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행방불명?”
“그래. 그 죽은 노인네가 애지중지한다던, 이제 방년 열아홉인가 스물인가 하는 그 막내!”
호사가의 말에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뿐인가? 객잔 안에 있는 모두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항상 얼굴을 가면으로 가리고 다닌다지? 엄청난 미모의 소유자기라도 한 모양이구만.”
“허어, 그런데 실종이라? 애비가 죽었는데?”
“금왕전장이 화방에 용모파기를 수천 장 만들어 달라 했다더군. 무한이며 이 호북 땅 내에 방이 쫙 나붙을 걸세. 포상금이 금 천 냥이라는 소문이 있어.”
금 천 냥!
“야반도주인가? 아니면 납치?”
“그 막내를 찾으면 큰돈을 벌 수 있다 이거군!”
“그뿐인가? 운이 좋으면 금가장의 사위가 되는 것도―”
“어허! 이 사람들아, 꿈 깨게나. 금가장의 막내는 사내야!”
“에이, 사내놈인가? 김샜군. 미인이면 뭘 하나?”
그래도 금 천 냥이 불러온 여파는 컸다. 사람들이 왁자지껄하게 금가장의 막내와 금 천 냥에 대해 떠들어댔고, 호사가는 자신이 불러일으킨 소란을 즐기며 술을 마셨다.
그들이 눈을 번뜩이며 입에 올리는 사람이 바로 옆에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 * *
“국수 값은 이걸로.”
나는 삿갓을 더욱 깊게 눌러 써 얼굴을 가리며 작은 은가락지를 내밀었다. 점원은 화들짝 놀라며 은가락지를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이렇게 현물로 주시면 저희는 못 거슬러드립니다요?”
“잔돈은 됐네.”
내겐 이 자리를 빨리 벗어나는 일이 더 중요했다. 내 용모파기를 봤다는 저 호사가가 혹시라도 날 알아봤다간 큰 소란이 벌어질 테니까.
[당분간 가면을 쓰고 다니긴 글렀네요. 빨리 무한을 벗어나면 한결 편할 텐데요.]
금가장을 나오고 며칠째, 나는 아직도 무한에 머물러 있다.
이곳 중원의 지리에 대해 잘 모르기도 했지만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볼 일만 마치고 떠야나지.”
식사를 마친 내가 찾은 곳.
질 좋은 검은 현판에는 금왕전장이라는 이름이 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금가장이 가진 여러 사업 중 하나인 금왕전장.
이곳은 내 형제 중 다섯째 누님인 금진양이 장주를 맡고 있다.
“어르신이 돌아가신 걸로도 모자라 막내 도련님은 실종이라. 장주님은 돌아와서 계속 드러누워 계시고. 이러다 우리까지 상 치르는 거 아닌가 몰라?”
“예끼, 이 사람아. 무슨 그런 험한 소릴! 곧 방도 붙인다고 하니까 도련님이야 금세 찾겠지.”
“장주님이 걱정되어서 하는 소리야. 막내 도련님을 오죽 아끼셨어야지.”
“그건 그래. 몸도 아픈 분이 도대체 사람들의 이목을 숨기고 어디로 가셨는지. 혹시…… 진짜 납치라도 당한 거 아냐?”
“이 사람아, 그런 숭한 소리를!”
전장에 들어서자마자 전장 사람들의 잡담 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저기, 실례합니다만.”
“당분간 영업 안 합니, 어?”
“도련님!?”
“오랜만이에요, 아저씨. 누님 좀 뵐 수 있어요?”
“물론입니다! 안 그래도 장주께서 도련님 때문에, 아니다, 빨리 가서 도련님이 오셨다고 전하겠습니다!”
“자! 이쪽으로 오십시오!”
응접실로 안내된 내 앞에 최고급 차와 다과가 빠르게 준비되었다.
금왕전장에 온 것은 처음이 아니다.
일 년에 삼백일쯤 자리보전을 하며 살긴 했지만, 그래도 일 년에 두 달 정도는 보통 사람의 컨디션을 되찾을 수 있었다.
멀리 나갈 수는 없었기에 나들이가 가능했던 건 무한 시내 정도.
그중에서도 금왕전장은 금가장과 가깝기도 하고, 항시 사람이 있어서 아버지도 크게 걱정을 하지 않고 보내주던 곳이다.
“태양아!”
문이 활짝 열리고 소복차림의 여인이 달려와 나를 덥썩 끌어안았다.
