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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의원-12화 (12/350)

12화

[일어나욧!]

“아니, 왜 또 새벽부터 난리야……”

어제도 고작 두 명 왔는데, 오늘이라고 동틀 무렵부터 바글바글할 리가 없다.

그런데도 홍령은 기합이 단단히 들어 있었다.

“어?”

헌데 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빗자루 같은 걸로 마당을 열심히 쓸어대는 소리.

문을 열어보니, 어제 첫 환자로 받았던 행상 할머니가 마당을 청소하고 있지 않은가?

“아니, 할머니가 왜 청소를 하고 계세요? 무릎이 안 좋으니까 며칠 쉬시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어제 선생님 침 맞고 푸욱 잤더니 이게 참 신통방통하게도, 홀홀, 무릎도 아프질 않구만요.”

“뭐, 몸이 편해서 하시는 거면 괜찮은데, 그래도 환자분께서 청소를 하시는 건 좀.”

“공짜로 잠자리도 얻고 치료도 받는데 제가 이런 거라도 해야지요. 안 그러면 제가 불편하여요. 부디 잡일 정도는 하게 해주셔요, 도련님.”

흠. 예상치도 못한 일손이 생겼는데.

“그러면 치료를 받는 동안만이라도, 몸이 불편하지 않은 선에서만 부탁드려요. 어디까지나 환자로 와 계시다는 건 잊지 말고요.”

“물론이지요, 홀홀.”

환자가 졸지에 숙식 제공 일꾼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뭐 좋은 게 좋은 거지.

어차피 환자가 늘어나면 청소 같은 자잘한 일을 할 시간이 없어질 테니 잘됐다면 잘된 셈이다.

[저 환자분 말인데요……]

응? 왜, 뭐 주의사항이라도 있어?

그러고 보니 어제 할머니의 맥을 짚은 후, 홍령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설마. 또 아버지 때처럼?

[그런 건 아니에요. 하지만 조심하는 게 좋겠어요.]

홍령의 목소리에는 경계심이 가득했다.

[굉장한 고수예요. 창천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기의 흐름으로 봐선, 저 얼굴도 진짜 얼굴이 아닐 거예요.]

가슴이 서늘했다.

역용술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정체불명의 고수!

홍령이 아니었다면 그냥 몸이 좀 아픈 할머니로 착각할 뻔했을지도.

[혹시 짐작 가는 거 없어요?]

없을 리가.

거지가 날 쫓아올 때도 그랬지만, 나를 노릴 만한 사람은 무수히 많다.

단순히 목숨을 취하거나 인질을 잡는 것 외에도, 나를 감시하고자 하는 이들도 있을 터.

내 형제들이라면 충분히 그럴 이유가 있다.

큰 형님은 말할 것도 없고, 진양 누님이 큰돈을 맡긴 나를 못 믿어 감시역으로 보냈을지도 모르는 일.

만약의 경우, 누님이 내 실패를 부추기기 위해 보낸 사람일 수도 있다.

[어떡하죠? 다음에 침을 놓을 때 확 기절시켜버릴까요?]

상대는 내 의술을 얕보고 있다.

그렇지 않다면 제 몸 상태를 훤히 들여다볼 수 있는 게 빤한데 맥을 짚게 내버려 두지 않았을 거다.

침착하자. 내가 앞서 있다.

확실히 기절시킬 수는 있고? 엄청난 고수라며.

[으음, 확실히 내공을 싣지 않는 이상은 무리인데……]

무릎이 아프다는 건 진짜야? 그 정도 고수가?

[병증이 있는 건 확실해요. 하지만 그 또한 역용술처럼 일부러 기를 뒤틀어 놨을지도요.]

확실한 게 하나도 없군.

[하지만! 시간이 있으면 알아낼 수 있어요! 며칠이면 돼요!]

그 정도면 충분하다.

적어도 확실한 게 한 가지는 있으니까.

만약 그만한 고수가 날 죽이거나 잡아가려고 했다면 이렇게 번거로운 수를 쓸 필요가 없었을 거다.

그렇다면 상대의 목적은 감시, 혹은 방해.

그 말은 내게도 시간이 있다는 뜻이다.

뭐라도 더 알아낼 때까지 난 침착하게 행동할 테니까.

홍령 넌, 알지?

[최선을 다할게요!]

* * *

그날 오후.

총 세 명의 환자가 새로 태양의원을 방문했고, 사흘째에는 마지막 열 번째 환자가 도착했다.

