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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의원-34화 (34/350)

34화

“자, 그럼 출발하자.”

남은 비적 놈들이 허튼 수작을 부리지 못하게 창천이 일일이 점혈을 손본 후에야 우리는 비동으로 출발했다.

비동으로 향하는 길은 처음부터 난관이었다.

꼬아놓은 칡덩굴 밧줄 하나를 타고 V자로 깎아지른 절벽을 내려가는 것부터가 시작.

절벽 끝에 위치한 덤불을 헤치고 드러난 동혈로 기어들어가자 동굴 안의 희미한 불빛에 기대어 석순과 석주가 거미줄처럼 펼쳐진 동굴 안을 한참이나 걸어가야만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파김치처럼 축 늘어진 채로 놈들을 따라가게 된 건 말할 필요도 없었다.

―쉬쉬식

“잠깐만. 무슨 소리 안 들렸어?”

“무슨 소릴 말하는 거지.”

―쉬식

“방금 그 소리. 무슨 벌레 소리 같은데.”

“……무슨 소릴 말하는지 모르겠군.”

“잘못 들었나……. 이봐, 방향은 맞아? 우리 잘 가고 있나?”

“맞다. 계속 직진하다가 세 번째 갈림길에서 꺾으면 돼.”

우리의 대형은 창천이 앞장서고, 부두목이 가운데, 그리고 내가 후미를 맡는 형태였다.

발과 입을 제외하곤 꼼짝도 못 하는 처지긴 하지만 수상한 행동을 할지도 모르니까, 라고 하기엔 솔직히 지쳐서 뒤떨어진 게 맞긴 하지만.

“……그거 아나?”

“휴우, 그거라니. 뭐?”

“이 비동은 우연히 발견한 거야. 어느 날부터인가 순찰을 나갔던 놈들이 돌아오질 않았거든. 흔적을 추적해보니 이 비동으로 연결됐지.”

힘들어 죽겠는데 뜬금없이 무슨 얘길 하는 거야? 부두목 나름대로 나한테 말을 붙여보려는 수작인가 싶었다. 어찌되었건 놈들의 생사가 나에게 달려있는 형국이니까. 점수 좀 따보려는 건가?

“그래서? 사라진 놈들이 이 비동에서 잘 먹고 잘 살고 있었어?”

“아니, 놈들의 것으로 보이는 뼈다귀와 물건들만 입구 근처에 굴러다니고 있었지.”

“……뭐?”

“그냥 흔한 이야기야. 좀 깊은 산이면 하나쯤 있다는 영물이지. 뭐, 대부분은 뜬소문이지만 여기엔 진짜가 있었어.”

저 앞에서 창천이 자기도 듣고 있다는 듯 걸음을 늦췄다. 무림인에게 영물은 그 자체로 내공증진의 수단이라는 소리를 들은 적 있다. 나도 유명하다는 영물의 내단 같은 걸 전생에 김치 먹듯이 먹었지.

“그래서?”

“궁금한가?”

부두목 녀석이 나를 돌아보며 씨익 웃었다.

“거대한 지네 같은 거였지. 칼 뽑아들고 덤볐는데 나랑 두목을 빼곤 놈에게 먹혀 죽었어. 우리도 까딱하면 죽을 뻔했지. 하하하!”

……뭐야?

왠지 불길하다.

“그때 우리가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알아?”

놈의 표정이 뭔가 불길했다.

이건 그냥 감이다.

위기의 상황에서 조상신이 내려준다는 육감.

“놈이 부딪친 곳이 무너져서 지가 깊은 동굴로 빠져버렸거든. 하하! 이 땅이 무른 땅이라 다행이었지.”

잠깐만, 저 녀석!

“창천, 잡아!”

“바로 이렇게!”

순간 놈이 전력으로 옆으로 달려갔다.

창천이 뒤늦게 알아채 뛰었고 나도 급하게 손을 뻗었지만 놈의 옷자락만 겨우 스쳤다.

퍼억!

놈이 한쪽 벽면을 향해 전력으로 부딪치자 벽면이 벽력과 같은 소리를 내며 무너졌다.

그 파급은 이내 바닥에도 전해졌고, 내 발밑까지 쩌걱쩌걱 소리를 내며 다가온 것은 순식간이었다.

“금태양!”

“창천! 뛰어!”

무너지는 바닥의 반대편으로 내달렸지만 바닥이 갈라지는 속도에 비해선 느렸다.

“으악!”

발이 땅이 아니라 어딘가 허공을 밟았다 느꼈을 때, 결국 내 몸은 추락했다.

