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일어나라.”
“이걸로 다섯 번째다. 일어나.”
“……안 일어나면 베어버리겠다.”
일단 그 짜증나는 가면부터, 라는 낮은 짜증과 함께 검이 뽑히는 소리가 들리자 눈이 번쩍 떠졌다.
[깨웠어요, 깨웠다고요! 그놈의 칼 좀 집어넣어요! 정말이지, 이 사람 두 시진도 못 잤는데!]
아, 정말이지 최악의 기상이었다.
눈을 뜨자마자 눈앞엔 짜증을 한가득 담은 창천이 서 있질 않나, 귀신은 왱알왱알 푸념을 늘어놓질 않나.
“뭐야, 무슨 일인데…… 하암, 나 해 뜰 때 잠들었다고……”
“무슨 일? 지금 저걸 보고도 무슨 일이란 소리가 나오나?”
창천은 아예 검집째로 방 밖을 가리켰다.
뭐야, 무슨 일인데?
“아, 의원님 나오셨다!”
“아이고 의원님! 오늘 진료는 언제부터 시작하셔요?”
“으어엉, 엄마 나 아파!”
“조금만 기다리랬지! 이제 곧 진료 시작할 모양이니까 참아!”
그랬다.
해는 벌써 중천이고 태청장원의 문 앞에는 나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인산인해……까진 아니지만 아무튼 제법 긴 대기 줄을 만들고 있었다.
“아이고야…… 언제부터 저렇게들 서 있었어?”
“네놈이 잠들었다던 그 해 뜰 무렵부터다. 도무지 시끄러워서 수련을 할 수가 없으니 어서 처리해.”
갑자기 깨워진 탓에 머리가 띵했다. 몇 시간 자지도 못했는데……
그래도, 일어나야지.
[괜찮겠어요?]
집을 나오기 전에도 무리하다가 쓰러진 적이 있었으니 홍령의 걱정은 괜한 게 아니었다.
하물며 그때는 오직 환자를 보고 의서를 탐독하는 데만 시간을 썼다.
하지만 지금은……
[새벽에 일어나서 회진 돌고, 청소하고, 끼니 마련하고, 약재 준비하고, 물 끓이고, 또 환자 받고, 치료하고, 의서 보고, 짬 날 땐 단련하고, 틈나면 마을에 가서 약재 사고 정보 수집하고…… 그러다 정말 쓰러진다고요.]
홍령이 말한 것처럼, 환자를 보는 의원의 업무 외에도 업장의 청결관리, 나 자신을 먹고 재우고 챙기는 일까지 혼자 다 맡아야 했다.
은 파파가 한동안 도와주기도 했지만 그 노파는 경합이 끝나고 며칠 후 「다음번엔 쉽지 않을 겁니다.」 같은 내용의 서찰만 남기고 사라져 버렸다.
“어쩔 수 없지. 사람이 좀 무리를 해야 할 때도 있는 거야.”
지금이 바로 그 때다.
가면을 고쳐 쓰고 옷차림을 다듬은 후 밖으로 나가자 수많은 환자들의 시선이 쏠렸다.
장 의원과의 경합이 있은 지도 벌써 보름.
소문은 발 빠르게 뻗어 나갔고 옆 마을에서 온 환자들까지 문전성시를 이루는 나날.
처음 홍보를 위해 공언했던, 열 명의 공짜 치료를 위해 사용한 비용은 이미 회수하고도 남았다.
[마을 내의 사람들은 다 한 번씩 왔다 갔으니, 이제 자리를 잡았다고 봐도 되잖아요.]
아니.
겨우 첫 발을 내딛은 거지. 지금부터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다.
“줄, 줄을 서세요! 번호표대로!”
은근슬쩍 일을 도우면서 의원에 자리를 잡은 어린 거지, 이젠 제법 멀끔해져서 거지라고 부르기에는 조금 애매한 어린아이가 번호 순대로 사람들을 줄 세웠다.
“내가 제일 먼저라니깐!”
“웃기시네! 이 번호표를 보고 말하시지?”
“아니? 일을 왜 이따위로 하는 거야? 내가 새벽부터 와서 번호표를 받았는데 이 작자가 번호가 더 빠른 게 말이 되나? 돈이라도 받았어?”
“이보시오! 미안하지만 양보 좀 해줄 순 없겠소? 우리 어머니가 상태가 안 좋아서―”
“저기, 그러면 급한 분이 이쪽으로―”
“아니, 이 거지새끼가? 네 놈이 표를 줘놓고 왜 나를 뒤로 밀어?”
