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뭐예욧! 정체를 알면서도 아무 말 안 한 거예요?!]
그럴 리가.
저건 은 파파의 원래 얼굴이 아니다. 아마 역용술이나 인피면구겠지.
“내가 독립한다는데 가족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잖아. 감시든 뭐든 몰래 사람을 보낼 거라고 생각했어.”
“호오, 그렇습니까?”
은 파파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그러나 다정함을 숨기지 않는 웃음을 터트렸다.
바로 정체를 밝힌 것도 그렇고, 역시 나를 해하려는 의도는 없는 게 분명하다.
“허면 이 노구의 정체는 어찌 알아차리신 겝니까?”
허나 늙은 그림자의 눈은 날카롭게 빛났다.
내가 어릴 적부터, 아니 그보다 한참 전부터 금가장의 눈과 귀가 되어왔던 여인.
아버지 금왕과 함께 나이를 먹으며 금가장을 암적인 면에서 지켜오고 키워 온 존재.
내가 그런 실력자의 정체를 단숨에 까발린 것이 기이한 모양이었다.
“실수를 하나 했거든.”
결정적인 단서는 홍령이 제공했다.
보통 노인이 아니라 창천을 뛰어넘는 실력자라는 사실.
그것이 의심을 확신으로 바꾸어주었다.
허나 그 이전에, 이미 나는 은 파파를 의심하고 있었다.
“그 좌판 말이야. 온통 내가 싫어하는 것만 깔아놨잖아.”
“……예?”
“은 파파는 나를 너무 잘 알아. 그게 독이 된 거지. 평범하게 섞어놨으면 나도 별 관심이 없었을 텐데. 내가 질색하는 채소만 모아서 팔고 있는 노파라고 하면 당연히 눈이 갈 수밖에 없지 않겠어?”
“고작 그 정도로, 제가 분장했다는 것을 알아차리셨다는 말입니까?”
“그걸로 끝났으면 모르겠는데. 굳이 찾아와서 도와주겠다고까지 하잖아. 그 외에도 몇 개 더 짐작 가는 부분이 있었고.”
어릴 적, 하루도 빼놓지 않고 병상에 누워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몰래 금가장을 뛰쳐나갔다가 쓰러졌을 때.
갑자기 바람처럼 불어와 나를 안아들었던 손길.
언제나 그림자 뒤에서 나를 지켜보며 걱정하던 눈빛.
아무도 없는 한밤중에 고열에 시달려 눈도 뜰 수 없을 때, 내 머리에 시원한 수건을 얹어주며 달래주던 목소리.
얼굴과 목소리를 바꾸고 다른 사람을 연기한다고 해서 그 안에 있는 감정까지 없는 척할 수는 없다.
“다르게 말하면 은 파파가 방심한 거지. 적이었으면 이렇게 허술하게 접근했겠어?”
“……호호호홀! 도련님에게 한 방 먹었습니다요. 아직도 세상엔 배울 점이 많구만요.”
“그래? 그럼 수업료를 내야지.”
“호오. 이 노구에게 원하는 것이 있으십니까?”
“백복령. 그런 이름을 가진 버섯이 필요해. 가급적이면 오늘 내로.”
“백복령이라. 그 절름발이의 발을 치료하실 생각인 게지요. 한 근에 금 두 냥은 하겠습니다만…… 그림자의 정체를 들킨 값으로는 제법 싸군요. 기한이 하루라. 조금 빠듯하지만, 어떻게든 될 겁니다.”
[과연, 천하제일금가의 그림자라 불릴 만하네요. 그걸 고작 하루 만에 가져오겠다고 장담하다니…….]
“하지만 도련님. 언제까지 이런 방식으로 고난을 헤쳐 나갈 수는 없을 겁니다.”
은 파파의 목소리는 서늘했다.
그것은 경고요 또한 충고였다.
“거 들켜 놓고 말 많네. 빨리 갔다 와. 해 지기 전엔 와야 해?”
“홀홀, 이 노파를 가혹하게 부리시는구만요. 다녀오지요.”
이런 방식이란 그런 거다.
뒷 세계에선 그 누구도 함부로 이름을 입에 담지 못할 이에게, 친할머니에게 그러듯 어리광을 부리는 것.
그 누구보다 엄격한 전장의 주인에게 정을 담보삼아 보다 많은 것을 받아내는 것.
나도 안다.
이런 식으로 정에 기대어 덤을 얻어내는 방식은 오래 가지 못하리라는 것을.
