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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의원-10화 (10/350)

10화

“일단은 네 말을 따라보도록 하지.”

[삐딱하기는. 맞고 나니까 딱 덜 아플 텐데.]

홍령이 투덜거리거나 말거나, 나는 슬슬 눈이 감기기 시작했다.

솔직히 한계였다.

아침부터 시장에 나가 십수 명을 치료해댔지, 새 의원을 열었다며 홍보를 해댔지, 끝나자마자 객잔서 짐을 싸들고 태청장원에 와서 여태 창천을 상대했지.

벌써 밖에는 어둠이 내려앉았고 실내는 등불이 필요할 정도가 되었다. 잠이 쏟아졌다. 몸이 무너질 거 같아서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방으로 옮기려는데, 창천이 내 어깨를 잡아 눌렀다.

“여기서 자라. 다른 방은 바로 쉴 만한 상태가 아니야.”

“그럼 너. 는……”

큰일 났다. 말이 느려지기 시작했다. 머리만 대면 바로 꿈나라 직행이다.

“알아서 한다. 치료비라고 생각해라.”

그렇게 말하곤 창천은 밖으로 나가버렸다. 마침 침구가 펼쳐져 있었기에 나는 더 이상 뻗대지 않고 삿갓을 벗고 드러누웠다.

[치료비를 헐값으로 때우려고 하네요.]

그러거나 말거나, 지금 내겐 드러누울 잠자리가 천금보다 소중했다. 홍령이 남궁세가가 어쩌구 저쩌구 중얼거리는 소리를 자장가 삼아 나는 수마에 빠져들었다.

* * *

[일어나욧!]

귀신이 목청껏 내지르는 소리에(귀신에게도 목청이 있다면) 나는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야, 무슨 일이야? 하암, 아직 새벽이잖아…….”

[오늘부터 개업이잖아요! 아무런 준비 없이 환자를 맞으려고요?!]

원래는 어제 태청장원에 와서 미리 환자를 맞을 준비를 할 생각이었다.

다 낡아빠진 장원이지만 그래도 환자를 보는 방 정도는 치워놔야 할 거 아닌가. 엉망진창인 마당도 좀 정리하고.

그랬던 걸 갑자기 창천이 물고 늘어지는 바람에……

“알았어, 준비하면 되잖아. 왜 그렇게 뿔이 났어?”

[내가 일어나라고 몇 번을 불렀는지 알아요? 귀신만 아니었으면 목이 다 쉬었을 거라구욧!]

그렇게 투덜거리면서도 홍령은 성실하게 내 몸 여기저기에 침을 놓았다.

[많이 피곤해 보이니까 몇 군데 더 놓을 거예요.]

“뭐 괜찮은 처방이라도 떠올랐어?”

[일단은 시험적으로? 뭔가 다른 게 느껴지면 바로 말해요.]

침을 몇 군데 더 놓아서 그런가?

괜히 몸에 활력이 더 도는데?

“슬슬 가면을 쓸까?”

삿갓과 면사, 그리고 가면 중 고민하다가 가면을 택했다.

내 얼굴에 맞춰 특별히 제작된 이 가면은 숨을 쉬기도 편하고 의외로 식사를 할 때도 불편하지 않아서 이제는 내 피부처럼 익숙해졌다.

오히려 삿갓과 면사가 더 불편하달까

간만에 가면을 착용하고 밖에 나가서 마당부터 청소하기 시작했다.

“좋아, 시작해 볼까!”

고작 잡일이지만 전에는 엄두도 못 내던 일.

하지만 마당을 반쯤 쓸어도 힘이 들기는커녕 몸이 풀리는 기분이 든다.

신나는데?

콧노래를 부르며 마당 청소를 마치고, 중앙당에서 쓸 만 한 방을 찾기 시작했다.

내가 쓸 방과 환자를 볼 방이다.

“왼쪽의 방들이 그런대로 지낼 만하다.”

“아씨, 깜짝이야!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네.”

창천이었다. 언제 다가온 거야?

“가장 괜찮은 방은 내가 쓰는 방이지만.”

“농담도 할 줄 아네.”

“정말 날 가만 내버려 둘 생각인가?”

창천이 추천한 왼쪽의 방들을 둘러보려는데 녀석이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가만 안 두면 뭐? 무공도 익힌 적 없는 내가 널 쫓아내기라도 할 수 있을 거 같아?”

