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당신 셋째 형님이 저렇게 가냘프게 생겼어요?]
내가 손님이 기다리는 방에 들어가기도 전에 귀신의 시야로 먼저 안에 있는 사람을 확인한 홍령의 말이었다.
가냘프다고?
셋째 형 금감양이랑 그렇게 안 어울리는 말을 찾기도 힘들 거다.
어릴 때부터 무공을 단련한 탓인지 키가 팔척 장신에 뼈대가 굵어 절로 두툼하다는 생각이 드는 인상.
삼국지로 치면 딱 장비 같은 이미지라 한번 보면 잊기 힘든 타입인데.
[하긴, 표국의 국주가 저렇게 생겼을 리는 없죠. 딱 봐도 돈 세는 거 잘하게 생겼는걸요.]
문을 열자 홍령이 묘사한 그대로의 인물이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고개를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도련님. 금왕전장 양양지부장으로서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금왕전장이라.
무당파의 근거지이자 호북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이니 금왕전장이 이곳에 지점을 낸 것은 이상하지 않다.
“누님이 보냈어요? 아무리 소식이 빨라도 벌써 거기까지 얘기가 닿나?”
“장주께는 어제 기별을 넣었습니다. 아직 이곳에 계신 걸 모르실 겁니다.”
그러면 누님 때문에 날 찾은 건 아니란 건데. 그럼 왜 왔지?
“그게 말입니다, 실은…….”
“실은?”
“휴, 그러니까, 그게…….”
지부장은 말을 꺼내놓고도 한참 동안 한숨만 푹푹 쉬면서 제대로 얘길 꺼내지 못했다.
“인사하러 와주신 건 고맙지만 지금 제가 좀 바빠서요. 얼마나 꺼내기 힘든 말인진 모르겠지만 오래 기다려드릴 수가 없거든요.”
“앗! 죄, 죄송합니다! 실은 도련님 이름으로 돈을 빌려간 사람이 있어서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내 이름으로?”
“예. 장 의원이라고, 지금은 도련님 밑에서 일한다지요? 꽤 거금을 타갔습니다. 휴우, 그때도 제가 안 된다고 몇 번을 거절을 했는데…….”
장 의원이 내 이름을 대고 금왕전장에서 돈을 빌려갔다고?
[그 인간이 진짜! 내가 그랬잖아요! 나쁜 마음을 먹고 도망간 거라니까요?]
홍령이 길길이 날뛰었지만 나는 당장 화가 나질 않았다.
일단 화가 나기엔 앞뒤 정황이 뭔가 이상했다.
“왜 빌려줬는데요?”
“예?”
“금왕전장이 어떤 곳인지 내가 모를 리 없잖아요. 내 밑에서 일한다는 말 한 마디로 돈을 빌려줄 만한 곳은 아니죠. 왜 빌려줬습니까?”
“그걸 갖고 있었습니다. 도련님이 지금 허리에 차고 계신 단도 말입니다.”
[태양보도! 태청의문에 가기 전에 여길 먼저 들렀나 봐요!]
이걸 내밀었다면 어쩔 수 없지.
태양보도는 내 것 외에도 누님과 형님들에게 각각 비슷한 물건이 있다.
아버지 금왕이 자식들을 위해 공들여 만든 것이고 그 자체로 금가장의 일원을 상징하는 물건.
금왕전장 지부장쯤 되면 누님의 것을 몇 번은 보았을 테니 장 의원이 들고 온 태양보도가 진짜인 걸 알아봤으리라.
“그래서 도련님의 대리인인 줄 알고 돈을 빌려주었는데, 돌아가는 사정이 영 수상해서 말입니다.”
음, 이건 지부장을 탓하기도 영 그렇긴 하다.
진짜 내 대리인이 태양보도를 들고 와서 내 이름으로 돈을 빌려 달랬는데 돈을 내주지 않았다?
그러면 그건 그거대로 누님이 경을 칠 일이었을 테니.
직장인의 애환에 눈물이 난다, 눈물이 나.
“수상하다면, 어떻게요?”
“우선 장 의원이 태청의문으로 돌아간 후 무당에서 도련님을 찾는 자들이 떠났지요. 그때부터 뭔가 좀 수상쩍다 싶었는데 장 의원이 재차 돈을 빌리려 하지 뭡니까?”
