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어이! 위험해!”
“우왁! 피해라!”
그 밑에 짚단처럼 늘어져 있던 포쾌들이 걸음아 날 살려라 하며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났다.
쾅!
바닥에 굴러 떨어진 윗돌은 물론 아랫돌의 단면은 매끈하기 짝이 없었다.
잘 드는 식칼로 두부를 썰어도 저것보다 매끈하진 못할 것 같았다.
“이곳에 팔이 없는 무능한 자는 없었으며, 혹 이 일로 의원에 시비를 건다면 이 좌수검이 섬서삼검이라 불리는 이유를 친히 지현에게 견식케 해주겠노라고. 그리 전하거라.”
“예, 옙! 똑똑히 전하겠습니다요!”
포쾌들은 아예 소변이라도 지린 것 같은 얼굴로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표두를 선두로 걸음아 날 살려라 도망쳤다.
[아니, 저 사람들이! 치료비도 안 내고!]
“나 하나로 인해 여러모로 폐를 끼쳤군.”
홍령이 도망치는 포쾌들을 보고 화를 내는 사이 좌수검이 다가왔다.
“아뇨,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요.”
“그 당연한 일을 하는 것이 가장 어려운 세상이거늘.”
그 말을 하고 좌수검은 잠시 나와 눈을 마주쳤다.
“……목소리로 보아 약관이나 되었을 법한 젊은 의원이군. 다시 한 번 그대에게 감사를 표한다. 다친 무림인을 환자로 받는 것은 큰 각오를 해야 하는 일이었을 터.”
그리고는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게 내밀었다.
작은 목갑과 동물의 뿔로 만든 명패.
목갑을 열자, 오묘한 향기가 풍기는 진녹색의 환약이 있었다.
[이건 설마?]
뭐야. 귀한 거야?
[색이나 크기로 봐선, 소림의 소환단 같은데요?]
“가진 재물이 없어 내어놓을 것이 이것뿐이네. 그대는 의원이니 요긴하게 사용할 수 있겠지.”
“이 명패는요?”
[보면 몰라요? 보은패잖아요.]
“혹 본인과 같은 무인의 도움이 필요할 때, 그 명패를 연화루로 보내시게.”
“그러면 도와주러 오시는 거군요?”
“그래. 내 신조에 어긋나지 않는 일이라면 무조건 그대를 돕도록 하지.”
하나는 소림의 소환단에 다른 하나는 좌수검이라는 고수의 보은패라.
[보기 드문 협객이네요.]
“감사히 잘 받겠습니다. 그러면 지금 떠나시는 건가요?”
“그래. 여기 더 있다간 그대들이 괜한 위협에 휩쓸릴지도 모르니.”
그렇게 말한 후 좌수검은 잠시 눈 깜빡할 사이에 신형을 날려 눈앞에서 사라졌다.
“나참. 무림고수라는 사람들이 상식을 뛰어넘는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눈앞에서 이렇게 보니까 신기한걸.”
같은 세상을 살고 있지만 금가장에서만 십오 년을 산 탓인가.
현실감각은 아직도 전생의 것에 의지하고 있는 내게 저런 신기는 아직까지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집안의 표지석이 엉망이 됐군.”
좌수검이 사라진 자리.
창천은 좌수검이 베어버리고 간 태청장원의 표지석을 보며 입술을 짓씹고 있었다.
화났나?
그렇다고 하기엔, 좌수검이 표지석을 베었을 때 너무 경탄하던데?
“또 만날 기회가 있을 테니까 너무 아쉬워하지 마.”
“흥, 누가 아쉽다고. 그자를 부르기 전에 내가 해결할 거다.”
“보은패를 안 써도 또 보게 될 거야.”
[그게 무슨 소리예요?]
“그냥 느낌이 그래. 들어가자.”
* * *
[환자가 정말 많네요!]
환자가 적어서 굶어 죽을 지경이 되는 게 의사들의 가장 큰 소망이라고 하는 의사들도 있던데.
홍령 이 귀신은 환자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기쁨의 비명을 지른다.
[하지만 세상에 아픈 사람이 사라질 날은 없잖아요, 현실적으로! 그러면 더 많은 환자를 치료하는 게 삶의 보람이죠!]
귀신이 현실적이니, 삶의 보람이니 말하는 게 좀 이상하지 않아?
“이보쇼?”
“아, 네. 침 더 놓아드릴게요.”
“그게 아니요, 진짜요? 저 밖에 반 동강 난 바위 말이요.”
“네?”
“그게 좌수검이 직접 베고 떠난 거요? 그쪽이 붙여준 팔로?”
[저 질문, 오늘만 서른여덟 번째네요.]
정말이지, 좌수검의 그 기행 이후 의원에는 사람이 폭발적으로 늘었다.
