 청성, 곤륜, 해남, 점창 그리고 개방이 있습니다. 오대세가는 남궁세가와 모용세가 제갈세가 하북팽가 사천당가가 있지요.”

많기도 하다.

수험생활 할 때 서연고 서성한 중경외시 노래 부르는 거 같기도 하고.

하긴 이 넓은 중원에 손에 꼽는 문파가 열댓 개면 오히려 적은 거라고 봐야겠지?

그만큼 실력은 진짜배기들이라는 거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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