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2화 (83/84)

5장 광풍의 노래 Ⅱ

 "어서 오십시오, 석시주."

 "그동안 평안하셨습니까, 요인 스님."

 소림사.

 천무맹과 천마맹의 전쟁 때부터 침묵을 지키기 시작한 소림은 제천맹의 시

대가 되었어도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세상일에는 더 이상 상관하지 않을

것처럼, 산문을 굳게 닫고 무당과 마찬가지로 공식적인 외부활동을 전혀 하

지 않았다. 제천맹의 개파대전 때는 물론이고, 그 이후로도 행사가 있을 때

마다 참석해달라는 첩지가 도착했으나 일이 있다는 핑계를 대어 단 한 번도

 참석하지 않았다. 거의 봉문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던 거였다.

 소림과 무당. 제천맹의 행보에 가장 큰 걸림돌이 그들이었지만, 제갈수연

도 어찌할 수 없었다. 힘으로 그들을 누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과거 천무

맹의 후신을 자처한 제천맹이었기에 정파무림의 태산북두인 두 문파를 손댈

 명분이 없었다.

 서로 간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상태에서 사 년의 세월이 흘렀고 금일 소

림의 산문(山門)과 방장실의 문이 동시에 열렸다. 전 금의위 영반이었던 석

숭의 방문 때문이었다. 단지 전직 관리의 신분 때문만은 아니었다. 소림을

위기에서 구해주었던 사람이 바로 석숭이었던 까닭이다.

 "이제야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고마웠습니다, 석시주."

 요인대사가 석숭을 향해 깊숙이 머리를 조아렸다. 사문의 최고 존장이었던

 각인대사가 역모사건의 주모자임이 밝혀지면서 가장 입장이 난처해진 곳은

 소림이었다. 원래 대명률(大明律)로 하자면 소림 자체가 멸문되어야 하는

엄청난 일이었지만 석숭 때문에 살아난 거였다. 소림도 피해자라는 사실을

들어 황제를 설득했던 것이었다.

 "그런 말 듣자고 온 것이 아니외다. 부탁이 있어서 찾아뵈었습니다."

 "부탁이라면……."

 "다름이 아니라……."

 석숭의 이야기가 장시간 이어지고 그의 말을 듣던 요인대사의 얼굴이 시시

각각 변했다.

 "허허! 아미타불! 사실이었단 말입니까. 아미타불……!"

 "그 친구는 마불신승의 모든 것을 이었습니다. 무상대법력을 감지하지 못

했습니까?"

 "설마 했지요, 설마……. 아미타불!"

 요인대사가 연신 불호를 읊조렸다. 대환단 도둑이라 여겼던 그 망나니가,

소림의 명예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존장으로 대우하기로 하였던 소사숙이,

실제 마불조사님의 제자였다고 한다. 무상대법력부터 시작하여 조사님이 깨

달았던 실전비기마저 전부 익히고 있었다는 것이다. 정신이 없었던 탓에,

너무 버릇없이 굴었던 탓에, 미리부터 선을 긋고 있었던 터였다. 그런 망나

니가 조사님의 진전을 이었을 리 없다는 생각, 아니 이어서는 안 된다고 여

기고 있었다. 소림의 명예를 위해 서둘러 진화하기에 바빴는데…….

 자신의 실책이었다. 어차피 좋은 곳에 쓰이면 그만인 대환단인데, 그게 무

에 그리 중요하다고 그랬는지 알 수가 없다. 사사로운 욕심에 달라 한 것도

 아니고 임신한 부인의 몸이 약해 보약으로 쓰려 한 것을…….

 평생 동안 무욕의 삶을 실천하며 살았다고 자부했건만 아니었다. 오히려

탐욕스럽게 행동했다. 소사숙 일행이 자신들보다 더 욕심 없이 살고 있었다

. 자신은 외형만, 남에게 보이는 부분만 소탈했던 거였다.

 "아미타불!"

 "이제는 소림이 나서주십시오. 언젠가는 밝혀져야 할 일이지 않습니까."

 "그럼 영운진인도……."

 "그렇습니다, 대사."

 "소림이 치욕스러워 밝히지 않았던 건 아닙니다. 세상이 혼탁해지기에, 그

것을 막고자 하였을 뿐입니다."

 오십 년 전의 백살마대 사건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각인대사에 의해 모든

 사실이 묻혀버렸었지만 백산의 방문이 있고 난 다음에 많은 조사를 했다.

결국 그 당시의 진실을 알게 되었고 경악스러워했지만, 차마 밝히지를 못했

다. 소림 혼자만의 일이 아닌 강호무림 전체의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젠 그럴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아무도 막지 못합니다. 그대로 방

치하게 되면 강호무림인들만 피해를 받습니다. 아니, 강호무림이 멸망합니

다. 그들은 그럴 능력이 충분히 있습니다. 비밀을 밝히는 게 강호무림을 살

리는 길입니다."

