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영의원-2화 (2/350)

2화

“저기, 혹시 아픈 덴 없어?”

“네?”

내 이마의 적신 천을 갈아주러 왔던 하인이 웬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홍령은 환자를 보고 싶다고 했지만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나는 환자다.

이 집안에서 제일가는 환자.

일 년 중 삼백 일 넘게 자리보전을 하는 내가 다른 사람을 치료하러 어딜 갈 수 있겠냐고.

할 수 있는 거라곤, 집 안에 있는 하인들을 상대로 아픈 곳이 있냐 물어보는 게 전부다.

가족들은 안 된다.

내가 산책만 해도 난리가 나는 사람들인데, 환자를 치료하겠다고 한다면 나를 묶어서라도 침상에 눕혀놓을 게 뻔해.

“도련님에 비하면, 소인이 아프면 어디가 아프겠습니까.”

[이마는 붉으나 귀에는 열이 없고, 얼굴은 부었는데…… 급체인 것 같군요.]

급체? 그걸 대충 보고 아나?

하긴, 죽을 고비에 서 있던 나를 침 몇 방으로 살려낸 걸 보면, 내게 빙의한 이 홍령이라는 귀신은 상당한 수준의 의원인 모양이었다.

“혹시 소화가 잘 안 되지 않아?”

“예? 아니, 도련님이 그걸 어찌 아십니까?”

“손도 몇 번 딴 모양이지? 소독 안 한 바늘로 따면 손가락만 상해. 자칫하면 큰 병이 될 수도 있어.”

하인은 깜짝 놀라 제 손도 들어 보였다. 나야 홍령이 말하는 대로 불러주는 거긴 했지만 정말 신기했다. 바늘로 딴 혈흔들이 군데군데 보라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리 와 봐. 내가 간단하게 치료해 줄게. 손 내밀어 봐. 어디 보자, 침이랑, 뜸이랑…”

내 방에는 항상 의료용구가 상비되어 있었기 때문에 침과 뜸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하인은 내 신분 때문인지, 아니면 갑자기 선보인 뛰어난 진찰 능력 때문인지 순순히 손을 내밀었다.

[좋아, 맡겨만 줘요.]

손이 반짝 빛나는 것 같은 기분과 함께 치료가 시작됐다.

내 손이 멋대로 움직인다.

전설의 명의처럼 몇 방의 침을 놓고 보라색 혈흔이 생긴 부분에 작게 뜸을 놓았다.

“―끄윽, 꺼억! 헉, 죄송합니다!”

“아냐. 소화가 돼?”

“예! 아주 신통방통하네요. 서당개도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더니, 의원님들 어깨너머로 배우신 겁니까?”

“그런 셈이지. 뜸을 떴으니 손가락은 소독됐을 거고, 한동안 먹는 거 주의해. 앞으로도 좀 안 좋으면 나한테 와. 가벼운 건 얼마든지 봐줄 수 있으니까.”

그날 이후, 내 방을 찾는 사람들이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집안의 하인들부터 아버지의 상단에서 일하는 사람들까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지만, 한 가지 공통점은 있었다. 섣불리 의원을 찾기에는 수입이 빈약한 이들이었다. 난 치료에 돈을 받지 않았으니까.

“당장은 이 정도면 됐고. 모레쯤 한 번 더 침 맞으러 와.”

“감사합니다, 도련님. 어깨가 한결 가뿐하네요. 이거, 도련님 입맛에 맞을진 모르겠지만……”

“뭘 또 이런 걸 가져와? 잘 먹을게!”

댓잎에 싼 싸구려 당과. 건강 때문에 늘 밍밍한 음식만 먹어야 하는 내겐 오히려 횡재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오늘도 네 명이나 되는 환자의 병증을 돌봐주었다. 문득 한숨이 나왔다.

[왜 그래요?]

“부러워서. 나도 저렇게 쉽게 나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홍령, 정말 나는 고칠 수 없는 거야?”

지금 상태도 나쁘진 않다. 아니, 환생 이후 지금보다 상태가 좋았던 적이 없었다.

홍령이 매일 통증을 경감하는 침을 놓고, 내 몸 안의 기(氣)를 어떻게 하고 나면 보통 사람처럼 몸이 가뿐해졌다.

주치의와 가족들은 그날 내가 먹은 단약이 효과가 있었나 보다 하고 있지만 사실은 홍령의 힘이었다.