허공에서 손을 내저어봤지만 무엇 하나 잡을 만 한 것이 없었다.

한참이나 떨어진 끝에 바닥에 몸이 부딪쳤다.

“윽, 크윽……!”

불행 중 다행이라면 손이 먼저 바닥에 떨어졌다는 점일까?

보통이라면 손뼈가 작살났을 것이다.

하지만 경혈의 기운을 돌려 급하게 팔에 힘을 더하자 추락의 충격을 상당 부분 상쇄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전부 멀쩡한 것은 아니었다. 왼팔에서 극심한 격통이 몰려왔다. 어딘가 한 부분이 최소 금이 간 듯했다.

이래서야 저길 기어 올라갈 수도 없겠다. 기어 올라갈 만 한 엄두가 나는 높이도 아니었지만.

“저 높이에서 추락했는데 목숨을 잃지 않은 걸 다행이라고 여겨야 하나…….”

“크윽, 크학! 하하하하, 하하하하하!”

멀지 않은 곳에서 미친 놈 웃음소리가 동굴을 울렸다.

맞아, 저놈도 같이 떨어졌지!

나는 성큼성큼 놈에게로 다가갔다. 놈은 팔이 묶여있는 데다 제대로 뛰지 못했는지 한참이나 멀리에서 벌레처럼 널브러져 있었다. 비릿한 혈향이 나는 것을 보아 떨어지면서 내상이라도 입은 모양이었다. 그런 건 내게 중요하지 않았다.

놈에게 다가가 있는 힘껏 주먹을 날리려던 순간.

― 안 돼!

익숙한 음성이 내 발을 붙잡았다.

“하하, 하하하하! 네놈들은 이제 다 죽은 목숨―”

아득. 빠득. 우드득.

갑자기 이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놈의 목소리가 사라졌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 그 이유가 내 눈에 들어왔다.

“……미친.”

한 번도 상상해본 적 없던 거대한 괴물이 눈앞에 있었다.

집채만 한 지네.

그 지네가 부두목의 몸을 통째로 집어삼키고 있었다.

두 다리가 버둥거리며 저항했고 그 안에서 “사, 살려―” 같은 소리가 웅웅거리며 울렸지만 그마저도 이내 놈의 목구멍 속으로 사라졌다.

딸꾹.

지네 놈이 부두목을 급하게 삼키느라 딸꾹질이 난 게 아니라면, 이 소리는 분명 내 목에서 났다.

딸꾹, 꾹!

‘미친, 이놈의 딸꾹질!’

조용히 숨죽이고 놈이 사라지길 바라는 것만으로도 부족한 상황에!

사사삭.

사삭, 사사사삭.

털인지 다리인지 모를 수십만 개의 마디가 내 쪽을 향해 기어왔다.

놈의 입가에선 부두목을 통째로 씹어 삼키느라 흐른 피가 뚝뚝 떨어졌다.

젠장, 이대로 저놈의 먹이가 되어야 하는 건가?

십수 년을 자리보전 하다가, 이제 겨우 사람답게 몇 달을 살았을 뿐인데?

이런 괴물 놈의 한 끼 식사가 되어야 한다고?

‘그럴 순 없어!’

창천이 쫓아와 도와주길 바라는 건 무리다. 그 녀석 쪽으로도 바닥이 갈라졌으니, 아마 창천도 괴상한 동굴 바닥에 떨어져 있을 거다. 그쪽엔 이 지네 괴물이 없겠지만.

무기로 삼을 만한 건, 그래, 돌은 있었다. 바닥이 무너지며 떨어진 덕분에 주변은 온통 바위 투성이었다.

놈이 느릿느릿 기어오는 것이 다행이었다.

‘기회는 한 번이다.’

머리가 차가워진 탓인지 딸꾹질도 멈췄다. 때문에 놈의 진행도 느려졌다. 내 위치를 확신하지 못하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움직이면 곧바로 쫓아올 것이다.

휙―

주먹만 한 돌을 반대편으로 던지자 놈의 고개가 돌아갔다.

또 하나를 던지자 놈은 그게 내 기척인 줄 알고 쫓아가기 시작했다.

한 번만 더!

놈이 내게서 완전히 뒤를 돌아보았을 때.

나는 최대한의 속도로 달려 놈의 몸통을 타고 올랐다.

[꾸어― 꾸어어어―]

당황한 놈이 괴이한 소리를 내며 몸을 흔들었지만, 재빨리 내 머리통만 한 돌로 힘껏 놈의 머리를 내려쳤다.

