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본래 자격이 없는 이의 수술은 손을 자르고 눈을 멀게 해 추방합니다만, 진인께서 죄인이 나이가 많음을 가엾게 여기시어 곤장 백 대로 지금껏 지은 죄와 빚을 감하겠다 하셨으니 진인의 하해와 같은 도량에 감사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장 의원은 숨이 턱 막혔다. 하해와 같은 도량에 감사하라고?
청운진인은 장 의원이 준 패를 버렸다. 아니, 정확히는 그 패를 금태양과 손을 잡는 데 썼을 것이다.
그리고 쓸모를 다한 장 의원을 버리는 거다.
장 의원처럼 나이 든 자가 아니라 젊고 건강한 장정도 곤장 백 대를 맞으면 엉덩이 살이 패여 나가고 뼈가 부러진다. 거기에 상처가 곪아 목숨을 부지하지 못한다.
율법당은, 그리고 청운진인은 장 의원에게 그냥 죽으라고 하는 것이다.
금태양이 자격 없이 수술한 사실을 묻어버리기 위해서.
그나마 손이 잘리고 눈이 먼다면 고생스럽게 거지노릇을 하다가 죽겠지만 곤장 백 대를 맞으면 하루 이틀 끙끙 앓다 죽을 테니 그나마 나은 처사라고 할까?
웬만큼 기개와 강단이 있는 자라면 차라리 목을 베어라, 이 간악한 놈들아! 하고 외칠 일이지만 장 의원은 그럴 수 없었다.
‘지금이라도, 지금이라도 싹싹 빌어 눈과 손으로 봐 달라 해야 하나? 눈이 멀고 손이 잘리면, 선조의 비급은 어찌 전수하고? 아니다, 혓바닥이라도 남아 있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으렷다!’
허나 그것을 누구에게 전한단 말인가?
부족한 재능으로 그 모든 것을 제대로 소화해내지 못한 탓에 장 의원은 가업을 이어나가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오로지 일 뿐인 인생에 마땅히 인연도 없어 자손이 없으니 재능 있는 자에게라도 비급을 물려주고자 했으나, 눈에 찰 만한 이는 전부 무당의가 되어 다른 가르침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
무당, 처음부터 끝까지 무당이 문제였다!
그러나 지금 장 의원은 지켜야 할 것을 위해 그 무당에 무릎을 꿇어야 했다.
맨 처음 그가 선조의 비기를 지키기 위해 무당에 머리를 숙였듯이.
“더 할 말이 있으십니까? 이의가 없다면 이만 집행을―”
“자, 잠깐만! 부디 한 번만―”
“이의 있습니다.”
부드럽지만 단호한 목소리.
장 의원은 이 목소리를 며칠 전 이 양양 시내에서도 들은 적 있다.
고개를 돌리자 낯익은 가면이 눈에 들어왔다.
“그, 금 의원?!”
* * *
“오랜만이네요, 장 의원님.”
나는 빙긋 웃었지만 장 의원은 영 그렇지 못한 표정이었다.
표정뿐인가. 얼굴도 수척하고 수염도 엉망인 것이 엄청 고생을 한 것 같은 모습이다. 태양의원에 있을 때는 잘 먹고 잘 자서 얼굴이 뺀질뺀질해 보이던 것과는 정반대였다.
“실례합니다만 잠깐 그 집행을 기다려주시면 안 될까요?”
“그대는 누구이기에 본문의 행사에 관여하는가?”
“며칠 전에 청운진인과 독대한 사람이라고 해두죠. 그걸 증명해줄 사람도 이쪽으로 오고 있고요.”
율법당의 사람은 잠깐 고민을 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유예하는 정도는 괜찮겠지. 허나 그대가 죄인을 구하기 위해 거짓을 고한 것이라면 무당의 이름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네.”
엄포를 놓았지만 별로 무섭진 않았다. 청운진인과 독대했던 것도 진짜고, 그걸 증명할 사람이 오고 있다는 것도 진짜니까.
일단 시간은 벌었군.
[휴, 조금만 늦었으면 정말 손 쓸 수 없을 뻔했네요.]
뭐야, 걱정했어? 내 보물 들고 튀었다고 욕을 그렇게 해놓고는.
