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내 생각이 맞다면, 이 방법뿐이야……!]
금태양의 몸 전체에서 송글송글 땀이 배어나왔다.
그뿐 아니라 옅은 아지랑이 같은 것이 몸 주변을 따라 흐르기 시작했다.
이윽고 금태양이 깊게 숨을 들이쉬자, 아지랑이가 모두 몸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의 몸이 천천히 허공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상승의 무공을 갖췄을 때만 일어나는 현상이, 지금 제대로 무공수련을 해본 적도 없는 금태양의 몸에 일어나고 있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그때, 금태양이 눈을 떴다.
찬연한 서광이 그를 감싸고, 그의 몸이 천천히 바닥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털썩, 드러누웠다.
[서, 성공인가?]
…
…
…
“드르렁…… 크응…… 컥! 크음, 음냐…….”
바닥에 널브러진 금태양은 코를 골고 있었다. 마치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아니, 조금 피곤한 하루였던 것처럼.
[성공이다…….]
홍령은 기운이 쭉 빠진 듯 빙의를 풀었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 넋이 나갈 거 같았다.
[당신은 정말 나한테 감사해야―]
그 목소리는 천천히 흐려지더니 이내 아스라이 사라졌다.
엎어진 채로 코를 고는 소리만이 어느덧 밝아진 방 안을 울렸다.
* * *
홍령이 사라졌다.
방 안에서 엎어진 채로 눈을 떴을 때 나를 가장 당황하게 한 사실은 바로 그거였다.
“……홍령? 진짜 없어? 정말로?”
몇 번을 불렀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홍령에게서 대답은 없었다.
사실 대답이 없더라도 느낄 수 있었다.
내 안의 무언가가 허전하게 빈 느낌.
그것이 홍령의 부재를 뚜렷하게 말해주고 있었다.
“이제야 일어났나?”
문을 나서자 창천이 초췌해 보이는 낯으로 앉아 있었다.
이 자식은 왜 또 여기 있어?
“……보아하니 운공은 마친 거 같군.”
운공?
―설마.
완전 정신을 잃긴 했지만 그 와중에도 드문드문 기억나는 것이 있었다.
홍령이 내 몸에 빙의했기 때문일 것이다.
산산이 부서지던 태도.
불타 무너지는 대들보.
홍령이 내 입에 소환단과 다른 환약을 욱여넣고 무언가 신기한 걸 하던 느낌.
나는 가볍게 주먹을 쥐어 보았다.
멀쩡하다.
온통 핏줄이 드러난 채로 옴짝달싹 할 수 없었는데, 완벽하게 나았다.
“이젠 별로 숨길 생각도 없는 모양이지.”
“무공을 익힌 건 아니, 아니다. 그냥 그런 걸로 치자…….”
쇠로 된 검을 도자기그릇처럼 부숴버리질 않나, 운기조식 같은 걸 하지 않나.
무공을 안 익혔다고 하기도 좀 뭣한 상황이다.
실제로 그 두목의 공격을 막아낸 건 그간 익힌 오금희를 발휘한 덕분이었고.
“다른 사람들은? 창고는 어떻게 됐어?”
“창고는 반쯤 타다 말았다더군. 놈들이 훔쳐간 게 오히려 전화위복이었다.”
“그래서, 훔쳐간 건 찾았어?”
“……대부분은.”
“전부 되찾진 못했다? 그 천하의 창! 천! 님께서 고작 그 조무래기 몇이 무거운 짐 들고튀는 걸 못 막았다?”
“내가 거기서 놈들을 쫓아갔다면 창고가 다 타버렸을 거다. 네놈도 멀쩡하지 못했을 거고.”
“애초에 네가 거기 버티고 섰으면 될 일이지! 어? 네놈의 이름을 걸겠다느니 하며 장담했잖아?”
“이름은 걸지 않았다!”
“그래, 지는 쪽이 개가 되기로 했지! 이제부터 넌 내 개다, 알았어?”
“미친, 내가 왜 네놈의―”
“내기에서 졌으면 진 거지, 개가 말이 많아. 입 다물어!”
창천은 골 아프단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물었다.
그렇다.
나와 창천은 내기를 했다.
나는 비적들이 진짜 쳐들어온다, 녀석은 안 쳐들어 온다로.