파삭!

이 정도로 이 괴물 같은 놈의 머리통이 깨질 거라고 기대도 안했지만, 그렇다고 돌이 깨지는 걸 예상한 것도 아니었다.

‘젠장, 석회동굴이니까 돌이 무르겠지!’

놈은 발광을 하며 나를 제 몸에서 털어내려 했지만 나도 안간힘을 쓰고 놈에게 매달렸다.

이럴 때 품에 태양보도 한 자루만 있었어도!

― 손을……!

손을?

또 다시 익숙한 음성.

기시감이 들려오는 목소리.

홍령이다!

홍령이 나를 도와주려 하고 있었다.

그런데 손을 뭐? 어쩌란 거야!

[꾸억―! 꾸어어억!]

이놈, 날 패대기치지 못하니까 아예 벽에 갖다 박고 있잖아!

온몸이 벽에 부딪친 충격 때문일까.

순간 방법이 생각났다.

그래, 돌로 깨부술 수 없는 피륙이라면!

두 팔의 경혈이 있는 대로 힘을 쥐어짜냈다.

지금껏 이 힘은 보통 사람과 같은 근력과 체력을 유지하는 데만 썼을 뿐, 목숨이 위험한 상황이 아닌 이상 정도 이상의 힘을 발휘하지 말라고 누누이 경고를 받았지만―

‘지금이 바로 그 때다!’

놈이 휘청이다 중심을 잡은 한 순간.

내 주먹이 놈의 뒤통수를 강하게 후려갈겼다.

―그리고 정적.

‘……됐나?’

놈은 내 주먹을 얻어맞은 채 꼿꼿이 몸을 세우고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아니, 부들부들 떠는 것도 같았다.

그것도 잠시.

기분 나쁜 소리와 함께 놈의 피륙이 터져나갔다.

내가 이 힘을 제대로 다루지 못했을 때, 통나무가 내부에서부터 폭발해 사방으로 비산했던 것처럼.

놈의 몸뚱아리를 붙들고 있던 나도 폭탄에 휘말린 것처럼 날아가 바닥에 철푸덕 떨어졌다.

“―쿨럭!”

두 팔의 경혈에서 모든 기운을 끌어 쓴 탓인지, 아니면 놈의 발악에 몇 번이나 벽에 부딪쳐서 그런지, 아니면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때문인지.

피를 한 사발 넘게 토해내고 나자 정신이 혼미했다.

온몸이 쑤시다 못해 더럽게 아팠다. 어디 하나 금이라도 간 건가 싶을 정도로 가슴이 찌르듯 아팠다. 호흡도 힘들었다.

‘죽을 위기 하나는 넘겼는데, 그러다 또 죽게 생겼네.’

적어도 괴물 같은 놈의 위장에서 소화되는 엔딩은 피했으니 이 정도면 호상(好喪)……

젠장, 죽기는 누가 죽는다는 거야!

나는 엉거주춤 자세를 뒤집었다.

요가에서는 아기자세라고 하는, 엎드려 온몸에 힘을 뺀 자세.

좋아. 흉곽이 덜 아프다.

이대로 해보자.

침을 놓거나 점혈을 하는 등으로 통증을 완화시킬 수 없는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

나는 천소와공의 구결에 따라 운기조식을 시작했다.

사실 말이 운기조식이지 그냥 토납법에 가까운 기본공이라고 하지만, 차이가 뭔지 정확히는 알지 못한다.

그저 내 몸 상태가 극도로 나빠졌을 때 몸이 활력을 돋우는 힘이 있다는 것만 알 뿐.

이걸 한참동안 하고 나면, 몸에 박C스와 비타민C, 우루S를 한 번에 입에 털어 넣고 푹 자고 일어난 것 같은 활력이 돈다.

깊이 숨을 들이쉴 때마다 몸에 카페인이 돌 듯 아스라한 기운이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잠깐만.

왜 기운이 머리로 향하지?

한 번도 이런 일이 없어서 당황했지만 머리로 향하는 기운들을 다른 곳으로 흩어버린다든가 하는 방법은 알지 못했기에 나는 기운들이 흘러가는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몸의 통증은 여전했지만 적어도 머리는 상쾌해지는 것 같았으니까.

피를 한 사발 토해서 어지럽던 머리가 명료하고 깨끗해졌다 느낀 순간.

[당신, 이게 무슨 꼴이에요?!]

벽력과 같은 소리와 함께 눈이 번쩍 떠졌다.

홍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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