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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의원-5화 (5/350)

5화

“집 나와서 많은 생각을 했어요. 아버지는 많은 걸 이룩하고 돌아가셨는데 난, 이렇게 살다가 죽으면…… 정말 억울하겠더라고요. 적어도 내가 이 세상에 살았다라는 흔적을 하나라도 남기고 싶어졌어요.”

내가 누님에게 찾아온 것은 금가장에 피해를 입히고 싶지 않아서만은 아니다.

가족이 아니라면, 그 어떤 채권자가 이런 사연 팔이를 들어줄까?

사람들은 내가 아버지에게 유산을 한 푼도 물려받지 못했다고 하지만 그건 뭘 몰라서들 하는 소리다.

물질만이 자산은 아니다. 감정 또한 자산이다. 그렇지 않다면 사람들이 괜히 인맥과 유대를 쌓으려고 노력할 리가 없다.

천하의 돈귀신이 내 사연에 귀를 기울인다는 것.

이게 아버지가 내게 물려주신 유산이다.

“내가 최근에 금가장 사람들을 치료하고 다닌다는 건 들었죠? 그게 꽤 즐거웠거든요. 내가 뭔가를 할 수 있다는 게, 이런 게 살아있는 거구나 싶었어요.”

“태양아…….”

“의원을 차리고 싶어요. 저도 뭔가 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하고 싶어요.”

“그래. 또 금가장이 유일하게 손대지 못한 부분이 의업이지.”

누님이 애틋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처음부터 기틀을 다질 필요는 없어. 이미 자리를 잡은 의원에 들어가는 건 어떠니? 그러면 내 돌봄을 받으면서도 충분히―”

“누님의 보호 아래서, 제가 얼마나 의원으로 성장할 수 있을까요? 제가 전염의 위험이 있는 환자를 봐도, 칼부림을 할 수 있는 환자를 봐도 간섭하지 않으실 수 있어요?”

“그건―”

“저는 단순히 일을 하고 싶은 게 아니에요. 자립하고 싶은 거예요. 금태양이라는 개인으로서 살아가고 싶은 겁니다.”

아버지의 죽음이 있고 나서야 깨우쳤다.

난 처음부터 아무것도 못하는 병약한 환자가 아니었다.

이미 전생에서 자립한 성인의 삶을 살아보지 않았던가?

“그게 아니더라도 다른 의원에 들어가는 건 곤란해요. 어깨너머로 배웠다지만 절 치료한 의원들은 하나같이 중원의 명의잖아요. 웬만한 분들은”

정확히는 내가 아니라 홍령의 뛰어남이지만 말이다.

대부분의 의원은 도제식으로 운영된다.

남의 제자로 들어가면 아주 기초적인 환자를 몇 년이나 봐야 할 거고, 큰 곳은 환자를 맡기까지 능력을 입증하는 과정이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직접 의원을 차리는 쪽이 낫다.

“내가 널 아끼는 것이 오히려 방해가 되겠구나. 알았다. 네 의지를 존중하마.”

“하지만 누님이니까 도와주실 수 있는 부분도 있어요. 예를 들면 적당한 거처를 고르는 일 같은 거 말이죠.”

“그런 건 인맥이 없는 상태에선 쉽지 않지. 그래, 어떤 건물을 알아봐 줄까? 무한 시내에 있는 것이면 되겠니? 의원을 한다니 두 채는 있어야 할 것이고―”

“누님도 참. 무한 시내에서 금 백 냥으로 어떻게 건물을 사요?”

금 백 냥이 적은 돈은 아니지만, 무한 같은 대도시에서는 돈의 개념이 달라진다.

모르긴 몰라도, 작은 노점 크기의 건물 하나를 사는 데 금 백 냥이 넘을 것이다.

“제가 원하는 건 따로 있어요. 있죠? 악성 채권으로 묶인 담보물.”

“―네가 그걸 어떻게. 아니, 이제 와 놀랄 일도 아니지. 그래, 넌 내 동생이니까.”

“무한에서 좀 떨어진 곳이 좋아요. 규모는 중소형 장원 정도?”

“그런 물건이 아마…… 잠깐 기다리렴.”

[그게 뭐예요? 악성 채권?]

돈을 빌려줬는데 못 돌려받은 건이다.

보통은 담보가 있으니까 담보를 팔아서 처리하면 되지만, 그럴 수가 없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물건이 간혹 생기거든.

[금왕전장은 중원 제일의 전장이라면서요. 금가장에는 표국도 있지 않아요? 그런 데 힘을 빌려주진 않나요?]

