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영의원-9화 (9/350)

9화

“아니, 할매? 굽은 허리가 펴진 게야?”

“저 할매 어깨가 아파서 팔을 못 들지 않았어? 그, 오십견이라 그랬던가?”

할매 주변에서 같이 장을 펴고 있던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또 아픈 분 계시면 봐드릴게요. 할머니, 이 좌판 좀 써도 될까요?”

순식간에 시장에는 출장 의원이 차려졌다.

있는 거라곤 내 덕분에 채소를 다 판 노파가 깔아준 좌판 하나.

처음에는 서너 명 정도가 재미 반, 장난 반으로 내 앞에 섰다.

“어어, 뭐야?! 갑자기 안 아파!”

“아니, 이게 십 년을 고생하던 고질병인데……”

“이 젊은 의원님이 아주 실력이 신통방통하구만!”

허리가 아프거나 계속 기침을 하는 등 자잘한 병증은 침 몇 방에 순식간에 상태가 호전됐다.

눈앞에서 보고 있는 나도 신기할 지경이었다.

그렇게 하나둘 병이 순식간에 낫는 사람들이 생기자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기 시작했다.

“저기, 우리 어머님이 오래도록 앓고 계신 치통이 있는데…….”

“혹시 다리 저는 것도 고칠 수 있나요?”

“밤마다 머리가 너무 아프거든요. 이것도 어떻게 안 될까요?”

얼마나 사람이 모여들었는지 이 시장에 온 모든 사람들이 내 앞에 줄을 서 있는 것 같았다.

더 이상은 무리였다. 체력적으로 한계다.

보여줄 만큼 보여주기도 했고.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치료가 필요하신 분들은 언덕 위 태청장원으로 와주세요. 그곳에 새로 의원을 열었습니다! 이름하여 태양의원! 선착순 열 명은 치료비가 공짜!”

“태청장원? 그 미친개가 버티고 있는 장원 말인가?”

“거기에 의원을 열었다고? 거기다 공짜?”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저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창천이 눈을 부라렸다.

그래서 어쩔 건데.

지식도 있고 실력도 입증한 날 쫓아내려고?

잠깐 동안 눈싸움이 이어졌다. 창천은 나를 죽일 듯 노려보다가 이내 쳇, 하고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이겼다!

“괜찮습니다. 안 물어요! 걱정 말고 오시면 됩니다. 만약 물어도 제가 고쳐드릴 테니까요.”

내가 창천과 눈을 마주치며 웃자 사람들이 놀란 기색으로 나와 창천을 번갈아 보았다.

“정말 괜찮은가 본데? 미친개가 별 반응을 안 하잖아?”

“그렇게 솜씨가 좋은데, 돈도 안 받는다고?”

“선착순 열 명 한정이래. 다음 마을로 떠나기 전에 들러볼까. 안 그래도 요새 어깨가 아파서……”

* * *

객잔으로 돌아가 휴식을 취한 나는 그대로 짐을 싸 태청장원으로 향했다.

내일부터 환자를 보려면 미리 준비를 해놔야 할 거 아닌가?

“아주 대담한 짓을 벌이더군.”

태청장원에 도착하자 창천이 핀잔을 던졌다. 하지만 전날처럼 문전에서 쫓아내려는 기색은 없었다.

“나 들어간다?”

대놓고 말하며 대문 안에 발을 디뎠지만 창천은 여전히 팔짱을 끼고 날 보고 있을 뿐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날 보는 게 아니라……

“안 그래도 생각나서 싸 왔지. 여긴 제대로 뭘 해먹을 상황이 아닐 것 같았거든.”

객잔 주인에게 부탁한 묵직한 찬합을 들어 올리자 창천의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무공?

눈에 보이지도 않는 수공(手功)에 내 손이 멋대로 움직였다.

[상당한 수준의 금나수군요.]

내가, 정확히는 홍령이 조종한 내 손이 창천의 금나수인지 뭔지를 피해냈다는 소리다.

어설프게 허공을 훑은 창천의 손이 당장이라도 검을 뽑을 것처럼 주먹을 움켜쥐었다.

“날 주려고 가져온 게 아닌가?”

“먹기 전에 할 일이 있어. 자, 손!”

“무슨―”

“밥 먹으면 맥이 흐트러진단 말이야. 몸이 완벽히 회복되진 않았지? 빨리 끝내야 빨리 밥 먹는다?”

