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발상을 떠올리자 행동은 금세였다.
홍령은 잘 보이지도 않는 개복 내부를 유심히 보더니 이내 몇 군데에 휘광처럼 침을 놓았다.
“호오? 피가 좀 멎은 거 같은데? 무슨 짓을 한 게야?”
좋아, 지금이다!
서둘러 남은 피를 닦아 지혈한 후 맹장의 위치를 찾았다.
[이거죠?]
대장으로 추측되는 장기 밑에 벌레처럼 매달려 있는 것.
터져버린 구멍에서 누런 농이 꿀럭꿀럭 새어나오고 있었다.
이대로 방치했더라면 저 염증 덩어리가 장 전체에 퍼져 복막염에 걸렸을 거다.
그가 있었다면 점혈을 통해서 쏟아지는 피를 쉽게 지혈할 수 있었겠지만 그게 아니니 시간을 단축하는 것이 최선이다.
홍령이 빙의한 손이 전광석화처럼 움직였다.
세심한 손길이 이어지는 동안 나는 적나라한 수술 장면에 토하지 않으려 애썼다.
아냐, 익숙해져야 해.
의원으로 살아가게 되었으니 이 정도는 눈도 깜빡하지 않을 정도가 되어야 한다.
하물며 나는 금가장을 나와 풍파와 같은 무림 세상에 떨어진 상황.
언제 내가 칼을 들어 누군가의 목숨을 취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의, 의원님! 급한 환자예요!”
신생이었다. 급한 환자라고?
우리가 긴급 수술에 들어간 걸 알고 있는 신생이 환자가 있다고 할 정도면 정말 급한 모양인데―
“본원이 나갈까?”
“아뇨. 장 의원님도 지금은 못 나가십니다.”
의원이 하나도 아니고 둘이나 있는데 수술 하나가 시작되면 긴급 환자를 볼 수가 없었다.
과정이 간단하다고 하지만 나도 받아본 경험이 있을 뿐이고 홍령도 처음인 방법이다.
끝날 때까지 신중해야한다.
[신생이 보조를 맡으러 들어온다 해도 소독을 하느라 시간이 지체될 거고, 저 돌팔이만큼의 속도는 안 나올 거예요.]
“도, 도련님― 억! 제발 살려주십쇼, 크억!”
[아까 왔던 그 표사예요. 곽 표두라고 했나요?]
곽 표두라고?
아까까지는 멀쩡해 보였던 사람이 갑자기?
“신생, 곽 표두가 어때 보여?”
“머리가 엄청 아프시대요! 식은땀도 나고요! 명치가 쿡쿡 쑤시신대요!”
“손은, 차가워?”
“얼음장 같아요! 아, 체하신 거 같대요!”
[급체군요. 손도 따본 모양인데 효과가 좋지 않았나 봐요. 빨리 손 쓰지 않으면 위험할 거예요.]
급체!
“신생! 뒤뜰에 달여놓은 약 중 두 번째 탕약기에 있는 것을 먹여! 빨리!”
[아, 그거!]
마침 시험해 보던 탕약 중에 급체에 효과가 탁월한 약이 있었다.
이렇게 바로 쓰게 될 줄은 몰랐지만.
“서두르죠. 약효가 돌아도 방심하면 안 되니까.”
밖에서는 바닥에 드러누운 곽 표두가 아파 죽겠다는 소리, 신생이 허둥지둥 약을 가져오는 소리, 아닌 밤중에 웬 홍두깨인지 의아해하며 일어난 환자들의 웅성대는 소리까지 온갖 소란이 들려왔다.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 한다.
비록 수술은 홍령이 하고 있지만, 그녀가 깃든 것은 나의 몸.
내 몸의 긴장과 떨림은 그녀에게 방해만 될 뿐이다.
[조금만 하면 돼요, 조금만 더!]
노랗게 염증에 물든 맹장과 장 사이를 간격을 두어 두 번 단단히 묶고, 불에 달군 칼로 절제.
농과 피를 닦아내고 환부를 봉합한다.
[끝났어요.]
“끝났습니다, 수고하셨어요.”
환부를 꿰맨 실을 끊어내자 밖에서도 기다리던 소식이 들렸다.
끄윽.
꺽.
꺼억―!
“거 트림 소리 한 번 요란하구만.”
“체한 사람이 트림을 했다면 다 나은 거죠.”
