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남궁세가의 핏줄에 전해지는 혈족병, 한번 상처를 입으면 피가 멈추지 않는 유전병을 앓고 있는 그에게 치료를 약속한 것도 벌써 시일이 꽤 흘렀다.
그간 의원 일이 정신없이 바빠서 신경을 못 쓴 것도 있지만……
“치료해서 당장 나을 수 있는 병이 아니라는 건 알잖아. 남궁세가 외에는 존재조차 잘 모르는 병이라 계속 연구를 해야―”
“그러니까. 그래서 그 연구를 시작하는 건 언제냔 말이다.”
“음, 그러니까……”
사실 그 일까지 하기엔 너무 바빴다.
현대의 병원은 많은 의사들에게 각기 전문화된 일을 할당한다. 진료와 치료, 그리고 제약의 영역이 나뉘어져 약사라는 전문직군이 따로 존재한다.
그뿐인가? 한국의 경우 병원은 1차, 2차, 그리고 3차 병원의 단계적 치료단계가 있다.
감기 같은 가벼운 병은 주변의 1차 동네병원에서, 폐렴 등의 다소 손이 많이 가는 치료는 입원실이 존재하는 2차 종합 병원에서, 정말 심각한 병증은 교육기관을 겸하는 3차 대학병원에서 담당한다.
심지어 일반치료와 응급치료, 회복치료가 구분되어 있다.
정신과나 마취과, 치과 같은 특수과나 간호사, 임상병리사, 병원 영앙사 등의 의사 외 직군까지 생각하면, 내가 해치워야 할 일들은 과중하다 못해 넘쳐흐를 지경이었다.
게다가 양의학이 아닌 한의학의 특성상, 치료 자체에 걸리는 시일이 길기까지!
“솔직히 말하자면, 본격적으로 연구에 들어가려면 시간이 필요해. 정확히는 내 일을 분담할 사람이 필요하지.”
“의원을 더 구할 생각인가?”
“그것도 좋지만 지금은 좀 무리고.”
[왜요? 그 경합 이후로 환자가 엄청 늘었잖아요. 한 명 정도는 구해도 괜찮을 거 같은데?]
이후 홍령이 되찾은 기억은 별거 없지만 내가 홍령에 대해 추측하고 있는 건 있다.
아마 의원의 경영에 큰 신경을 쓰지 않는, 의술에만 몰두할 수 있는 환경에 있던 의원이라는 것.
“갑자기 장사 잘된다고 고정비를 늘리면 적자 나.”
이 천재적인 의원 귀신은 사업체의 경영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
“하물며 병이라는 건 보통의 재화나 용역의 수요랑은 다르다고. 병목현상을 빠르게 해소하려고 사람이나 설비를 늘렸다가 파산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데. 하물며 지금은 한 명 더 쓸 수지도 안 맞을걸?”
“……재화? 용역? 병목현상?”
[그게 뭐예요?]
“그런 게 있어. 아무튼, 의원을 당장 고용하긴 좀 무리지. 접수원이라면 모를까.”
지금까지 접수는 시간이 되는 사람들이 잠깐씩 와서 도와주는 형태였지만 계속 그렇게 할 수는 없다.
멀리서 소문을 듣고 태양의원에 찾아오는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객잔 주인은 바빠질 거고, 다른 사람들도 각자 할 일이 있으니까.
“아무나는 안되고, 병증이나 의학에 약간이나마 지식이 있는 사람이어야 해.”
아까처럼 응급환자를 뒤로 미뤄놓으면 안 되니까.
한가할 때는 날 보조하면서 의술을 배울 생각이 있는 사람이면 더 좋다.
[작은 일들을 맡기면서 의생(醫生)으로 키우면 좋겠네요.]
현대로 치자면 인턴을 뽑는 느낌일까?
“그런 자가 그렇게 쉽게 구해지진 않을 텐데. 차라리 의원을 구하는 게 빠를 거다.”
“그렇긴 해. 머리도 좀 되고, 글도 알아야 하고, 습득력도 괜찮은데 행동도 굼뜨지 않은 사람을 찾아야 하는 거니까. 거기에 의학을 배우겠다는 뜻도 있어야 하고.”
갑자기 현대의 경력 있는 신입을 요구하는 사축이 된 기분이 들지만, 능력만큼의 대우는 해줄 거니까 괜찮겠지.
……그런 사람이 있다면!
