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활명탕이라, 좋은 이름이군요.”
“그죠? 아무래도 상표가 필요할 거 같아서요.”
“저도 덕분에 목숨을 건졌으니 정말 딱입니다, 딱.”
뭘 숨기랴?
사실 이 약의 정체는 내가 현대에서 수시로 달고 살던 그 약, 병뚜껑을 따기만 해도 부채를 촤르륵 펴는 소리가 들리는 거 같은 소화제의 모조품이다.
대한제국 시기에 한 한의사가 서양의학을 접목해서 만든 소화제가 원조.
그때도 급체로 죽는 사람이 많았던 탓에 목숨을 구한다는 ‘활명’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그 수익금으로 독립운동 활동자금을 모았다는 얘기도 있고 아무튼, 원조를 존경하는 의미에서 나도 비슷한 이름을 붙였다.
[그런 얘기는 대체 어떻게 알고 있는 거예요? 그 집안 손자 같은 거였어요?]
설마.
그냥 한창 취업 시즌에 원서 넣고 면접 준비하면서 조사했던 잡다한 상식 중 하나일 뿐.
“그러면, 마셔보겠습니다.”
곽 표두가 긴장되는 얼굴로 밀랍을 뜯고 뚜껑을 열었다.
저 약은 일부러 햇볕 잘 드는 실온에 잘 방치해 놨다.
과연 상하지 않았을까?
“냄새는 멀쩡하군요. 어쩐지 산뜻한 냄새도 나는 것이.”
“제조법을 좀 더 손봤어요. 마셔봐요.”
꿀꺽!
잠깐의 망설임 직후 곽 표두는 단지 안의 약을 꿀떡 삼켰다.
그리고는 잠시 뒤.
“꺼어어억―”
[어휴, 효과가 좋은 건 알겠지만 너무 더럽네요.]
일부러 과장하는 거 같은데?
여기 있는 표사와 쟁자수들도 잠재적인 고객이니까.
“어휴, 속이 다 시원합니다. 맛도 깔끔하고 시원한 것이 입가심에도 좋네요.”
“박하를 추가해봤거든요. 어때요?”
“쉬지도 상하지도 않았습니다. 삼 일밖에 안 되긴 했지만 정말 이렇게 한 달만 유지되어도 좋겠는데요.”
“선선한 그늘에서 개봉 안 하고 보관하면 일 년도 가능할걸요?”
중원 무림에도 절임음식을 보관할 때 비슷한 방식을 쓰는 듯했지만, 탕약에 이걸 접목한 건 내가 처음일 거다.
가열을 이용해 진공상태를 유도하고 밀랍으로 빈틈없이 봉하기까지.
내가 가진 현대의 지식이 진짜 자산이 된 셈이다.
“흠흠, 표두 어르신. 좋은 거 혼자만 드시지 마시고 좀 나눠 먹으면 안 됩니까?”
“우리도 속이 좀 더부룩 한데 말이야―”
“자식들. 도련님이 거하게 쏘신 걸 먹고 소화가 안 된단 소리가 나오더냐?”
곽 표두와 내 대화를 듣고 있던 표사들이 은근슬쩍 몰려들었다. 나이 많은 쟁자수들도 어떻게 한 병을 마셔볼 수 있을까 싶어 기웃댔다.
“그러지들 말고 한 개씩 마셔봐요. 한 개에 동전 열 닢만 받을게요!”
“아니, 동전 열 닢이라니! 무슨 개소리요?”
갑자기 이 판에 어울리지 않는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어처구니없는 표정의 왕 씨가 삿대질을 하고 있었다.
“갑자기 뭡니까? 개소리라니.”
“거 의원님이 금을 만들어 놓고 똥값에 팔려고 하니까 하는 소리외다. 그런 물건이면 은을 받아도 아깝지 않을 텐데!”
진짜 그런가?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표사와 쟁자수, 그리고 은근슬쩍 잔치판에 껴들었던 마을주민 몇몇이 왕 씨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좀 더 올려 받아도 될 거 같아요. 지금은 표사들이 도와줘서 인건비가 안 들었지만 사람을 쓰면 그것도 꽤 비용이 들 거예요.]
맞다, 여긴 모든 게 수제작이지!