피범벅이 된 겉옷을 벗고 가면을 고쳐 쓴 후 수술방을 나가자 곽 표두가 얼이 나간 얼굴을 하고 있었다.
“곽 표두, 괜찮아요?!”
“아, 네! 괜찮습니다! 손을 따도 말을 듣지 않더니, 이 의생이 가져온 약을 먹었더니 갑자기 쑥 내려가는군요?”
“휴, 다행이다. 효과가 제대로 들었군. 그래도 혹 모르니 맥은 봅시다. 수술 직후라 피가 많이 묻어서 씻고 올 테니 저쪽 방에서 기다려요.”
팔자에도 없는 수술에 진이 쪽 빠졌다.
아니, 전생에 받았으니까 팔자에 있긴 하지. 하지만 그땐 내가 맹장 수술을 받는 쪽이었고 이번엔 내가 수술을 집도하는 쪽이었으니까.
그래도 곽 표두 상태는 봐줘야 하니까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손과 얼굴을 씻어냈다.
“와우, 손 떨린다.”
긴장한 탓이겠지.
몸을 빌려주는 것에 불과한데도 이렇다니. 한심하긴.
[처음 수술대에 선 의생은 더한 경우도 많아요. 당신은 담력 쪽으론 재능이 있어요.]
칭찬 고맙네.
하긴, 지난달까지만 해도 자리보전을 면치 못하던 신세였는데. 이 정도면 과분하다.
[게다가 당신이 아니었으면, 그걸 수술할 수 있다는 생각도 못 했을걸요?]
“난 그냥 수술받은 경험이 있을 뿐이야. 내가 네게 얘기해주는 건 어디까지나 상식 선의 얘기고.”
내가 아픈 적이 있다 보니 보통보다는 관련한 경험이 있을 뿐, 전문가는 아니니까.
물론 나도 안다.
단순해 보이는 발상의 전환,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내가 알고 있는 현대의 상식. 그건 긴 역사 동안 수많은 천재들이 발상의 발상을 역전해 쌓아 올린 것들.
지금 이 시대에는 ‘절대 당연하지 않은 사실’들이다.
[재능이 아니라면 자산이라고 생각해요. 그건 당신의 자산이에요.]
그래, 이건 내 자산이다.
내가 성공하기 위한 발판.
타인의 성취를 손쉽게 갖다 쓰는 느낌이 들긴 하지만, 그로 인해서 이 중원무림의 의료 사정이 나아진다면 그들도 기뻐하지 않을까?
그들이 알 일은 없겠지만 말이다.
“태양 도련님, 그 약이 대체 뭡니까?”
진료실로 돌아오자마자 곽 표두가 물었다.
“그렇게 궁금해요? 일단 맥 좀 보고요.”
“그야 궁금할 수밖에요. 황천길 가는 줄 알았습니다. 헌데 그 탕약을 마시고 나니 갑자기 속이 시원하게 내려가면서, 턱 막히던 숨이 한 번에 뻥 뚫리더라니까요?”
[너무 조잘대면 맥을 짚기 힘든데. 뭐, 말하는 걸 보니 상태는 괜찮은 모양이네요.]
나도 곽 표두가 이렇게 말이 많은 사람인 줄은 처음 알았다.
오며 가며 한두 번 인사나 했을 뿐이라, 그때는 딱딱하고 사무적이었는데.
“……그런데 도련님.”
한참을 죽다 살아났다며 천하명의라도 보듯이 눈을 반짝이던 그가 급 목소리를 낮췄다.
“음? 왜 그래요?”
“그, 얼맙니까? 그 약은……?”
“왜요, 비쌀 거 같아요?”
“그야 그렇지 않겠습니까? 죽어가던 사람을 한 방에 고친 만병통치약이 아닙니까. 정말 죄송하지만 혹 값을 지불할 수 없다면 제가 몇 달에 나눠서라도―”
“에이. 그렇게 안 비싸니 걱정 마요.”
사용한 재료가 고급이긴 했지만 많이 안 썼다.
탕약기 하나에 한 첩 넣어 우린 거였고, 그중에 반 그릇 정도를 먹였을 뿐이니.
“가성비가 꽤 괜찮은 편이죠.”
“괜찮다마다요! 효과도 좋은데 가격도 합리적이라니 그보다 좋을 수가 없지요! 마음만 같아선 항상 상비해 들고 다니고 싶습니다. 표행길에서 급체 때문에 픽픽 쓰러져 앓다가 죽어가는 놈이 일 년에 한두 번은 꼭 있을 정도라…….”