[좀 전부터 저랬어요.]
끄응. 안 그래도 바빠 죽겠는데……
하긴. 슬슬 운영에 문제가 생길 때가 되긴 했다.
“무슨 일이에요?”
“워, 원장님!”
“의원님, 마침 잘 오셨수다. 이 치들에게 뭐라 말 좀 해주십시오. 제가 아침 일찍 와서 번호표를 받았는데 말입니다―”
“그러니까, 당신 번호표는 7번! 나는 3번이다 이 말이야!”
“당신은 오후 늦게야 왔잖아! 어떻게 당신이 3번을 갖고 있을 수 있어?!”
“아이고 원장님. 우리 어머니 좀 보십시오. 번호표를 기다리다간 다 죽게 생겼습니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이런 문제였다.
갑은 일찍 와 번호표를 받았는데, 을은 뒤늦게 왔음에도 더 빠른 번호표를 갖고 있고, 병은 순서를 기다리기엔 너무 다급한 환자다.
“일단 할머니, 맥 좀 짚을게요.”
급한 환자가 우선이지.
번호표를 든 채 불퉁한 얼굴이 된 환자들은 일단 미뤄놓고, 낯이 허옇게 질린 할머니부터 그 자리에서 진맥했다.
[급체네요. 일단 이 자리에서 침을 놓고 안에서 상세하게 보죠.]
또 급체야?
의술을 행하면서 알게 된 건데, 의외로 급체 때문에 의원을 찾는 사람들이 많다.
손을 따거나 엄마 손은 약손 같은 마사지로 해결되기도 하지만, 이 또한 ‘급성’인 탓에 제때 체증이 내려가지 않으면 사망에도 이르는 병.
“꺼억, 꺽―”
“트름 나오는 거 보니 내려갔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들어가 누웠다 가세요. 이따 더 봐드릴게요.”
병증 자체는 어려운 병이 아니다. 지금처럼 의원의 손만 닿으면 낫는 병.
저런 병 같지도 않은 것 때문에 사람이 죽는다니, 여전히 믿어지지 않는다.
[모든 사람이 근처에 실력 좋고 비용도 부담 없는 의원 근처에 사는 건 아니니까요.]
하긴.
21세기의 한국에서도 도시를 벗어나면 응급실은커녕 시답잖은 동네병원 하나 없는 곳도 많다.
의료에서는 선진국인 한국도 그런데 이 시대 중원은 어떤 상황이겠는가.
“그리고 나머지 두 사람은…… 뭐가 어떻게 된 거야?”
가짜 번호표를 만들었다거나 암표를 샀다거나 할 수도 있겠지만, 태양의원은 아직 그 정도로 성장한 것은 아니다.
“한 명이 아니다.”
“창천? 봤어?”
“이자는 객잔주인이 접수를 볼 때 받았고, 저자는 거지가 오후부터 접수를 볼 때 받았다. 아까 다 죽어가던 그 노인은 접수하는 자가 아무도 없을 때 왔지.”
“사람이 없었다고? 그걸 본 너는 있었던 거 아냐?”
“우리 거래에 접수원 일 같은 건 없었던 거 같은데.”
저 싸가지가.
어쨌든 창천이 상황을 지켜봤기에 문제가 뭔지는 파악했다.
“창천. 여기 있는 사람들, 온 순서대로 줄 좀 세워봐.”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싫음 말고. 기억 안 나면 됐어. 기억이 안 나신다는데 어쩌겠어.”
“……유치한 도발이군.”
유치하면 어떤가. 효과만 좋으면 됐지.
창천은 미간을 찌푸린 채로 사람들을 하나둘 줄 세우기 시작했다.
빠른 번호표를 갖고도 뒤로 밀려난 사람들은 불만 가득한 얼굴이 되었지만, 줄을 세우는 게 하필 저 미친개인지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반면 뒤쪽 번호표를 받았지만 앞으로 간 사람들은 화색을 띠었다.
“잠깐만. 거기 아주머니, 이쪽으로 나와서 따로 줄 서시고요. 애기야! 너도 이쪽으로 와!”
창천이 줄을 세우는 와중 나는 홍령이 점찍은 환자들을 따로 빼서 줄을 만들었다.
내가 봐도 낯빛이 유독 안 좋거나 식은땀을 뚝뚝 흘리는, 척 봐도 상태가 심각한 사람들이었다.
