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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의원-11화 (11/350)

11화

청결과 위생은 건강에 매우 중요하다.

제때 씻어주지 않으면 각종 피부질병에 시달리는 것은 물론, 몸의 면역력이 피부질환에 많은 힘을 기울여야 해서 신체 내부의 건강에도 문제가 생긴다.

[맞아, 면역력이라는 개념이 흥미로웠어요. 다음에 더 자세히 얘기해줘요.]

시간 날 때마다 틈틈이 홍령에게 현대의 의학 상식을 가르쳐 주고 있다.

나도 잘 아는 건 아니지만 ‘상식적인’ 선에서의 지식은 갖고 있으니까.

아무튼, 장작을 패다가 물을 끓여 씻는다는 것은 이 시대에서는 사치에 해당한다.

찬물 세안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거지들이 도외시 당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환자는 받았고, 다음 환자들이 어린 거지를 보고 도망가지 않으려면 겸사겸사 씻겨야지.

문제는……

“이걸 나보고 하라고?”

창천은 내게 솥과 장작의 위치만 알려주고는 쌩하니 사라졌다.

물론 녀석이 굳이 해줄 필요는 없는 일이긴 한데.

솥은 척 봐도 장정 두셋이 용을 써야 나를 수 있는 크기. 거기에 물을 채우고 그만한 물을 끓일 장작을 나르다간……

“안 돼, 못 해. 알잖아. 보통 사람도 힘들 일인데 나 이거 나르다가 죽어.”

[할 수 있어요. 한번 들어봐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잠깐만, 너 설마?”

혹시 홍령이 그런 가공한 힘을 낼 수 있는 건가?

홍령은 지금까지 내 손에 깃들어 신들린 치료를 해왔다. 홍령이 무공을 익혔다면, 이 병약한 팔로도 저 무쇠 솥을 번쩍 들어 올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뭣보다, 안 될 거 빤한 일을 일부러 하라고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좋아, 한번 해보자.

[좀 따끔할 지도 몰라요.]

내가 무쇠 솥의 가장자리를 양손으로 잡고 들어 올리려는 순간.

찌릿―

양 팔에 전기가 통하는 감각과 함께, 갑자기 팔이 깃털처럼 가볍게 느껴졌다.

“어, 어!”

번쩍!

뭐야? 지금 뭐야?!

내가 이걸 들었어?!

[빨리 갖다 놔요. 저쪽이면 괜찮겠네요.]

얼떨떨해할 새도 없이 나는 홍령이 가리킨 돌들 위에 무쇠 솥을 갖다 얹었다. 적당히 돌로 틈을 메우면 화덕으로 쓸 만할 거 같았다.

[자, 자! 서둘러요! 물, 그리고 장작!]

놀라웠다.

살면서 들어본 가장 무거운 게 탕약 그릇인 내가, 갑자기 이렇게 힘이 세지다니?

현대에 살 때도 평범한 사무직 회사원이었을 뿐이라, 무쇠 솥은커녕 물동이나 장작을 몇 번 나르는 것도 힘들었을 거다.

하지만 지금은 해냈다.

“미쳤어…… 내가 해냈다고?”

사람 하나가 들어가도 남을 무쇠 솥에는 물이 가득 차 있었고 장작의 불은 활활 타올랐다. 이제 어린 거지를 데려와서 목욕만 시키면 끝!

아까는 전혀 내키지 않던 일이었지만 지금은 얼마든지 기운이 났다.

그 거지를 번쩍 들어 올려서 끓는 물에 풍덩 집어던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무슨 소리예요. 그럴 순 없어요.]

하긴, 그건 좀 그렇지?

[슬슬 효과가 다했을 테니까요.]

홍령의 말에 떨어지기 무섭게 헉, 하고 숨을 집어삼켰다.

아까까지만 해도 깃털같이 가볍던 두 팔이 천근처럼 무거웠다.

지칠 정도로 혹사당한 느낌.

[흠, 효과는 있지만 역시 일시적이네요. 회복에는 얼마나 걸리려나.]

뭐야…… 내 몸에 무슨 짓을……

팔의 피로가 온몸으로 번져나갔다.

[새로운 처방을 시도해봤잖아요. 기억 안 나요?]

그랬다. 창천의 맥을 짚어본 홍령은 내 처방에 몇 방의 침을 더했다.

고, 작 그걸로……?

[오해는 말아요. 당신 같은 경우에만 가능한 거니까.]

홍령의 말을 마지막으로, 나는 거부할 수 없는 피로감에 휩싸여 정신을 잃었다.