소문이 퍼지는 데 한계가 있는 작은 시골동네지만, 이 마을은 그 시골 중에서도 정기적으로 시장이 열릴 정도의 규모가 있는 곳.
그리고 오늘이 그 장날이었다.
“솔직히 뻥이지? 이 동네 순진해 빠진 사람들은 속아 넘어가겠지만 나 같은 장돌뱅이야 그런 허풍에는 익숙하지.”
아니, 아저씨. 잠깐만.
“내가 허리가 아파서 들르긴 했는데 말이야, 도통 서 있을 수가 없더라고. 대충 이 통증만 가시게 해주면 내가 나가서 아주 끝내주는 명의가 왔다고 소문 내줄 테니까, 치료비가 얼마더라? 내가 그거 반만 받겠네. 입소문 내는 값으론 싼거야―”
[아니, 이 작자가?!]
내가 말릴 틈도 없이 빙의된 홍령의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억!”
홍령의 침 한 방에 엎드리고 누워 있던 환자의 허리가 활 줄 풀린 활처럼 반대 방향으로 팽팽하게 꺾였다.
“어억! 꺽!”
“네네, 치료 과정이라서요. 조금만 참으세요.”
이런 홍령의 욱하는 성격도 이젠 익숙했다.
대체 이 성격으로 의원은 어떻게 하고 살았나 몰라.
[흥!]
다시 한 번 손이 번쩍하며 몇 군데에 침을 놓자 환자의 허리가 다시 바닥으로 툭 추락했다.
“허억, 헉! 야 이 새끼야! 실력 있는 의원이라고 해서 왔더니 이 돌팔이가 사람을 잡으려고 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멱살을 잡으려는 환자의 손목을 턱 붙잡았다.
이건 홍령의 힘이 아니다.
“이거 놔! 이거 안 놔?!”
“지금도 아프세요?”
“어? ……어?”
“다 나으셨죠? 치료비는 은 반 냥입니다.”
“으, 은 반 냥?”
“앞으로 아플 일 없을 겁니다. 혹시라도 통증이 다시 찾아오면 열 배로 배상해드리죠.”
내 당당한 태도 때문인지 아니면 끈질기던 통증이 말끔히 사라졌다는 사실 때문인지.
“끄응.”
진상을 부리던 환자는 결국 전낭에서 반짝이는 은 반 냥을 지불하고 나갔다.
투덜거리면서도 “용하긴 용하네, 허리가 하나도 안 아픈 걸 보면.” 하며 폴짝폴짝 뛰어 나가는 모습이 우습기까지 했다.
[방금 팔을 막아낸 거, 좋았어요. 팔의 움직임이 점점 좋아지는데요?]
그러게.
꾸준한 치료와 함께 수련을 거듭했더니 이제 팔 하나만큼은 홍령의 빙의 없이도 웬만한 범인(凡人)만큼, 아니 그 이상 움직일 수 있게 됐다.
날아다니는 파리를 젓가락으로 붙잡을 정도는 아니지만, 왈패나 다름없는 장돌뱅이의 멱살잡이를 한 손으로 막아낼 수 있는 정도.
[하여간 당신은 참 운이 좋다니까요. 어쩌다 이런 명석한 귀신이 깃들어서 말이에요.]
운이 좋다라.
그래, 운이 좋지.
죽을병에 걸렸지만 여기까지 왔다.
아주 작은 실마리라도 단단히 붙잡았다.
이 정도면 아주 운이 좋은 거지.
“의원님! 다음 환자 들여보낼까요?”
신생이 문틈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짜식, 점점 더 귀여운 짓을 한단 말이지.
전생에서 결혼을 일찍 했다면 저만한 애도 있었을 텐데.
“아니, 슬슬 식사 시간이잖아. 밥 먹고 하자.”
“하지만 환자가 저렇게 많은데…… 물 들어올 때 노를 저어야죠! 구걸도 장날에 잔뜩 해놔야 배가 든든한 법이라고요.”
흠, 먹는 데는 돈을 아끼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구걸하던 때 버릇이 남아 있나?
나는 신생의 더벅머리를 마구 헤집어주었다.
“하루 이틀 장사하는 거면 모를까. 최우선은 건강이야. 불규칙하게 일하면 오래 못 버텨.”
“그렇긴 하지만……”
“가자. 장 의원님이 오늘은 뭘 하셨을라나.”
“네! 오늘은 고기국수를 할 거라고 하셨어요!”
고기라, 좋은걸?
[너무 많이 먹으면 안 돼요. 알죠?]
아무렴, 알고말고.
금가장에서 독립한 이후 한 가지 또 좋은 점이 있다.
바로 먹는 것이 자유롭다는 것.
그 전에는 아파서 먹지 못한 것도 있었지만, 그래도 상태가 괜찮으면 잘 구운 고기나 혀가 얼얼한 국도 한 숟가락 떠먹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내 건강을 걱정하는 가족들의 눈치 때문에 함부로 먹지 못했다.