그래 봤자 범인에 비해 턱없이 약한 몸이지만.

[지금의 나로서는 무리예요.]

“지금의? 그러면 나중엔 된다는 거?”

[나는 전생의 기억이 또렷하지 않아요. 하지만 당신을 통해서 환자를 보고, 의서를 읽으면 조금씩 기억이 돌아와요.]

기억이 돌아 온다라.

하인들을 통해서 홍령이라는 이름의 의원에 대해 알아봤지만 그 이름을 아는 이는 없었다. 어쩌면 아주 오래 전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확실한 건, 그녀 덕분에 내가 살았다는 것. 그리고 낫지는 못해도 적어도 아프지는 않게 해준다는 것.

유명한 명의들의 처방도 짧은 진통 효과가 전부였으니, 그것만으로도 내가 홍령에게 의서나 환자를 보여줄 이유는 충분했다.

“크흠, 태양이 안에 있느냐.”

더 이상 날 찾는 환자도 없는 김에 사람을 시켜 사온 의서를 읽고 있는데(말이 읽는다이지 사실 난 펴놓고 있을 뿐, 보고 있는 건 홍령이다.) 밖에서 헛기침이 들리더니 문이 벌컥 열렸다.

“아버지, 큰 형님!”

“아픈 건 좀 괜찮나 보구나. 책도 읽고 있고.”

“아, 그게…….”

“소문은 들어 알고 있다. 아랫것들을 봐주고 있다지?”

아버지는 질책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주름진 노인의 얼굴에는 흐뭇한 미소가 피어 있었다.

“제대로 배운 적도 없는 녀석이 무엇을 안다고.”

반면, 큰형은 탐탁잖은 기색이 역력했다.

여덟이나 되는 형제자매 중 맏형이었기에, 사실상 나이 차이는 큰 형 쪽이 더 아버지 같은 느낌이 났다.

“의원들 하는 거 보고 어깨너머로 배운 게지. 어릴 적부터 몸이 아파 그렇지 총명한 것은 너도 알지 않느냐. 그래, 제대로 스승을 두고 배워보는 것은 어떠한고?”

“아버지. 많이 아픈 녀석입니다. 부담을 주지 마십시오.”

“쯧, 네놈은 네 막냇동생 얼굴이 안 뵈느냐.”

내 얼굴?

아차!

내가 서둘러 가면을 쓰려고 하자 아버지가 내 손을 잡았다.

“봐라. 얼마나 활기차 보이느냐.”

“아버지…….”

“그간은 네가 환자라는 생각에 싸고돌기만 했지. 허나 사람은 역시 무어라도 해야 생기가 도는 법이야. 네가 즐겁다면 됐다. 필요한 거는 없고?”

“네, 괜찮아요. 아버지 맥도 봐드릴까요?”

“허허, 그래 보거라. 쿨럭.”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 병이 없는 것이 이상할 터였다. 올해 들어 기침도 잦아지셨고.

21세기라면 모를까, 이곳 중원에서는 충분히 장수했다고 할 나이지만. 그래도……

[…….]

‘홍령?’

[네?]

‘왜 말이 없어? 우리 아버지 어때? 많이 안 좋아?’

[아, 그게…… 잘 모르겠네요.]

‘뭐야, 그게 무슨 소리야?’

[아직 기억을 덜 찾아서 그런가 봐요.]

으음, 역시 그런가.

“왜 말이 없는 게냐?”

“아, 그게. 잘 모르겠어서……”

“후후. 어깨너머로 익힌 의술로는 쉽지 않겠지, 쿨럭. 그래, 스승이 싫다면 의서라도 더 구해다 주마. 무리는 하지 말고. 쉬엄쉬엄하거라.”

아버지는 내 머리를 한 번 쓰다듬고는 큰형의 부축을 받아 방을 나섰다.

……많이 안 좋아 보이시는데.

그래, 홍령이 기억을 더 찾으면 아버지를 치료할 수 있을지도 몰라.

* * *

다음 날.

“도련님? 여기까진 무슨 일로―”

“어디 좀 아픈 사람 없어?”

나는 적극적으로 환자를 찾아 나섰다.

다행히 우리 집, 금가장(金家莊)은 넓기도 더럽게 넓고 사람도 그만큼 많았다.

그중 외원의 한 곳에 자리를 잡고 환자를 받기 시작하자 사람들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자고로 공짜를 거절하는 사람은 없는 법이니까.