언젠가는 냉정하기 짝이 없는 거래의 판에 오를 때가 올 것이다.
[음, 그러면 오히려 더 그래야 하는 거 아닌가요? 솔직히 당신 지금, 먹고 죽을 것도 없잖아요. 그거라도 이용해야지 어쩌겠어요.]
맞아, 그래야지.
다정한 이들의 마음을 이용하는 게 좀 불편한 것도 사실이지만, 홍령 덕분에 마음이 가벼워졌다.
마음은 가벼워졌는데……
“……이 비탈길을 어떻게 올라가지?”
은 파파가 내게 다정하다는 거 취소다.
이거 분명 얄미우니까 알아서 올라가라고 내버려 두고 간 게 틀림없었다.
나 체력 거지인 거 빤히 아는 사람이!
[진짜 다친 것도 아니잖아요? 어서 가요. 환자가 와 있을지도 모른다고요!]
하아.
벌써부터 냉정한 세계의 시작이구만.
땀을 흘리며 비탈을 오르기 시작했다.
* * *
은 파파가 돌아온 건 다음 날 오후였다.
[진짜 백복령인데요?! 심지어 전부 특상품……!]
홍령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내 머릿속에 비명을 질러댔다.
“모자라십니까?”
[충분해요! 아니, 충분하다 못해 남아요! 어서 준비하러 가요!]
안 그래도 밤새 약을 만들 준비를 마쳐놓은 참이었다.
이 백복령이라는 약재만 손질해서 달이기만 하면 끝.
정작 난관은 그 약을 앞에 둔 당사자 앞에서 일어났다.
“병을 낫게 할 약이라니…… 의원님, 나는 그냥 장 의원님이 오시기 전까지 덜 아플 약이면 충분합니다.”
“맞아요. 이걸 함부로 먹었다가 장 의원님 치료랑 충돌하기라도 하면…… 늦어도 며칠이면 오실 테니까요. 그때까지만 잘 부탁드립니다.”
“그러지 말고, 절 믿고 좀 드셔봐 주세요. 통증도 많이 가라앉았잖아요.”
“아니 그래도, 여태 받던 치료가 있는데…… 그냥 침이나 한 방 더 놔주시면 안 될까요?”
아무리 달래고 권해도 객잔 주인 내외는 완강했다.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삼십 년. 평균수명이 짧은 이 동네에서는 거의 반평생이나 다름없는 시간 동안 한 사람의 치료를 받아온 사람이다.
그런데 갑자기 다른 치료를 권한다?
21세기 지구로 치자면, 갑자기 어느 날 나타난 외계인이 “사실 너희는 숨을 안 쉬어도 살 수 있다! 그게 더 건강을 지키는 비결이다!” 하며 숨을 쉬지 말 것을 권하는 느낌일까.
“장 의원님의 약에 힘을 더해주는 약이라고 보시면 돼요. 장 의원님 오실 때까지 충분히 안 아프게 지낼 수 있을 거예요.”
장 의원이 사실 당신들을 속였고, 나을 수 있는 병을 낫지 못하게 삼십 년 동안 질질 끌었다.
그 사실을 밝히는 것은 간단하다.
그 사실을 믿게 만드는 것이 불가능할 뿐.
“으음, 그렇다면야…… 일단 먹어는 봅시다.”
당장은 태양이 나그네의 옷가지를 벗기듯 한 꺼풀 한 꺼풀 나아가면 그만.
결국 최후에 웃는 자는 따스한 태양이 될 테니까.
* * *
금태양 특제 백복령탕.
복용 첫째 날.
“음?”
“왜 그래요, 여보?”
“아냐. 다리에서 뭔가 이상한 느낌이 나서. 기분 탓이겠지.”
복용 셋째 날.
“……어째 다리가 근질근질한데. 나가서 걷고 싶은 기분이야.”
복용 닷새째 날.
“에그머니, 여보! 무슨 그렇게 시커먼 땀을…… 아니, 일어날 수 있어요?!”
복용 이레째 날.
“이봐요, 의원님. 나 아무래도…… 걸을 수 있을 거 같습니다.”
* * *
태양의원의 몇 안 되는 사람들이 전부 모인 가운데, 객잔 주인이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음 태양의원에 실려 올 때만 해도, 자력으로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던 중병의 몸.
그랬던 그가, 그의 두 다리가.
