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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의원-8화 (8/350)

8화

“사내가 돼서 한 입으로 두 말을 하네. 자기 입으로 뱉은 약속은 지켜야 하는 거 아냐? 치사한 녀석.”

머리카락이 쭈뼛 서고 심장이 벌렁벌렁 뛰었다.

방금 손모가지가 나갈 뻔했는데 떨지도 않고 입만 나불대는 게 스스로도 신기할 지경이었다.

[잠깐만요!]

응?

[……그래요, 기억났어요. 좀 전의 그 검형은 분명, 남궁세가의 것이에요.]

뭐지? 환자를 보는 게 아닌데도 기억을 되찾을 수 있는 건가?

아니, 그보다 남궁세가라고?

오대세가 중 제일. 아니, 무림제일이라 불리는 안휘의 남궁세가가 왜 여기서 나와?

[아닌가? 아냐, 맞아요. 당신의 가정을 생각해보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요. 분명 순수한 남궁세가의 검은 아니지만, 놀라울 정도로 비슷해요!]

홍령이 뭔가에 홀린 듯 주절주절 나불대던 중.

“쿨럭, 큭! 퉤엣!”

갑자기 창천이 피를 뱉으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어? 저기, 괜찮아?”

[안 괜찮아요. 빨리 가 봐요!]

아까까진 심장이 벌렁거려서 떨지 않고 말하는 게 전부였는데, 무슨 용기가 났는지 나는 성큼 장원 안으로 발을 들였다.

“들어, 오지 말라고, 허억, 쿨럭!”

“말하지 마. 무리하면 안 돼!”

아마 저 다 죽어가는 낯 때문일 것이다.

거울을 볼 때마다 보이는 중환자의 얼굴.

나는 저 얼굴이 싫다.

내 얼굴이든, 남의 얼굴이든. 저 꼴을 하고 있는걸 보고 싶지 않다.

“기혈이 뒤틀린 상태였네. 그 상태로 검을 날려? 미친 거 아냐? 죽고 싶어? 다행히 주화입마에 들 정도는 아니야. 응급처치만 하면 가라앉을 거야.”

홍령이 하는 말을 청산유수처럼 옮기자 창천의 눈이 크게 떠졌다.

“침 좀 놓을게.”

자신의 상태가 위급함을 알아서인지, 내가 있는 대로 아는 척을 해서인지 녀석은 순순히 몸을 맡겼다.

물론 조금이라도 허튼짓을 하면 베어버리겠다는 듯 검을 쥔 손을 내려놓진 않았지만.

[됐어요. 맥이 진정됐네요. 무리하지만 않으면 괜찮을 거고…… 맥을 짚어보니 더욱 수상쩍어요, 이 사람. 이 맥은 분명 그거예요, 그거!]

그거?

홍령의 말은 일단 뒤로하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의 목표는 달성, 아니 오히려 초과 달성하기까지 했다.

나를 경계하던 녀석의 눈이 조금은 누그러졌으니까.

“그대로 두면 상태가 더 나빠질 거야. 내일 시장이 열리는 건 알고 있지? 거기서 진료를 볼 거니까 혹시 몸이 계속 안 좋으면 찾아와.”

“……내 상태가 감기 같은 하찮은 것이라도 되듯 말하는군. 나는 전담하는 의원이 있다.”

“그렇겠지. 남궁세가의 혈족병은 아무 의원이나 알아볼 수 있는 게 아닐 테니까.”

난 사람의 눈이 그렇게 퉁방울처럼 튀어나올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네 녀석, 어떻게……!?”

당장 내 멱살이라도 잡을 것 같았지만, 다행히 아직 그 정도 기력을 회복한 건 아닌 모양이었다.

“내일 시장에서야, 알았지? 까먹지 마.”

대신 녀석은 핏발이 선 눈을 하곤 자리를 벗어나는 나를 뚫어져라 노려봤다.

“맞다, 찬합에 음식 아직 많이 남았으니까 배고프면 먹어도 돼!”

그 말을 마치고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서둘러 객잔을 향해 걸었다.

한참을 걸어 태청장원이 까마득한 점으로도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야 나는 겨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하, 긴장돼 죽는 줄 알았네!”

* * *

다음 날.

객잔에서 식사를 마친 나는 짐을 챙기고 시장으로 향했다.

장이 열린다는 얘기는 어제 밥을 준 어린 거지에게서 들었다.

