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이 몸 말을 못 들었느냐? 순순히 이쪽으로 오라니까? 해치진 않는다! ”
다시 한번 두목이 으름장을 놓았다.
그래도 내가 움직이질 않자 다른 쪽으로 오해를 한 모양이다.
“어쭈, 급한데 반항을 해? 피를 봐야 말을 들으려고!”
두목이 휙 내지른 태도가 정말 내 팔 하나쯤은 자를 듯이 휘어졌다.
그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내 팔이 물 흐르듯 움직이더니 태도의 옆면을 찰싹! 내려쳐 흘려보낸 것이다.
[어, 어라?!]
“어라?!”
홍령도 당황했다. 홍령이 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내가 한 일이다.
정확히는 나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취한 행동이었지만.
“큭, 무슨……! 이놈도 무공을 익혔나?! 그런 정보는 없었는데?!”
두목은 횡설수설하며 다시 한번 태도를 휘둘렀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본격적이고 힘이 실려 있었다.
그리고 나도, 정확히는 내 팔도 아까보다 본격적으로 힘을 실어 상대의 공격을 막아내기 시작했다.
타앙―!
피륙과 쇳덩이가 부딪치는 소리라고는 믿을 수 없는 소리가 사위를 울렸다.
내 손과 팔이 적절하게 움직이며 상대의 공격을 막아내며 나는 소리였다.
[오른쪽! 왼쪽! 조금 더 위로!]
이번에는 홍령의 보다 적극적인 보조가 있었다.
홍령의 말에 따라 한동안 연습했던 원희생동의 투로가 손끝에서 고스란히 펼쳐졌다.
원숭이가 나무를 타듯이 유연하고 자연스러우면서도, 손끝과 팔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고 홍령이 말하긴 했지만 그게 진짜 될 줄이야!
양 팔이 활발하게 움직이자 몸의 긴장도 풀렸는지 발도 어느 정도 풀렸다.
[이제 도망쳐요. 이자를 이기는 건 힘들 거예요.]
맞는 말이었다.
지금까지는 저쪽이 날 얕봐서 가능했던, 말하자면 초심자의 운 같은 거다.
실제로 슬슬 팔에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맨손으로 저 묵직한 칼을 몇 번이나 쳐냈더라?
경혈에 고인 기가 빠른 속도로 비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더 이상 무리했다간 진짜 큰일 날지도―
“후우, 후. 얕봐서 미안하다, 애송아. 이제부터 전력으로 간다!”
아니, 아저씨! 도망칠 생각 아니었냐고!
눈이 훼까닥 돌아간 두목은 태도를 마구 휘두르며 덤벼들었다.
쌩 초짜 같은 나한테 농락당한 게 그렇게 기분이 나빴나?!
“창천 이 자식은 대체 어딜 간 거야! 으아악! 아악! 악!”
“요 미꾸라지 같은 녀석이!”
[힘내요! 거의 다 왔어요! 조금만 더!]
창천이 근처에 왔다는 얘길까? 그 전에 내 목이 떨어지게 생겼는데?!
“이걸로 끝이다, 이 애송아!”
두목이 뭔가 휘황찬란한 기술 이름 같은 걸 외치면서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다.
그리고 머리 위에서부터 수박을 쪼개듯 내려치는 태도!
미친.
이건 죽는다.
……죽는다고?
또?
이제 겨우 살만해졌는데, 이딴 식으로 죽는다고?
[안 돼욧!!!!]
그 순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질 않는다.
연습해왔던 투로를 따라 그 무식한 태도를 막아냈던 내 팔이, 죽음의 위기 속에서 뭐라도 해보겠다는 듯 머리 위를 막아섰다.
무언가 단단한 것이 터지며 폭음이 귀를 울렸고, 동시에 어깻죽지부터 손끝까지 모든 세포가 폭발하듯 고통이 휘몰아쳤다.
나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 * *
두령은 지금 상황을 믿을 수가 없었다.
평생을 함께해왔던 태도가 산산조각이 났다.
저 가면을 쓴 수상쩍은 애송이한테!
‘이, 이런 괴물이라는 말은 없었잖아……!’