치료가 공짜라는 소문에 혹해 찾아온 이가 여섯(여기에 얼결에 환자가 된 수상한 할머니도).

그리고 나머지 넷이 내가 노리던 바로 그 사람들이었다.

삼십 년.

장 의원이라는 자가 오랜 세월 동안 한 마을의 주치의를 책임졌음에도 고치지 못한 자들.

“장 의원께서 십 년을 봐주셨는데, 잠깐 침 맞을 때만 괜찮고요. 약을 아무리 먹어도 낫지를 않아요.”

지금 보고 있는 환자는 그중 상태가 가장 심각한 이였다.

십 년간 원인 모를 병으로 다리를 절었고, 먼 동네에서 출장을 오는 의원이 며칠만 늦어지면 아예 다리가 마비가 되어 움직이지도 못할 정도의 병증.

“일단 급하게 침을 놓았는데. 통증은 좀 어떤가요? 여전한가요?”

그 환자는 바로 이 마을 객잔의 주인장이었다.

“아, 예, 아까보다는 좀 덜 아픈데…… 휴, 장 의원님이 주신 약재를 달여 먹으면 이 정도는 아닌데 말입니다. 이번에 늦게 오셔서 약이 다 떨어지는 바람에…….”

“그 약이 남아 있다면 비슷한 약이라도 지어드릴 수 있습니다.”

“안 그래도 달이고 남은 걸 좀 가져오긴 했는데…….”

“일단 가진 걸로 비슷한 거라도 만들 테니까 푹 쉬고 계세요. 침 효과가 반나절은 갈 겁니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장 의원님이 며칠 내로 오실 테니, 그때까지만 좀 신세 지겠습니다.”

홍령.

……홍령?

[네?]

‘뭐야, 왜 말이 없어? 네가 말이 없으면 괜히 불안하다고.’

[아, 그게…….]

‘이번엔 뭐가 문제야?’

이젠 익숙하다. 홍령이 갑자기 말이 없으면 반드시 문제가 있다.

객잔 주인을 진찰할 때까지만 해도 조잘조잘 잘도 얘기하던 홍령이 갑자기 말이 없어진 건.

“이 약 때문이지?”

장 의원이 객잔 주인을 위해 십여 년간 처방했다는 그 약의 부스러기였다.

의심 가는 부분은 있다.

“병을 악화시키는 약이야, 아니면 그냥 진통 효과만 있고 치료 효과는 없는 약이야? 그도 아니면 새로운 병을 만드는 약인가?”

[―당신이 그걸 어떻게?!]

전생이고 현생이고 환자로 살다보니 그런 쪽으로는 알고 싶지 않아도 알게 된달까.

어딜 가나 나쁜 사람들이 하는 짓은 똑같다는 점은 슬프지만.

[두 번째예요. 확실히 치료할 수 있는 약이 있는데 전혀 다른 처방을 하고 있어요.]

“나을 수 없는 병이라 일부러 진통제만 준 건 아니고?”

[절대 아니에요.]

홍령이 단언했다. 어떤 의미로는 다행이었다. 불치병 환자라면 어떻게 할 방도가 없으니까.

그렇다면 장 의원이라는 자는, 치료할 수 있는 병을 일부러 경과를 늦추고 있다는 뜻이 된다.

이유는 물어볼 필요도 없다.

오래도록 환자를 받아 돈을 벌려는 속셈 말고 뭐가 있겠는가?

“일부러 병을 만드는 악질이 아니라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나…….”

[악질이 아니라고 할 수도 없어요. 이런 약만 먹으면서 치료시기를 놓쳐 왔으니, 앞으로 일 년 정도면 저 환자는 영영 제대로 걷지 못했을 거예요.]

그렇게 심각하다고?

[그간 오용했던 약의 독기를 빼는 게 문제지, 치료 자체는 어려운 병이 아니에요. 빠르면 열흘, 길어도 보름이면 충분해요.]

홍령이 장담했다.

[문제는 당장 필요한 약재가 제게 없어요. 백복령(白茯笭)이라는 버섯인데, 이거 구하기도 힘들뿐더러 부르는 게 값이거든요. 그게 있어야 몸에 쌓인 독을 빼낼 수 있을 텐데…….]

난 또 뭐라고.

그 정도는 내가 구할 수 있다.

그보단……

“일부러 틀린 약을 처방한 환자가 과연 이걸로 끝일까?”

* * *

[어머, 깨우지도 않았는데 일찍 일어났네요?]

