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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의원-44화 (44/350)

44화

“그런데 태청의문은 얼마나 더 가야 해요?”

“이미 태청의문입니다.”

우리가 무슨 문 같은 걸 지나왔던가?

양양 성내에 들어온 이후 우리는 큰 대로를 따라 걸어왔을 뿐이었다.

그런데 벌써 태청의문에 도착했다니?

[옆을 봐요. 전부 의원이에요.]

홍령의 말마따나 대로 옆으로는 온통 의원이었다.

천하의원, 태평의원, 안심약방 등 온갖 의약당들이 무당의 깃발을 걸어놓았고 그 앞으로는 환자들이 줄을 지어 서 있었다.

“많은 환자들이 태청의문에서 직접 치료를 받고 싶어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어렵지요. 때문에 태청의문에서 수학한 제자들이 주변에 의원을 차리고 환자를 받고 있습니다.”

일종의 낙수효과 같은 건가?

그보다는 음식점 하나 유명해지면 비슷한 음식을 파는 가게들이 주변에 잔뜩 생겨서 짬뽕골목이나 막국수촌 같은 게 만들어지는 거랑 비슷할지도.

“그리고 여기가 진짜 태청의문입니다.”

수많은 의원이 줄지어 서 있는 대로의 끝.

금으로 된 현판이 걸린 장원의 대문에는 머리에 영웅건을 두른 무인들이 번을 서고 있었다.

“진인이 기다리시던 손님이시네.”

“금태양 의원님이십니까? 안에 기별하겠습니다. 들어가 기다리시지요.”

내가 오는 걸 기다렸는지 번을 서던 무인이 서둘러 안으로 소식을 전하러 갔고, 나는 장원 내의 정자로 안내되었다. 신생은 태청의문 문주와의 자리가 불편했는지 다른 곳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돈 냄새 나요.]

그런가?

확실히 그렇긴 하네.

빠르게 내어 온 다과도 차도 고급이었고, 정자도 여기저기 금이며 자개로 장식되어 있었다.

생각해보면 대문의 현판도 금으로 만들었지.

뭣보다 이 정자가 위치한 곳에서 돈 냄새가 솔솔 났다.

전생의 석촌 호수만 한 연못이 있고 거기에 정자가 있는데, 아무리 봐도 연못이 있을 만한 터가 아니란 말이지.

의외로 땅을 파는 공사는 땅 위에 뭘 올리는 공사보다 더 비싸게 먹히는 편이다.

거기에 물까지 채운다면 가격은 천정부지로 뛰어오를 터.

전생에 본부장 놈 별장 공사에 불려가서 수영장 단가 협상을 했던 안 좋은 추억이 떠오른다…….

[하여간 마음에 안 들어요. 의원에 대체 이런 호화로운 공간이 왜 필요하냐고요.]

환자들의 힐링을 위해서 필요할 수도 있지.

실질적인 치료만큼이나 마음의 안정도 중요하니까.

물론 좀 과하게 화려하긴 하지만……

유독 기분이 안 좋아 보인다?

[몰라요. 이 동네 들어오면서부터 기분이 영 안 좋았어요. 도가문파의 영역이라 그런가 봐요.]

아, 그런가?

나도 잘은 모르지만, 역시 도가문파 하면 귀신하고 궁합이 좋지 않을 법도 하지.

귀신 쫓는 부적 같은 것도 다 절이나 도문에서 만들지 않던가.

[이 정자에도 몇 개나 붙어 있어요. 세상에, 경면주사 대신 금으로 부적을 썼잖아?]

덕지덕지 붙은 돈 냄새 나는 부적에 귀신이 기겁을 하는 사이 누군가 계단을 올라왔다.

“무량수불. 객을 기다리게 하여 미안하네. 태청의문을 맡고 있는 무당의 청운이라 한다네.”

“아닙니다. 금태양입니다.”

쉰 살쯤 되었을까? 도포자락을 걸친 한창 때의 장년인은 무당의 도인답게 허허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사람 좋아 보이네.

[……미친, 미친. 너 이 새끼 잘 만났다!]

응?!

갑자기 내 손에 빙의한 홍령이 청운 진인의 목을 향해 출수했다.

뭐야! 무슨 짓이야!

다급하게 손에 힘을 주어 홍령을 거부했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처음 만나는, 그것도 무당 도인의 멱살을 잡을 뻔했다.

