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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의원-33화 (33/350)

33화

“혼자 가도 상관없다. 네놈은 의원을 운영하도록.”

“시끄러. 너한테만 맡겼다가 이번에 무슨 꼴이 났는데. 나도 갈 거야.”

“가는 길이 험할 텐데.”

“네놈이 가는 길이면 당연히 험하겠지. 비적들을 길잡이로 데려갈 거야. 놈들이라면 좀 더 편한 길을 알 테니까. 정확한 위치를 찾으려고 시간낭비도 안 하겠지.”

“저, 저도 갈래요! 데려가 주신다면…….”

“그래. 같이 가자.”

신생은 객잔에 맡기거나 할 생각이었지만, 애처롭게 날 보는 눈을 보니 함께 가야 할 것 같았다. 내가 떠나면 마을에서 또 거지처럼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걸까?

“쳇.”

“혀는 왜 차? 놈들이 숨겨놓은 보물이라도 독식할 생각이었어? 어라, 표정 봐라? 진짜 뭐 있대?”

“……놈들이 말하길, 기운이 정순한 동굴이 하나 있다더군. 간 김에 조용히 수련을 할 생각이었던 것뿐이다. 네 녀석이 같이 가니 조용하긴 글렀군.”

“뭐래. 사람이 더 있어야 호법도 서주고 비적들 감시도 하고 좋지.”

기운이 정순하다고?

평소에는 별 관심도 없던 대목이 내 이목을 끌었다.

생각해보면 홍령은 종종 그런 얘기를 했다. 귀신의 기준에서 좀 무리하거나 힘이 들 때면 [어휴, 기운 딸려. 귀기(鬼氣) 다 빠지네.] 같은 한탄을 말이다.

귀신이라는 건 결국 영혼 같은 거고, 기운으로 이루어져 있다면.

그 기운을 보충했을 때 더 빨리 돌아올 수 있지 않을까?

홍령이 나 때문에 힘을 잃고 잠들어 있는 상태 같은 거라면 말이다.

모두가 함께 가기로 결론을 낸 후 나는 바쁘게 움직였다.

입원해 있던 환자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집으로 돌려보내고, 들고 갈 수 없는 귀중품은 창천이 가르쳐 준 비밀 창고에 옮겼다.

창천과 신생도 각자 출발 준비를 하느라 분주했다.

특히 창천 녀석은 무슨 짐이 그렇게 많은지 짐을 한 보따리 싸고 있어서 비실비실한 비적 놈들을 굴비두릅처럼 묶는 일은 나와 신생이 해야 했다.

정작 내 짐은 별 것 챙길 게 없었다.

꾸준히 복용해야 하는 약과 가면, 옷가지 약간.

마을에 처음 도착했을 때와 크게 차이가 없다.

‘아니, 시끄럽게 조잘대는 귀신이 하나 없지.’

어느새 그녀와 함께하는 생활에 익숙해졌는지 정적이 감도는 짧은 시간이 어색했다.

……어서 돌아왔으면.

그런 생각을 하며 짐을 꾸리고 나서니 밖에선 의외의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아니, 다들 여기서 뭐 하세요?”

해가 쨍쨍하게 떠오르는 아침.

대부분의 마을 사람이 농사를 짓는 이곳에선 부지런히 나가 밭일을 하거나 아침부터 울어대는 닭의 꽁무니를 쫓아다니며 달걀을 찾으러 다니는 등, 아무튼 하루 일과를 시작하고도 남았을 시간이다.

근데 왜 다들 여기 있어?

“의원 님, 저희가 잘하겠습니다. 제발 가지 마세요!”

“장 의원님도 변을 당하셨다는데, 의원 님까지 가시면 저희는 어찌 삽니까.”

“의원 니임, 으아아아앙.”

어떤 사람들은 무릎을 꿇기도 했고 내가 몇 번 고뿔을 봐준 아이들은 울어 제끼기까지 했다.

이게 이렇게까지 할 일이야 싶고, 당황스러우면서도 내심, 싫지는 않았다.

“저기, 이러지들 마시고. 아예 가는 게 아니니까요.”

“아예 가시는 게 아니면……?”

“장 의원님도 자기 의원 비워놓고 여기 왕진 오고 그랬잖아요. 그런 거예요.”

“그러면 왕진을 가시는 겁니까?”

“뭐, 그런 셈이죠.”

홍령이 없는 이상 꿈도 못 꿀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납득했는지 이내 우리를 위해 길을 텄다.

