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만약에 그랬다면 그쪽은 어땠을 거 같아요? 죽게 내버려두는 건 좀 그렇다 치고, 엄청난 수술비를 내세워 노비처럼 부려먹었다면?”
“기분 드럽겠지. 처음에는 분노해서 펄펄 뛰겠지만, 죽던 걸 살려줬으니 약간 고마운 마음도 들었겠지. 겉으로는 샐샐대면서도 뒤로는 튀거나 뒤통수를 칠 생각을 했을 거야.”
“맞아요. 그렇게들 생각하죠. 오래 지내다 보면 미운 정이 들기도 하지만 미운 정은 어디까지나 미운 정일 뿐.”
부당함을 강요할 힘이 사라지고 약자의 입장이 되면 그들은 제일 잔혹해진다.
미운 정도 정 아니냐고?
약자에게 그런 정을 논할 수 있는 사람은 그런 식으로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서 그 자리에 붙어 있지 않는다.
끼리끼리 논다고, 결국 그런 놈 밑에 그런 놈이 기회를 엿보며 붙어 있을 뿐이니까.
전생에 그걸 뼈저리게 느끼고 죽었지.
……입이 쓰다.
“굳이 위험을 감수하면서 남을 적으로 둘 필요 있나요. 크게 부담이 안 된다면 은혜를 입혀놓는 게 낫지. 웬만큼 금수 같은 사람도 은혜를 함부로 저버리지는 못하거든요.”
“순진하구만.”
“부잣집 도련님이잖아요. 아니면 그런 순진한 계산보단 제가 정이 많아서요, 그렇게 말하는 쪽이 마음 편하세요?”
왕 씨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잠시 생각을 하는 듯하더니……
자신의 품에서 웬 종이 뭉치를 떡하니 꺼내 내 앞에 내려놓았다.
“금왕전장의 전표일세. 활명탕을 판 값이지. 자넬 주겠네.”
“주신다고요?”
전표는 진짜였다. 다른 전장의 전표는 몰라도 금왕전장의 전표는 진짜와 가짜를 구분할 수 있다. 거기 놀러 가서 할 만한 일이라곤 전표와 돈을 가지고 노는 일밖에 없었으니까.
“뭘 그렇게 보나? 예상보다 많이 팔았으니 주는 거네. 이번 제조할 때 보태 쓰시게.”
“……설마 이게 전부는 아니죠?”
“이, 이 사람이! 아까는 도덕군자처럼 굴더니 지금은 양아치처럼 구나! 나도 품삯은 챙겨야 할 거 아닌가! 입소문 내준 친구들한테 한 턱 낼 것도 있어야 하네!”
“찔려 하시긴. 다 주지는 마시라고 얘기한 건데요. 벌 만큼은 벌어야죠.”
분위기로 은근하게 압박을 가했지만 번 돈을 다 내놓으라고 하면 그 또한 내가 왕 씨한테 사기를 치는 셈이 되겠지.
“활명탕이 가능성이 있다는 걸 확인했으니 전보다 더 대량으로 생산할 거예요. 모르긴 몰라도 가격을 더 낮춰 팔 수도 있어요.”
“그래도 괜찮네. 자네는 제조에만 전념하게나. 판매는 내 알아서 하지.”
나는 빙긋 웃었다.
가능성 있는 사업을 관두고 싶지 않았던 거든, 내 말에 감명을 받았든 그건 상관없다.
중요한 건 자기 스스로 내 방식을 납득한 사업 파트너가 생겼다는 거다.
“손은 왜? 악수?”
“앞으로도 잘 부탁드린다고요. 앞으로 바빠지실 거예요. 돌아가서 친구분들께 한 턱 쏘세요.”
나는 받은 전표 중 한 장을 다시 왕 씨의 손에 쥐여 주었다.
줬다 뺏은 돈, 아니지, 이 경우에는 줬다 돌려받은 돈이라 그런지 표정은 영 찜찜했지만.
왕 씨도 떠나고 신생도 곽 표두를 돕겠다며 나갔다.
[……그렇게 돈을 벌어서, 무당에 안겨 주려구요?]
눈앞에 다른 일들이 있는데 활명탕에 집중한 이유.
그건 지금 내가 처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돈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돈을 주고 무당에 대리수술을 맡겨 수술의 자격을 따거나 그게 아니라면―
“돈을 투자해서, 내가 삼백 건의 수술을 할 여력을 만들 거야.”
결국, 돈은 수단이다.