첫날, 방에서 환자를 볼 때보다 두 배는 더 많은 인원이 모여들었다.

“아무래도 저희 같은 사람들은 금가장의 내원에 들어가기는 좀 그래서…… 막내 도련님이 여기까지 나와 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두 배로 시작한 환자는 매일매일 불어났다.

세 배……

네 배……

다섯 배……

[이봐요, 도련님. 적당히 해요. 그러다 쓰러진다구.]

“왜 그래? 기억을 빨리 되찾을수록 너도 좋은 거 아냐? 내 걱정은 말아. 네 덕분에 하나도 안 아프니까 말이야.”

[통증만 없을 뿐이지, 안 아픈 게 아니라고 분명―]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아버지가, 아니, 그것도 이유 중 하나긴 하지만.

사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감사합니다, 도련님. 덕분에 이 지긋지긋한 종기가 깨끗하게 나았네요!”

“밤에 도통 잠을 자질 못했는데, 도련님 침 한 방에 요새는 매일 잠자리가 꿀 같습니다.”

수많은 감사의 말.

대기 줄을 설 때부터 내게 보내오는 기대의 시선.

매번 공짜로 치료받기 미안하다며 두고 가는 약소한 선물들은 덤이었다.

진맥부터 치료까지 전부 홍령이 하는 것이고 나는 몸을 빌려줄 뿐이지만.

그래도 말이다.

환생한 이후,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오직 자리에 누워 죽지 않으려고 발악하는 것뿐이었다.

빈속에 넘어오는 위액보다 쓴 약을 세끼 밥보다 많이 먹고, 눈물 나게 아픈 치료를 이 악물고 참아내고, 몸에 조금 힘이 돌아와도 또 아플 것을 대비해 나가고 싶은 마음을 참고 침상에 붙박여 있는, 그런 일들.

누군가의 인정도, 보람도, 대가도 없는 일.

그런 십수 년을 살다가 누군가에게 기대라든지, 감사 같은 걸 받으면 말이지.

……사람은, 이래서 살아가는 거구나.

그런 생각이 든다고.

[알았어요. 하지만 오늘은 더 이상 안 돼요. 벌써 삼 일이나 제대로 잠도 안 잤잖아요?]

“이것만 좀 더 보자고. 홍령 네가 그렇게 보고 싶어 하던 의서란 말이야.”

[그렇긴 한데…….]

“도련님!”

의서를 펼치기 무섭게 누군가가 다급하게 날 부르며 뛰어왔다.

“큰일 났습니다! 표마차가 뒤집어져서, 사람이, 사람들이!”

사고가 났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침통을 집어 들려는데, 순간, 눈앞이 핑 돌았다.

“도, 도련님!”

홍령을 만난 뒤로 까맣게 잊고 있었던 통증이 불현듯 전신에 닥쳤다. 맨몸으로 한겨울 추위에 내던져진 듯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괜찮―, 말을 뱉으며 한 걸음을 내딛으려는 순간.

온몸에 힘이 빠지고 바닥에 몸이 내동댕이쳐졌다.

* * *

“허락할 수 없다.”

그렇게 쓰러지고 난 며칠 만에 눈을 떴다.

집 안은 난리가 나 있었다. 외원에 내 자리를 내주었던 이들은 금가장에서 쫓겨났고 침통과 의서 등 환자를 보는 데 필요한 모든 물건을 압수당했다.

“큰형님, 제발. 제가 잘못했어요. 다신 안 그럴게요!”

“애초에 네 방을 벗어나지 말라 했을 텐데! 썩 돌아가지 못해!”

“혀, 형님……”

나는 움찔하며 눈치를 살폈다. 큰형에게 부탁해서 되지 않을 일이라면 아버지에게 부탁하면 될 일이다.

문제는 아버지가 아버지 방에 없다는 사실이었다. 아버지의 집무실에는 큰 형뿐이었다.

“행여 아버지께 가서 매달릴 생각은 말아라. 화가 단단히 나셨으니까. 꼴도 보기 싫다고 하셨다.”

큰형의 서슬 퍼런 목소리에 찬 물이라도 맞은 기분이었다.

아버지가 허락해주지 않는다면 이 금가장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미안해요. 내가 좀 더 당신 몸을 챙겼어야 하는데…….]

“아냐. 내가 네 경고를 무시한 거지. 내 책임이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