일단 이 정도면 되겠지? 하고 몸을 돌리려는데.
“거 너무하네. 나도 더 아프다 오던지 할걸.”
“그러게 말이야. 지금 콱 칼로 배나 째버려?”
뭐?
[무슨 저런 사람들이 다 있어요? 아무리 말만이라도 그렇지―]
홍령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화를 냈다.
하지만 나보다 화가 날까.
아프다는 게 얼마나 힘들고 서러운 일인데, 뭐?
“누굽니까, 방금?”
“……”
“당신이죠? 뭐라고 했습니까? 다시 한 번 말해보세요.”
“의원 양반. 그게 아니고―”
“아니, 솔직히 좀 그렇잖아? 우리도 아파서 왔다고!”
[침착해요. 그냥 진상이에요. 의원 일을 하다 보면 종종 있는 일이라고요.]
침착하라고?
아니, 그럴 순 없다.
내가 화가 나는 건 둘째치더라도, 이런 진상을 그냥 둬선 안 된다.
“방금 칼로 콱 배나 째버린다고 했죠? 한번 해보세요.”
“아니, 그, 보쇼. 우리가 진짜 그럴 생각인 게 아니라―”
“해보시라니까요. 아, 칼이 없으신가? 창천, 칼 좀 빌려줄래?”
“그런 하찮은 일에 내 검을 쓰려고 하다니. 차라리 내가 직접 저 자의 배를 째도록 하지.”
“이, 이보쇼! 이게 무슨!”
상대가 기겁을 하며 뒤로 물러나자 나는 적당히 창천을 제지하고 앞에 나섰다.
“정작 배를 째려니까 무서우십니까? 절 기분 나쁘게 했으니까 당신을 치료해 주지 않을지도 모른다, 뭐 그렇게 생각하세요? 설마, 그래도 사람 살린다는 의원이 그렇게 야박할까 생각하시겠죠. 안 그렇습니까?”
좌중이 고요해졌다.
“……거 저치들은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나 가지.”
“의원님이 기분이 상해서 의원을 물려버리면 어떡하려고 저런대. 이제 장 의원님도 못 믿을 판인데.”
“이 작은 마을에 의원을 차려주셨으면 감사하다고 절이라도 못 할 망정, 쯧쯧…….”
다른 사람들이 작게 투덜거리는 소리까지.
진퇴양난에 빠진 진상들이 어쩔 줄 몰라 하는 걸 보니 기분이 좀 풀렸다.
“배나 째버릴까, 그런 생각을 했을 때부터, 당신들은 벌써 우리 의원을 신뢰하고 있는 겁니다. 당신이 죽을 만큼 아플 때, 순서고 뭐고 당신부터 살려줄 거라는 걸.”
“아, 알겠소. 그러니까 그 칼 좀 치우시고……”
“거 얌전히 기다리라고 한 마디 하면 되지, 쩝.”
[말하자면 이 사람들은 본보기군요.]
화가 난 것도 사실이지만 홍령의 말이 맞다.
사람은 선하지 않다. 그렇다고 무조건 악하기만 한 것도 아니다.
사실 대부분의 인간은 상황에 따라 천사가 되기도 하고, 악마가 되기도 한다.
그래도 ‘괜찮을 것’ 같다면, 아무렇지 않게 작은 악행을 저지르곤 하는 것이 바로, 인간.
편의점 알바생에게, 콜센터 직원에게, 나보다 약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이들에게.
명동에서 뺨 맞고 한강에 와 화풀이를 하듯 아무렇게나 감정을 배설하고 잊어버린다.
그렇게 하나 둘, ‘그래도 괜찮았다’는 표본이 늘어나면 작은 악의는 순식간에 퍼져나간다.
마치 사람을 병들게 하는 곰팡이처럼.
‘처음에 선을 딱 그어두면 괜찮으니까.’
당장은 내가 마을 내에서는 갑의 입장. 확실하게 선을 그어놓고 행동할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선을 정해주면 함부로 그 선을 넘지 않는다.
진상을 최소화해서 직원들의 스트레스를 관리하고, 선을 지키기로 합의한 ‘대부분의’ 고객과 거래한다. 그리고 선을 지키지 않는 자들과만 싸우면 된다.
“잠깐.”
진상들을 정리한 후 다시 환자를 보러 가려는데 이번엔 창천이 앞을 막아섰다.
“뭔데? 아, 도와줘서 고마워.”
“그런 건 아무래도 됐다. ……내 순서는 언제 돌아오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