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영의원-30화 (30/350)

30화

“대신 거마비는 제가 내죠. 곽 표두?”

“예, 도련님.”

“물건을 맡아 팔아주진 못해도, 표물 의뢰는 받을 수 있죠?”

“물론입니다. 어차피 저 치들과 가는 방향이 같으니 반의 반값으로 모시지요.”

“표국 지부의 창고에 물건을 임시 보관하는 비용도 포함해서?”

“아이고, 이제 보니 정말 금왕 어르신을 쏙 빼닮으셨습니다. 허허!”

아까는 셋째 형의 눈치를 보더니, 이 정도는 곽 표두의 재량으로도 가능한 일인지 참 호탕하게도 웃었다.

금왕표국의 창고에 보관하면 왕 씨가 무슨 딴 마음을 먹어도 수작질이 쉽지 않을 것이다.

“그건 그렇고, 장주께서 보내신 편지는 읽으셨습니까?”

“봤죠. 왜요?”

“장주께서 도련님 걱정을 많이 하셔서 말입니다. 보도도 잘 간직하고 계신 거 같군요, 하하.”

누님은 대체 곽 표두에게 무슨 얘기까지 한 거람.

어쨌든 이렇게 두 번 세 번 확인하는 걸 보니 용돈 깨나 쥐여 주신 모양이다.

“표두 어르신, 어서 출발하시지요! 난 다 준비가 되었어!”

왕 씨가 호들갑을 떨었다. 짐은 대체 언제 다 쌌는지 그 행동력이 놀라울 정도였다. 진짜 약장수 하기 딱인 타입이야.

“그러면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표사와 쟁자수들이 물건을 싣고 태양의원을 떠났다. 오는 길도 장관이었지만 가는 길 또한 구경거리가 된 탓에 마을 사람들이 또 북적였고 신생은 그 사이에서 열심히 활명탕에 대한 소문을 퍼트렸다. 마을 사람들도 소중한 고객이니까.

복작복작한 하루를 보내고 하늘에 땅거미가 지기 시작했다.

‘오늘 밤이라.’

나는 곽 표두가 떠나기 직전 몰래 건네주고 간 쪽지를 만지작거리며 어두워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달도 없는 밤.

밤손님이 오기 참 좋은 날이다.

* * *

뻐꾹, 뻐꾹―

밤을 알리는 새들의 소리가 고요한 마을에 울려 퍼졌다.

그 사이로 새 소리라고 하기에는 다소 이질적인 소리가 섞였다.

뻐뻐꾹 뻐꾹― 뻐꾹!

그것이 신호가 된 듯 각자 무기를 패용한 흑의인들이 날랜 몸놀림으로 태양의원의 장원에 발을 디뎠다.

“창천이라는 놈은?”

“안 보입니다.”

“표사들이 남은 흔적도 없고?”

“예, 샅샅이 뒤졌습니다. 남은 건 목표물뿐입니다.”

한 번 암호로 확인한 사항이었지만, 중요한 건인 만큼 이중 삼중으로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좋아, 가자!”

“예, 두령!”

흑의인들이 향한 곳은 바로 태양의원의 창고였다.

금왕표국이 실어 나른 최고급 약재가 쌓여있는 창고.

두령은 긴장을 늦추지 않으며 자신의 태도(太刀)로 낡은 자물쇠를 내려쳤다.

깡!

자물쇠는 힘없이 부서지고 그들 앞에 목표하던 물건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니까 이게 천금의 가치를 한다는 약재라는 거지? 어서 챙기자!”

두령의 명에 흑의인들이 각자 자루를 꺼내 약재들을 마구잡이로 챙겼다.

아니, 처음에는 마구잡이로 챙기다가 자신들이 챙겨온 자루가 약재를 전부 가져가기에는 무리라는 걸 깨달았는지 개중에서도 비싸 보이는 것들을 골라 챙기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 시간이 지체됐지만 한 식경이 되도록 아무 일도 없었기에, 재촉하던 두령도 마음이 조금 느슨해졌다.

“창천이라는 놈이 이 시간에 운공을 하러 자리를 비웠다더니, 별 일 없어서 좋구만.”

긴장이 가시자 두령의 눈에도 욕심이 번들거리기 시작했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척 봐도 고급스러운 목갑들이었다.

“저것들이 웬만한 대문파의 단약에 버금간다지? 저것만 있으면 나도……!”

두령의 머릿속으로 장밋빛 상상이 스쳐 지나갔다.

