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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의원-28화 (28/350)

28화

[당신, 부잣집 도련님이라 항상 주치의가 대기하고 있어서 몰랐나 본데요. 약은 제형에 따라 탕약과 환약, 산제(散劑)가 있어요. 그중 탕약이 제일 비싸고요.]

“효과에 있어서 비교가 안 됩니다, 도련님. 저희 같은 사람들은 늘 길 위의 삶을 살기 때문에 느긋하게 탕제를 달여 먹을 환경이 안 돼 산제 같은 가루약이나 환약을 들고 다녀야 합니다. 하지만 탕약은 약효만을 끓여내는 거고 산제나 환약은 약재를 갈아서 먹거나 뭉쳐놓은 게 아닙니까.”

아하, 흡수율이 다르겠군?

흡수율이 다르면 효과도 다르다.

죽과 밥, 떡을 생각하니 이해하기 쉽다.

죽은 소화가 잘 되어 몸에 즉각적으로 에너지를 주지만 밥과 떡은 위장이 소화해서 몸이 쓸 에너지로 변형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고질병이나 시간을 두고 치료하는 병은 환약이나 산제를 써도 괜찮아요. 지금처럼 빠른 효과가 필요할 때는 탕약이 최선이지만요.]

달이는 데 한두 시간에서 길게는 며칠씩도 걸리는 탕약이 급한 상황에서 최선이라니, 이런 아이러니가 있나.

“집에서 달여 먹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의원이 직접 달인 것과 효과가 차이가 나니 가격이 다를 수밖에요.”

현대에도 보험이 되는 약과 안 되는 약의 가격 차이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수준이긴 하다.

이곳 중원은 현대만큼 대량생산으로 단가를 절감할 수 없으니 더 비싸겠지.

그런 약을 자기 월급을 써가며 다친 부하들을 돌보는 사람이라……

누군가는 미련하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인정이 있고 신뢰할 만한 사람이다.

좋아. 이 사람으로 하자.

“곽 표두, 혹시 부업 하나 할 생각 없어요?”

“예?”

원래도 탕약을 개발하던 건 돈을 벌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얘기를 들어보니 생각 이상의 대박 냄새가 난다!

“설마…… 제게 그 탕약을 도시로 가서 팔라는 말씀이십니까?”

“맞아요. 마침 내 물건 내리고 빈 수레도 있잖아요.”

“말씀은 감사하지만, 그건 좀 어려울 거 같습니다.”

“왜요, 탕약이라서요? 환약이나 산제처럼 운반할 수가 없으니까?”

“예, 그렇습니다. 그릇에 담아 옮긴다 해도 쉽게 상해버릴 테니까요. 아, 혹시 고약으로 만드실 생각이십니까? 아무래도 환이나 산제보다는 낫지만…… 그런 종류의 소화제는 이미 시중에 파는 의원들이 있습니다. 이제 와 시장에 진입하기는 쉽지 않으실 겁니다.”

[이미 내가 다 했던 얘기들이네요.]

홍령이 심드렁하게 중얼거렸다.

탕약을 상품으로 만들어 팔겠다고 했을 때 홍령도 나를 저렇게 말렸다.

“상하는 문제만 해결된다면 상관 없죠?”

“예? 그, 그렇습니다만. 그게 가능할 리가 없습니다.”

“아뇨, 가능해요.”

내가 너무 당연한 듯 얘기해선지 곽 표두는 벙찐 표정을 지었다. 뭐라고 더 하고 싶은데 내가 생명의 은인이라선지 아니면 금가장의 도련님이라 그런지 말을 참는 눈치였다.

“대신 곽 표두가 좀 도와줘야 해요. 일손이 필요하거든. 이삼일이면 돼요.”

곽 표두는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표사들을 빌려드리죠. 하지만 저는 이걸 직접 팔아드릴 수는 없습니다. 국주님이 아시면 경을 칠 겁니다.”

이런. 그쪽이 문제군.

표두급이라 시장 상황에 빠삭한 곽 표두가 탐이 났지만 어렵다면 어쩔 수 없다.

안 그래도 불같은 셋째 형님 성격에 곽 표두가 나랑 손을 잡고 부업을 한다면 당장에 그의 밥줄이 끊길 수도 있는 일.