넉넉한 돈은,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피하고 하고 싶은 일에 매진할 수 있게 만드는 마법을 부린다.
“그러니까 일단 돈을 벌어보자고.”
* * *
곽 표두가 구해온 자리는 옛날 의원으로 쓰이던 작은 장원이었다.
듣자하니 태청의문으로 향하는 대로에서 약간 떨어져 있는 바람에 장사가 잘 안 됐다나.
아무리 목 좋은 곳이라도 비슷한 업종이 몰려 있으면 실력이 있어도 망하기 십상이니까.
“비켜요, 비켜!”
“가마솥은 거기 내려놓고! 이봐, 약재는 창고에 쌓도록 해!”
“밀랍은 아직이야?”
이미 한 번 활명탕을 만들어 본 경험이 있는 표사들은 시키지 않아도 준비를 척척 마쳤다.
표사들이 활명탕의 밑준비를 하느라 분주한 사이 나는 다른 표사 몇 명을 데리고 방 정돈을 했다. 원래도 의원으로 쓰이던 곳이라 진료와 입원의 공간이 나눠져 있는 건 편했지만, 이번에는 본격적으로 수술을 할 공간도 필요했다.
적당한 높이의 수술대를 놓고 방 전체를 고루 비치게 야명주를 매달았다.
양양으로 오면서도 간단하게 실험을 해봤는데, 야명주와 함께 보관한 생고기는 다른 고기가 상하거나 썩을 동안에도 멀쩡히 보존되었다.
이 정도면 멸균에 대한 효과는 어느 정도 검증됐다고 볼 수 있다.
장기간 쬐면 위험할 수 있겠지만, 수술을 할 때 멸균과 감염방지의 이득이 더 크니 그 정도는 감수할 수 있다.
“의원님, 수술도구요! 견본을 가져 왔어요!”
“벌써?”
곽 표두에게 부탁했던 것 중에는 이 수술 도구도 있었다.
청운 진인의 말처럼 허가된 이들에게는 수술이 가능하다면, 이곳은 아마 호북 일대에서 수술의가 가장 많은 동네일 것이다.
그렇다면 수술 도구를 가장 잘 만드는 장인도 이곳에 있을 터.
원래는 태청의문의 의뢰만 받는다던 장인은 금왕표국이라는 이름에 고민을 해보더니 이내 수술도구를 제작을 승낙했다.
운이 좋다면 금가장의 이름을 달고 중원 전역으로 팔려나갈 수도 있을 테니까.
어디 그만큼 품질이 되는지 볼까?
신생이 품에 안고 온 꾸러미를 풀었다. 그 안에는 각양각종의 단검과 가위, 겸자와 집게, 막대기 등, 의학드라마에서 봤던 것 같은 특이한 도구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이 정도면 괜찮아요. 쓸 만하겠어요.]
태양보도의 효과가 탁월하니 웬만한 날붙이가 필요한 일은 계속 태양보도를 쓰겠지만, 특수한 도구들은 수술 속도며 정확함에 도움이 될 거다.
“좋아. 이렇게 주문한 수량대로 만들어달라고 해.”
“네! 아, 곽 표두님이 의원님들 지원서류는 방에 갖다 두셨대요!”
[일이 넘치네요…… 대체 환자는 언제 볼 수 있어요? 환자 볼래요! 환자 보고 싶어요!]
간만에 의료행위가 아닌 일로 바쁘다 보니 귀신은 불만이 가득했다.
조금만 참으라고. 화산지회 예선이 시작되면 그 바라고 바라던 환자가 넘치게 될 테니까.
[하아…… 당신은 이런 일 지겹지도 않아요? 환자를 보면 보람이라도 있지.]
글쎄다.
환자를 치료하고 그 환자가 나으면 보람차기는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건 내 실력이 아니라 홍령의 실력이니까.
홍령이 느끼는 보람이나 즐거움과는 약간 거리가 있다.
반대로 이런, 장소를 마련하고 기자재를 준비하고 사람을 뽑는 등의 번잡한 일들.
보통 사람은 재미를 느끼기 어려울 수도 있지만 나는 이런 종류의 일이 즐겁다.
게임을 해도 어떤 사람은 강력한 보스를 화려한 컨트롤로 잡는 걸 즐거워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롤러코스터 타이쿤이나 주 타이쿤처럼 시뮬레이션 게임을 재밌어한다.
어떤 일을 즐긴다는 것은 곧 그 일을 잘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어디 보자. 지원서가 많기도 하네.”