그들도 이 작은 현 내에서는 나름 주름잡는 비적 패거리였지만 동네를 벗어나면 이름 없는 흑도에 지나지 않는다.

작은 비적집단이 이름만 거창하게 붙여놨다고 뒤에서 손가락질 할까 봐 이름도 없을 무(無)를 썼다.

이름하야 무적단(無敵團), 그리고 두령은 스스로를 무패도(無敗刀)라 칭했다.

참으로 겸손한 이름이 아닌가?

하지만 이 단약을 복용해 내공이 한 단계 상승한다면 얘기가 달라질 것이다.

다른 현의 비적이나 산적, 흑도 따위를 두들겨 패 무릎을 꿇리고 세를 불려서 더 큰 야망을 향해 달려 나간다!

“우리도 이제 이 동네 미친 개보다 유명해질 때가 왔다!”

“아, 그러신가?”

그리고 그 미친 개가 나타났다.

창천은 바람 같았다. 스쳐 지나간 기척도 느끼지 못했는데 어느새 가득 쌓인 표물 위에 앉아서 그들을 고깝다는 듯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 어떻게! 분명 자리를 비웠다고 들었는데……!”

“보통은 그렇지. 그 망할 놈이 오늘은 자리를 지켜야 한다고 개 목줄 잡듯이 잡아두지만 않았다면.”

창천은 짜증을 숨기지 않았다.

“네놈들은 다 뒈졌다.”

그의 검이 소리 없이 허공을 가르며 뽑혀 나왔다.

“X됐다.”

비적단 중 누군가가 흘린 그 한 마디와 함께 창고 안에서는 비명 소리가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 * *

“창천 녀석, 잘 하고 있는 거야?”

나는 초조하게 방 안을 서성거리며 다시 한 번 쪽지를 읽었다.

「금왕표국이 떠나는 당일 밤. 표물을 노린 습격이 있을 겁니다. 부디 보중하시길.」

몇 번이나 읽어 구깃구깃해진 이 쪽지는 곽 표두가 내게 몰래 전하고 간 것이다.

왜 몰래 전했을까?

당연히 누군가에게 알려지지 않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내가 습격 사실을 알면 곤란해지는 자가 누가 있을까?

첫째, 당연히 비적단이다.

내가 습격 사실을 알면 비밀리에 강도짓을 하는 의미가 없다.

당연히 지금처럼 내가 만반의 준비를 갖춰둘 테니까.

하지만 곽 표두가 고작 이런 시골 비적단 두목의 사정을 봐줄 일이 뭐가 있겠는가?

혈연지연학연 따위가 있다고 생각해도 그건 아니다.

그렇다면 둘째, 곽 표두가 사정을 감안해야 하는―

[뭘 복잡하게 생각해요? 당연히 당신 셋째 형인지 뭔지가 사주한 거잖아요?]

……나도 안다.

그저 믿고 싶지 않을 뿐이지.

한숨이 나왔다.

정황이라는 게 그랬다.

곽 표두가 남의 이목을 신경 쓰면서 내게 알려줄 일이라면, 당연히 셋째 형이 비적단에게 돈 좀 쥐여 주고 강도짓을 하라고 시킨 거겠지.

이유는?

[강도짓 좀 하면 당신이 지레 겁먹고 돌아올 줄 알았나 보죠. 표사들 떠나자마자 일 났으니까 표국 쪽으로 마음이 쏠릴 거고. 또 알아요? 애초에 가는 척만 했다가 비적이 습격할 때 돌아와서 구해주는 척할지도.]

흠, 전자는 말이 되지만 후자는 좀 애매하다.

셋째 형은 그렇게까지 잔머리를 굴리는 타입은 아니거든.

그냥 겁을 주고 돌아오게 하거나 아니면 자기 표사들을 호위로 쓰라고 강요해 반쯤 자기 밑에 두려고 하겠지.

악의는 없다.

셋째 형 입장에선 그게 나를 위한 최선의 길이기도 할 거다.

곽 표두가 남긴 쪽지만 봐도 그렇다.

비적들은 ‘나’를 습격하는 게 아니다.

그저 창고를 털어 ‘태양의원’의 운영에 타격을 줄 뿐.

[와, 정말 짜증나네요. 진짜 싫다.]

그래서 창천은 잘 하고 있나 몰라.

가장 기가 차분한 새벽녘 산에 올라 운기행공을 하는 걸 모르지 않지만, 이번엔 쪽지를 보여주며 남아 있으라고 붙잡아 놨다.

어쨌든 녀석도 비적 놈들을 막는 데는 동의했지만.