내가 그에게 부업을 제안한 건 그가 금왕표국의 표두이기에 빛을 발하는 것이니까.

몰래 하자고 설득할 수도 있겠지만 저렇게 인정이 있는 사람이라면 표국과 셋째 형님에게도 의리를 지키려고 할 테니, 무리하지 않는 게 좋겠지.

“다른 방법도 생각해뒀으니 괜찮아요. 그럼 내일 아침 일찍 표사들을 모아주세요. 일당은 많이는 못 줘도 적잖게 챙겨줄게요.”

“아, 아닙니다! 숙박비에 식비에, 술값까지 내주셨는데요. 녀석들도 도련님이 도와달라 하시면 제깍 달려올 겁니다!”

음, 후회할 텐데.

[후회할 텐데요.]

그치?

* * *

금왕표국의 표사와 쟁자수들은 막내 도련님을 도와야 한다는 표두의 말에 다들 발 벗고 나섰다.

사실 그들이 생각한 ‘도움’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기껏해야 다 낡아 보이는 장원 수리나 도울까?

그런 생각으로 장원 마당에 모인 표사들 앞에서, 금태양은 손가락을 들어 가리켰다.

마을을 둘러싼 산을.

“벌집이 필요합니다. 있는 대로 다 따오세요.”

벌집!

이 도련님이 단 것을 먹은 지 오래되었나? 갑자기 벌집이라니?

어쨌든 꿇으라면 꿇어야 했다.

아무리 금 금태양은 금가장의 일원이니까!

“아악! 이놈의 벌침!”

“벌집 최대한 안 상하게! 연기를 더 피워!”

칼밥보다 길밥을 먹은 경력이 긴 이들이다보니, 개중에는 벌집을 따는 법을 아는 이들도 있었다.

그들이 표사들을 진두지휘하며 온 산을 이 잡듯이 뒤지자 제법 많은 숫자의 벌집이 모였다.

그러나 일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부셔서 꿀은 따로 빼고, 밀랍만 추려 녹여주세요!”

“솥에 물을 붓고 장작을 때요!”

“아낙들이 가져온 병을 전부 담갔다 빼요!”

이리저리 정신없이 일을 시키는 와중에 금태양도 약을 달이느라 분주하게 뛰어다녔다.

일시키는 당사자가, 그것도 몸이 허약하기로 유명한 막내도련님이 땀을 뻘뻘 흘리며 뛰어다니는데 건장한 표사며 쟁자수들이 농땡이를 피울 수 있을리가.

뜨거운 물에 소독한 병을 뒤집어 놨다가, 펄펄 끓는 탕약을 적당히 담아 뚜껑을 닫고 밀랍으로 밀봉!

“좋아, 병조림 완성!”

“이렇게 하면 정말 안 상한단 말입니까?”

“그렇다니까요. 날 믿어봐요 곽 표두.”

그러나 곽 표두 외에도 표사며 쟁자수들도 미심쩍은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보통 탕약은 며칠 안 가 상한다고 했죠?”

“예. 요새 날씨면 삼일도 안 되어 쉬어버릴 겁니다.”

“좋아요. 그럼 이걸 삼일 후에 개봉해보죠. 그 날이 떠나는 날이죠?”

곽 표두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금태양은 자신이 있었다.

통조림까지는 아니어도 병조림은 현대 가정에서 잼 따위를 만들어 보관할 때도 사용하는 간단한 방법이다.

나폴레옹이 전쟁을 할 때도 사용했다니 이 정도 도자기 병으로도 충분할 터.

깨지는 게 문제긴 하지만 초특급 일류 표국인 금왕표국의 물류 시스템이라면 안전할 거다.

금태양과 금왕표국의 사람들이 한창 소화제를 병조림으로 만드느라 분주한 사이.

“……헉, 허억! 내가 살아있나? 배, 배는?”

수술 이후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왕 씨가 번쩍 눈을 떴다. 한창 진맥을 보고 있던 장 의원이 핀잔을 주었다.

“거 호들갑은. 잘 살아있고 수술도 잘 된 거 같으니 그만 누우쇼. 맥도 괜찮구만.”

