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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의원-17화 (17/350)

17화

“뭐야, 그렇게 의외야? 당연한 거잖아.”

“……그렇긴 하지만.”

“뭐, 그런 꿈 좇는 거 같은 이유 말고도 다른 이유도 있어. 저길 보라고.”

장 의원이 실려 간 별채.

그 주변에는 마을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장 의원의 안부를 걱정하고 있었다.

“이 동네에서 삼십 년 의원 노릇을 한 자야. 그 세월이면 제아무리 돌팔이라도 그 의원 손에 나은 이가 수십은 넘을걸. 이제 여기서 장사해야 하는데 괜히 나쁜 인식 심을 필요는 없잖아.”

말하자면 이쪽이 실리적인 이유다.

“당장 너부터도 장 의원이 걱정되어서 물어본 거잖아. 안 그래?”

“십여 년 넘게 나를 치료한 분이다. ……걱정이 되지 않을 리 없지.”

“맞아. 나 같아도 그럴걸. 이 무시무시한 무림에서, 이유도 모르는 습격으로 온 집안이 몰살을 당한 장원의 유일한 생존자에게, 치료비를 받긴커녕 종종 용돈까지 쥐여준 의원이잖아. 누가 보면 이 집안에 큰 은혜라도 입은 사람처럼 말이야. 그런 게 없다는 건 창천 너부터가 가장 잘 알겠지만.”

창천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나는 이 녀석을 얻어야 했다.

녀석의 병이 나와 비슷하다는 건, 녀석을 치료할 수 있다면 내 병의 일부도 치료할 수 있다는 것.

“이상하다고 생각한 적 없어? 장 의원은 어떻게 남궁세가의 혈족병에 대해서 알고 있었을까? 증상을 호전시키지는 못해도, 더 나빠지지 않게 관리할 수는 있었을까? 각 세가의 혈족병은 세가 무공의 근원이나 다름없어서 철저히 비밀에 부쳐지는데 말이야.”

그러려면 녀석의 장 의원에 대한 신뢰부터 무너트려야 한다.

“너도 봤지? 저자는 그렇게 실력이 뛰어나지 않아. 그런 사람이 어떻게―”

“그만.”

그런데……

녀석은 정말 장 의원을 백 퍼센트 신뢰하고 있는 걸까?

“네 녀석, 뭘 알고 그렇게 지껄이고 있는 거지?”

“뭘 알지는 않아. 그냥 의심하고 있을 뿐이지. 네가 남궁세가의 피를 진하게 타고 난, 일종의 실험체일지도 모른다는 걸.”

남궁세가의 무공은 그 혈족병, 혈우병을 극복하기 위해 탄생했다.

반대로 말하자면 그 병을 앓는 인간이 아니라면 고금제일이라는 남궁세가의 무공을 익힐 수 없다.

그리고 제일의 존재에겐 항상 이를 시기 질투하는 이들이 따라붙는다.

하물며 이곳은 중원 무림.

대수롭지 않게 정직을 땅에 처박고, 아무렇지도 않게 대결에서 패한 상대의 죽음을 논하는 곳.

그런 곳에서 고금제일무공의 비밀을 파헤치기 위해 반인륜적인 일이 일어나지 말라는 법이 있는가?

“네 부모는 남궁세가의 먼 방계이고, 집안에서 남궁세가 혈족병을 타고난 건 오직 너뿐이었으며, 정체를 알 수 없는 이들이 세상 그 누구도 듣도 보도 못한 무공을 가르치다가 네가 주화입마에 걸려 팔공에서 피를 쏟아내 손 쓸 수 없을 지경이 되자 그날 밤 집안이 몰살당했지.”

은 파파로부터 들은 창천의 내력.

“살수들은 어렸던 네가 죽은 줄 알고 지나쳤어. 하지만 너는 천운으로 주화입마를 극복했지. 혈족병의 마수에서는 여전히 벗어나지 못했지만, 네가 살아남았다는 소식을 들은 놈들은 생각했을 거야. 이 녀석은 두고 볼 가치가 있다고.”

녀석이 어떻게 여태 살아남았는지 신기할 지경이다.

나라면, 아니 보통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미쳐버렸을 테니까.

“네 상태를 주기적으로 확인하고 보고 할 누군가가 필요했을 거야. 또 잘못되지 않게 꾸준히 관리해주고, 관찰하면서…….”

“……그래서 놈들이 얻는 게 뭐지?”

짜식, 눈빛 한번 살벌하네.

“네가 익힌 게 진짜 남궁세가의 무공이었다면 주화입마에 걸리지 않았을 거야. 그렇다는 건, 네 무공이 남궁세가의 것을 그럴싸하게 베낀 복제품이라는 거겠지.”

