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어쩔 생각이지?”
[어떻게 할 거예요?]
신생이 왕 씨를 데리고 나가자 곧바로 질문이 쏟아졌다.
“이럴 때마다 묻지만 말고 너도 생각이란 걸 좀 해보지그래?”
[그, 그렇네요. 내가 생각이 짧았어요.]
아니, 홍령한테 하는 얘기가 아니었는데?
홍령은 그럴 수 있다. 아직도 기억이 온전하지 못 한데다가 새로 생전의 기억을 떠올려도 주로 의술에 관한 것이니까.
“제풀에 지쳐 나가떨어지게 할 생각인가?”
“설마. 한 달 가지곤 어림도 없을걸? 저건 애초에 작정하고 온 진상이라고.”
“아니면 일단 요구를 들어준 후 저자가 친구들을 만나서 멀쩡함을 암시한 이후에 처리하려는 건가?”
“그렇게 멀리까지 출장 나갈 생각은 있고? 이런 시골에서야 한두 사람 사라져도 모르지만 도시에서는 얘기가 달라.”
[앗, 혹시! 저 사람을 이용할 생각인가요?]
그래도 홍령이 창천보단 좀 낫네.
“나쁜 쪽으로 소문을 흘리는 데 능하다면 좋은 쪽으로 소문을 흘리는 데도 능하겠지. 저 사람은 진상을 부리는 게 목적이 아냐. 돈이 목적이지.”
“돈만 맞는다면 얼마든지 손을 잡을 수 있다 이건가?”
“비용이 문제겠지만.”
좋은 말을 퍼트리는 건 나쁜 말을 퍼트리는 것보다 배는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어려운 일은 항상 더 비싼 비용이 요구된다.
본래부터 홍보를 목적으로 하는 거라면 모를까, 악의를 갖고 접근했으니 아마 그 비용은 몇 배가 들 것이다.
애초에 괜찮은 자를 구하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이런 시골에선 그런 사람을 구하러 가는 비용이 더 들 테니까.
기왕 온 기회를 잘 써먹어 봐야지.
[밖이 소란스러운데요?]
홍령이 말하기도 전에 창천은 벌써 밖으로 몸을 날린 상태였다.
“슬슬 그게 올 때가 됐지.”
[아! 맞아요. 서찰이 왔었죠! 그게 오늘 즈음이었네요. 바빠서 까맣게 잊고 있었어요.]
큰형님이 나를 감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보냈던 금가장의 그림자, 은 파파.
은 파파가 돌아가고 얼마 안 되어 집에서 서찰이 왔다.
안부를 묻는 인사 따위는 없이, 용건만 적어 보낸 심플한 내용.
그 ‘용건’이 도착하는 날이 오늘이었나 보다.
“문을 여시오! 길을 비키시오!”
밖은 이미 문전성시였다.
장날이라 아침부터 사람이 많긴 했지만, 그땐 분명 사람만 많았다.
근데 지금은……
“세상에, 마차가 몇 대야?”
“실려 있는 짐은 어떻고? 어마어마한 양이구만.”
“이 시골에 웬 표국이지? 어디서 많이 본 문양인데.”
마을 사람들이야 거의 동네를 벗어나 본 적이 없으니 아는 표국이 있을 리가 없고, 그나마 저것이 표행단이라는 걸 알아본 자들도 여기저기 마을을 다니며 물건을 파는 장돌뱅이들이었다.
그중에서도 큰 도시로 장사를 다니는 한두 명이 눈을 크게 뜨고 외쳤다.
“설마, 금가장?”
“맞아! 금왕표국이다!”
“금왕표국? 아니, 금가장 하면 그 천하제일부호라는?”
“그런 곳에서 왜 이런 시골에 물건을 나르러 왔지?”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와중에도 금왕표국의 표사들은 절도 있게 움직였다.
수 대의 마차에 금색 깃발이 휘날렸고 쟁자수들이 표사들의 지시에 따라 마당 한 귀퉁이에 짐을 하역했다.
이런 작은 동네에서는 그것만으로도 보기 드문 장관이었던지라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점차 몰려들어서 태양의원의 대문 앞은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이보게, 저게 다 뭔가?”
언제 왔는지 장 의원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나는 대답 대신 빙긋 웃으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잘들 지냈어요?”
물건을 하역하던 이들도, 경계를 서며 지시를 내리던 이들도 일제 동작을 멈췄다. 그리고는 날 향해 절도 있는 자세를 취해 보였다.
“금왕표국 제 칠각의 표행단이 도련님을 뵙습니다!”
어릴 때, 그러니까 21세기의 기억을 가지고 금가장의 막내로 태어난지 얼마 안 됐을 때는 이런 게 참 어색했는데 말이지.
이젠 금태양으로 살다 보니 대충 익숙해졌다.