호오?
다른 쪽으로 다리를 놓으려고 했는데, 이쪽도 괜찮아 보이는걸?
나는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렸다.
원래는 입소문에 강한 호사가 왕 씨와 적당히 타협을 해서 그에게 약을 파는 일을 대행 맡기려고 했다.
하지만 덥썩 물건을 맡기기에 왕 씨는 영 믿음직하지 못한 자.
다 죽어가던 걸 살려놨으니 깨어난 이후에 태도가 어떨진 모르겠지만……
일단 내 눈앞에 나에 대한 강력한 신뢰와 금가장의 식구라는 끈끈함까지 곁들인, 제법 괜찮은 사업 파트너 후보가 나타났다.
어디 한번 운이라도 띄워볼까?
“그런데, 곽 표두. 형님이 돈 많이 안 줘요? 표두쯤 되면 돈 꽤나 벌 거 같은데 약값 같은 걸 걱정하고.”
“예? 아, 그게…….”
“뭔가 사정이 있으면 얘기해 봐요. 혹시 아나, 내가 얘길 듣고 마음이 약해져서 약값을 깎아줄지.”
싸게 해준다는 말이 그의 마음을 움직였는지, 곽 표두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도련님께는 낯선 얘기일 겁니다. 저희같이 칼밥을 먹는 자들은 늘 부상의 위험이 있지요. 표사는 다른 일들에 비하면 그래도 벌이가 좋은 일이지만, 다치면 번 돈이 그대로 치료비로 들어가기 마련입니다.”
“표국에서 고용한 의원 같은 건 없어요? 전담 의원은? 표행 중에 다치면 좀 싸게 해준다든지, 공짜로 해준다든지. 그런 계약을 한 의원도 없고?”
“어느 표국이 그런 걸 해주겠습니까. 표국이야말로 수많은 사업 중 가장 비용이 많이 드는 일인데요.”
물론 현대에서도, 유통물류는 일은 많고 사람도 많이 써야 해서 고정비가 크지만 크게 수익이 나는 일이 아니긴 하다.
이건 유통물류업에 경비업까지 포함한 개념이니 더욱 이익의 폭이 적겠지.
거기에 산재 지원까지 해주면 순익이 더 떨어질 거다.
……그래도 좀 그렇네.
중원 제일 표국이라고 하니 기본 복지 정도는 챙길 줄 알았는데.
“역시 표두쯤 되면 다칠 일이 많나 봐요. 제일 앞장서서 그런가?”
“아뇨, 제 치료비가 아닙니다. 제 부하 녀석들…… 멀쩡히 표행 다니는 놈들이야 벌어서 의원에 가면 되지만, 더 이상 표행을 하지 못할 정도로 다친 놈들이 있습니다. 표행이 아니라 다른 일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부상을 입은…… 그놈들 약값이 꽤 듭니다.”
“그것도 표두의 일이에요?”
“그냥 제가 마음 불편해서 하는 일입니다. 한두 놈이 아니기도 하고, 아시다시피 약이라는 게 워낙 비싸다 보니.”
곽 표두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이 중원무림에서 약이라는 게 그렇다.
결코 저렴하지 않다.
무림인이라면 필수로 들고 다니는 금창약마저도 효과가 있는 것을 사려면 돈깨나 들어간다나.
현대의 후O딘이나 마O카솔의 가격과는 절대, 절대 비교할 수 없다.
슬픈 건 효과도 그만큼이 아니라는 거지만.
“곽 표두가 원래 생각했던 가격은 얼마예요? 아까 먹은 탕약 말이에요.”
“은 서른 냥은 생각했습니다.”
“엥? 너무 과한데요. 솔직하게 얘기해 봐요.”
“진짭니다. 그거 한 그릇으로 끝나는 게 아닐 거잖습니까? 앞으로 한 제는 먹어야 하지 않나요?”
이런, 오해가 있군.
“아뇨, 한 그릇이면 돼요. 그 이상 먹기엔 좀.”
“그, 그렇습니까?”
“가격도 대충 한 그릇에 동전 이삼십 개면 될 거 같은데.”
“예? 그치만 탕약이잖습니까?”
“탕약이면 뭐가 달라요?”
[당연히 다르죠!]
“다릅니다!”
홍령과 곽 표두가 동시에 쩌렁쩌렁 외쳐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