[그건 그거고요. 하지만 장중경의 후손이라잖아요. 그것도 장중경의 비전을 가지고 있는! 상한론이 아니라 상한잡병론 원본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구요! 우리 선조이신 화타께서는 상한잡병론을 놓고 ‘사람을 살리는 책이다’라고 하셨다니까요? 얼마나 대단한 내용일지 감이 잡혀요? 그런 의서가 난리 통에 원본이 소실되어서 남아 있는 걸 재편찬한 게 지금 알려진 상한론이라구요!]
전에 창천을 보고 강자 오타쿠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는데, 홍령은 한 술 더 뜨네.
어쩌다 내 주변엔 이런 사람(?)들뿐이지?
[게다가 당신도 장 의원에겐 받을 돈이 있잖아요. 금왕전장도 돈을 받아야 하고요. 장 의원이 죽는다면 당신 돈에 당신 누님 돈까지 날아간다고요.]
그래. 나는 꽤 막중한 임무(?)를 어깨에 짊어지고 온 셈이다.
나를 궁지에 몰려고 했던 장 의원을 살려야 한다는 임무 말이지.
단순히 무패도에게 납치된 줄 알았더니 사실 나를 함정에 빠트리려고 했고, 그게 꼬여서 정작 자신이 함정에 빠진 장 의원을 구명하는 상황이 나라고 썩 마음에 드는 건 아니지만……
[은원은 스스로의 손으로 해결해야 깔끔한 법이죠. 난 솔직히 당신이 무적단 조무래기들을 관에 넘긴 것도 마음에 안 들었어요.]
내가 놈들을 관에 넘겼는데? 놈들 목에 걸려 있던 현상금도 받았잖아.
그 현상금은 뒤늦게 나를 따라온 한 의원을 통해 전달받았다. 지현의 서찰도 받았는데, 의맹에 고발한 것이 미안하고 잘못했으며 앞으로 많은 편의를 봐주겠다는 내용이 몇십 장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거랑 그거랑은 다르다고요!]
알았어, 알았다고.
사적복수는 여전히 내게 익숙하지 않은 일이긴 하지만 홍령이 뭐라고 하는지는 이해했다.
장 의원이 태청의문과 해결할 일? 그건 그쪽이랑 어떤 식으로 해결해도 상관없다.
중요한 건 나와 볼 일은 나랑 마쳐야 한다는 거다.
“금 의원님, 찾으셨습니까.”
“아, 오셨어요?”
그리고 내가 기다리던, 나와 청운진인의 관계를 증명해줄 사람이 도착했다.
바로 나를 여기까지 호위하며 데려왔던 무당의 무인 말이다.
“삼대제자 현건, 진인의 손님께서 부르셔 왔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처음에는 그냥 평범한 무인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무당의 본산제자였다.
현자 배의 대사형이라고 하던가?
그를 비롯한 삼대 제자들은 어느 정도 본산에서 수련을 마치면 태청의문으로 내려와 의문의 여러 가지 일을 돕는다고 했다.
양양으로 오던 중 잠깐 이들의 실력을 견식할 일이 있었는데, 산적 조무래기들을 상대하는 일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홍령이 [창천보다 뛰어나요. 엄청나네요.]라고 할 만한 실력자였다.
그런 사람이니 내 신분(?)을 증명하는 데 넘칠지언정 부족할 리는 없을 것이다.
“실로 이자가 진인의 손님이란 말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율법당 사람과 현건이 뭔가 심상찮은 눈빛을 주고받는 거 같긴 했지만 딱히 분위기가 내게 나쁘게 흘러가는 거 같진 않았다.
“흠흠, 그러면 그대는 무슨 연유로 집행을 미루어 달라 했습니까? 혹 이자를 구명하려 하십니까?”
“딱히 구명은 아니고요, 사실관계는 바로잡아야 하지 않나 해서요.”
“그, 금 의원! 날 구해주러 온 게 아닌가?”
“음, 저희가 할 얘기가 좀 있긴 하지만 장 의원님을 구해드리러 왔다고 하긴 좀.”
“이, 이놈이!”
장 의원은 대노했지만 밧줄에 칭칭 묶여있는 상태라 파들파들 떠는 게 고작이었다.
좀 참고 기다리시라고요. 나도 잡혀온 게 아닌 게 어디야.
“우선 장 의원이 처벌받는 내용을 들어보니까, 가장 중요한 건 허락받지 않은 수술을 한 부분인 거죠?”