* * *

“―헉!”

[이제 좀 정신이 들어요?]

“내가 쓰러진 지 얼마나 됐―”

말을 할 필요도 없었다. 열린 문 너머로 해가 뉘엿뉘엿 지는 게 보였으니까.

망했다.

온갖 쇼를 해대며 홍보를 했는데 개업 첫날부터 의원이 기절해 있었다니!

[다행이라면 다행인데, 아무도 안 왔어요.]

아무도?

목소리가 시무룩한 걸 보니 홍령이 날 놀리려는 건 아닌 거 같았다.

아침부터 사람들이 줄을 설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여태 그 거지 한 명 빼곤 아무도 안 올 줄이야.

[더 홍보를 해보는 건 어때요? 집집마다 찾아가서 치료를 해본다든가.]

아니, 일단 좀 더 기다려보자.

이제 겨우 하루가 지났을 뿐이니까.

“그보다, 내가 왜 여기 있지?”

내가 기운을 잃고 쓰러진 건 창고 앞마당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내 방 침상에 누워 있다.

누가?!

“이제 일어났나.”

그 의문의 주인이 열린 문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설마, 창천 네가?”

아, 맞다! 가면!

다행히 창천은 등을 돌린 채로 문간에 털썩 앉느라 서둘러 얼굴을 가릴 시간이 있었다.

아니, 어차피 창천이 쓰러진 날 옮겼다면 이미 들켰을지도.

“설마는 뭐가 설마냐.”

“……봤어?”

“뭘, 갑자기 픽 쓰러지던 거? 아니면 그 이상한 가면을 내가 들춰보기라도 했을까 봐?”

가면을 보며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짓는 걸 보니 맨얼굴을 본 건 아닌 모양이다.

하긴, 그걸 봤다면 저런 태도가 나올 리 없지.

이 얼굴의 추악함은, 겉으로나마 내게 호의적일 수밖에 없는 금가장의 하인들은 물론, 나를 가장 사랑하는 진양 누님마저도 불쾌함을 감추지 못할 정도니까.

[걱정 마요. 그는 당신을 옮기기만 했어요. 가면은 당신이 잠결에 벗은 거고요.]

기절한 주제에 잠버릇까지 고약했다니.

“그렇담 다행인데, 뭐야. 숨어서 날 지켜봤어?”

“그냥 근처에 있었을 뿐이다. 그 거지는 씻겨놨으니 나머진 알아서 해.”

“어? 네가 씻겼다고?”

“여긴 내 집이야. 그런 불결한 게 돌아다니는 건 못 참아.”

어쩐지 녀석의 옷 여기저기가 좀 젖어 있다 싶었다.

짜식, 그냥 도와줬다고 하면 되지.

“아무튼 고마워. 몸은 좀 괜찮나 봐? 어때, 내 치료 효과 있지?”

나도 갑자기 엄청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는데 무림인인 창천에겐 더 큰 효과가 있지 않았을까?

“딱히―”

잠깐 망설이던 창천이 입을 열었을 때였다.

[사람이 왔어요!]

사람?

동시에 창천의 고개도 돌아갔다.

어디서 인기척이 나긴 한 모양이었다.

“저기, 계십니까?”

그리고 내 귀에도 나이 든 노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환자, 첫 환자다!

[무슨 소리예요. 그 거지가 첫 번째 환자잖아요.]

홍령이 핀잔을 주건 말건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환자도 환자지만 그 목소리가 귀에 익었다.

“할머니!”

“아이구야, 계셨구만요. 어제는 참으로 감사했습니다요.”

어제 은전 두 닢으로 깔끔하게 완판(?)시킨 채소 좌판의 노파가 찾아온 것이다.

“어서 오세요! 치료를 받으러 오신 거죠?!”

“예에?”

“이쪽으로! 어디 보자, 어제 기침을 좀 하시던데! 어제는 침밖에 없었지만 여긴 약재도 좀 있거든요. 어서 들어오셔요! 뜸도 올려드리고 부항도 놔드릴게요!”

“아니, 저는 그러려고 온 게―”

노파는 정말 치료를 받으러 온 게 아니었는지 당황한 얼굴이었다.

“기왕 오신 거 받고 가세요. 정 뭐하시면 어제 많이 사드린 대신이라고 생각하시고요. 어차피 공짜인데!”

“아이고야,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이 촌부가 잠시 신세를 지겠습니다요.”