표국은 단순히 물건을 이송하는 데 무력을 대여하는 일 외에도, 힘이 필요한 다양한 용역에 투입된다.

온화한 수단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분쟁에도 물론 이용되며, 전장의 채권추심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현대에서도 무력을 이용한 채권추심은 최후의 수단으로 통한다.

최후의 수단이라는 건, 웬만해선 그 수단이 먹힌다는 걸 뜻하지만……

이곳은 21세기 현대가 아닌 중원이다.

무림이라는 비현실적인 힘이 떡하니 존재하는 곳.

표국의 고수보다 빚을 진 고수가 더 강하면 어쩔 수 없지. 문 앞에 버티고 서서 날 죽이기 전에 이 담보물은 못 가져간다! 하면 어쩌겠어. 포기해야지 뭐.

[그렇군요. 그 고수를 쓰러트리기 위해 다른 고수를 고용하는 데 돈이 더 든다면…… 포기할 수밖에 없군요.]

그렇게 된 악성 담보물은 누군가에겐 빌려준 돈을 돌려받지 못하는, 그렇다고 아주 버리지도 못하는 계륵 같은 존재가 되지만, 그 ‘문제’를 해결하고 담보를 회수할 수 있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자, 여기 있단다. 한번 훑어보렴.”

누님이 가져온 죽간 몇 개를 빠르게 훑었다.

어차피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물건은 한계가 있다.

보통 이런 문제가 있는 물건은 원래 가치에 비해 가격이 현격하게 떨어진다.

한 푼도 못 받을 바에야 얼마라도 받고 문제를 해결해버리는 것이 채권자에게 현명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가격이 떨어져도 내가 가진 금 백 냥 내에서 해결해야 하니 너무 큰 규모의 장원들은 자동적으로 탈락이었다.

나는 담보로 잡힌 장원들의 정보는 물론 그 옆에 나란히 기입된 보고 내역을 꼼꼼히 훑었다.

지난 기간 동안 담보물을 확보하기 위한 시도와 실패를 기록한 것들.

이 채권을 돈 주고 산다고 해도 진정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내가 이곳에 있는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이걸로 할게요. 서른 냥이면 되죠?”

내가 고른 죽간을 본 누님의 눈이 살짝 찌푸려졌다.

“무슨 소리니. 그게 원래 얼마짜리 장원인데. 오십 냥은 받아야 한단다.”

“돈 못 받은 지 십 년도 더 넘었는데요. 이거 어디에 팔아도 금 열 냥도 못 받아요. 제가 누님이라 많이 쳐드리는 거라고요.”

“……끄응, 알았다, 알았어. 서른 냥에 주마.”

“늦었어요. 스무 냥.”

“얘가 정말, 씁.”

“잘못했습니다. …스물다섯 냥!”

“어휴.”

이건 어차피 내가 이긴 게임이다.

누님은 날 아끼고, 뭐라도 해주고 싶어 하니까.

하지만 큰 형님이라는 현실적인 제약이 있다.

많은 걸 해주진 못해도 하자가 있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물건을 싸게 넘겨주는 건 오히려 누님이 해주고 싶은 일일 것이다.

나는 편하게 판을 깔아드렸을 뿐.

“알았다. 차라리 이렇게 하자. 이 장원의 권리를 네게 주마. 돈은 받지 않겠다.”

“엥? 진짜요? 공짜로요?”

이렇게까지는 생각 못 했는데?

“그냥은 아니야. 조건이 있어.”

“그렇겠죠. 말씀만 하세요. 공짜라는데 당연히 받아들여야죠.”

“우리가 이 장원을 회수해 팔지 못한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어. 그것을 너 혼자만의 힘으로 해결하렴. 형제자매들 중 그 누구의 힘도 빌리지 말고.”

“그게 단가요?”

어차피 이 정도는 예상했다. 내가 진양 누님 외에 무조건적인 도움을 받을 만한 형제는 없기도 하고.

“그리고 이건, 네가 갖고 있으렴.”

누님이 내 손에 쥐여 준 것은 바로 내가 금 백 냥의 담보로 내놓은, 표면에 내 이름이 새겨져 있어 ‘태양보도’라 부르는 단도였다.

“누님.”

“네게 주는 금 백 냥은 투자금이야. 일 년 후 돌려받을 거다. 이자는 오 부.”

“네? 오 부요?”

오 부라니. 현대로 치면 이자만 오십 퍼센트다. 언제 누님이 고리대금으로 업종을 변경했지?!