맞다, 어제 그 거지를 그냥 두고 왔는데. 뭐, 알아서 잘 갔겠지. 그만하면 밥값은 충분히 받아냈고 말이다.

작은 동네지만 저잣거리의 규모는 제법 컸다. 이 주변 마을에서 전부 장을 보러 온 듯 사람들이 북적였고 상인들은 목청껏 호객을 해대고 있었다.

“쌉니다, 싸! 잘 말린 돼지고기가 있습니다!”

“거기 아리따우신 소저! 귀한 백반이 있는데 구경 좀 해보지 않으실라우?”

나는 적당히 시장을 구경하며 두리번거렸다.

번화가 중 번화가, 무한에서 살던 내가 보기에는 보잘것없는 시장이었지만 그게 또 색달라서 즐겁다고나 할까.

워낙 독특한 사람이 많아서 내 삿갓과 면사가 크게 주목을 끌지 않는 도시와 달리 모두가 지나가며 나를 한 번씩 쳐다본다는 건 좀 신경 쓰이는 일이었지만.

‘이런 건 한국의 시골이랑 크게 다를 거 없네.’

오고 가는 사람들. 날을 잡았다는 듯 광주리에 한가득 식재료를 짊어지고 가는 여인들. 일거리가 없나 기웃거리는 날품팔이들까지.

[저기 있네요. 느티나무 뒤에.]

그렇게 북적이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나는 홍령이 찾아준 창천의 위치로 정확히 걸어갔다.

“왔네?”

“……왔군.”

“몸은 좀 어때? 아침은 먹었고? 난 먹고 나왔는데. 안 먹었으면 뭐라도 먹으면서 얘기할까?”

“필요 없―”

“아, 찬합! 다 먹었나 보네. 자, 오면서 보니까 저 집 꼬치가 맛있어 보이던데. 가자!”

창천의 손에서 빈 찬합을 낚아챈 후 꼬치집으로 앞장서 걸어갔다. 창천은 투덜거리면서도 이내 내 뒤를 따라왔다.

[먹이로 길들이는 건가요?]

길을 들인다기보다는, 일단 대화를 할 수 있는 상태를 만들자는 거지.

허기질 정도로 굶주린 상대보다는 배부르고 나른한 사람이 대화가 더 통할 테니까.

하물며 그 배를 채워준 사람의 말이라면 일단 순순하게 듣고 볼 거고.

[차라리 먹을 걸 가지고 내 말을 들어라, 하면 안 되나요?]

안 된다. 밥 가지고 장난치는 건 상대가 나보다 확실한 약자일 때도 자칫하면 물리기 마련인데, 창천 같은 무림인을 상대로는 날 죽여줍쇼, 하는 꼴이나 마찬가지다.

“아저씨, 완자 꼬치 다섯 개 주세요.”

반질반질한 양념을 묻힌 고기꼬치 다섯 개 중 네 개를 창천에게 내밀었다. 창천은 못마땅한 표정을 하면서도 꼬치를 거절하지 않았다.

이거 봐, 역시 먹을 거 앞에 장사 없다니까?

“어제보단 얼굴이 나아 보이는데. 역시 무림인은 회복력이 달라.”

“―우선, 네 녀석이 뭘 알고 있는지 알아야겠다.”

음, 다행이다.

입술엔 양념을 묻힌 채 한입에 완자 두 개를 넣고 우물거리는 모습을 보니 어제의 날 선 모습과는 달라서 긴장이 좀 풀렸다.

어제는 진짜 지릴 뻔했다고.

“어제 말한 걸로 대답이 다 되지 않았어? 남궁세가에서 그 병을 어떻게 부르는지는 모르지만 말이야, 상처가 나면 피가 멈추지 않는 병이잖아?”

“……!”

“내가 어떻게 그걸 알고 있는지 궁금해? 아는 사람이 적긴 하지. 오대세가라는 게, 자기들 핏줄에 대대로 내려오는 유전병을 극복하기 위해서 방법을 찾다가 고유의 무공으로 답을 찾게 됐다는 걸 말이야.”

무공.

하늘을 날고, 산을 가르며, 경지에 오르면 혈혈단신으로도 백만 대군 앞에서 오롯이 당당할 수 있다는 절세의 비기.

그 신비로운 기술은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

“모든 무공의 기본은 양생술, 즉 건강을 지키기 위해서 시작됐어. 오대세가도 구파일방도 무공의 기원은 모두 같아.”