“아이고, 정말 죽는 줄 알았네. 의원 님은 어디 계시오?”

“의원 여기 있소만.”

“아니, 당신 말고. 그 가면 쓴 의원님 말이외다.”

내가 진짜 가면을 하나 짜든지 해야지! 장 의원이 투덜거리며 턱짓으로 바깥을 가리켰다.

“뭐 새로 약을 만든다던데. 상하지 않는 탕약이라나? 만들어서 팔 생각인가 보더만.”

“상하지 않는 탕약?”

그 말에 왕 씨의 눈이 번뜩 떠졌다. 탕약이 상하지 않는다고?

본래 소문을 여기저기 떠들고 다니는 것으로 밥과 술을 얻어먹는 호사가인 그다.

왕 씨는 금태양이 제조하는 약의 가치를 곧바로 알아차렸다.

“어휴, 병만 잘 고치나 했더니 여러모로 재주가 뛰어난 의원님이었구만.”

“뭐, 신통방통하긴 해. 의맹의 높은 분들도 어렵다고 하던 수술을 저 어린 놈이 잘도 한단 말이지.”

금태양의 실력에 대해선 이제 장 의원도 한 수 접고 들어갔다.

그 어린 게 의맹 산하의 교육을 거치지도 않고 그런 실력을 쌓았는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헌데 당신은 낯이 좀 익소이다? 혹 건넛 마을에 신통의원인가 뭔가 하는 곳에서 의원질 하던 자 아뇨?”

“내 신통의원의 주인은 맞네만, 의원질이라니!”

“커험. 거 보나 마나 의원이 망해서 이곳에 굴러들어온 모양인데 젊은 의원님이라고 무시하지 말고 잘 배우시구려. 누가 알겠소? 저 의원님께 신통한 수술 실력을 전수받으면 다시 그 자리를 찾을 수 있을지?”

“……잠깐, 그 자리를 다시 찾아? 그게 무슨 소리요?”

“내 이 마을에 오기 전에 들렀는데 새 현판을 달고 있더만. 듣자하니 의맹에 회비를 여러 번 연체했다지? 다른 의원이 그 자리에 영업권을 받은게지.”

장 의원의 낯이 파랗게 질렸다. 조상 대대로 이어온 의원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현판이 내려갔다니!

“젠장, 이게 다 저놈 때문이지!”

병실을 나온 장 의원이 금태양을 쏘아보았다. 저놈의 간악한 술수에 얽혀 어찌저찌 이곳에 머무르는 사이 평생의 가업이 날아갔다. 그는 어떻게든 이 일을 해결해야만 했다.

* * *

금왕표국 제 칠각 십칠 표행단이 떠나는 날.

태양의원의 마당에서는 때 아닌 잔치가 벌어졌다.

“자, 많이들 먹어요! 먼 길 떠나려면 잘 먹어야지!”

“도련님, 감사합니다!”

“우리 금태양 도련님의 무병장수를 빌며! 건배!”

아닌 게 아니라 내가 연 소박한 송별회였다.

돼지도 잡고 소도 잡고 산 중턱에서 표사 하나가 잡아온 노루까지 구워 낸 데다 온갖 기름진 튀김과 면, 떡 따위가 상에 올랐다.

고급은 아니어도 넉넉한 술까지 곁들였으니 표사와 쟁자수들이 배를 통통 두드리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어때요, 슬슬?”

“안 그래도 말씀드리려던 참입니다. 거북하네요.”

곽 표두가 썩 불편한 기색으로 명치께를 눌러댔다.

급체가 내려간 지 삼 일밖에 안 된 사람이 기름진 음식에 밀가루를 욱여넣었으니 당연한 결과.

현대였으면 의사가 짜게 식은 눈으로 봤겠지.

“자, 그러면 하나 따 볼까요?”

나는 미리 준비한 약을 건넸다.

손바닥 반만 한 작은 크기의 단지는 밀랍으로 뚜껑이 단단히 봉해져 있었고, 부적 같은 종이에 <<태양의원 활명탕>>이라는 한자를 목판으로 찍어 붙여놓은 것이 내가 봐도 그럴싸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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