―으악!

“어디 처참한 비명소리가 들리는 거 같지 않던?”

“맞아요. 엄청, 아픈 소리가 났어요.”

내 방에는 장 의원과 신생도 함께 있었다.

혹시라도 인원이 분산되어 있다가 놈들에게 인질로 잡힌다든지 하는 돌발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위급하지 않은 환자는 돌려보내거나 객잔에 잠시 신세를 지게 했다.

남은 환자는 내 옆방에 있는 몇 명이 전부.

오늘 밤 소란이 있을 거라고 미리 예고를 해뒀으니 어지간히 큰 사달이 나지 않는 이상 의원의 평판에 금이 가는 일은 없겠지.

“혀, 형님은 괜찮을까요?”

“괜찮겠지. 아무렴 미친개라 불린 세월이 얼만데. 너야말로 괜찮아?”

“전 괜, 괜찮아요.”

신생은 그 작은 몸에 이불을 둘러 싸매고 감기라도 앓듯 벌벌 떨었다.

길바닥에서 험하게 살아왔다고는 하나 본격적인 칼부림이 일어나는 건 역시 무서운 건지.

같이 있기를 잘 했다.

“그래서 언제까지 이 좁은 방구석에서 시커먼 사내들끼리 엉덩이 붙이고 있어야 하나? 방에 못 돌아가면 예서 좀 자도 되나?”

……장 의원은 혼자 둬도 될 뻔 했다.

[잠깐만요.]

응?

뭐야, 불길하게?

안 그래도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며 비명소리가 요란해서 찜찜한데.

[……불이에요.]

뭐? 불?

[한 놈이 불을 질렀어요!]

벌컥 문을 열자 창고 쪽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아직 큰 불로 번지진 않은 것 같지만 워낙 낡은 건물이라―

“무슨 일이에요? 큰, 큰일이라도 났나요?”

“웬 사달이냐? 저 연기는 뭐고?”

불은 초기에 진압해야 한다.

눈앞에 있는 것은 벌벌 떨고 있는 어린애 하나, 나이든 노인이 하나.

옆방에도 대부분 환자들이다.

혼자 가는 게 나아.

[당신도 환자거든요?]

그래도 내가 이곳의 주인인데, 어떻게 가만히 있어?

“잠깐 다녀올 테니 여기 계세요. 어디 가지 마시고요.”

나는 그대로 밖으로 나가려다가 다시 몸을 돌렸다. 그리고 허리춤의 태양보도를 끌러 신생에게 건넸다.

“비적들이 올지도 모르니까 갖고 있어. 없는 것보단 나을 거야.”

“떼잉, 그 어린 게 칼을 쓰면 얼마나 쓴다고. 내놔라. 내 갖고 있으마.”

장 의원이?

틀린 말은 아니긴 했다. 덜덜 떨고 있는 신생보다야 침착한 장 의원이 낫겠지.

당장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다.

장 의원에게 태양보도를 쥐여 주고 나는 서둘러 불이 난 곳으로 뛰어갔다.

“창천 이 녀석은 대체 뭘 하는 거야?! 제압만 하라니까!”

창고 주변은 온통 피범벅, 시체 범벅이었다.

환자를 보면서 피와 살에는 제법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도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그러나 눈앞의 불이 더 급했다.

서둘러 주변의 물동이를 가져다 활활 타고 있는 창고의 불을 끄고 있는데, 어디선가 격한 숨소리가 들렸다.

[조심해요!]

홍령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몸을 틀자 그 자리에 거대한 태도가 날아왔다.

쨍그랑―

물동이가 깨지며 물방울이 산란하고 거대한 칼날이 타오르는 불길에 번쩍였다.

그 앞에 피를 철철 흘리며 나를 노려보고 있는 자는 마치 구전설화 속에 나오는 도깨비나 악귀 같았다.

“허억, 헉…… 후, 숨어 있길 잘 했군. 가면을 쓴 거 보니 여기 주인이라는 그 도련님인가 보지? 해치지 않을 테니 얌전히 이 몸을 따라와라! 여길 벗어날 때까지만 인질이 되어주면 마을을 벗어나서 풀어주마!”

온통 피 칠갑을 하고는 저 당당한 반응하며 거대한 태도(太刀)까지.

보나 마나 저놈이 두목이다.

[뭐 해요? 빨리 도망쳐요!]

나도 그러고 싶다고.

도망쳐야 하는데, 발이 움직이질 않는 걸 어떡해?

다리의 떨림에 머리까지 울릴 지경이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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