“화타의 오금희를 말하는 건가?”

“맞아. 모든 무공의 원류, 그렇기에 많은 이들이 자신들의 무공을 보완하거나 개선할 때 그들에게 도움을 청했다고 해.”

홍령이 어제 밤새도록 알려준 것들을 머릿속으로 정리하며 차분하게 내뱉었다.

“고금제일의 신의 화타. 나는 그분의 의맥을 이어받은 화씨의문의 후인이다.”

허나 이 말을 할 때만큼은 나도 가슴 속에서 피어오르는 어떤 쾌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홍령이 말한 시조가 바로 현대의 나도 알고 있던 그 화타라니!

“과연, 화씨의문의 후인이라면 혈우병에 대해 알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겠군.”

창천 또한 어젯밤 홍령에게 처음 얘기를 들었던 나만큼 놀란 모양이었다. 하지만 내 얘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허나 당신이 펼치는 그 검식은―”

“그만. 얘기는 충분히 들었다.”

응? 여기서 끊는다고?

고기완자 꼬치 네 개의 효과가 고작 반 각?

“말로는 누구나 떠들 수 있지. 네가 정녕 그 후인이라면 직접 실력으로 너를 증명해라.”

아아, 난 또 뭐라고.

누가 무인 아니랄까 봐 말보다는 주먹, 아니 이 경우에는 의술을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는 모양이었다.

어제 응급처치를 해준 걸로는 부족했나?

[저도 이쪽이 편해요. 얼마든지 오라구욧!]

“좋아, 그럼 지켜보라고.”

아까부터 눈 여겨 보고 있던 사람이 있다.

채소를 늘어놓고 팔고 있는 나이 든 할머니였다.

계속 기침을 해대고 낯이 안 좋은 것이 영락없는 병자의 행색.

이 마을에서 처음으로 의술을 선보이기에 부족할 것이 없는 상대다.

“안녕하세요, 할머니. 이거 주세요. 그거도 주시고. 저것도 맛있어 보이네.”

“아이고, 콜록, 젊은 도련님이 손이 크시구만.”

“뭘요. 아! 이거 어쩌지! 다 맛있어 보이는데!”

[저기요? 당신 채소 안 좋아하잖아요?]

한동안 같이 다니면서 내 식성을 파악한 홍령이 딴지를 걸었지만 나는 모른 척하며 품에서 전낭을 꺼냈다.

“여기부터 여기까지 다 주세요, 할머니. 돈은 이 정도면 되죠?”

내가 꺼낸 것은 반짝반짝 빛나는 은전 두 개.

전생과 비교하자면, 은전 한 닢은 약 십만 원을 웃도는 정도의 가치를 지닌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 좌판의 시들어빠진 채소 꾸러미 몇 개에 이십 만원이 넘는 돈을 지불한 것이다.

그러니 노파의 눈이 휘둥그레질 수밖에.

“아니, 이렇게나 많이…… 이걸 다 팔아도 이 돈의 십 분지 일밖에 안 됩니다요, 도련님. 다 사주시는 것도 고마운데…….”

노파가 어쩔 줄을 몰라 하자 시장사람들의 시선이 몰렸다.

뭐야? 뭔데? 사람들의 수군거림 속에서 나는 은전을 돌려주려는 노파의 손을 꼭 쥐었다.

“채소가 너무 맛있어 보여서 그런 거니까 부담 갖지 말고 받으세요. 정 미안하시면 이 돈으로 의원에라도 가시고요. 몸이 안 좋아 보이세요.”

“아이구, 의원은 무슨……”

“아니면 제가 좀 봐드릴까요? 제가 이래 봬도 의원이라서요.”

삿갓에 얼굴을 전부 가리는 면사의 거부감은 은전 두 냥으로 해결되었다. 노파는 주저하다가 이내 손을 내밀었다.

‘홍령, 부탁해.’

[맡겨 두라고요!]

홍령의 자신감 넘치는 대답과 함께 내 손이 전광석화처럼 움직였다.

맥을 짚고, 침을 놓고, 찰나의 기다림.

[음?]

“허, 허어. 아니 갑자기 숨 쉬기가 편안한 것이―”

노파가 깜짝 놀란 눈을 하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더니 이내 허리를 쭉 펴고선 기지개까지 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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