“무슨 불편한 곳이라도 있소이까?”

“아, 아닙니다.”

눈치 못 챘겠지?

눈치를 못 챈 건지 아니면 모른 척하는 건지 청운 진인은 내게 자리를 권하며 차를 따랐다.

“드셔보시구려. 금가장의 차만큼 귀한 것은 아니지만 무당산 천주봉에서 딴 잎으로 우린 차라오.”

“예, 네. 제가 지금 목이 안 말라서요. 하. 하. 하.”

차를 마신다고?

꿈도 꿀 수 없었다.

지금 손깍지를 풀었다간 홍령이 청운 진인의 머리채라도 잡아버릴 것 같으니까.

한 번도 이런 적 없었는데. 대체 왜 그래?

[내가, 내가 그랬잖아요! 복수할 상대가 있다고!]

그랬다.

장 의원을 상대하며 태청독을 복용했을 때.

복수할 대상이 있고 이를 위해선 내가 필요하니까 날 절대 죽게 하지 않을 거라고.

그런데 그 복수의 대상이……

이 사람 좋아 보이는 무당파 도인이라고?

[맞아요! 그러니까 이거 놔 봐요! 내가 저 호랑말코를 죽여야 성이 차겠다고요!]

제발 좀 진정해! 그게 가능할 리가 없잖아!

태청의문의 문주 자리를 맡고 있으니 의원이겠지만, 동시에 청운이라는 도호를 갖고 있다.

그건 눈앞의 도사가 무당의 제자임을 뜻한다.

허리춤에도 검을 차고 있지 않은가?

무림에 대해 잘 모르는 나지만, 구파일방 중 검으로 무당이 제일이라고 했다.

그런 무당파의 무인한테 덤빈다고?

복수도 좋지만, 그것도 상대를 이길 수 있을 때나 하는 거지!

[하지만, 하지만…….]

침착해. 일단 복수의 대상이 누군지 깨닫긴 했잖아.

그 전까지 홍령은 강렬한 복수심은 떠올릴 수 있지만 그 상대가 정확히 누군지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 대상이 누구인지 안다면 복수를 위한 계획도 세울 수 있다.

[그건, 그렇지만! 흐윽, 끅…….]

아니, 울지 마.

홍령이 울 정도로 분한 대상이라니.

대체 생전에 청운 진인과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어지간히 지독한 일인가 싶다.

[……알았어요. 지금은 당신을 봐서 참겠어요.]

그래. 이 보 전진을 위한 일 보 후퇴라고 생각하라고.

내가 얘기하는 동안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떠올리려고 노력해봐.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불구대천의 원수인데 뺨 한 대 때리고 끝나면 안 되잖아.

물론 반대의 경우도 안 되지만.

“으음, 무당의 중 하나와 시비가 붙었단 얘기는 알고 있다네. 태청독 같은 위험한 것을 쓰지는 않았으니 안심하고 이 빈도의 차를 즐겨주시게나.”

“그런 생각을 하던 건 아니었어요. 정말 목이 안 말랐던 것뿐이지만 진인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들겠습니다.”

홍령의 분노가 겨우 잠잠해진 다음에야 나는 진인이 권한 차를 마실 수 있었다.

뭐야, 고급이 아니라더니. 완전 뻥이잖아?

“맛이 좋네요.”

“하하. 귀인께 상찬을 들으니 면구하네. 천주봉은 무당산에서도 제일 높이가 높은 곳이라 찻잎으로 쓸 만한 것은 얼마 나지 않는다네.”

아주 대놓고 비싼 거라고 말하네.

명산 중의 명산이라고 말하는 무당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에서 나는 차를 내놓고 별 것 아니라니.

“귀한 대접을 받았으니 저도 그만큼 돌려드려야 하는데. 제가 예상치 못하게 와서 진인께 드릴 선물이 없네요.”

“선물이라니. 이리 귀인과 인연이 되었으니 그것으로 충분하네. 아니지, 장 의원의 고발로 엉뚱하게 고초를 겪을 뻔 하지 않았나? 그걸 생각하면 사죄를 해도 모자라지 않나.”

“그 건은 어떻게 된 거죠? 무패도는요?”