“백복령을 구하러 가야지. 으쌰!”

동도 트지 않은 시각.

나는 동네 마실이라도 가는 차림으로 가볍게 의원을 나섰다.

구하기도 쉽지 않은 데다 가격까지 상상을 초월한다는 약재를 구하러 가는 걸로는 보이지 않는 모습.

[뭐예요, 혹시 약초에 해박한 지식이 있었어요? 이 산 어디에 백복령이 자랄 만한 곳이 있나요?]

동네 뒷산으로 걸음을 옮기는 내게 홍령이 참새처럼 조잘대며 물어왔다.

설마, 약을 먹는 거라면 자신이 있지만 그 재료까지 알 수는 없지.

내가 노리는 건 따로 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오고 가는 다듬어진 길을 가다가 중간부터 비탈을 타기 시작했다.

정말 누가 보면 약재라도 캐러 가는 건가 싶을 정도로, 약초꾼이 아니면 택하지 않을 길.

한 발짝만 잘못 디뎌도 저 아래로 바짝 추락할 것 같은 길을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심장이 벌렁거리는 기분이었다.

[조심해요. 이런 인적 드문 골짜기에서 큰 부상이라도 입으면 위험하다고요.]

홍령은 뛰어난 의술 실력을 자랑하지만, 여기서 내가 운신이 불가능한 부상을 입게 된다면 제대로 손 쓰지도 못한 채 그대로 고립되어 죽고 말 것이다.

그래, 만약 발이라도 헛디딘다면 말이다.

“으악―!”

바로 이렇게!

낙엽을 밟고 미끄러진 몸이 균형을 잃고 넘어졌다.

넘어지다 못해 비탈길로 데굴데굴 굴러 내려가기 시작했다.

돌과 나무뿌리 따위가 옷과 살갗을 마구잡이로 찢어발겼다.

[괜찮아요?!]

이게 괜찮아 보여?

그럼 안 되는데.

“윽, 내 다리, 다리가―”

[뭐예요, 무슨 일이에요?! 진짜 다친 거예요?]

아니, 손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어.

홍령이 멋대로 손을 움직여 다리의 상태를 살피려는 걸 의지를 발휘해 막았다.

안 괜찮아 보여야 한다.

누가 봐도 가만 내버려 둘 수 없겠다 싶을 만큼.

“으윽…… 이거, 아무래도 못 걷겠는데…… 아무한테도 말 안 하고 왔는데 어쩌지. 윽!”

[……뭐예요, 꾀병?]

티 나?

나는 좀 더 혼신의 연기를 했다.

발목을 접질려서 꼼짝도 못 하고 있다는 연기.

아파 죽을 거 같다는 연기.

자신이 처한 상황을 깨닫고 조금씩 겁을 먹기 시작한 연기.

이건 목표하고 있는 한 사람을 꾀어내기 위한 연극이다.

[어휴, 내가 이 몸에 깃들어 있는 게 아니라면 눈치 못 챘을 거예요. 어쩜 그렇게 아픈 척을 잘해요?]

고기 맛도 먹어 본 놈이 잘 안다잖아.

자, 슬슬 걸릴 때가 됐는데.

나는 애써 일어나 걸어보려는 척 연기했다.

그러다 한 번 또 미끄러졌다.

“―으악!”

[안 다친 거 맞아요?!]

아니, 이번엔 조금 삐끗했을지도.

하지만 효과가 있었다.

머리 위의 나무가 그림자를 무겁게 휘청이더니, 그 위에서 한 명의 인영이 뚝 하고 떨어져 내리며 내 목의 혈을 짚었다.

[어딜!]

하지만 홍령이 무슨 짓을 한 건지 상대의 점혈은 먹히지 않았다.

덕분에 나는 꼿꼿이 일어나 상대와 마주 볼 수 있었다.

검은 복면에 검은 옷.

특정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복면 너머로 보이는 하얗게 센 백발뿐.

“오랜만이야, 은 파파(婆婆).”

[아는 사람이에요?]

알다마다. 너도 아는 사람인걸.

“……어떻게 알아차리신 겁니까? 그보다, 발목은?”

“보다시피 멀쩡해.”

내가 가볍게 제자리걸음을 걸어 보이자 은 파파가 한숨을 푹 내쉬며 복면을 벗었다. 성성한 백발과 주름진 노파의 얼굴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앗!]

바로 태양의원에 신세를 지게 된, 채소팔이 행상 노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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