“곽 표두. 오랜만이네요.”
“예. 도련님께선 건강해 보이시는군요. 정말 다행입니다. 전에 서찰로 전했다시피 도련님께서 복용하셔야 할 약재 반년 분을 가져왔습니다.”
“반년이라…… 좀 많아 보이는데? 두 달분 정도 더 있는 거 아닌가?”
“하하, 눈치가 비상하시군요. 예비용으로 넉넉히 들고 왔습니다.”
“내가 이 약들 먹은 세월이 얼만데.”
“직접 확인해보시겠습니까? 여기 장부입니다.”
이걸 다?
물론 내가 복용해야 할 약이니 물량이 맞게 왔는지 직접 검수하는 게 맞는 일이긴 하지만 너무 많은데.
“거, 물건을 확인해야 한다고?”
때마침 장 의원이 거드름을 피우며 끼어들었다.
[안에 뭐가 들었는지 궁금한 모양이네요.]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는 앞이니 비싼 약재를 눈앞에서 쓱싹하진 못하겠지.
실력이며 인품이 출중하다고는 못하겠지만, 같이 일하면서 지켜본 장 의원은 의원으로서 기본은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무당 속가의원 출신이라고 하니 귀한 약재를 구분하거나 검수하는 정도는 할 수 있을 터.
“부탁드릴게요, 장 의원님. 꼼꼼하게 해주세요.”
“알았다, 큼큼!”
[어휴, 저렇게 좋을까? 당신이 부탁 하나 했다고 어깨에 힘 들어간 거 봐요.]
장 의원은 목에 빳빳이 힘을 주고는 장부와 표물을 일일이 대조해보기 시작했다.
표물을 열어 물건을 확인할 때마다 “헉!, 이것은?!” “이, 이렇게 귀한 약재가……!” 같은 감탄사가 튀어나오는 걸 보니 물건을 잘못 알아볼 염려는 안 해도 될 거 같았다.
“큰형님도 용케 금왕표국 편에 보냈네. 셋째 형님이 가만히 있었을 리가 없는데.”
“안 그래도 국주께서…… 아, 아닙니다.”
[수상하네요. 뭔가 있는 거 같은데요?]
내 생각도 그랬다. 하지만 한번 목구멍 안으로 들어간 말을 꺼내는 것은 쉽지 않을 터.
“그래서, 바로 무한으로 돌아가나요?”
“아닙니다. 먼 거리를 왔으니 말과 표사들을 쉬게 했다가 십언으로 갈 겁니다.”
“마음 같아선 장원에 짐을 풀라고 하고 싶은데 보다시피 엉망이라.”
“아유, 괜찮습니다.”
“대신 멀리 가지 말고 이 동네 객잔에 묵어요. 오느라 고생했으니 숙박비 정도는 내가 낼게요.”
“아닙니다. 도련님 사정 다 아는데―”
“내가 지금 가난뱅이로 보여요?”
나는 괜히 어깨에 힘을 주고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내 진료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쭉 줄지어 선 채로 금왕표국의 표물 들을 구경하는 중이었다.
“고생한 표사들 술 한 순배 돌릴 정도로는 벌고 있으니까 염려 말고.”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저희가 거절할 수 있나요.”
숙박비를 내주겠다는 소리에는 거절하더니 술 소리는 거절 안 하는 것이 역시 표국의 인물다웠다.
“다들 들었지! 도련님께서 오늘 술값을 내신단다!”
“와우!”
“도련님, 감사합니다!”
공짜 술 소리가 나오자 표물을 나르는 표사와 쟁자수들의 걸음이 경쾌해졌다.
텅 비어 있던 태청장원의 낡은 창고에 약재들이 차곡차곡 채워진 후 표사들은 객잔으로 향했고, 나는 의원의 영업을 마무리한 후 다시 한 번 표물과 장부를 확인했다.
“물건에 딱히 문제는 없는 거 같지?”
[겉보기론 그래요. 딱히 장난을 쳤다거나 하는 기색은 없어요.]
“별일이네.”
[천하제일 금왕표국이라면서요. 표물에 문제가 있는 쪽이 이상한 거 아닌가요?]
“금왕표국의 이름값이야 신뢰할 만하지. 내가 별일이라고 하는 쪽은 표국이 아냐. 표국의 국주 얘기지.”
[아하, 당신 형제요?]
금왕표국의 국주를 맡고 있는 셋째 형 금감양.
“나쁜 사람은 아닌데, 성격이 뭐랄까…… 좀 그렇지.”
말하자면 멧돼지 같달까, 삼국지의 장비 같다고나 할까.
단순하고 불같은 성미를 가진 사람인데, 내가 멋대로 집을 나온 거 때문에 많이 화가 났을 것이다.