“……무공을 익히지 않았다는 거짓말은 넘어가 주지. 허나 넌 내 가장 큰 약점을 알고 있다. 그걸 이용한다면 날 제거하는 게 어렵지는 않을 터.”

녀석은 진심이었다. 내가 진짜 자기를 어찌할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있다.

“뭐라는 거야. 넌 환자야. 난 의원이고. 환자를 내쫓는 의원이 어디 있어?”

“하지만―”

“집도 넓잖아. 너 여기 아니면 갈 곳 있어? 없지? 팔 것도 아니고 내가 쓸 건데 낡은 장원에 방 한 칸 내주는 게 뭐 어렵다고.”

내가 대수롭지 않게 말하자 창천은 미간을 찌푸렸다.

허나 이내 “……별 이상한 놈을 다 보겠군.”하고 중얼거리며 이내 사라졌다. 녀석도 내가 진심이라는 걸 납득한 모양이다.

[그냥 두는 게 좋은 선택이긴 하죠. 아니, 그가 떠난다고 해도 반드시 붙잡아 놔야 해요.]

홍령도 같은 생각이었다.

창천은 뭔가 크게 착각하고 있지만(아마 홍령이 내 몸에 빙의해서 제 공격을 피한 것 때문에 그러는 모양이다), 누가 날 공격해 온다면 나는 막아낼 재간이 없다.

그런 점에서 미친개라고 소문난 창천이 집 지키는 개로 버티고 있어 주는 건 내게 여러모로 큰 도움이 된다.

[그의 병을 치료하는 게 당신에게도 도움이 될 테니까요.]

응? 그게 무슨 소리야?

[창천이라는 자와 당신의 맥, 비슷한 부분이 있어요. 그의 병을 연구하다 보면 당신을 치료할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아까 침을 평소와 다르게 놓은 게 설마?

[맞아요. 내가 생각한 게 맞다면 빠르게 효과를 볼 수 있을 거예요.]

심장이 두방망이질 쳤다.

지금까지 내 앞에서 이처럼 확신 있게 말한 의원은 없었다.

아니, 다들 처음에는 반드시 치료법을 찾아내겠다고 호언장담을 해대긴 했다.

날이 갈수록 자신을 잃고 끝내는 ‘이 병은 치료할 수 없다’고 단언하고 내 앞에서 사라졌지만.

[마음에 좀 걸리는 부분이 있긴 하지만―]

“뭐야, 그게 뭔데?”

[그건 좀 생각을 해볼게요. 그 약, 완벽하다고 생각했는데 뭔가 좀 이상해요. 당신 병하고 상관있는 문제는 아니에요.]

창천이 먹던 약? 장 의원이라는 자가 처방했다던?

어제는 만든 사람이 천재라고 극찬을 하더니 갑자기 뭐가 이상하다는 건진 모르겠지만, 홍령이 말했듯 나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일은 아니었다.

“그러면 나랑 상관있는 부분은 어떤 건데? 창천과 내 맥이 어떤 점에서 유사하다는 거야?”

침착하자. 나는 깊게 심호흡했다.

지금껏 내 병을 제대로 진단해 내는 것을 성공한 의원조차 세 손가락에 꼽았다. 그나마도 의원들마다 말이 조금씩 달랐다.

불명(不明)은 곧 불치(不治)다.

정체도 모르는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의원이 이 세상 어디에 있겠는가?

[당신의 몸은 크게 다섯 가지 문제가 있어요.]

이것은 첫 번째 진단에 성공했던 의원과 같은 말이다.

[이는 각각 당신의 팔, 다리, 그리고 상중하 단전에 문제를 일으키고 있죠.]

이것은 두 번째 의원과 같은 의견.

[문제의 원인은 극심한 기허(氣虛). 타고난 선천지기까지 갉아먹어 곧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몸이죠. 오행 중 하나만 부족해도 기의 균형이 흐트러져 병이 생기는데, 오행의 기가 아예 존재하질 않으니 살아있는 게 신기한 상황이에요.]

그리고 이것이, 마지막으로 나를 돌봤던 신의의 진단이었다.

[기의 불균형이 얼마나 심각하게 흐트러져 있느냐가 병증의 심각성을 결정해요. 남궁세가의 혈우병 정도라면 오행 중 하나의 기가 고갈 상태라고 보면 되죠.]

나는 다섯 오행 전체가 고갈이고, 창천은 그중 하나가 고갈이다.

‘창천, 고칠 수 있겠어?’

홍령이 그를 낫게 할 수 있다면, 나도 다섯 개의 문제 중 하나는 해결할 수 있다.