“돈을 또 빌렸다고요?”
“그때는 태양보도도 보이지 않기에 내어주지 않았습니다. 그 이전에도 빌려간 돈이 워낙 많아야지요. 도련님의 대리인이 아니라면 필시 훔쳤거나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싶어 살펴보던 도중 도련님이 양양에 오셨고―”
나도 양양에 와선 곧바로 청운진인을 대면하고 그의 제안이며 이런저런 방법들을 생각하다가 장 의원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장 의원을 찾으려던 원래 목적인 태양보도가 손에 들어왔기 때문이기도 했고.
“그러면 얼마나 빌려갔어요? 내 이름 대고 빌려간 거랑, 지금까지 총 빌린 금액이?”
“그, 절대 장주께 말하지 않으신다면…….”
오우, 생각 이상으로 많이 빌렸나 본데?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지부장이 몸을 가까이 붙이고 금액을 속닥거렸다.
[……!]
와우.
와.
……그렇게나 많이 빌려갔다고?
납득이 안 가는 일이 생기면 화가 나는 사람이 있고 어처구니가 없어서 그냥 허탈하게 웃음만 흘리는 사람이 있다.
“거참. 허.”
그중 나는 후자였다.
“그래서, 그걸 내가 갚아야 하는 건가요?”
“절대 아닙니다! 도련님이 진짜 대리인으로 맡기신 게 아닌 이상 그럴 리가 있나요.”
“금액도 금액인데, 그럼 그 전엔 태양보도 없이도 그 금액을 빌려줬다는 거잖아요? 그건 또 왜 그랬어요? 아, 누님한테 얘기 안 할 테니까 얘기해보세요.”
사람이 말이 안 되는 일을 하게 되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학연, 지연, 혈연. 뭐 그 외에 사랑이라든지 동정심이라든지. 이성으로는 말이 안 되는 일을 감정은 아무렇지 않게 해치워버린다.
……설마 사랑은 아니겠지?!
“장 의원에 대해 얼마나 알고 계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 집안이 장 의원대에 들어서서 좀 쇠락하였지만 그 전대, 전전대까지만 해도 이 일대에서는 알아주는 명의였습니다. 부모님과 조부님이 덕분에 몇 번이나 목숨을 구하셨지요.”
[일단 사랑은 아니네요. 그래도 의외예요. 그 돌팔이가 꽤 뼈대 있는 의원 가문이었나 봐요.]
“도련님께서도 의술을 익히셨으니 장중경이라는 이름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장 의원은 그 장중경의 후손입니다.”
[장! 중! 경!]
뭐야, 그게 누군데?
[당신, 장중경을 몰라요? 말도 안 돼! 우리 선조이신 화타는 알고 있었잖아요?!]
그야 화타는 화타잖아.
중국사나 삼국지를 모르는 사람도 화타 정도는 알고 있을 걸?
홍령이 이렇게 말하는 거나 장 의원의 조상이라는 걸 보니 대단한 의원이긴 한가 본데.
[선조와 함께 건안 삼신의로 불리는 분이에요. 상한론이라는 의서를 집필하셨구요. 상한론이 얼마나 대단한 저서냐면, 후, 이렇게 설명하면 끝도 없는데. 아무튼 여러 분야의 의술 중 특히 제약에 명성이 높은 분이었죠.]
장 의원도 약재를 다루는 솜씨가 좋았지.
대단한 약을 만들기보다는 적은 양의 약재에서 최대한 약효를 뽑아내 탕약의 양을 늘린다든가 보통 처방하는 비싼 약 대신 저렴한 약재로 원가를 낮춘다든지 하는 꼼수긴 했지만.
그것도 다 약재와 제약에 대한 지식이 풍부하니까 그런 응용이 가능한 거다.
“누님에게 들키면 뭐라고 할 생각이었어요? 누님이 그런 사정을 이해 못 할 만큼 차가운 사람도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용납할 일은 아닌데.”
“그 사람이 돈을 빌려댄 건 대대로 이어진 의원을 유지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필시 장중경의 비전을 가지고 있을 테니, 정 돈을 갚지 못한다면 그 비전을 받아도 밑지는 일이 아니라 하려 했습니다만.”
“그것마저 불가능할 상황이 왔다?”