현대의 O쓰 활명O 가격만 생각하다가 큰 실수를 할 뻔했다.
가내수공업의 규모로는 공장 자동화, 대량생산의 단가를 절대 따라잡을 수 없으니까.
“그러면…… 은 반 냥?”
“반 냥! 그 정도면 나쁘지 않겠네.”
약간 비싼 거 같은데. 반 냥이면 대충 오만 원쯤 하지 않나?
[보통의 탕약에 비하면 싸다니까요! 게다가 집에 보관하고 있다가 필요할 때 바로 먹을 수 있잖아요?]
그래도 우린 후발주자잖아.
의원 이름을 붙인 약을 우리만 팔겠나? 무당의니 소림의니 하는 작자들도 다 판다.
탕약이 아니다 뿐이지 환약이나 산제로 된 소화제는 이미 시중에도 많다.
“결정했어요. 한 개에 은 반 냥, 세 개에 한 냥!”
진공 밀봉으로 일 년은 상하지 않는 상비용 탕약.
거기에 살 마음 없었던 물건을 왕창 사게 만드는 편의점의 천재적인 상술, 투 플러스 원 전략이다!
“세 개에 한 냥이면 가격이 어떻게 되는 거야? 은 삼분의 일 냥인가?”
“아니지, 두 개를 사면 하나가 공짜인 거지!”
“괜찮은데? 우리 셋이 사서 하나씩 나누는 건 어때?”
벌써 표사와 쟁자수들부터 반응이 왔다.
“활명탕 사실 분은 이쪽에 줄 서주세요! 한 줄로요! 활명탕 말고 다른 약도 있어요!”
신생이 눈치 빠르게 사람들을 줄 세우고 물건을 팔기 시작했다.
표사와 쟁자수들 말고도 마을 사람들도 은근슬쩍 줄을 섰다.
“어때요, 곽 표두? 이 정도면 나랑 손 잡아 볼 만하지 않아요?”
“그러게 말입니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탐이 납니다. 상당히…… 돈이 될 거 같습니다만.”
“같습니다만?”
“표국 일을 하면서 다른 일을 하는 건 금지되어 있어서, 역시 어려울 거 같습니다.”
아니, 때가 어느 땐데(?) 투 잡 금지야?
“셋째 형님 눈치를 보는 건 아니고?”
“간간이 잡일을 해서 돈을 버는 사람도 있기는 합니다만, 예, 아무래도 국주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처지라. 죄송합니다.”
곽 표두가 내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활명탕이 잘 팔릴 거 같다고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예상이지 확정된 수익이 아니다.
그 가능성 하나만 믿고 잘 다니던 직장을 때려치우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
하물며 내게 곽 표두가 매력적인 사업 파트너인 이유는 그가 금왕표국의 표두이기 때문이지, 개인의 능력과는 별개였다.
개인의 능력으로 친다면 오히려……
“엣헴, 우리가 함 팔아볼까? 자네가 제안한 것도 있고. 대도시에 가면 아주 불티 나게 팔리겠어.”
[뻔뻔하기가 정말 얼굴에 철판을 두른 거 같네요.]
호사가라고 한다면 저 정도 뻔뻔함은 기본이지.
하물며 이제부터는 약장수가 될 건데, 목청 크고 수다 잘 떨고 철면피인 건 약장수의 기본 소양이 아니던가?
“한 개에 은 반 냥, 세 개에 한 냥이라. 수익이 대단히 나오지는 않겠어. 여기서 가는 거마비며 그곳에 가서 보관하는 창고비며 우리들 숙박비랑 식비랑, 깃발도 하나 으리으리하게 걸어야지. 자네 대도시 좌판 가격이 얼마인지는 알아? 저거 삼백 개는 팔아야 좌판 값이나 낼까 모르겠네~”
허이구. 이 진상 또 시작이네.
“이보게, 자네 지금 어디서 수작질이야?”
“수작질이라니요, 곽 표두 나으리. 쇤네는 그냥―”
“여봐라!”
곽 표두의 한 마디에 술에 취해서 세일 분위기를 즐기던 표사와 쟁자수들의 눈빛이 변했다.
표국은 표물의 호위뿐 아니라 건물의 호위, 혹은 인물의 호위도 맡는단 얘기를 했던가?
