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그래요, 나예요! 세상에, 귀기를 회복하려면 한참 더 걸릴 줄 알았는데. 덕분에 살았어요. 잠깐만 기다려요!]
홍령이 팔에 빙의한 후부터는 일사천리였다.
그녀는 내 품의 비상약 중 적절한 것을 골라 복용시키고, 온갖 혈에 침을 놓은 후 다시 운기조식을 시켰다.
[당신이 쓰러졌을 때 이 내가기공을 이용했어요. 그때는 그 눕공인지 뭔지로 도무지 효과를 보기 어려웠거든요.]
아, 그래서 내 몸의 기운이 절로 그 길을 따라간 건가?
내가 무공 고수였다면 억지로 기운의 방향을 틀었겠지만 그게 아니라서 다행히 잘 흘러간 모양이다.
[둘 다 도가계열이라 마찰이 없었던 것도 있고요.]
운공이 지속될수록 머리가 맑아지고 상쾌해짐과 동시에, 홍령의 목소리도 또렷해졌다.
운공을 할 때는 다른 생각을 하면 안 된다는데 그것도 어렵지가 않았다.
[상단전을 열어서 그래요. 운이 좋았죠.]
운이 좋았다니?
[원래는 하단전을 만들고, 중단전, 상단전으로 올라가는 게 정석이에요. 상단전부터 열면 보통은 미쳐버리죠.]
주화입마라는 게 그건가?
그렇게 위험한 걸 나한테 했다고?
[당신은 예외예요. 알잖아요. 당신은 귀문(鬼門)이 열려 있었다고요.]
몸이 나빠질 때마다 귀신의 소리가 들리던 것.
그 덕분에 홍령을 만나기도 했지만 영 꺼림칙한 일 중에 하나였다.
[말하자면 상단전이 반쯤 열려 있던 상태나 마찬가지였어요. 나는 그걸 제대로 열어놓은 거뿐이에요.]
남들은 잘못 열면 미쳐버린다는데 정작 그걸 먼저 열어버렸다니.
그러면 귀신들 목소리가 매일 들리고 그러는 거 아냐?
[그런 건 아니에요. 오히려 당신의 의지로 조절할 수 있죠. 수련은 필요하겠지만.]
그런 거라면 천만다행이다.
[천만다행 그 이상이죠! 이제 경혈에만 의존하는 위험한 수단은 안 써도 된다고요!]
뭐라고?
하긴, 단전을 만들지 못해서 경혈이라는 작은 웅덩이에 의존하던 것이니까.
그러면 나도 정말 무림인처럼―
[안 돼요. 이건 정말 안 돼요.]
쳇, 그럴 줄 알았다.
보나 마나 위험하다는 얘기겠지. 원래 상단전을 먼저 열면 주화입마에 걸린다고 하고.
[그것도 있지만 잘못하면 사파로 몰릴 수 있으니까요.]
응? 그건 또 뭐야?
[자세한 건 나중에 얘기하고, 일단 상단전을 열었다는 얘기는 누구에게도 비밀로 하도록 해요. 누가 오고 있어요.]
홍령의 인도에 따라 운기조식을 마무리한 후 눈을 뜨자, 내가 떨어졌던 천장의 구멍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금태양, 거기 있나?”
창천이다.
“어, 나 여기 있어.”
“지금 가지. 기다려라.”
녀석이 와줘서 다행이다. 아무리 컨디션을 회복했다고 해도 여길 기어오르는 건 엄두가 안 났거든.
창천은 바닥으로 훌쩍 뛰어내리고는, 이내 잔뜩 미간을 찌푸리곤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건?”
“어…… 그렇게 됐어.”
놈이 가리킨 것은 산산조각이 나 비산한 지네괴물의 시체였다.
맞아, 저 엄청난 놈을 내가 처리했지?
“그놈이 말하던 영물인가. 내단은…… 있어도 다 부서졌겠군. 내가중수법 말고 다른 방법을 쓰지 그랬나.”
내가중수법? 그게 뭐야?
[당신이 저 영물을 해치울 때 쓴 방법이요. 내공을 상대의 안에서 폭발시켜 타격을 입히는 수법이죠.]
아, 그거!
나무를 폭발시킬 때도 해봤고, 비적단 두목의 태도를 터트릴 때도 해봤다.
[말은 바로 하죠. 당신이 의도한 게 아니라 잘 안 돼서 그렇게 된 거잖아요.]