대화 참 길게도 돌아왔다. 여기부터가 핵심이다.
“네. 이대로 내버려두면 장 의원은 목숨을 잃을 겁니다.”
뭐라고?
* * *
태청의원 율법당.
율법당이란 문자 그대로 규율을 정하고 이를 지키지 않을 경우 규제를 가하는 곳이다.
보통의 의원이라면 율법당 같은 것이 존재할 리 없다.
자체 사법기구를 둘 정도의 규모를 갖추는 것도 일일뿐더러, 정도를 넘어서는 규제를 사적으로 가하는 것은 관에서 엄중히 금하기 때문이다.
사이비 의술을 행하다가 사람을 여럿 상하게 했다든지, 청부를 받아 고의로 죽음에 이르게 했다든지, 의료행위에서 사기를 쳤다든지.
그런 일들은 보통 관에 신고되어 심판을 받는다.
보통 사람들은 그런 범죄자들을 추적하거나 강제로 처벌을 집행할 능력이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태청의문의 율법당은 그 존재 자체로 태청의문이 보통 의원이 아니며, 무당파에 근간을 두고 있다는 증거인 동시에, 사람들이 무당의를 신뢰하는 이유다.
무당의의 본분을 행하지 않는다면 태청의문의, 정확히는 무당파에서 파견된 율법당의 무인들이 중원대륙 끝까지 쫓아가 칼을 들이밀 테니까.
그리고 그 무당의 벼려진 칼날은 지금 장 의원의 목 앞에 드리워져 있었다.
“죄인 장 씨는 들으시오. 죄인은 사치스러운 생활을 위해 환자에게 터무니없는 치료비를 요구하고 가짜 약을 처방하였으며, 그것으로도 모자라 본문에 상당한 빚을 지고 빚을 갚기 위해서 정당한 자격을 취하지 않고 환자의 팔을 붙이는 수술을 하려다 실패하였다. 상기 사항에 이의가 있습니까?”
“나, 나는 억울하네! 그건 전부 사실이 아닐세!”
장 의원은 목이 쉬어라 외쳤다.
물론 방금 고지한 내용 중 일부는 사실이긴 했지만!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며 증거도 증인도 넘치긴 하지만!
‘사치라니! 내 무당의가 된 이후로 사치를 부릴 여력도 없이 있는 대로 쪽쪽 빨아 먹혔건만!’
적어도 그 부분만큼은 결단코 아니라고 장담할 수 있었다. 그가 가짜 약을 처방하거나 비싼 치료비를 뜯어낸 이유는 또 무엇이던가?
전부 무당파, 태청의문이 그에게 과도한 돈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솔직히 장 의원에게 요구되는 금액은 다른 무당의들과 비교해도 배는 비쌌다.
몇 번 항의를 해본 적도 있지만 태청의문에서는 장 의원의 나이가 많고 그 의술의 배경이 태청의문의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이유로 들어 매번 항의를 묵살했다.
나이가 많아 과실을 할 위험이 높고, 태청의문의 방식이 아닌 의술을 펼쳐 잘못되었을 경우 무당의의 신용이 깎이는 것을 감안한 금액이라는 것이다.
뒤늦게 후회하고 무당의 자격을 포기할까도 했지만 후폭풍으로 의업을 아예 접었다는 이들의 말에 그조차도 하지 못하고 옴짝달싹 못 하는 신세가 되었다.
어떻게든 가업의 명맥을 이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근근이 버티고 있었는데, 일이 이런 식으로 돌아갈 줄이야!
“청운진인을 뵙게 해주게! 그분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시네! 그 수술은 내가 한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이 한 것이야! 나는 억울하네!”
“그 부분 또한 거짓임을 진인께서 직접 짚어주셨습니다. 증거까지 접수되었으니 그만하십시오.”
“즈, 증거라면……!”
장 의원의 눈이 흔들렸다. 율법당에서 내민 증거란 건 다른 것이 아니었다.
바로 금태양이 좌수검을 수술할 때 사용했던 피 묻은 천과 붕대, 바늘과 실. 즉 수술에 사용된 물건들이었다. 이중 태양보도가 빠졌지만 장 의원은 그 물건을 알아보았다.
바로 장 의원이 청운진인에게, 금태양이 직접 수술을 한 증거라며 갖다 바친 것들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