땅을 굳건히 딛고 그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선다, 선다!”
“일어섰다!”
“이봐, 주인장! 한 번 뛰기도 해봐!”
“이 사람들아. 이제 겨우 자리에서 일어난 사람한테 무슨!”
장 의원이 오기 전까지는 쭉 자리보전을 할 거라고만 생각했던 객잔주인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치료를 시작한 지 고작 이레.
“그동안은, 한 달간 약을 달여 먹어야 겨우 거동이 가능한 정도였는데……”
두 다리에 실린 힘이 믿기지 않는 듯, 객잔 주인은 몇 번이고 제자리에서 발을 움직여 보았다.
그가 없는 동안 혼자 객잔을 지키느라 낯이 초췌해진 아내는 아예 눈물을 글썽일 지경이었다.
“괜찮을 거 같네요. 걸어보시죠.”
내 말에 객잔 주인이 조심스럽게 발을 떼기 시작했다.
어린 아이가 첫발을 내디딜 때보다도 긴장되는 순간.
허공에서 살짝 떨리던 왼발이 앞으로 나아갔다.
“―우와! 걷는다! 걸어!”
“잠깐, 지금 다리를 안 저는 거 같은데? 평범하게 걷지 않아?”
경탄과 기쁨의 물결이 자리에 모인 모두의 얼굴에 번져나갔다.
하지만 그 기쁨이 당사자인 객잔 주인만 할까.
그는 믿기지 않는 얼굴로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뎌, 마침내 내 앞에 섰다.
그의 표정에는 뭐라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이 어려 있었다.
“……의원님, 부디 제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한 발짝 걸음을 내딛는 것조차 힘들어하던 그가, 이제는 두 다리를 굽혀 몇 번이고 내 앞에 절을 한다.
“아니, 왜 이러세요. 이러지 않으셔도 돼요.”
“저, 다 들었습니다. 제가 그간 먹던 약이…… 사실 제 몸에 독이 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도 안 돼. 그걸 어떻게? 설마 당신, 나 몰래 알려줬어요?]
그럴 리가.
하지만 짐작 가는 바는 있다.
“나물 할매가 엊그제, 지나가다 두 분의 대화를 들었다며 귀띔을 해줬지요.”
여기서 이런 일을 할 사람은 은 파파뿐이지.
“처음에는 안 믿었습니다만 이렇게 며칠 만에 낫고 나니……”.
“운이 좋았을 뿐이에요. 마침 할머니께서 뒷산에서 약재를 구해다 주셨고요.”
“하지만 의원님이 안 계셨으면 약이 있어도 써보지도 못했겠지요. 정말이지…… 처음부터 제가 잘못된 약을 쓰고 있었다 말하셨으면 저는 그 약을 입도 대지 않았을 겁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장 의원님을 믿었으니까요. 하지만 의원님, 그리고 도련님은 제게 그런 말은 한 마디도 안 하시고, 제가 그저 낫기를 바란다며 설득하셨지요. 이제는 압니다, 믿습니다! 제가 그동안 속았다는 걸. 이 두 다리가 바로 그 증거입니다!”
객잔 주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아예 제자리에서 개구리처럼 펄떡펄떡 뛰기 시작했다.
됐다.
눈에 보이는 성과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평생 동안 다리를 절며 마을의 터줏대감 노릇을 한 객잔 주인이 멀쩡히 걸어 다닌다.
거기에 지난 세월 동안 받은 치료가 잘못된 것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제 이 마을의 누구도 태양의원의 문을 두드리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다.
“게 아무도 없느냐! 의원이라는 작자는 어디 있느냐!”
어이쿠.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가기도 전에 벌써 문을 두드리는 작자가 나타났다.
문을 걷어차다시피 하고 쳐들어온 이는 염소꼬리 같은 반백의 수염이 인상적인 중년인.
그보다 시선을 끄는 것은 그가 허리에 패용한 침통이었다.
바람이 부는 모양새를 그린 듯 푸른 문양이 새겨진 침구통.
의업에 몸담은 이가 아니라도, 저 문양의 뜻을 모르는 사람은 중원에 존재하지 않는다.
무당의(武當醫).
구파일방의 수좌. 고강하고 절도 있는 무공으로 중원에 명성을 떨치는 무당파.
그런 무당파 무공의 기반이 되는, 무당파 고유의 의술!
갑자기 태양의원에 들이닥친 이는 그런 무당파 의술을 계승한 증거를 갖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