푹 자고(?) 일어나 기운도 나겠다, 실력발휘 좀 해볼까?

물론 치료를 하는 건 내가 아니지만.

……

……

……홍령?

[아, 네.]

‘뭐 해? 할머니 뭐 문제 있어?’

진료실로 자리를 옮기고 맥을 짚는데 홍령이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이렇게 홍령이 말이 없었던 건 딱 한 번.

돌아가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던 아버지를 진맥했을 때뿐이다.

설마 이 할머니도?

[아뇨, 그런 건 아니에요. 아닌데…….]

뭐야? 수상하게.

[일단 노화로 인한 잔병이 좀 있으니까 치료할게요.]

좋아. 이따 얘기하자고.

안 그래도 내 몸에 했던 치료에 대해서라든가 여러 가지로 물어볼 게 많았으니까.

홍령은 빠르게 치료를 진행했다.

침과 뜸을 놓고 내 봇짐을 털어 약도 달였다.

아까 끓였던 물이 반 정도 남아 있어서, 창천의 도움을 받아 새로 약탕을 만들어드리기도 했다.

현대 한국이라면 건강보험의 적용을 받아 만원이나 낼까 싶을 정도의 치료다.

허나 평범한 서민은 의원을 만나기도, 의원에게 충분한 치료를 받을 만큼의 돈을 마련하기도 어려운 시대에 이 정도면 나름 상급의 서비스였다.

“아까 창천 봤어? 툴툴거리면서도 시키는 대로 하는 걸 보면 치료가 효과가 있긴 있었나 봐. 그치?”

모든 치료를 마치고 밤.

간단히 끼니를 때우며 홍령이 무어라 말하길 기다리는데.

[이건 뭔가 이상해요.]

응? 뭐가?

[첫날이라지만 환자가 이것밖에 안 왔잖아요. 아무리 사람이 없어도 새벽부터 지금까지 앉을 틈도 없이 환자를 볼 줄 알았는데…….]

시장에서 실력도 입증해 보였고 선착순으로 반값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고작 두 명.

거지는 치료를 받으러 온 거지만 할머니는 애초에 감사인사를 하러 온 걸 붙잡아둔 거다.

“솔직히 그렇잖아. 얼굴을 가리는 가면을 쓴 것도 수상쩍고…… 내가 너무 어려서 그런 걸지도 모르지. 목소리만 들어봐도 어리잖아.”

무림에서는 아이와 노인, 여인을 조심하라는 농담도 있지만 의술은 다르다.

의술은 경력이 전부인 세계.

그 말은 나이가 곧 전부라는 말과 상통한다.

[그래도 그렇죠! 의원이 얼마나 귀한 존재인데! 하물며 여긴 다른 의원이 없는 동네 아니었어요?]

대부분의 의원은 도제식으로 길러지며, 황실에서 운영하는 학교가 있긴 하지만 현대의 대학병원에 비할 바는 아니다.

명망 있는 의원들은 마치 무공처럼 자신만의 비방과 비급을 가지고 있는데다, 그러한 것을 남에게 잘 전수해주지도 않는다.

때문에 무한과 같은 대도시가 아니면 얼굴 한 번 보기 힘든 것이 바로 그 ‘의원’이라는 존재다.

뭐, 21세기 한국도 조금만 시골로 들어가면 제대로 된 병원 하나 없는 곳이 넘쳐나지만…….

“들었잖아. 이 마을에 상주하는 의원은 없지만 몇 달에 한 번, 건넛마을 장 의원이라는 자가 출장을 와. 벌써 삼십 년이나 됐다지.”

창천의 주치의이자 이 마을을 자기 구역으로 삼고 있는 의원.

[확실히, 그건…… 사람들은 한번 주치의를 정하면 잘 바꾸지 않으니까요. 그것도 이런 시골에서는……]

“그래서, 자신 없어?”

[무슨 소리예욧! 나 홍령, 이런 시골의 의원에게 질 만큼 실력을 허투루 키워오지 않았다고요!]

“그럼 됐어. 수십 년 진료한 의원이 있는 동네야. 갑자기 다른 의원을 찾아올 사람은 소수겠지만, 그 소수만 잡으면 돼.”

수십 년의 독점.

과연 그게 강점이기만 할까?

“분명 있을 거야. 그간 비용이 부담되던 사람들, 그리고 그 의원에게 치료를 받아도 도통 낫지 않던 사람들…… 분명 찾아올 거야.”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낫는다면 더할 나위 없는 홍보가 된다.

“보름. 보름이면 충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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