먹을 걸 제대로 못 먹는 생활이 얼마나 고달픈지는 아는 사람만 알 것이다.
하물며 나는 21세기의 식생활을 기억하는 사람이다.
피자, 짜장면 같은 건 고사하고 김치라도 먹고 싶은데 그 비슷한 것마저 먹지 못한 채로 살다가, 홍령의 치료로 거의 완벽한 자유를 얻으니 이렇게 식사 시간이 고대될 수 없었다.
“이제 왔느냐? 떼잉, 빨리빨리들 다니지 않고! 탕 식는다!”
장 의원은 벌써 한 상을 차려놓았다. 창천은 언제 왔는지 벌써 수저를 들고 있었다.
꼬장꼬장한 돌팔이지만 혼자 산 세월이 있어서인지 음식은 제법이었다.
“잘 먹을게요.”
“잘 먹고 자시고, 대체 언제까지 이 노구에게 식사 당번을 시킬 셈이더냐?”
“차림비도 빚 탕감에 넣어드리고 있잖아요.”
“난 의원이란 말이다! 의원이 환자를 봐야지 밥 뜸 들이는 걸 보고 있어야 쓰겠냐?”
[허이구, 돌팔이 주제에?]
“하지만 신생이 밥을 하기엔 너무 어리잖아요. 창천은…… 아시죠?”
“끄응. 아니, 그러면 네 놈은?”
“저요?”
“그래, 네놈”
“제가 식사에 뭘 넣을 줄 알고요?”
“으응?”
“저야 장 의원님이 식사에 무슨 짓을 하셔도 해독할 능력이 되니까 상관없지만, 저 못 믿으시잖아요. 믿으세요?”
장 의원이 꿀 먹은 벙어리처럼 벙쪘다.
“떼잉, 일하기 싫다는 말을 아주 돌려 말하는구나! 됐다! 그보다, 언제까지 밥상머리에서 그 가면을 쓸 게냐? 불편하지도 않나?”
“예?”
물론 불편하다.
입 부분만 분리할 수 있어서 밥 먹을 땐 분리하고 먹으면 되긴 하지만, 지금처럼 국수 같은 걸 먹을 때 면이 가면에 찰싹 달라붙기도 한다.
그 외에도 애로사항이 한두 가지가 아닌 데다 잘 더러워져서 여벌을 여러 개 갖고 있기도 하고.
“떼잉, 우리끼리 밥 먹을 땐 그냥 벗게. 그 밥맛없는 면상때기가 아니더라도 여기 있을 땐 늘 밥맛이 뚝 떨어지니까.”
에?
장 의원이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는데.
[돌팔이래도 의원은 의원이니까요. 더 심한 환자도 많이 봤겠죠.]
그야 그럴 수 있겠지만, 솔직히 이 얼굴을 보고 밥을 먹고 싶나?
“나도 상관없다.”
“저, 저도요……! 의원님이 편하시다면……”
뭐야, 다들 왜 이래?
진짜 괜찮다고?
가족들과 함께하는 식사 자리에서조차 벗어본 적 없는 가면이었다.
지난번 수술 때도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면 벗지 않았을 거다.
그런데 뭘까.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은 쉬워서일까.
잠시 고민하다가 가면의 끈을 풀었다.
그리고.
“……! 아, 아냐! 전 괜찮아요! 거지 생활하면서 그보다 더한 얼굴도, 읍읍!”
“새끼거지는 잔말 말고 만두나 처먹거라. 한결 낫구만.”
“음.”
……기분이 묘한걸.
밥상머리에서는 갓끈도 푸는 법이라고는 했지만, 다른 사람들과 하는 식사 시간에 가면을 벗고 있다니.
[편해 보여서 좋네요.]
응, 편해.
먹기도 편하고, 마음도……
편하네.
“자네 근데, 이 가면 여러 개 있지?”
“예, 그런데요?”
“나 하나 주면 안 되나?”
엥?
가면을 벗으라고 하더니 이제 내 가면을 탐내기까지?
물론 저 가면이 고급품이긴 하다.
가볍고 통풍도 잘 되고 겉보기에 미관상으로도 아름답다.
모르긴 몰라도 살 사람만 구한다면 값을 넉넉히 쳐줄 거다.
하지만 그래 봤자 가면.
게다가 내 얼굴에 맞춤제작을 한 물건이라 아무리 편하다고 해도 남이 쓰면 어느 정도 불편할 수밖에 없다.
저런 걸 모으는 이상한 취미가 있는 사람이 아닌 이상 살 사람도 없을 텐데?
“떼잉, 내가 이상한 취미가 있는 건 아니니까 그 눈깔 좀 어떻게 하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