내기를 걸게 된 경위는 간단하다. 창천 녀석이 곽 표두의 쪽지를 죽어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기가 버티고 있는데 어지간히 돌아버린 놈들이 아니고서야 습격할 리가 없다나?
만약에라도 쳐들어온다면 이 장원에는 털 끝 하나 건들지 못하게 하겠다고 호언장담을 했다.
그 결과가 이거다.
“진짜 끔찍하게 탔네…….”
이젠 화 낼 기력도 없었다. 화재 장소를 정리하던 마을 사람들이 몸은 괜찮냐며 걱정했고 적당히 고개를 끄덕인 후 대피시킨 약재들을 확인하러 갔다. 신생이 표물 장부와 비교하며 물건을 확인 중이었다.
“의원 님! 괜찮으세요?”
“응, 괜찮아. 어젯밤엔 많이 놀랐지?”
더벅머리를 쓰다듬어주자 신생은 그세 울상이 되었다.
“무, 무서웠어요…… 장 의원님도 어제 상황을 알아봐야겠다고 나가시고선 여태 소식이 없으시고, 흑…….”
장 의원?
그 영감님은 또 어디를 간 거람?
“물건은 제가 확인해 봤는데, 여기 있는 것들이 없어요…….”
신생이 확인한 표물장부를 보자 한숨이 턱 나왔다.
“제일 비싼 것만 골라 가져갔네.”
하필이면 아직 복용해야 하는 약들만 골라 가져갔다.
활명탕에 들어가는 필수재료도 사라졌다.
소량이긴 하지만 반드시 필요한 약재.
‘엎친 데 덮친 격이군.’
고급품은 도둑맞고 창고는 불탔다.
환자들은 보안이 위협받는 의원에 불안함을 느낄 거고, 환자를 보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홍령의 존재가 사라졌다.
그야말로 최악.
‘……아니, 최악은 아냐.’
나는 주먹을 단단히 쥐었다.
이 정도로 포기하기엔 이르다.
아직 할 수 있는 일들이 있었다.
“창천, 놈들은?”
“헛간에 있다.”
“앞장 서.”
녀석은 내 말투에 불만스러운 표정을 했지만 이내 순순히 앞장섰다.
헛간 안에는 창천이 제압한 놈들 대여섯이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나는 놈들을 한 번 훑으며 물었다.
“두목은 튀었고, 그럼 이중에서는 누가 제일 대장이지?”
“……나다.”
턱수염이 성성하고 험상궂게 생긴 얼굴. 현상범 수배서에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면상이다.
나는 주먹을 단단히 쥐고, 놈의 면상에 주먹을 갈겼다.
“윽―!”
“크윽, 퉷.”
아무런 힘을 싣지 않은 채 맨 손으로 사람의 아구창을 갈기는 건 생각보다 아팠다.
하지만 덕분에 당장의 분노는 잠깐 가라앉았다.
마음 같아서야 더한 보복도 하고 싶지만……
“묻고 싶은 게 있다.”
“흥.”
“누가 이 습격을 사주했어? 누가, 돈도 아니고 약재를 노리라고 했지? 네놈들의 두목은 어디로 도주했을 거 같아?”
놈은 대답 대신 퉤, 하고 피 섞인 침을 뱉었다. 내 근처에도 오지 못했지만 녀석의 의사는 명확했다.
“순순히 대답하지 않을 줄은 알았지.”
21세기로 치자면 조폭과 같은 놈들이다. 그런 놈들이 붙잡혔다고 고분고분 말을 듣는 걸 본 적 있는가? 적어도 영화나 드라마에서 그런 경우는 구경도 못 했다.
“난 원래 온건한 사람이지만, 지금은 좀 많이 화가 났거든. 그러니까 네놈들에게는 예외를 둘 거야.”
홍령이 없어서 다행이다.
그녀가 있었다면 기겁을 했을 테니까.
“창천.”
“죽이지만 않으면 되나?”
녀석은 곧바로 검을 뽑으며 답했다. 놈도 꽤나 열 받아 있는 모양이다.
“아혈이라는 걸 막으면 말을 못 한다지? 비명소리는 못 나오게 해. 환자들이 놀랄 테니까.”
“의원의 방침인지 뭔지는 지켜주지.”
창천에게 심문을 맡기고 나가기 전, 나는 놈들의 앞에서 다시 입을 열었다.