자칫 잘못했다면 걸레짝이 되는 건 무기가 아니라 자신의 몸뚱아리일 뻔했다.
그런 생각을 하자 무패도의 등에 식은땀이 쭉 흘러내렸다.
큰일이었다. 작은 단도 한 자루를 빼놓고는 제겐 무기라곤 없는데 가면 쓴 놈은 여전히 자신을 노려보고 서 있었다.
맨손으로 제 공격을 전부 막아낸 데다 쇳덩이를 도자기처럼 부숴버린 놈이다.
이 작은 단검으로 상대할 수 있을 리가……!
‘튀, 튀어야 해……!’
인질을 잡는다는 생각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어떻게 하면 저 가면 너머 귀기 어린 시선에서 벗어날 수 있지?!
실제로는 홍령이 빙의해 쓰러지는 것만 가까스로 막아내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무패도는 그 상황을 적극적으로 오해했다.
금태양과 홍령으로서는 다행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두목! 두목!”
“살아 계셨슴까!”
그때 무명단의 졸개 몇이 무패도를 향해 꽁지 빠지게 달려왔다.
창천을 피해 가까스로 도망친 것이다.
“저놈은 그 도련님?”
“인질로 잡아갈까요?”
“아냐, 아냐, 아냐! 건드리지 마! 우리 셋으론 감당 안 된다!”
무패도는 기겁을 하며 손을 내저었다.
“나머지 놈들은?”
“모, 모르겠습니다. 그 미친개가 가는 방향 반대로 무작정 뛰었더니―”
“일단 서둘러 이곳을 빠져 나가자. 육시럴, 걸려도 된통 잘못 걸렸어!”
무패도가 욕지거리를 주워 삼키며 걸음을 옮기려 했을 때.
“네 이놈들! 못 간다!”
또 누군가가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꼬장꼬장해 보이는 얼굴에 자글자글한 주름과 염소수염, 거기에 누가 봐도 의원인 것이 뻔한 차림새.
허리춤에는 태양보도를 차고 보퉁이를 든 그는 장 의원이었다.
“허, 우리가 아주 핫바지로 보이나? 이제 이런 쉰내 나는 노인네까지―!”
“갈 거면 날 데리고 가라!”
“……응?!”
“날 데리고 가면 의맹에서 큰 보상을 내릴 것이야! 허탕을 치는 것보다야 천배는 낫지 않겠나!”
이게 무슨 상황인지 알 수 없었지만 일단 장 의원이 자신들을 적대하려 하는 건 아닌 게 확실했다. 우두머리가 옆의 졸개들에게 눈짓을 하자 그가 장 의원에게 다가가 덥썩 그를 짐짝처럼 짊어졌다.
“아니, 이놈들아! 곱게 모시지 않고!”
“시끄러우니까 입 닥치게 해!”
무패도의 말에 누군가가 장 의원의 목덜미를 수도로 내리쳤다.
뭔진 모르겠지만 일단 이거라도 챙겼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들은 허겁지겁 태양의원을 빠져나갔다.
그들이 모습을 감춘 순간 금태양의 무릎이 꺾였다.
기세를 잡을 때를 놓친 불길은 더욱 커져만 갔고 연기를 들이마신 금태양도 몇 번이나 기침을 해댔다.
홍령이 어떻게든 팔다리를 움직여 보려고 했지만 경혈을 폭발시킨 몸으로는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다.
[아, 안 돼! 안 돼요! 이렇게 당신을 보낼 수는―!]
홍령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몸은 기울고, 활활 타오르던 창고의 들보 하나가 기어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안 돼!]
비명소리와 거의 동시에, 주위가 소란스러워졌다.
“자! 빨리 물을 기세! 다 기었으면 옆 사람에게 건네!”
“어서, 어서 달라고!”
“불을 꺼라!”
사람들의 외침이 들려왔다. 마을 사람들, 그리고 객잔에 미리 피신해 있던 경증 환자들. 그들이 태양의원에 치솟는 연기를 보고 달려온 것이다.
그들은 몇 명씩 조를 짜 물동이를 이어 나르며 불을 껐다.