“네가 한번 알아봐. 그래도 이 마을에 오래 살았잖아.”
“내가 왜―”
“일단 그동안 일을 봐줄 의원을 고용하러 가 볼까나.”
[의원이요? 아까는 의원을 고용하긴 무리라면서요?]
나는 대답 대신 걸음을 옮겼다.
창천 녀석도 궁금한 건지 내 뒤를 쫓아왔다.
저 녀석, 진짜 수련을 하긴 하는 거야?
“안녕하세요! 다들 몸 상태는 어떠세요?”
방 안의 침상에 누워 있던 환자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인사를 건넸다.
며칠씩 치료가 필요한 이들이 머무는 입원실이다.
그중 단 한 명만 내게 인사를 하지 않고 누워 있었다.
“장 의원님, 저 왔어요. 몸은 좀 어때요?”
* * *
금태양이 바로 옆에 와 앉는데도 장 의원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슬슬 퇴원할 수 있을 정도로 상태도 회복되었고, 돌팔이긴 하지만 제법 오래 업을 이어온 걸 보면 홍령에 비해 부족할 뿐이지 아주 모지리는 아닐 터.
“깨어있는 거 알고 있으니까 자는 척은 그만두시고. 우리 할 얘기 있잖아요. 돈 말이에요, 돈. 치료비.”
뭣보다, 공짜로 부려먹을 수 있는 인력을 놀릴 수 있나.
엄밀히 말하면 받을 돈이 있는 거지만.
“안 일어나시네. 다 나은 거 알고 있거든요? 치료비 안 내고 튀려다가 창천에게 걸린 것도 알고 있는데?”
그 말에 장 의원의 돌아누운 어깨가 움찔했다.
사실 튀려다가 걸린 게 한 번도 아니었다. 몸을 회복한 직후부터 몇 번이나 시도했지만 번번이 그 미친개에게 걸려 허사가 되었다.
그 일만 생각하면 장 의원은 이가 갈렸다. 배은망덕한 놈, 몇 년이나 돈도 안 받고 저 상처를 봐주었더니!
창천의 상태를 정기적으로 보고하면 위에서 꼬박꼬박 상여금이 나왔기 때문에 한 일이긴 했지만, 그래도 그렇지!
하지만 장 의원은 도주를 포기한 게 아니었다.
아니면 어떡하란 말인가? 이제 다 나았노라! 하고 그간 병을 방치하며 돈을 뜯어먹은 동네 사람들 사이를 유유히 지나가란 말인가?
저 악랄한 태양의원 놈들이 제게 바가지를 씌우는 걸 가만히 두고 있으란 말인가?
놈들이 처방하는 약은 냄새만 맡아도 부내가 났다. 효과도 끝내줬다.
장 의원이라면 족히 원가의 백배는 받아먹을 그런 귀한 약재였다.
지금 뒤에서 장 의원을 깨우려고 쿡쿡 찌르고 꼬집고 간지럽히기까지 하는 저 악랄한 금태양 놈이라면 천 배는 부를 게 분명했다.
절대 못 낸다. 한 푼도!
애초에 장 의원은 여기서 이렇게 오래도록 치료를 받겠단 말은 하지 않았다. 놈들이 억지로 입원을 시켜놓고 입원비를 눈덩이처럼 불린 거다. 사기다, 사기!
지금 눈을 뜨면 그 돈을 받아내려고 뱀 같이 혀를 굴릴 거고, 같은 병실에 입원한 치들이 옳소! 옳소! 편을 들 게 뻔하다.
참아야 한다…… 참, 아아 한다…… 젠장, 간지럽…… 앗, 거긴! 아, 안 돼……! 안, 돼, 에, 에……!
“비켜라. 칼로 쑤셔보면 정말 자는지 아닌지 알 수 있겠지.”
스릉.
창천이 칼을 뽑아드는 소리가 섬뜩했다. 저 미친개라면 장 의원의 다리 한 짝 정도는 얼마든지 푹 찍어버릴 것이다. 간지럼 정도야 이를 악물고 참아냈지만, 칼에 꿰뚫리고도 잠든 척을 할 수는 없지 않나!
“흐, 흐아암― 아이고 잘 잤다아? 어, 그, 네놈들이 여긴 웬 일이냐?”
장 의원은 어색하게 기지개를 켜며 방금 눈을 뜬 시늉을 해보았다. 씩 웃고 있는 금태양을 보니 자는 척을 하던 건 이미 들켜버린 거 같았지만.