“……쳇.”

[개 길들이는 솜씨가 훌륭한데요.]

창천은 중앙당의 방 한 칸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간단한 세간이 있는 걸 보니 창천이 이 방에서 기거하는 모양이었다.

홍령이 창천의 맥을 짚어보기 시작했다.

어제는 응급처치를 위해 간단히 살핀 거라면 이번에는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다.

[흐음…… 호오, 역시…… 그런데 이건……?]

맥을 짚는 건 홍령이고 나는 손을 빌려주는 것 외에 할 일이 없었기에, 눈앞에 있는 창천의 얼굴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짜식, 잘생겼네.

하인들이 몰래 빌려다 주던 소설 속 남주인공의 삽화처럼 생긴 얼굴이었다. 후기지수라는 이름이 잘 어울리는 얼굴. 깨끗한 피부며 날카로운 턱선, 곧은 검미와 우수가 깃든 눈동자까지.

부럽다.

나도 저런 얼굴을 가질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아니, 저렇게까지 잘생길 필요도 없었다. 그냥 평범하기만 해도 좋았다.

딱 전생의 얼굴 정도만 되어도 괜찮을 거다.

지금의 내 얼굴은, 누가 봐도 기겁을 할 만한 괴물의 모습이니까.

만약 내가 저 얼굴이었다면……

“……그래, 어떻지?”

창천의 물음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내 손은 이미 창천의 손목에서 떨어진 채였다. 얼마나 넋을 놓고 있었던 거지?

“나도 남궁세가 혈족병 환자의 맥을 실제로 짚어본 건 처음이라 병증을 다 파악하는 데는 시간이 걸려.”

“상관없다. 어차피 장 의원님이 오시기 전까지만 내 상태를 봐주면 그만이야. 원래 먹는 약이 있는데 그 약이 다 떨어져서 곤란해.”

“그 와중에 날 향해 검을 날렸지. 장 의원이라는 사람이 만든 약을 보여줘. 재료가 있으면 비슷하게 만들 수 있을 거야. 남아 있지?”

“……반 알이 남았다.”

장 의원이 제때 오지 않자 약을 아껴먹은 모양이었다.

그 의원이라는 자가 늦은 게 한두 번이 아닌 모양인데?

킁킁, 냄새를 맡고 살짝 뜯어 맛도 보았다. 약이란 대체로 맛이 고약하지만 이건 특히나 고약한 향미였다. 복약에는 일가견이 있는 나조차도 눈살을 찌푸릴 정도였으니.

[굉장한 제조법이네요. 이걸 이렇게 쓰는 방법이 있다니? 확실히 혈우병에 효과가 있겠어요. 명의네요.]

뭐? 명의라고?

화타의 후예인 홍령이 말할 정도니 그야말로 대단한 의원이 틀림없었다.

그렇게 대단한 의원이 자리 잡고 있는 동네라는 말은 없었는데?!

[왜 그래요? 뭐 문제 있어요?]

당연히 문제가 있다. 우린 여기에 의원을 차릴 거니까.

마을은 작고 사람은 적다.

대충 둘러본 바로는 의원 하나가 먹고 사는데도 약간 지장이 있을 만한 수준의 소비 규모.

그러니까 장 의원이라는 명의도 자기 마을에서만 진료를 보지 않고 주변 마을로 왕진을 다니는 것일 터.

이렇게 작고 협소한 시장에 의원이 둘?

그건 둘 다 죽자는 건데, 그 와중에 라이벌의 실력이 더 뛰어나다니…….

[너무 비관적으로 생각하지 말아요. 그 정도 명의를 만난다면 당신의 병을 고칠 실마리를 빨리 찾아낼 수 있다고요!]

홍령의 말도 맞았다. 의원을 차리려는 목적부터가 내 병을 고치는 데 있었으니까.

“지금 갖고 있는 걸로 임시방편 정도는 가능하겠어.”

“그 정도면 충분하다. 며칠만 버티면 될 테니까.”

“침놓는 동안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 장 의원이라는 분에 대해 얘기해 봐. 어떤 사람이야?”

“그건 왜 묻지?”