마을 사람들 대다수가 뛰어온 덕에 불길은 빠른 속도로 잡히기 시작했다.
“젠장, 성가시군.”
바짝 마른 오래된 창고였음에도 불길이 빠르게 잡힌 것에는 화염 한복판에서 창고가 더 타버리기 전에 칼로 모조리 베어버리고 있는 창천의 덕도 컸다.
“……성가시다고 하기엔 스스로 부른 재앙 아닌가?”
그 뒤에는 여전히 주저앉아 있는 금태양이 있었다.
위기의 순간 창천이 나타나 불에 타 쓰러지던 대들보를 베어내 위기에서 넘어간 것은 좋았지만, 애초에 창천이 제대로 움직였으면 될 일이었다.
“분명 놈들을 제압만 하라고 했는데. 꼴을 보니 어지간히 신이 났나 봐? 그러니까 놈들이 불 지르는 거 하나 못 막았지.”
“답지 않게 빈정거리는군.”
그도 그럴 것이, 지금 금태양의 입을 빌려 말하는 이는 홍령이었다.
“빈정이라니. 당연히 할 말을 하는 것뿐이야. 한 번만 더 이런 식으로 멋대로 굴면 더 이상의 치료는 없을 줄 알아.”
금태양의 얼굴을 한 홍령이 창천을 쏘아보았다.
비슷한 난치병을 앓고 있다는 점 때문인지 금태양은 창천에게도 물렀다.
내가 빙의했을 때 한 마디 해야지!
“……알았다. 명심하지.”
생각보다 순순히 말을 듣네?
홍령은 의아했지만 당장은 금태양의 상태가 우선이었다.
슬슬 빙의로 몸을 유지하는 것도 한계에 달하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과 환자들의 도움으로 화재 진화도 거의 마무리되어 가는 상황.
“방으로 돌아가야 하니까 부축해. 상태가 말이 아니야.”
창천은 순순히 금태양을 부축해 방으로 향했다. 방에는 신생만이 남아있었다.
“의, 의원님! 괜찮으세요?!”
신생이 기겁을 할 만큼 금태양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드러난 팔은 실핏줄까지 벌겋게 드러났고 태도가 산산조각 나며 옷이며 가면 따위를 넝마로 만들어 놓았으니까.
[더 심각한 건 내부의 상태야.]
“다들 나가줘. 창천은 호법을 서고.”
“내가 왜―”
“지금 판단이 안 돼? 이 상태로 내가 계속 입을 열어야겠어?”
까칠한 목소리에 창천이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가 자리를 비우자 홍령은 일단 금태양의 짐을 뒤졌다.
[이게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좌수검의 팔을 붙여준 이후 그 대가로 받았던 소림의 소환단!
금태양이 평소 복용하던 약도 못지않은 품질을 자랑했지만 지금은 그걸로는 부족했다.
몇 개의 환약과 소환단을 씹어 먹은 후 홍령이 금태양 몸의 상태를 살피며 자세를 잡았다.
[원래는 누워서 운공한다고 했지만, 지금은 그걸로는 안 돼.]
천소와공(天逍臥功).
편히 누워 하늘을 노닌다는 우아한 뜻을 가졌지만, 금태양은 편하게 ‘눕공’이라고 부르는 이 내가기공은 오로지 섭취한 내단과 약재의 기운으로 목숨을 연장시키는 데 초점을 둔 내공심법이다.
지금은 그 정도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금태양의 눈이 반쯤 감겼다.
[……좋아, 이거라면!]
내공심법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방법은 또렷하게 기억났다.
무엇보다, 지금 금태양을 구할 방법은 이것뿐이다!
몸속에 들어온 소환단과 내단의 기운들이 망아지처럼 날뛰기 일보 직전.
어떤 손길이 그 기운을 잡고 한 방향으로 인도하기 시작했다.
보통의 내공심법이 그러하듯 아래로, 아래로, 혈도를 타고 부드럽게 흘러 하단전을 만드는 곳으로 흘러가는 게 아니라.
위로.
또 위로.
무림인들이 상단전이라 부르는 그곳을 향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