“미리 말해두는데, 나는 병 주고 약 주는 일 따윈 하지 않을 거야.”
어차피 홍령이 없기에 제대로 된 치료도 할 수 없다.
홍령이 있다고 해도, 저들을 치료하고 싶지는 않다.
“시작하지.”
창천의 말과 함께 나는 헛간을 나섰다.
* * *
두 시진 후, 나는 다시 헛간을 찾았다.
약속대로 그 시간 동안 비명은 들리지 않았다.
허나 헛간 안의 몇몇은 꽤나 지독한 상태로 헛간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죽이진 않았다.”
“수확은 있었고?”
“이런 걸 가지고 있더군. 이자가 부두목인 모양이다.”
창천이 건넨 것은 한 장의 서찰이었다.
일을 지시하는 내용과 적지 않은 대가를 제시한 내용이 야생마와 같은 필체로 휘갈겨져 있었다.
누구의 글씨인지 또렷이 알아볼 수 있다.
“이 외에 다른 건 없고?”
아직도 유일하게 허리를 꼿꼿이 편 채 무릎 꿇은 부두목이 지친 목소리로 내뱉었다.
“……가면을 쓴 녀석, 그러니까 네놈은 생채기 하나 나지 않게 하라고 했다. 장물은 전부 가져도 좋지만 네놈이 다칠 경우 보복을 감수해야 할 거라 엄포를 놓았지.”
“사주한 건 금왕표국이고?”
“다 알고 있으면서 이런 쓸 데 없는 짓을 한 거냐?”
손에 쥔 서찰 한 귀퉁이가 맥없이 구겨졌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듯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안 돼, 침착하자.
눈앞에 셋째 형이 있는 것도 아닌데 분노해봤자 나만 손해다. 확인할 것은 전부 확인했고, 증거 또한 내 손에 있다.
후― 깊게 심호흡 한 후 나는 구겨진 서찰을 잘 펴서 품 안에 갈무리했다.
“창천, 밖에 나가서 얘기하자. 여긴 피 냄새가 너무 나.”
“놈들은 정말 이대로 둘 건가?”
창천이 쓰러져 있는 비적들을 고갯짓했다.
“말했잖아. 치료 안 한다니까.”
“너는 장 의원도 살렸다.”
“그때는 실리적인 이유가― 하, 일단 넌 나가라.”
홍령이 없어서 본격적인 치료는 못 한다고 말을 할 수도 없고.
창천은 찜찜한 표정을 한 채 밖으로 나갔고 나는 품 안에서 환약 몇 알을 꺼냈다.
이걸 줄까 말까 고민했지만 처참하게 당한 꼴들을 보니 이 정도는 줘도 될 거 같았다.
“대단한 약은 아냐. 하지만 먹으면 죽지는 않을 거다.”
한 알 한 알 대충 놈들의 입에 집어넣고 나도 헛간을 나왔다.
그래, 의원에서 사람이 죽어나가면 찝찝하니까.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했고 살거나 죽는 건 이제 저놈들 일이겠지.
방으로 돌아온 나는 창천과 신생을 앉혀놓고 입을 열었다.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 얘기를 좀 해볼까?”
“앞으로의 일?”
“네가 헛간에서 그러고 있는 동안 나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어.”
당장 의원을 계속할 수는 없다. 홍령이 없으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극단적으로 줄어들 터. 홍령이 다시 돌아온다고 해도 내가 의원의 신뢰를 왕창 깎아먹는다면 소용이 없다.
……돌아온다면 말이지.
그 부분이 불안했지만 홍령이 영영 떠난 건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쓰러진 나를 회복시키기 위해 무리하다가 잠시 힘이 약해졌을지도 모른다. 내가 정신을 잃은 후 나의 행보가 어땠는지를 들어보면 더더욱 그랬다.
“일단, 도둑맞은 것부터 되찾으러 가자.”
“네? 그, 그러면 의원은―”
“임시휴무야. 창천, 녀석들의 본거지는 캐놨겠지? 사람이라면 보통 이럴 때 자기 근거지로 향할 테니까. 거기 가서 약재들이랑, 내 보도랑, 그리고 장 의원님도 되찾아야지.”
하필이면 장 의원이 인질로 끌려가냐.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장 의원이 내게 갚아야 할 돈은 둘째치고, 장 의원에게 덜렁 맡겼던 태양보도가 문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