그걸로도 모자라 각자 품에서 뭔가를 주섬주섬 꺼내 우리에게 주기 시작했다.

“저기, 가다가 출출하시면 이거라도 좀.”

“먼 길 가시다 보면 필요할 겁니다.”

“의원 아저씨, 이거. 내가 먹으려고 숨겨놨던 당과인데. 가면서 먹어.”

분명 짐이 가볍다 생각했는데, 순식간에 짐이 두 배가 됐다.

……이 사람들, 내가 정말 의원을 접고 떠난다 해도 쥐여 줄 생각이었나 본데.

내가 가는 걸 배 째라 말릴 작정이었다면 이런 걸 미리 챙겨 올 리 없으니까.

“저 그러면, 왕진 다녀오겠습니다.”

“의원은 염려 말고 다녀오십셔!”

“맞아, 우리가 주기적으로 청소도 하고 번도 설 테니까 말이야!”

“올 때 내 당과, 두 배로 갚아! 꼭 와서 갚아줘야 해!”

객잔 주인을 필두로 사람들이 외치며 손을 흔들었다. 당과를 쥐여 준 꼬맹이가 되바라진 소리를 하며 외쳤다.

말라비틀어진 당과 쪼가리를 씹으며, 우리는 왕진을 떠났다.

* * *

“헥…… 헥…… 미친, 여기 누가 오자고 그랬어!”

내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자 저 앞에서 나직한 한 마디가 울렸다.

“네놈이다.”

“의, 의원님이요…….”

창천은 그렇다치고, 신생 너까지!

우리는 지금 비적단의 본거지가 있다는 산을 오르는 중이다.

그런데 산을 타는 건 나 혼자뿐인 거 같다.

그렇지 않고선 나만 계속 이렇게 숨을 헉헉 거릴 리가 없다.

창천이나 비적단 녀석들은 그럴 수 있다. 비적단 놈들은 창천에게 지독하게 당한 지 며칠 지나지 않았지만 내가 준 약도 먹었고, 원래 자기 집 앞마당이니까 이런 험한 산을 동네 마실 나오듯 가볍게 다닐 수도 있다.

하지만 신생도, 저 어린애도! 거지 생활을 하느라 비쩍 마른 몸으로 저렇게 잘도 다니는데, 나는 왜!

힘들 때마다 침을 놔주며 호랑이 기운을 솟아나게 해줬던 홍령이 미친 듯이 그리워지는 순간이었다.

“아, 더는 못 가. 먼저들 가. 곧 따라갈 테니까.”

이미 저들은 나보다 한참이나 앞에서 나를 기다리며 휴식 중이었다.

이게 이렇다니까? 등산을 질색하는 사람들은 아마 알 것이다.

체력 좋은 놈들은 빨리 앞으로 가서 느린 사람을 기다리면서 충분히 휴식도 하고 노가리도 까다가 다시 출발하는 식으로 움직일 수 있지만, 체력 딸리는 사람은 겨우 도착했는데 일행들은 다 쉬었다며 먼저 가버린다.

그러면 울며 겨자 먹기로 지친 몸으로 따라가다 또 뒤떨어지거나 휴식하면서 간격이 미친 듯이 벌어지는 악순환이 계속되니, 아무튼 산행 내내 지옥 같은 경험만 하고 내려오는 것이다.

나만 그렇게 끔찍하고 체력 좋은 놈들은 상쾌하게 아, 오늘도 재밌었다! 또 갑시다! 하는 거지.

전생의 나야 보통 성인 남성의 체력을 갖고 있긴 했지만, 등산에 미친 부장님들에게 설악산 대청봉 오색코스에 끌려갔을 때는 나도 저 심정을 절절히 느꼈다.

그때 이후로 산이라면 질색했는데, 다시 태어나도 또 이 꼴이 될 줄이야!

“그 말만 지금 몇 번째인지 아나? 네놈 때문에 시간이 얼마나 지체 되었―”

“거의 다 왔대요! 조금만 더 힘내세요!”

내가 속을 거 같아?!

원래 산을 탈 때 제일 믿어서는 안 되는 거짓말이 ‘거의 다 왔다’가 아니던가?

창천이 험하다고 했을 때 믿었어야 했는데!

한탄해봤자 이미 늦었다.

활력이 떨어질 때 먹는 약을 벌써 세 번째 입에 털어 넣은 후 억지로 다리를 움직인 지 두 시간 후.

“다, 다 왔다……!”