“날 보살피면서 유산 한 몫 받을 생각을 감추지 않던 사람이거든. 뭐, 받은 만큼 책임은 제대로 지겠지만.”
이러나 저러나 나는 집을 나왔고, 이미 그건 끝난 얘기다.
“아무튼, 나도 슬슬 한 몫 장만해 봐야지.”
의원의 경영은 순조롭지만 그렇다고 돈이 된다는 얘기는 아니다.
사업을 시작하는 초창기에는 생각지도 못한 비용이 많이 들어간다.
특히 태청장원은 여기저기 보수할 곳이 많아서 세세하게 유지보수비가 들어가고, 약재는 도시의 도매상에서 소매상을 거쳐 이 마을의 작은 시장까지 오는 장돌뱅이를 거치면 몇 배나 가격이 불어난다.
입원 환자들을 위한 식사와 의원에는 필수적인 청결을 유지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까지.
진료비 및 약재비도 비싸게 청구하지 않으니 매출은 성장세여도 순이익은 영 꽝인 상황.
[그렇다고 진료비를 올리기엔 좀 곤란하죠.]
이 정도 규모에 만족한다면 가격을 좀 올려도 될 거다.
한정된 시장에서, 대체품이 없는 의원의 존재.
폭리를 취해도 울며 겨자 먹기로 비용을 지불할 수밖에 없는 독점 서비스니까.
하지만 난 그 이상을 보고 있으니까 당장의 이익 저조는 감수해야 한다.
“그러던 와중에 호박이 넝쿨째 들어왔으니, 잘 손질해서 팔아야 하지 않겠어?”
[맞아요! 이걸 다 복용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창천이 갖고 있는 남궁세가의 유전병을 연구하며 얻어낸 성과.
탕약 그릇보다 무거운 건 들어볼 엄두조차 못 내던 내 두 팔은 이제 평범한 성인 남성의 그것처럼 건강해졌다.
여차하면 무림인처럼 강력한 파괴력을 발휘할 수도 있다.
그건 몸에 엄청난 부담을 주니까 함부로 사용하면 안 된다고 누누이 주의를 받고 있지만.
어쨌든, 팔이 나은 만큼 약을 줄여도 된다는 뜻이다.
“이 정도면 되려나?”
홍령의 말에 따라 더 이상 복용하지 않아도 될 약재들을 분류해보니, 5분의 1이라고 해도 상당한 양이었다.
“이걸 약재 상태 그대로 팔아도 괜찮겠지만, 그건 좀 그렇지?”
[당신 큰 형님이 가만있지 않겠죠.]
평범한 약재라면 모를까, 구하기 힘든 귀한 것들이 많아서 어디 팔면 추적하기도 쉬울 거다.
도의적으로 좀 찝찝하기도 하고.
“좋아. 이걸로 새로운 약을 만들어 팔자.”
재료만 판매한다면 재료값만 받고 끝이겠지만, 좋은 상품을 만든다면 재료값 그 이상의 수익을 거둘 수도 있다.
게다가, 효과가 좋은 약은 멀리서도 손님을 부르는 법이다.
돈도 벌고 홍보도 할 수 있다니, 이거야말로 꿩 먹고 알 먹는 일이 아닌가?
[그럼 시작해볼까요?]
* * *
밤이 늦도록 이런 저런 약을 시험해 보다가 방에 들어오니 피곤해 죽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해야 할 일이 아직 남아 있다.
우선은 누님이 금왕표국 편에 보낸 편지와 보퉁이.
「 그곳에 무사히 자리를 잡았다는 소식은 들었단다. 창천이라는 자를 함께 지내도록 배려했다지? 네 스스로 꾀를 발휘해 해결해 낸 것은 자랑스럽구나. 약조대로 이자는 받지 않을 테니 염려 말렴. 」
우선은 일 얘기.
태양의원을 개업하기 위해 누님에게 빌린 돈은 이 태청장원을 온전히 손에 넣으면 이자를 받지 않기로 했다.
원금을 완납할 기한도 정하지 않았으니 사실상 그냥 내 돈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자랑스럽다라.
필체는 침착하지만 어쩐지 흐뭇해하는 진양 누님의 얼굴이 눈앞에 그려지는 기분이다.
「 같이 보낸 것은 아버지의 위패야. 사십구재에도 오지 못했으니 얼마나 마음이 아플까, 가엾은 것. 부디 너를 사랑했던 아버지를 잊지 말고 향을 피워드리렴. 」
나는 잠시 젖은 눈가를 닦았다.
의원을 개업하는 일에 몰두하느라, 아니 사실은 일부러 바쁘게 살면서 잊고 있었다.
병약한 나를 포기하지 않고 사랑해주신 아버지의 죽음이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장례식도 사십구재도 챙기지 못했으니, 전생이나 이번 생이나 불효자 중 불효자였다.
누님의 편지는 아직 끝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