아니, 그게 맞는 말이긴 한데. 그래도 이번엔 의도한 거라고.
나무와 태도를 터트렸을 때 그 느낌을 떠올리려고 노력하면서, 내가 저놈을 처치했단 말이야.
[그래요, 잘했어요. 덕분에 살았으니.]
이것도 할 줄 안다는 걸 비밀에 부치는 게 좋으려나?
[비장의 한 수는 숨겨두면 좋죠. 하지만 원래는 외공을 익힌 무인을 상대할 때 쓰는 수법이에요. 웬만큼 단련한 고수에게는 통하지 않을걸요.]
그래도 충분하다. 내가 살면서 고수랑 싸울 일이 있겠어?
일반인을 상대로 위기의 순간에 한 수를 써먹을 정도면 충분하다.
“일단 올라가서…… 좀 씻도록 하지. 구역질이 난다.”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잘 알고 있거든?”
지네 영물의 살점과 체액으로 범벅이 된 상태라 내게선 지독한 냄새가 났다. 그게 아니더라도 이 끈적거리는 것들을 빨리 씻어내고 싶어 죽을 지경이었다.
“내가 떨어진 곳에 물이 고여 있더군. 그곳으로 가지.”
창천의 도움으로 위로 올라온 후 녀석이 발견했다는 웅덩이로 향했다.
내가 떨어진 곳은 이삼 층 높이 정도 됐는데, 여기는 기껏해야 한 층 깊이 정도밖에 안 되어 보였다.
“여긴 별로 안 무너졌네. 내가 여기 떨어지고 네가 아까 거기 떨어졌어야 하는데.”
“그랬으면 내단도 멀쩡했을 테니 일석이조겠군.”
조심스럽게 내려가자 정말 물 냄새가 났다.
[물 냄새가 맡아져요?]
어, 그런데? 그게 왜?
[그게 왜? 이 사람이 정말, 아무리 무림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그렇지. 당신처럼 방에만 틀어박혀 살던 사람이 물 냄새를 구분한다는 게 이상하지 않아요?]
그, 그런가?
[게다가 앞도 똑바로 잘 보고 걷고 있잖아요? 이렇게 어두운데!]
생각해보니 그랬다.
몸이 좋지 않다는 것은 오감에도 해당하는 일이라, 나는 전생에도 없던 야맹증이며 일시적 난청 등의 곤란을 겪곤 했다.
왜 앞이 보이지?
[상단전을 열어서 그런 거 같은데 나도 확신은 못 하겠네요. 상단전부터 여는 경우가 별로 없으니.]
보통은 내공수련을 하며 안력, 청력 등을 같이 단련하기에 상단전이 열렸다고 특별히 감각이 더 강화되고 하는 일은 없다는 것이다.
그즈음이면 이미 최고수의 반열에 올랐으니까.
그런데 나는 예외인 거고.
[뭐,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해요. 연구할 만한 현상이 생겼네요.]
나와 홍령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사이 창천이 걸음을 멈췄다.
“여기다. 이 정도 물이면 씻을 수 있겠지. 가서 갈아입을 옷을 가져오도록 하지.”
[창천, 계속 저렇게 순순했어요?]
좀 까칠한 거야 여전하지만 순순하다면 순순한 편이다.
비적들이 입힌 피해가 커진 데 자기 잘못이 있다는 걸 납득한 건지.
[흥, 보나 마나 치료 효과가 보여서 신이 나서 날뛰었을 테니까요. 창천 팔에 자잘한 상처 봤어요?]
아, 그 상처들.
녀석의 실력이면 놈들에게 웬만해선 상처 입을 정도가 아니었을 텐데 긁힌 듯 작은 실금들이 있어서 의아하게 생각하긴 했다.
[상처를 입어도 피가 멎는지 시험해봤겠죠. 그런데 피가 멎으니까 신나서 날뛴 거고. 아무래도 치료 속도를 좀 조절해야겠어요.]
……어쩐지. 지는 쪽이 개가 되기로 하지 않았냐 했을 때 아무 말 못 하더니. 그런 뒷사정이 있었나?
치료법이 있는데 치료 속도를 늦추는 건 좀 그렇긴 하지만.
창천에 대한 홍령의 투덜거림을 들어주며 탈의를 하고 물웅덩이에 손을 집어넣었는데, 차갑고 따가운 느낌이 피부를 때렸다.
“뭐야, 이거 탄산수인가?”
손으로 떠먹자 입에서 톡톡 터지는 감각이 진짜 탄산수였다.