창천 녀석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다시 칼을 집어넣었다.
장 의원은 간담을 쓸어내렸다.
저놈, 진짜 찌를 생각이었구나……!
“잘 주무시네요. 내 필살 간지럼도 참으시는 거 보면 이제 다 나으셨나 봐요. 그죠?”
금태양은 친절하게 웃었지만 장 의원의 눈에는 고리대를 수금하러 온 악랄한 사채업자의 미소처럼 보일 뿐!
“흥, 할 말이 있어서 온 게지. 무어냐? 돈이냐? 치료비로 얼마를 요구할 작정이지?”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도망치기도 버티기도 실패했으니 이제 정면승부밖에 남지 않았다.
대체 얼마를 요구할까? 금 열 냥? 스무 냥? 설마 백 냥?! 그만한 돈은 없었다. 자신이 가진 의원을 팔아도 티끌만큼이나 도움이 될까.
아니다, 놈은 돈이 많다고 했다!
그렇다면 돈을 요구하진 않을테니……!
자길 엉망진창으로 만들 생각인 거다! 간악한 사파 놈들처럼! 장기를 적출하고 피를 뽑아 목욕을 한 다음 시신은 강시로 만들 속셈이겠지!
무섭도다, 무서워! 요새 것들이란! 의맹의 일원으로 이 잔혹한 사파놈의 싹을 뽑아야 했는데, 이렇게 당하고야 마니 허망하구나―
“……해서, 장 의원님이 잠깐 여기서 일 해줬으면 좋겠거든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 장 모, 불의 앞에 무릎 꿇을 수는 없―, 잠깐, 뭐라고?”
“하긴. 대결에서 패배했는데 같이 일하는 게 불편하실 수도 있죠. 그래도 한번 생각해보세요. 일당은 넉넉히 쳐드릴게요. 치료비 그냥 갚으시는 것보다 이득일 걸요?”
“……넉넉히라면, 얼마나?”
“대충, 이 정도?”
금태양이 손가락 두 개를 펴 보았다. 장 의원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손가락 두 개? 은 두 닢? 아니지, 스무 냥? 설마, 이백 냥?
이백 냥이 뭐야, 매일 은 두 냥을 꼬박꼬박 받는다 해도 남는 장사다. 아무리 의원이 귀한 동네라지만 쌔빠지게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는 시간 따위를 생각하면……
아, 아니지! 이 장 모, 자존심이 있지! 이 새파란 애송이들에게 머리를 굽힐쏘냐!
“그, 내가 내야 할 치료비는 얼마인데?”
금태양은 씩 웃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손가락 네 개를 펴 보였다.
“아, 참고로 노란 거예요.”
“뭐, 뭐, 뭐, 뭐라고?!”
“좀 세긴 하죠? 근데 어쩔 수 없었어요. 장 의원님 상태가 위중해서 꽤 비싼 약재를 쓰는 바람에―”
“네놈이 미친 게지? 그걸 그 돈밖에 안 받는다고?! 집에 돈이 많다더니 이거 땅 파서 장사하는 놈일세! 아니, 전부터 한 마디 하고 싶었는데 말이야, 애초에 왜 그 증상에 그런 비싼 약재를 쓰는 게야? 감초나 당귀 같은 걸로도 얼마든지 잡을 수 있다고! 이래서 있는 집 놈들은, 쯧쯧―”
오호, 금태양은 작게 감탄했다.
약간 기대를 하고 운을 띄워본 건데 장 의원은 착실하게 금태양이 원하는 것을 주절주절 나불대기 시작했다.
훨씬 저렴하고 구하기 쉬운 약재로 병증을 치료하는 법, 약의 용량을 줄이면서 원하는 효과를 내는 법, 현대로 치자면 위약효과와 비슷한 효과를 내는 법 등등……
치료 효과가 너무 감소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원가를 절감할 수 있는 노하우들.
지금의 태양의원에 딱 필요한 지식이다.
‘홍령은 아무래도 고급 재료에 익숙한 의원인 거 같으니 말이지. 백복령만 봐도 그렇고.’
하지만 모든 병증에 그런 고급 재료가 필요하진 않으니, 장기적으로 수지타산을 맞추려면 꼭 알아야 할 지식이다.
개똥도 약에 쓸 때가 있다더니. 사기나 치고 다니는 돌팔이가 이런 식으로 유용할 줄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