길 위에서 사는 자들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들도 결국은 칼밥을 먹고 사는 무림인이다.
수십 명의 칼잡이들이 쏘아보는 눈초리에 왕 씨가 옴마야 하며 움츠러들었다.
“쇤네가 그리 큰 수익을 달라 얘기한 게 아닙니다요. 요만큼, 요만큼만 챙겨 주이소.”
왕 씨는 움츠러들면서도 손가락 세 개를 펴 보였다.
삼십 퍼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 그러면 요만큼…….”
손가락 두 개.
이십 퍼라, 나쁘지 않은 비율이지만……
“아이고, 도련님. 아무리 그래도 그 이하로 받아서 무슨 장사를 한다는 말이요? 차라리 굶어 죽고 말지.”
“수술비를 저렴하게 분납하는 셈 치고 그 정도 받는 게 나을 텐데?”
“수, 수술비요?”
“잘 아시죠? 원래 불법은 비싸요.”
왕 씨의 표정이 말라 비틀어진 버섯처럼 쭈글쭈글해졌다.
의맹이 금지한 수술을 찌르지 않겠으니 돈을 달라던 진상에게 오히려 역공을 펼친 셈이다.
“뒷간 갈 때 다르고 나올 때 마음이 다르신가? 참고로 그거 앞으로도 수술 경과를 살펴봐야 하니까 한두 번은 와야 해요. 나 말고 그거 할 수 있는 사람 없는데, 다른 데 가서 덧나도 난 모르는 일이고.”
“그, 그건……!”
왕 씨의 표정이 말라 비틀어진 버섯을 넘어서 시커멓게 변했다.
……음, 너무 심했나?
[그 복통으로 죽을 뻔한 고통을 겪은 사람이잖아요. 그 고통을 다시 겪는다는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끔찍할걸요.]
뭐, 이 정도면 소소한 복수 겸 으름장은 충분히 놓은 거 같으니까.
“잘 생각해보세요. 제가 이것만 팔 거 같아요? 앞으로 어떤 대박 상품을 만들어낼지는 아무도 모른다고요. 지금부터 저와 좋은 관계를 쌓아두면―”
나는 적당히 말을 흐렸다.
원래 사람의 상상력과 호기심에 불을 붙이는 데는 말을 하다 마는 것만큼 효과적인 게 없다니까.
거기에 내가 금왕의 막내아들이라는 사실이 충분한 장작이 되어줄 것이다.
“혓바닥만으로 먹고 살기는 솔직히 힘들잖아요. 제가 제안을 하는 것도 다 사모님이 인맥이 넓고 말솜씨가 수려한 분인 걸 잘 알아 그런 겁니다. 한 푼 안 받고 팔아준다고 해도 무능한 사람한테는 안 맡겨요.”
이제 상처에 약 좀 바르고 살살 비행기 좀 띄워주면―
“크흠, 흠! 역시 금가장의 도련님이라 그런가 보는 눈이 있으시구만?”
“아무래도 그런 편이죠?”
“좋아, 내 함 힘 써보지! 이번 물건은 돈 되는 대로 다 돌려 보내드리겠네!”
호오? 자기 마진을 한 푼도 안 남기겠다고?
“금왕의 안목을 물려받은 도련님이 이 사람을 선택했으니 그 값을 해야지. 대신 다음부터는 꼭 받을 거야, 알았어?”
“그럼요. 잘 되면 전속 계약도 고려해볼게요.”
말로는 무슨 말을 못 하랴.
“신생, 활명탕 얼마나 남았어?”
“표행단 분들이 사가신 게 스물두 개, 아직 아흔 개 가량 남았어요.”
“딱 아흔 개 가져가면 되겠네. 은으로 서른 냥, 선불입니다.”
“서, 선불?”
“그럼 제가 뭘 믿고 떡하니 물건을 드려요? 우리 이번이 첫 거래입니다?”
“끄응, 다 못 팔면 정말 거리에 나 앉겠구만. 기다려보게!”
왕 씨는 제 짐을 가져오더니 소지금을 싹싹 긁어모아 내 앞에 묵직한 전낭을 내어놓았다. 현금이 부족하다며 돈 될 만한 금붙이 따위도 염가로 쳐 내놓았으니 실제로는 더 비싼 값을 받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