[탄산수요? 초수(椒水)를 말하는 거예요?]
여기선 그렇게 부르나?
이름이야 둘째치고, 이런 곳에서 탄산수를 발견하다니!
전생에서 탄산수는 건강에 좋다는 인식이 있어서(당을 첨가하지 않은 경우 한정이다) 음료로 많이 팔릴뿐더러, 일부 생산지에서는 탄산수를 이용해 온천도 운영했다.
나도 한 번 가본 적 있는데, 탄산수에 몸을 담그는 기분이 제법 신기하고 시원했다.
조선시대에 세종대왕이 몸의 종기를 치료하기 위해 자주 찾았다는 썰이 있는 탓인지 어르신들도 많고 손님이 꽤 많았다.
나도 거길 다녀와서 일시적으로 몸의 피부가 좋아진 거 같은 기분도 들었고.
아무튼,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다.
지금 내 눈앞에 동굴에서 뿜어지는 돈 분수가 있다는 거다.
[초수는 물이 맑아서 귀한 물로 통하죠. 약재를 우릴 때 특별히 찾기도 해요.]
이 동네에서도 귀하게 취급된다니 그 부분도 오케이.
머릿속에 사업계획이 쭉쭉 펼쳐졌다.
물 자체로도 귀하다니 밀봉해서 상류층에 팔아도 되고, 탕약의 고급화를 꾀할 때 물 대신 쓸 수도 있다.
오는 길이 좀 험해서 문제지만 약수탕을 만들어도 된다. 물을 길어와 의원에 약탕을 만드는 방법도 있다.
영물의 내단(애초에 없었을 수도 있지만)을 놓친 게 전혀 아쉽지 않다.
잠깐만, 영물이 있었다는 건 이 동네 기운이 좋다는 거 아냐?
혹시 이 탄산수가 내공을 증진시키는 데도 도움이 된다던가?
그러면 진짜 대박인데!
[그건 나중에 세부적으로 생각하기로 하고, 일단 씻도록 해요. 영물의 체액에 독이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맞아, 당장 급한 건 나의 청결과 건강이지.
물로 더러운 것을 다 씻어냈을 즈음 신생이 내 봇짐을 가지고 무너진 돌더미를 내려왔다.
“의원님, 옷 가져왔어요!”
“고마워. 창천은 어쩌고 네가 왔어? 오는 길도 험한데.”
“비적들을 감시해야 할 거 같다고 하셔서 제가 왔어요! 이 정도 길은 괜찮아요!”
어휴, 대견한 녀석. 나는 신생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옷을 갈아입었다.
아무래도 부두목이라는 놈이 우리를 함정에 빠트렸으니 다른 놈들도 의심스러운 모양이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나도 놈들이 어떤 수단으로 점혈을 풀고 신생을 어찌할까 봐 걱정했으니까.
“온 김에 이 물 좀 챙겨가자. 물병 좀 줘봐.”
내 봇짐의 물병과 신생의 물통에 흘러내리는 맑은 탄산수를 가득 담았다.
대단한 양은 아니어도 담아두면 어딘가 쓸모가 있겠지.
산산조각 나긴 했지만 영물의 잔해도 좀 챙겨둘까. 약이 될 수도 있잖아?
[말려서 쓰면 여러모로 약이 되죠. 독성이 심해서 조심해서 써야 하지만 영물이니까 약성도 좋을 거예요.]
비록 장물 들고 튄 놈은 못 잡았지만 여기 온 보람이 없진 않아서 다행이다.
그건 또 어떻게 써먹을까 생각하면서 신생과 비동을 빠져나왔더니, 이상한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다.
“꼬, 꼼짝 마!”
“칼만 뽑지 마라! 그러면 덤비지는 않겠다!”
내 눈앞에 펼쳐진 건 다(多) 대 다의 대치 상황. 아니, 비적들은 전부 점혈 당해 있으니까 엄밀히 말하자면 일대 다의 상황이지?
“창천, 뭐해? 이 사람들은?”
“모르겠다. 갑자기 나타나더니 저러고 있는군.”
창천은 귀찮다는 듯 팔짱을 끼고 우리를 향해 덜덜 떨고 있는 자들을 향해 턱짓했다.
[포쾌들이잖아요?]
포쾌라. 얼마 전에도 봤었지. 그들이 지현의 명령으로 좌수검을 쫓아왔을 때 말이다.
잠깐만, 저 포쾌들 어딘가 낯이 익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