“그렇습니다. 맹의 자격을 득하지 않은 무지렁이들이 하는 수 없이 수술을 하는 일까지 우리가 일일이 관여하지는 않으나, 함부로 수술을 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한 무당의는 얘기가 다릅니다. 다른 부분 또한 처벌 대상이나 가장 큰 부분은 그게 맞지요.”
“거기에 타인을 거짓으로 고발한 것이 참작되어 더 중한 벌을 받는 거고요?”
“맞습니다. 혹 금 의원이라면, 당신이 태양의원의 그 금태양입니까? 장 의원이 원래 수술을 했다고 고발한 상대는 바로 당신입니다.”
율법당 사람이 뭘 알고나 얘기하라는 듯 말했다. 하지만 장 의원이 날 고발했다는 건 이미 알고 있다. 지부장이 ‘일이 이상하게 돌아간다’고 얘기한 부분이 그거였으니까.
“네, 맞아요. 제가 좌수검의 팔을 수술했습니다.”
“뭐, 뭐라고요?”
“자네!”
“금 의원님. 여기서 그런 말을 하시면 진인께서 곤란해지십니다.”
율법당 사람과 장 의원이 놀라는 데 이어, 현건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진인께서 곤란하시다고요? 아, 제가 수술의 자격을 득하지 않은 상태로 수술한 건을 덮어주시려고 엄한 사람에게 죄를 뒤집어씌운 부분이요?”
“금 의원!”
“진인께서 헷갈리셨나 보죠.”
현건의 표정이 미미하게 일그러졌다. 나는 아랑곳 않고 앞으로 나아가, 율법당 사람의 앞에 펼쳐져 있는 피 묻은 천에 내 태양보도를 뽑아 갖다 댔다.
정확히 핏자국이 일치했다.
“이 천은 수술 당시 단도에 묻은 피를 닦아낼 때 썼던 거네요. 그리고 이 단도는 제 겁니다. 그건 저기 현건 도장이 잘 아실 거고요.”
“……맞습니다.”
“아까 듣자하니 의맹의 자격을 득하지 못한 무지렁이가 수술을 하는 것까지 관여하진 않으신다니, 그건 제게도 해당이 되는 말이겠죠?”
“아니, 그게 말입니다. 금 의원을 비하하려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큼큼.”
청운진인의 손님인 내가 의맹의 자격을 얻지 않았다 하자 율법당 사람이 급하게 말을 바꿨다.
“곧 맹의 자격을 따고 수술의가 되기 위한 수련과정을 거칠 것이니 한 번만 봐주시지요.”
“물론입니다. 허면, 그 부분은 아니었던 것으로 참작하고…….”
율법당주의 눈이 빠르게 굴러가는 게 보였다. 율법당주는 현건을 손짓해 불러 뭐라 속닥거리더니 이내 판결을 결정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허면 무당의로서 품격을 실추한 사항에 대해서만 처벌을 내리겠습니다. 여러 가지 사안을 감안하여…… 곤장 서른 대로 하지요.”
곤장 백 대가 곤장 서른 대가 됐다.
여전히 강한 처벌이긴 하지만, 솔직히 나도 장 의원이 그간 돈을 벌기 위해 자행했던 짓들을 탐탁잖게 생각하는 건 사실이니까.
전생에서 학창시절 소풍으로 민속촌에 갔을 때 몇 번 드러누워 기념사진을 찍기도 했던 십자모양의 곤장대가 나오고, 어린아이 키만 한 몽둥이를 든 이들이 양쪽에 나란히 섰다.
사극에서는 보통 엄청난 장정들이 하던데?
[무당의 제자들이네요. 저 정도 몇백 번 휘두르는 건 일도 아닐걸요.]
홍령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몽둥이가 곤장대에 묶인 장 의원의 볼기를 사정없이 내려치기 시작했다.
……퍽!
……퍽!
……퍽!
어우, 저거. 아프겠다 수준으로 끝날 일이 아니잖아.
어린아이 키만 한 길이는 둘째 치고, 너비가 한 뼘은 되어 보이는 몽둥이다.
말이 몽둥이지 사실 두툼한 나무판자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저걸 무공을 익힌 무인들이 내려친다니……
윽! 살점 튀었어.
저러다 죽는 거 아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