“장 의원이 자네의 수술 증거를 가져와 제출했다네. 허나 미심쩍은 부분이 있어 도우에게 얘기를 들어보고자 했지. 그 오해는 이미 풀렸으니 걱정 마시게. 무패도도 우리가 잘 잡아두었다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아닐세. 사실, 자네도 알다시피 선친께서 살아계실 때는 무한과 양양이 썩 가깝지 않았잖나.”

아하, 역시 이거군.

이유는 모르겠지만 금가장과 무당파는 썩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다.

지리적 거리로 보면 가장 가까운 대문파니까 인연이 깊을 만도 한데.

사업적인 거래는 하는 것 같았지만 무당의 편의를 크게 봐주는 것도 아닌 것 같았고.

뭣보다 결정적으로, 우리 형제 중에서 무재(武才)가 가장 뛰어난 둘째 형님이 무당이 아니라 소림으로 출가했다.

내가 어릴 때 출가해서 집에는 자주 오지 않았기 때문에 아는 건 많이 없지만, 손꼽히는 후기지수를 넘어 지금은 무승(武僧)이라는 별호를 얻었단 얘길 들었는데.

별호가 심플할수록 강하다고 했으니 지금의 둘째 형님은 엄청나게 강한 거겠지.

그런 기재를 가까운 무당이 아니라 소림으로 보냈으니, 모르긴 몰라도 아버지가 무당파를 별로 안 좋아하신 건 알겠다.

“금왕께서 그렇게 가신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장문인도 그렇고 태청의문을 맡고 있는 내 입장에서도 앞으로는 금가장과 우리가 더욱 가까워지길 바라고 있다네.”

설마 모르나? 내가 큰 형님 눈 밖에 났다는 걸?

구파일방 같은 대문파는 정보에도 빠르다고 했는데.

“그대와 금가장주의 사이가 돈독치 못하다는 건 알고 있네.”

그래, 알고 있겠지.

그런데 왜 이렇게 나한테 호의적이냔 말이야.

“허나 겉으로 보이는 것이 어찌 다던가? 형제의 피는 물보다 진한 법. 언제 금가장이 다시 결속할지는 모르는 법이지.”

앞으로의 가능성을 보고 투자하겠다는 얘긴가.

도사와 투자라.

안 어울리는 단어의 조합이긴 하지만 금박을 덕지덕지 바른 정자와 돈이 흐르는 거 같은 연못을 보면 아주 안 어울리는 건 아닌 거 같고.

“앞으로도 이렇게 자주 보도록 하세나. 그대가 의원을 차린 곳이 여기서 멀지 않다지? 이름이 태양의원이라 했나? 좋은 이름이군.”

“안 그래도 그 때문에 왔습니다. 제가 의맹의 자격이 없어서 의술을 펼치면 안 된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더라고요.”

태청의문과 무당이 나와 잘 지내보려고 한다면 이 문제는 생각보다 쉽게 해결될 수도 있겠다.

“그건 틀린 말이네. 우리가 관부도 아닌데 우리에게 자격을 증명하지 못했다고 해서 의업을 하지 못하게 한다는 건 말이 안 되지. 허허.”

“하지만 자격을 따지 못한 의원들에게는 주기적으로 무당파가 찾아온다고 하더라고요.”

이건 한 의원에게 들었던 얘기다.

다른 스승을 모시거나 가업으로 의술을 전수받아서 의맹에 가입할 필요성을 못 느끼던 의원들도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무당의 제자들 때문에 결국 자격을 따야 했다고.

“그냥 찾아와 어슬렁거리는 정도라면 모르겠지만, 환자로 찾아와선 치료를 잘못했다며 칼부림까지 한다던데요?”

“허허. 무당의 제자들 여럿이 무림행을 하며 검과 도를 수련하고 있지. 그 과정에서 다치거나 아프면 의원을 방문하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닌가? 허나 그들은 이곳 태청의문의 의술에 익숙해져 있으니 그들의 의술이 성에 안 찰 수는 있지.”

“하지만 그렇다고 검을 뽑는 건 명문대파가 아니라 저기 시정잡배나 다름없는 일이 아닌지―.”

순간 청운 진인의 기세가 돌변했다.

맑고 고요하지만 무표정한 시선은 나를 꿰뚫어버리고, 뾰족한 기세가 나를 당장이라도 고슴도치처럼 넝마로 만들어 버릴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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