[거의 확실해요! 잘못된 부분이 여럿 있지만, 분명 그 고안자는―]

가만 좀 있어 봐. 다 넘어왔다고.

“놈들이 얻는 것, 그래. 운이 좋다면 누군가는 남궁세가의 무공을 근원부터 파훼할 방법을 찾게 돼.”

“넌, 알고 있나? 그게 누군지?”

창천은 기대하는 눈빛이었지만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이것만큼은 은 파파도 대답해주지 않았다.

“정확히는 몰라. 하지만 짐작도 안 가는 건 아니지.”

천하제일의 좌(座).

시기와 질투는 아무나 할 수 있지만 그 자리를 진정 쏴버릴 작정을 하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상대가 아닌 자신이 그 자리에 걸맞다는 확신, 추진력, 그 과정을 행할 재력과 인력 등 그 모든 것을 지닌 자.

나는 손을 뻗어, 저 하늘 너머를 가리켰다.

“저 산의 주인들이 오시하고 있는 곳에서 감히 누가 그런 짓을 벌일 수 있겠어?”

저 하늘 너머.

이렇게 멀리서도 그 존재감을 뚜렷이 자랑하고 있는 고고한 산맥.

내가 자리 잡은 이 땅은 무당산의 지맥 아래에 있다.

“네 녀석, 설마 그걸 알면서도 장 의원과―”

“상대가 무당파라는 걸 알면서도 한 판 승부를 벌인 거냐고 묻는 건가?”

처음에는 나도 좀 고민을 했다.

무당파의 영역에서 무당의의 코를 납작하게 만든다는 건 그만한 보복을 각오해야 하는 일.

허나, 자신이 있었고,

[다른 건 몰라도 의술이라면 맡겨만 둬요.]

그래야 하는 이유도 있다.

“맞아.”

나는 전보다 한결 힘 있는 손으로 가면을 쥐었다.

“나도 그 녀석들에게 볼 일이 좀 있거든.”

그리고 창천에게만 보이게끔, 내 가면의 일부를 살짝 벗었다.

“……!”

“보다시피 이런 몸이다 보니. 녀석들의 의술에 관심이 많아.”

“그렇다면 차라리 다른 방법으로도, 아니, 이런 방법이 아니면 안 될 이유가 있나 보군.”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다시 가면을 고쳐 썼다.

아버지 금왕의 재력으로도 무당파의 비의(秘醫)는 얻어내지 못했으니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런 점에서 제안할 게 한 가지 있어. 나와 손을 잡자.”

”……이제 보니 미친놈이었군. 그것도 진짜 제대로 돌아버린 놈이었어.”

창천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네 처방은 쓸 만했다.”

녀석은 그 말만 하고는 나를 지나쳐 갔다.

그거면 충분했다.

[쓸 만한 검을 얻었군요.]

비록 두 동강이 난 검이지만, 날은 충분히 예리하니까.

* * *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이 오고가는 금가장은 평소에도 조용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금가장의 필두인 금왕상단과 한 울타리에 있는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형님, 형님!”

그러나 오늘은 조금 다른 종류의 소란이 금가장을 요란하게 만들었다.

“이봐요, 형님! 지금 그렇게 태평할 땝니까?”

기별도 없이 문을 벌컥 열며 뛰어 들어온 금가장의 셋째, 금감양은 잔뜩 성이 난 채로 뭐라 지껄이려다 휙 고개를 돌렸다.

“뭐야, 진양이 넌 왜 여기 있냐? 너도 태양이 그 놈 때문에 왔어?”

“내가 불렀다.”

금감양의 요란에도 장부에서 시선을 떼지 않던 첫째 금건양이 탁, 소리 나게 죽간으로 된 장부를 내려놓았다.

“의원을 차렸다지.”

“내 말이 그 말입니다! 같잖은 재주로 의원질을 하겠답시고 나선 거야 둘째 치고, 그 녀석이 뭐라고 현판을 달았는지 알아요?”

“현판?”

보아하니 천하의 첫째 형님도 이 소식엔 늦은 모양이라 금감양은 더욱 목청을 높였다.

“태양의원이랍니다, 태양의원! 믿어져요? 그놈이 아무리 어미가 달라도 그렇지―”

금감양은 분을 삭이지 못했고 금건양은 나이를 먹어 흰 눈썹이 군데군데 보이긴 하나 여전히 곧은 검미를 꿈틀거렸다.

금왕.

그 이름하에 있는 이들은 혈연을 막론하고 한 가족이라는 약속.