“신용만으로 빌려주는 거야. 네 대책 없는 계획에는 팔 부를 받아도 모자라. 이 정도는 당연하지.”

“차라리 담보를 받으심 안 돼요?”

“대신, 네가 그 장원의 문제를 해결하고 완전히 손에 넣는다면 한 푼의 이자도 받지 않으마.”

누님의 눈에는 어떤 단호한 의지가 엿보였다.

우리가 가족임을 증명하는 물건을, 그리 저렴한 가격에 담보로 맡기지 말라는 의지.

[좋은 누님이네요.]

서로에게 좋은 거래다.

장원을 어찌할 수 없다면 나는 누님에게 돌아와야 할 거고, 누님은 거한 이자를 조건으로 내걸었으니 큰 형님에게 내걸 명분이 있다.

한 번의 도박으로 많은 것을 얻었다.

“힘들면 언제라도 돌아오렴. 연락 꼬박꼬박 하고. 알지?”

“가자마자 편지 부칠게요. 고마워요.”

* * *

[빚이 무섭진 않아요?]

“왜? 빚진 기억이라도 되찾았어?”

[그런 것까지 기억나진 않아요. 하지만 좀 탐탁잖은 느낌이랄까…….]

“보통 빚이라는 건 그런 느낌이긴 하지.”

대부분의 현대인은, 그 형태와 규모가 달라서 그렇지 항상 빚과 함께 살아간다.

주택담보대출이든 카드 값이든 뭐든, 한낱 개인에게 빚이란 밑 빠진 독과 같다. 물을 아무리 부어도 결코 메워지지 않는다.

“하지만 동시에, 빚은 돈이야.”

아버지, 금왕이라면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그건 사업가의 관점이다.

“빚을 활용할 줄 알아야 진짜 사업을 한다고 볼 수 있지.”

대학에 들어가 경영학과 신입생이 되었을 때 처음으로 배웠던 것.

자산은 빚을 포함한다.

건전한 범위 내에서 부채를 활용하는 것이 바로 사업가의 능력이다.

“사업에 필요한 돈을 전부 빚내는 사람은 드물지만 말이야. 자기 자본 없이 전부 남의 돈으로 사업을 하는 사람은 대체로 사기꾼이니까.”

[그럼 당신은 사기꾼인가요?]

“경영의 3요소로는 자본과 사람, 그리고 판매할 용역이나 물품을 꼽지. 자본은 없지만 사람과 용역은 있어. 투자를 받기엔 적당한 요소지.”

[으음, 당신 말은 가끔 이해하기가 어려워요.]

“전에도 얘기했잖아. 나는 다른 세상에서 살다 다시 태어났다니까.”

일전에 홍령에게 얘기한 적이 있다.

하루 종일 붙어 있는데 얘기를 안 하고 넘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니.

내가 살던 현대에 대해 모든 걸 이해시키진 못했지만, 홍령은 귀신이라 그런지 신선들이 산다는 천계나 악귀들이 산다는 지옥처럼 그런 곳도 있구나 하고 받아들였다.

발달한 의학 개념에 대해서는 관심이 많아서, 평범한 일반인인 나한테 온갖 의학 상식을 물어봐서 다소 피곤할 정도.

“간단하게 말하자면, 다 홍령 당신의 손에 달려 있다는 거야. 내가 사기꾼이 되지 않고 살아남으려면 말이지. 열심히 하라고.”

[알았어요. 당신도 내가 원하는 바를 들어주려고 노력하니 나 또한 최선을 다해야지요.]

나는 홍령에게 기억을 되찾을 수 있는 치료행위의 기회를 제공하고, 홍령은 되찾은 기억으로 나를 치료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우리는 서로에게 제법 괜찮은 동업자다.

[의원이라, 기대되는걸요. 이름은 결정했나요?]

“태양의원.”

내 사업을 한다고 결정했을 때부터 정해둔 이름이었다.

[만병이 나을 거 같은 이름이네요.]

“그치, 괜찮지?”

[좋아요, 나 화홍령. 시조님의 명예를 걸고 약조하겠어요. 당신과 함께 태양의원을 중원 제일의 의원으로 만들어 보이겠어요.]

“중원 제일?”

[그 정도는 되어야지 않겠어요?]

그래. 기왕 일을 벌이는 거 최고가 되겠다는 야망은 가져야지.

어차피 내 병은 천하제일의 명의도 고치지 못한 병이다.

중원제일의 의원을 만들겠다는 포부 정도는 있어야 내 병을 고칠 방도도 떠올릴 수 있겠지.

“좋아, 우리 한번 최고가 되어 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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