“너 정말!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니? 갑자기 집을 나가 소식도 없다니. 내가 너를 찾는 방을 수천 장을 뿌리려고 했는데, 흑…… 어디 다친 데는 없고? 세상에, 얼굴 초췌한 거 봐.”
금왕의 다섯째. 금왕전장주 금진양.
세간에서는 누님을 일컬어 흔히 ‘돈의 흐름을 지배하는 자’, 금맥신녀라 부른다.
“진양 누님, 숨 막혀요……”
“어머, 그래. 미안. 괜찮니? 내 정신 좀 봐. 힘들었지. 어서 안으로 들어가자. 푹 쉬고 그 다음에 얘기하자. 내가 다 알아. 보나 마나 큰 오라버니가 네게 압박을 준 거지? 이제 아무 걱정하지 말렴. 이 누님이 다 지켜줄게.”
허나 내게는 형제 중 가장 다정한 사람이다.
“내가 생각해둔 바가 있단다. 널 위해 새로 장원을 지을 거야. 이미 도면도 다 뽑아놨단다. 뭐든 원하는 걸 말만 하렴. 먹고 싶은 게 있다면 황실의 숙수라도 납치해 올 테니까.”
……좀, 지나치게 팔불출이라는 생각도 들긴 하지만.
“저, 누님과 살려고 온 게 아니에요.”
“뭐? 그럼?”
“돈을 빌리러 왔어요. 저 나름대로 자립해보려고요.”
“자립? 힘들게 뭐 하러 그러니. 몸도 아픈 애가. 자, 그러지 말고 어서―”
“누님. 전 진심입니다.”
나는 진양누님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누님과 함께 살면 편하긴 하겠죠. 하지만 그래서는 지금까지와 다를 게 하나도 없어요. 저는 그렇게 살다가 죽을 날만 기다리고 싶지 않아요. 더 이상 그렇게 살지 않을 겁니다.”
나를 사랑하는 누님의 도움을 받으며 홍령의 기억을 떠올리게 유도할 수 있을 것이다.
누님은 돈도 있고 나를 위해 무엇이든 해줄 용의가 가득하다.
하지만 그래선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다.
“태양아, 널 받아줄 수는 있지만 돈을 빌려줄 수는 없어.”
좋아. 먹혔다.
누님은 거절의 의사를 밝혔지만, 이건 긍정적인 신호였다.
내 말을 진지하게 들어준다는 거니까.
“용돈을 달라고 떼쓰는 게 아니에요. 사람 대 사람으로, 전장의 고객으로 돈을 빌리는 거고, 이자를 내고 기한 내에 갚을 거예요.”
누님은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 표정을 가다듬었다.
“내가 너의 무엇을 보고 돈을 빌려주지?”
순식간에, 그녀는 다정한 누님이 아닌 무한의 돈을 주무르는 금맥신녀, 속칭 돈 귀신의 모습이 되었다.
“너는 아프고 약해. 그 누구보다 가족인 내가 잘 알아. 넌 사람을 잘못 선택한 거란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었다면 금가장의 막내라는 이름만 보고 네게 돈을 빌려줬을 거야.”
“단순히 돈을 빌리는 문제라면 그랬겠죠.”
그러나 나도 반론을 준비해왔다.
“네, 그들은 제게 돈을 빌려줬을 겁니다. 제가 아픈 걸 알면서도요. 이 무한 땅에 제가 병약한 걸 모르는 사람이 있나요? 심지어 전장을 한다는 사람들이?”
이 정도 말도 논파하지 못한다면 누님에게 돈을 빌리는 건 불가능 할 테니까.
“아마 세상물정 모르는 제게 감당하기 어려운 큰 액수에 어마어마한 이자를 붙여서 훗날 금가장을 곤란하게 만들 수단으로나 써먹었겠죠. 제가 그렇게 했어야 할까요?”
누님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생각 없이 날 찾아온 게 아니라는 건 알겠다. 하지만 여전히 문제는 남아 있어.”
“돈을 빌리려면 담보가 필요하지만 저는 없다는 거요?”
“아버지는 네게 아무것도 남겨주지 않으셨으니까. 실제로 들고 간 것도 별것 없다 들었어.”
“며칠 잠자고 요기할 정도는 챙겼지만요.”
“그래. 담보가 없다면, 네 신용으로 돈을 빌릴 생각이니? 내가 널 아끼긴 하지만 정과 신용은 다른 문제야.”