이곳 양양의 임시 출장소에서 나를 도와줄 임시직에 지원한 서류들이다.
그 짧은 사이에 사람을 뽑는다는 소문이 꽤 퍼졌는지 서류가 내 키만큼 쌓여 있었다.
“신생. 서류를 자격을 딴 기준으로 정리해줘. 일 년 내외는 여기, 삼 년 내외는 여기, 그 이상은 여기. 수술 참가 경험이 있다고 기재한 서류는 따로 붉은인을 찍어놔.”
“어, 그럼 아직 수련의라고 되어 있는 사람은요?”
“그건 따로 빼놔. 이중에서 쓸 만한 사람이 없으면 그쪽도 보게.”
화산지회 예선까지 얼마 안 남았으니, 그 전에 서류를 걸러내고 면접을 보고 사람을 뽑아 손발을 맞춰봐야 한다.
신나는데?
[그게 신난다고요? 말도 안 돼!]
홍령이 기겁을 하거나 말거나 서둘러 서류를 정리하고 훑어보기 시작했다.
“역시 내 예상이 맞았어.”
이렇게 산더미 같은 서류 중, 수술 참가 경력이 있는 의원이 절반이나 된다.
개중에는 수술을 삼백 건도 넘게 들어간 사람도 열 명이 넘는다.
하지만 수술의 자격을 땄다고 기재한 사람은 하나도 없다.
“점혈이야. 점혈을 할 수 없으니 수술 실력은 뛰어나도 수술의 자격은 딸 수가 없는 거지. 그런 사람이 이 양양 바닥에 한가득이야.”
수술은 기술이다.
철이나 흙을 다루는 기술에 비하면 살아있는 인체를 다루는 기술이니 당연히 더 복잡하고 섬세하지만, 어느 정도 재능이 있고 교육을 받고 수없이 많은 반복을 거친다면 숙련을 올릴 수 있다.
그렇다면 점혈은?
[검이나 도 등 무기기술에 비해 폄하되는 경향이 있지만 단순히 잡기로 치기에는 엄청난 재주죠. 내가기공을 익히기에 적합한 체질이어야 하고, 체질에 맞는 적당한 내가기공을 부단히 수련해 체내에 기를 쌓아야 하고, 손끝으로 기를 발출해 타인의 경혈을 짚을 수 있어야 하니까요. 아, 경혈에 대한 이해도 기본이고요.]
부단한 연습도 중요하지.
점혈 잘못했다가 사람 죽일 수도 있다고.
[그래요, 당신 연습 열심히 했죠. 알아요.]
꼭 그걸 알아달라는 건 아니고, 아무튼.
수술에 비해 익히기가 더욱 까다로운 것이 바로 점혈이라는 거다.
게다가 내가기공은 어릴 때부터 익혀야 효과가 좋다는 말도 있고.
[의원들은 수술뿐 아니라 다른 의학도 익혀야 하잖아요. 수술은 하나의 방편일 뿐이에요. 진맥부터 체질, 침놓는 법, 훈증하는 법, 뜸뜨는 법, 부항에 약 달이기까지. 얼마나 배울 게 많은데요. 그런 의원들이 점혈까지 익히는 건 솔직히 무리죠.]
그게 가능한 사람들은 손에 꼽을 거다.
정확히는 원래 의원을 하려던 게 아니라, 무당에서 무공을 수련하다가 검으로 대성할 수 없어 의원으로 진로를 튼 이들이나 가능할까?
어릴 때부터 무공을 수련했으니 점혈을 할 정도의 실력은 있을 거고 의술 명문인 무당에서 의술을 전수받으면 수술의가 되는 두 가지 조건을 다 채울 수 있겠지.
그러니까 수술이 평범한 의원들에게는 금기나 다름없다고 알려진 것이다.
[그러면, 여기 수술을 삼백 건 한 사람들은 뭐예요?]
기대를 접지 못하고 무공수련을 하면서 수술도 꾸준히 해온 사람들이겠지.
아마 이런 사람들이 차고 넘칠걸.
그러니까 청운 진인이 나한테 수술 삼백 건을 대리해주겠다는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대리수술 제안을 승낙했으면 그런 사람들이 나를 대신해서 뼈 빠져라 수술을 하고, 청운 진인의 호주머니를 거쳤다 떨어지는 콩고물을 받아서 다시 무공수련에 돈을 쓰고.
어지간히 재능이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무공을 공짜로 지도, 전수하는 곳은 없으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