“남궁세가의 혈족병에 대해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아. 그런데 그걸 꾸준히 치료해오고 있을 정도의 명의라니 관심이 생길 수밖에 없지. 그분이 어떻게 처방했는지 들으면 임시처방이라고 해도 더 괜찮은 치료를 할 수도 있어.”

나도 그 장 의원이라는 사람이 궁금했다.

알 만한 명의는 다 나를 거쳐 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버지는 중원에서 가장 이름난 부자였고 내 병의 치료에 천금을 쏟아 부었으니까.

물론 그중 내가 얼굴을 보지 못한 명의도 있다.

사대신의(四代神醫).

중원에 죽은 사람도 살려낸다는 네 명의 신의가 있다.

아버지가 초빙에 성공한 것은 단 한 명.

나머지 세 명은 아버지의 제안을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고 들었다.

어쩌면 장 의원이 그들 중 한 명인 걸까?

‘에이, 그래도 이런 시골에서? 아냐, 오히려 이런 시골이라…….’

만약 장 의원이라는 사람이 사대신의 중 한 사람이라면, 아무래도 의원을 차릴 자리를 새로 알아봐야 할지도.

“무당의는 알고 있겠지?”

무당의(武當醫).

알다마다.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중원 어디에 있겠는가?

[무당의가 뭔가요?]

아무래도 모르는 귀신은 있는 모양이다.

‘무당파는 알지?’

[당연하죠.]

무당파. 구파일방의 수좌이자 고강하고 절도 있는 무공으로 중원에 명성을 떨친 도문(道門).

남궁세가를 비롯해 오대세가가 자신들의 피에 흐르는 체질을 극복하기 위해 양생술을 익히고 이를 가문 고유의 무공으로 발전시켰다면, 이들 대문파는 평범한 사람이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양생술을 익히다가 무공으로 발전시켰다.

그 과정에서 의술은 무공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며 발전했고 일부 도사나 승려는 의원에 준하는 지식과 실력을 갖추기도 했다.

그것을 체계적으로 발전, 교육시켜 해당 문파의 이름을 단 의원들을 배출했으니―

[그게 바로 무당의라는 건가요?]

무당파에서 배출한 의원이다 이거지. 그 외에도 몇몇 대문파가 있지만 특히 이 호북 땅에서는 무당의를 알아준다고.

무당의 표식인 태극의 문양을 옷이나 침구통에 새기고 다니며, 그들이 지나간 길에는 아픈 사람이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현대로 치자면 개업의마다 연세치과의원이니 서울대안과의원이니 하는 식이랄까.

“장 의원이라는 분이 무당의시다, 이 말이지?”

“그래. 이 마을에 오래도록 진료를 오신 분이기도 하지. 내 부모님 대부터 그분께 신세를 졌다.”

“터줏대감이시군.”

“의원을 차린다고 했지, 태양의원이라 했나? 쉽지 않을 거다.”

안 그래도 부담 백배인데 직격탄을 날리는구만.

무당의라는 타이틀만으로도 버거운데 하필 수십 년 이 마을에 왕진을 다닌 의원이라.

“자, 침은 다 놨고, 어디 맥을 보자…… 음, 아까보다 맥이 좀 안정됐어. 그리고 약은…….”

홍령은 내 보따리를 풀어 수십 개의 약병을 꺼냈다. 그리고 그중에서 몇 개를 골라 창천의 손에 건넸다.

“원래 내가 먹는 약인데, 네가 먹던 것과 비슷한 걸로 골랐어. 급한 대로 먹을 만할 거야.”

“……다른 주의사항은?”

“운기조식은 하지 마. 검도 손대지 말고. 내상 입었을 땐 무리하면 안 되지.”

창천의 검미가 볼썽사납게 찌그러졌다. 나도 홍령이 시키는 대로 말하고 있을 뿐인데 저런 눈초리를 받다니 좀 억울하다.

“무공은 잘 모르는 모양이군. 내상을 입었을 때 약을 복용하고 운기조식을 하면 회복이 빨라진다.”

“그건 네가 네 몸에 맞는 내공심법을 익혔을 때 얘기고.”

“내가 익힌 가문의 비전이 잘못됐다고 얘기하고 있는 건가?”

“그건 네가 더 잘 알고 있을 텐데. 정확히는 네 몸이 잘 알고 있겠지.”

뭐라고 하는 선문답인지 모르겠다. 나야 홍령이 말하는 걸 그대로 읊을 뿐이니.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