이른바 불치에서 난치(難治)의 영역으로 가는 것이다.

그 또한 쉽지 않은 투병의 길이겠지만, 누구나 ‘불가능’한 것과 ‘심각하게 어려운 것’중 후자가 낫다는 걸 알고 있다.

[장담은 어렵지만, 일단 그 약을 만든 장 의원이라는 자를 만나보면―]

“손님이다.”

우리의 심도 있는 대화는 거기서 끊겼다. 창천이 갑자기 누군가를 끌고 온 탓이었다.

“응? 이 시간에?”

이제 겨우 동이 틀 무렵이었다. 사위가 어둑해 앞도 분간이 어려울 지경. 가면 너머로는 상대를 식별하기가 더욱 어려웠다.

하지만 냄새!

냄새만큼은 눈앞이 어두워도 확실하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 거지네요?]

“문간에서 기웃거리고 있더군. 널 찾아왔다던데.”

우리 볼 일은 그날로 끝난 거 아니었나?

나는 거지에게 찬합을 내줬고 거지는 태청장원으로 나를 안내해주며 동네의 이모저모에 대해 알려주었다. 시장이 선다는 사실도 그에게서 들었다.

내가 태청장원을 벗어나기 전 도망친 걸로 우리의 인연은 끝인 줄 알았는데.

“저기, 선착순 열 명은 병 치료를 무료로 해주신다기에…….”

아, 환자였나!

어린 거지는 바지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뭔가를 뒤적거리더니, 이내 애기주먹만 한 전낭을 꺼내 내밀었다.

“저, 제가 거지라 싫으시다면 돈을 낼게요! 많지는 않지만 이게 제가 가진 전부예요…….”

어린 거지가 자신 없는 얼굴로 전낭을 내밀었다.

“됐어, 그냥 들어와. 아직 준비가 덜 되긴 했지만.”

저 돈의 보관처(?)는 둘째 치고, 저 어린애가 거지질 하며 모은 코 묻은 돈을 어떻게 받아? 정말 비상시에 쓰려고 모아둔 걸 텐데.

……진짜 코 묻어 있을 거 같아서 안 받는 건 아니다.

[거지라. 잔병이 많겠네요. 손보는 재미가 있겠어요.]

진료실로 쓰기로 한 방에 어린 거지를 데리고 들어가 진료를 시작했다.

[심각한 병은 없네요. 잘 못 먹고 못 자서 생긴 병이 대부분이에요. 침 맞고 쉬면 나을 텐데……]

맥을 짚고 침을 놓던 홍령이 말을 흐렸다.

뭐야, 뭔데?

[아주 중요한 요법을 시행해야 해요. 근데 그건 귀신이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침을 놓고 뜸을 놓는 것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뜻.

내 힘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뭔데? 어떻게 도와주면 돼?’

[그건 말이죠―]

홍령이 재밌다는 듯 키득거리며 말을 이었다. 반대로 듣는 내 표정은 일그러졌다.

……아니, 이 귀신이 진짜!

[중요한 일이에요. 엄연히 치료 요법이랍니다. 제대로 안 하면 당신도 곤란해질 수 있어요.]

“저어, 무슨 문제라도……?”

침을 놓고 내가 한참을 혼자 중얼거리며 가만히 있자 이상하다 생각한 건지 어린 거지가 걱정스럽게 물어왔다.

“아뇨, 하…… 일단 그대로 한 식경 정도 누워 있어. 그리고 다른 요법을…… 하, 일단 기다리고 있어.”

거지를 두고 밖으로 나오자 마침 창천이 밖에 있었다.

들어오려고 하는 걸 거지가 그를 두려워해서 쫓아냈던 건데, 치료하는 게 궁금하기라도 했나?

“뭐 필요한 거라도 있는 건가.”

“어. 큰 솥이나 대야 같은 거…… 아무튼 큰 거면 좋겠는데.”

“그렇군. 창고에 네 녀석이 원하는 게 있다. 따라와라.”

창천은 구석에 있는 무너진 창고로 날 데려갔다.

거기에 과연 내가 필요로 하던 것이 있었다.

멧돼지 한 마리쯤은 통째로 삶을 수 있을 것 같은 커다란 솥이었다.

“그 거지를 씻길 생각이겠지. 뒤뜰에 우물이 있고 장작은 옆에서 갖다 쓰면 된다.”

맞다. 홍령은 그 거지를 씻겨달라고 부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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