드디어 놈들의 본거지에 도착했다.

비적 놈들의 본거지 아니랄까 봐 정말 꽁꽁 숨어 있어서, 비적들의 안내가 아니었다면 며칠을 헤매다 산 속에서 객사했을 지도 모른다.

내가 대충 엎어져 물을 마시고 심호흡을 하고 신생의 부채질을 받으며 컨디션을 회복하는 사이, 창천이 비적 놈들의 혈을 짚고 주변을 샅샅이 훑어본 후 돌아왔다.

“놈의 흔적이 없다.”

“없어? 숨은 건 아니고?”

“아예 이쪽으로 돌아오지 않은 거 같군.”

“미치겠네. 여기가 아니면 어디로 간 거야?”

힘들어 죽겠는데 놈이 없다니 짜증이 확 치밀어 올랐다. 본거지가 아니면 어디로 갔지? 그만한 약재를 팔려면 사줄 만한 곳을 찾아가야 하니까, 대도시로 갔나? 무한 같은?

아냐, 곧바로 대도시에 가기엔 놈의 상태가 좋지 못했다. 창천에게 입은 상처도 상처지만, 태도가 부서질 때 놈도 만만찮은 내상을 입었을 게 분명했다.

그래, 환자적 관점으로 생각해보자.

놈은 몸을 추스를 시간과 공간이 필요하다.

의원에서 훔쳐간 내단과 환약도 있으니 우선 그걸 흡수하려고 하지 않았을까?

“창천, 여기에 기운이 영험한 동굴이 있다고 하지 않았어?”

“……설마 거기로?”

“여기 안 들르고 바로 거기로 갔다면 흔적이 없을 수도 있잖아. 저놈들에게 물어보자.”

점혈을 풀고 부두목에게 묻자 놈은 생각보다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반 시진 정도 안으로 들어가면 된다. 다만 길이 좁아서 여럿이 가기는 무리야. 저놈들은 어딘지도 모르고. 정확한 위치는 나와 두목만 안다.”

그러고 보면 출발할 때부터 놈들은 나한테 묘하게 협조적이었다. 그래 봤자 군말 없이 시키는 대로 한다 뿐이지만. 창천이 뭐라 하면 한 번이라도 못 들은 척하는 것과는 달랐다.

‘좋은 경찰, 나쁜 경찰 효과인가?’

비록 고문해서 정보를 얻어내라는 지시는 내가 내렸지만 진짜 고통을 가한 건 창천이고, 나는 치료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원기를 회복할 수 있는 약도 줬다. 저들의 입장에서는 창천보다는 내 쪽이 낫겠지.

개과천선 시켜서 내 사람으로 부릴 수 있을까?

이미 나는 장 의원도 내 밑으로 거두었던 전적이 있다. 거기에 비적 몇을 더한다고 달라지진……

아니, 좀 다르지. 많이 다르지. 죄에도 경중이라는 게 있는데.

당장 장원을 습격한 일로 마을 사람들의 감정도 안 좋을 거고, 내가 앞으로 영역으로 삼을 마을도 놈들에게 피해를 입거나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유족이 있을지 모른다.

다른 사업도 아니고, 의원의 이미지에는 치명적이다.

‘단점만 있는 건 아니긴 한데…….’

이런 깊숙한 산에 익숙하니까 약초를 캐는 일을 시켜도 된다. 저들은 험한 일에서 손을 씻을 수 있고 나는 좋은 약초꾼을 힘 안들이고 얻을 수 있다.

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결정했다.

일단, 좀 더 지켜보자.

“나랑 창천이 이자를 데리고 가고, 신생은 여기서 이자들을 감시하고 있어.”

“너도 여기 있는 게 좋을 텐데. 여기서 반 시진이나 더 가야 한다면 여기까지 올라오는 것보다 더 험한 곳으로 들어갈 거다.”

“아니, 나도 갈 거야.”

기가 영험하다던 동굴이 과연 홍령의 귀환에 도움이 될지 빨리 알아보고 싶으니까.

실제로도 오면서 홍령이 알려준 운기조식이라는 걸 했는데, 어쩐지 홍령의 존재가 조금이나마 느껴지는 기분이 들었다.

비동으로 가는 동안 죽을 만큼 힘들어도 홍령이 돌아와 침을 놔준다면 다시 컨디션이 회복될 테니까 상관없다.

……정말 홍령이 돌아온다면, 이번에는 나도 의술을 배워볼까.

언제까지나 홍령에게 의존할 수는 없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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