금태양은 그 이름을 저버리고 제 이름을 떡하니 현판에 걸어 놓음으로서 그 약속을 진흙발로 걷어찼다.

“진양이 넌 알고 있었더냐.”

“아뇨, 저도 몰랐어요. 당연히 포기하고 돌아올 줄 알았다고요. 그 애가 가져간 게 어떤 물건인지 보셨잖아요.”

“……그래. 무당이 주시하고 있는 물건. 그간 회수 시도가 없던 것도 아니지. 그걸 그리 쉽게 손에 넣어 버릴 거라곤 너도 예상하지 못한 바겠지.”

금건양이 좀 전까지 보고 있던 장부가 바로 태청장원에 관한 내용이었다. 이를 훑어본 금감양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야, 금진양! 이렇게 위험한 데에 애를 보내면 어떡해? 무당파 녀석들이 해코지라도 하면 어쩌려고?”

“은 파파가 가 있대. 당분간은 별 일 없을 거야.”

“은 파파는 이미 복귀했다.”

은 파파가 금가장으로 돌아와 금태양의 거취에 대해 보고한 게 바로 오늘 아침의 일.

태양의원에 대한 얘기를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녀가 아직 금건양을 진정한 금가장의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건 확실했지만, 그건 시간이 해결해줄 일이다.

“어쩌죠, 오라버니?”

“내버려 둬라.”

“형님!”

“오라버니, 아무리 그래도 그 애는 아버지 자식이에요!”

“무당산에 머저리들만 있는 게 아닌 이상 놈들도 그 사실을 알겠지.”

그 말이 뜻하는 바는 명징했다.

금태양의 행보가 거슬린다 해도, 어지간해선 천하제일금가의 핏줄을 대놓고 건드리진 않을 거라는 것.

무림문파도 먹고사는 일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니 말이다.

“무당 놈들은 그렇다 치고, 그 현판은 그냥 냅둘 거유?”

“그런 구멍가게 같은 의원에 금왕의 이름이 붙는 것도 수치스러운 일이지 않느냐.”

결국 내버려 두라는 말이다.

“허, 정말이지. 형님 뜻은 알았수. 그렇다면 내가 나서는 수밖엔. 나 갑니다!”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금감양은 요란스럽게 문을 벌컥 열고는 나가버렸다.

“말은 저래도 당분간은 조용하겠죠?”

“그렇겠지. 녀석과 담판을 지을 거였다면 굳이 내게 올 필요도 없었을 게다.”

너도 그만 가봐라. 금건양은 그리 말하곤 자신의 일거리에 관심을 돌렸다. 허나 금진양은 쉬이 자리를 뜨지 않았다.

“더 할 말이 있느냐.”

“……태양이에게 너무 가혹하세요.”

“녀석의 소꿉장난을 봐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자비롭다고 생각한다만.”

“경계하시는 건 아니고요?”

“경계?”

“아버지가 태양이에게 ‘진짜 유산’을 남기지 않았을까 걱정하신 적, 정말 없어요?”

금왕은 금태양을 제외한 자식들에게 자신이 평생 일군 사업을 전부 물려주었다.

허나 그게 정말 금왕이 남긴 유산의 전부일까?

“너도 그런 같잖은 풍문에 귀를 기울이는 거냐.”

“아뇨, 난 알아요. 아버지가 내게 직접 얘기하신 적 있으니까요.”

“……!”

“은 파파, 아직도 오라버니를 금가장의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았죠?”

금왕의 그림자.

나이가 든 이후로는 금왕의 늦둥이 금태양을 지켜보는 등 소일거리를 맡아 했지만, 여전히 금가장의 뒤에서 움직이는 이들은 은 파파의 지시를 따른다.

“아버지가 그랬어요. 은 파파에게 열쇠를 남기고 간다고. 그리고 아버지도, 은 파파도 태양이를 무척 귀여워했죠. 오라버니가 손에 넣지 못한 아버지의 진짜 유산, 그걸 태양이가 얻을까 봐 그렇게 미워하고 경계하는 거 아닌가요?”

“그건 놈에게 유산이란 게 의미가 있을 때의 얘기겠지. 벌써 잊었느냐? 앞으로 몇 년을 살지 장담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그 아이다.”

“……!”

“이만 가 보거라.”

명백한 축객령에 금진양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없다고는 안 했어. 의미가 없다고 했을 뿐.’

그게 금은보화가 됐든, 은 파파를 중심으로 한 금가장의 그림자가 됐든, 뭐가 됐든.

금왕이 남긴 ‘진짜 유산’은 존재한다.

이를 확인한 것만으로도 큰 수확이라 생각하며 금진양은 금가장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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