“큰형님께는 누님이 정과 신용을 혼동한 것으로 보이겠지요. 돈을 빌려준 게 아니라 준 거라고 생각할 거고요. 많이 화나셨죠?”
“그래. 큰 오라버니께선 허락지 않으실 거다.”
[뭐가 그렇게 복잡해요? 형제간에 도와주는 것도 안 되는 건가요? 중원 제일의 부잣집이라더니.]
홍령이 투덜거렸다. 보통 사람들 보기에는 이해가 안 갈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건 금가장이라는 집단의 독특한 구조 때문에 생겨나는 일이다.
금왕전장은 무한 제일, 아니 중원 제일의 전장이라 불러도 과언이 아니다.
전장의 힘은 보유하고 있는 현금에서 나온다.
그 현금은 어디서 났을까?
절반 이상의 금이 금왕상단의 것이다.
금왕상단은 금왕전장에 막대한 금을 맡겨놓고, 금왕전장의 전표를 이용해 거래를 한다.
중원 전역에 퍼져 있는 금왕상단의 지부들은 현금의 이동이라는 리스크를 피하고, 안전하면서도 빠르게 거래를 진행할 수 있다.
금왕전장은 금왕상단이 맡긴 돈을 기반으로 큰 규모의 대출을 감당할 수 있다. 금왕상단과 연계되어 중원 어디에서나 금왕전장을 찾아볼 수 있다는 것도 큰 힘이다.
금가장은 그런 식으로 복잡하게 뒤얽힌 사슬 위에 세워진 성(城)이다.
반대로 말하면, 상단을 맡은 큰형님의 심기를 거스르면 전장 운영이 힘들어질 수 있다는 뜻.
[흐응, 그 사람은 당신을 별로 좋지 않게 생각하니까요.]
내가 단순히 누님의 도움을 받는 걸 넘어서, 개인 대 개인으로 거래하려는 이유다.
누님은 내게 뭐든 해주려고 하겠지만, 큰 형님의 말 한 마디에 그 모든 게 한 순간에 사라질 수 있으니까.
아버지의 장례에도 참석하지 못하고 갇혀 있어야 했던 것처럼.
“세상 물정 모르는 아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너도 아버지 아들이긴 하구나.”
누님은 나와의 대화가 다소 충격이었는지 차를 마시며 표정을 가다듬었다.
“서당개도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잖아요. 중원 제일의 상가(商家)에서 평생 자리보전을 했는걸요.”
누님은 내 말에 아까의 상황을 납득한 듯했다.
하지만 나도 전생의 경험, 그러니까 고도로 발전된 현대의 경제경영을 겪어본 경험이 없었다면 이렇게까지 하는 건 불가능했을 거다.
“거기까지 생각했다는 건, 큰 오라버니가 납득할 만한 무언가가 있다는 뜻이라고 생각해도 될까?”
“담보요. 납득할 만한 담보가 있다면 누님이 제게 금 백 냥을 빌려 주신다 해도 아무 말 못 하시겠죠.”
나는 봇짐에서 한 자루의 단도를 꺼냈다.
금가장을 나올 때 챙겨온 몇 안 되는 물건 중 하나다.
“아니, 태양이 너! 너 이게 무슨 물건인지 알면서!”
[저 단도가 뭔데요? 비싸 보이기는 하는데.]
홍령의 말이 맞다.
남해에서 발견된 귀한 운철로 검날을 만들고, 황금과 보석으로 검집을 치장한 단도.
허나 금가장의 식구들에게는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기에 더더욱 귀중한 것이다.
소유자가 금왕의 핏줄임을 상징하는 물건이니까.
“이 정도라면 금 백 냥의 담보로는 충분하잖아요.”
“충분하다 못해 넘치지!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니! 아무리 네가 우리와 같은 배에서 나지 않았다고 해도, 넌 우리 가족이고 내 형제야! 태양아, 정말 가족을 버릴 생각이니?”
“누님. 진정하세요. 제가 언제 판댔어요? 담보로 맡긴다고 했죠. 남도 아니고 가족인 누님에게요.”
나는 다시 한 번 가족을 상기시켰다.
다른 곳으로 갈 수도 있었지만 굳이 누님을 찾아왔다는 사실을.
“……금 백 냥. 그걸로 뭘 하려고? 적어도 이 돈으로 뭘 할진 알아야겠다.”
반쯤은 넘어왔다.
2라운드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