 처음엔 석숭 자신도 광풍대원의 능력에 반신반의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설마 눈에 보이지도 않는 진식마저 이용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열한 명

전부가 하늘이었다. 그들보다 강한 무림인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런 그들을

 누가 막아낼 것인가. 찾아내지도 못할 터였다. 그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강

호무림을 위해서 제천맹이 사라져야 할 판이었다. 제천맹에 가담하고 있는

무인의 수를 줄여야만 피해를 최소화시킬 수 있을 터였다. 그것을 소림방장

에게 원하는 것이었다.

 제천맹의 존재가치를 없애달라는 부탁이었다.

 "아미타불! 알겠습니다, 석시주.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대사님."

 "이 업보를 어찌 다 풀고, 이 업보를……. 아미타불!"

 떠나는 석숭의 뒷모습을 쳐다보던 요인대사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세속의

인연을 끊고 산문을 닫은 채 살고자 하였는데 그럴 수가 없게 되었다. 지금

 강호에서 벌어지는 혈겁의 시작은 소림이었던 것이다.

 최초의 원흉이었으며 역적으로 선포되어 있는 각인대가 있고, 그가 제갈수

연과 같이 자신의 사제들에게 살수를 펼쳤다. 지금에 와서는 소사숙이 살귀

가 되어 천하를 향해 살겁을 자행하고 있다. 석숭이 찾아온 것은 결코 소사

숙이 걱정되어 온 게 아니었다. 그의 손에 의해 죽어갈 강호가 걱정되었고,

 살귀가 되어 강호를 전전할 소사숙의 마음이 걱정되어 찾아온 거였다.

 그리고 요몽. 감당할 수 없는 운명의 무게 때문에 결국 다시 백치로 돌아

오고 말았다. 부처님의 뜻이라고, 인간에 대한 당신의 시험이라고 여기기엔

 너무 기구한 삶이었다.

 "소사숙, 부디 자비를……."

 마불신승이 백산에게 유언처럼 했던 그 말을 요인대사가 다시 중얼거렸다.

 세상에 대한 용서를 베풀어달라고. 그게 세상을 구하고 자신을 구하는 길

이기에.

 그러나.

 요인대사의 간절한 바람은 붉은 혈광을 날리는 광풍대원들과 백산에게까지

 들리지 않는지 사천성을 없애버린 데 이어 광동성, 귀주성, 복건성 등 비

교적 외각지대에 있는 제천맹 지부에서 혈겁이 자행되었다. 신년의 한파(寒

波)와 같이 시작된 혈겁은 육 개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차가운 살기를 강호

전역에 뿌리고 있었다.

 귀마겁(鬼魔劫).

 혈겁을 자행하고 다니는 정체 모를 흉수들에게 붙여진 별호였다. 언제 어

디서 나타날지 알 수 없다. 한낮에도 나타나고, 밤중에도 나타난다. 꿈에도

 만나지 마라, 만나면 남는 건 죽음밖에 없다.

 무엇보다 강호무림인들을 두렵게 하고 있는 사실은 혈겁이 시작된 지 육

개월이 지났지만 그들의 진정한 정체를 모른다는 데 있었다. 즉 미지에 대

한 공포였다.

 그러던 강호무림에 서광이 비쳤다.

 불안에 떨고 있던 무림인들을 향해 제갈수연의 일성이 터져나왔던 것이다.

 "그들은 귀신이 아니다. 사 년 전 혈광마겁의 잔당들이 살아 돌아왔다. 그

 저주받은 마인들이 다시 혈겁을 자행하고 있는 것이다. 강호인들이여, 언

제까지 불안에 떨고 있을 것인가. 강호무림은 여러분의 것이다. 스스로 지

켜야 한다. 일어서라, 그리고 모여라. 제천맹의 지부로 모여서 강호정의가

살아 있음을 보여라."

 단비와 같은 일성이었다. 많은 곳이 혈겁을 당했지만 흉수의 정체를 알았

다는 게 그들을 더욱 안도하게 하였다. 인간의 본성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귀마겁의 흉수들에 대한 두려움은 있을지언정 미지의 적에 대한 극단적인

공포심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다시 검을 찬 무인들이 하나 둘씩 제천맹으로, 또는 제천맹의 지부를 향해

 이동을 시작했다. 이제는 막아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서린 얼굴로, 강호정

의를 수행하는 협객(俠客)의 얼굴로. 정의와 더불어 영광된 삶을 살기를 원

하는 자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고, 사 년 전 혈광마겁 때 좌절했던 무인

들이 다시 꿈을 꾸기 시작했다. 귀마겁에 의해 저질러졌던 혈겁은 그들에게

 새로운 기회의 장이 된 것이다.

 그러나 서둘러 움직이던 무림인들의 발길은 또 다른 일성에 의해 더 이상

움직일 수가 없었다. 제천맹의 지부를 향하던 그들이 숭산과 무당산 쪽을

쳐다보며 걸음을 멈췄다.

 "우리 소림과 무당은 강호제현들께 석고대죄를 청하는 심정으로 진실을 밝

히고자 합니다. 과거 오천맹의 후예였던 백살대가 일으켰던 백살마대의 혈

겁은 구파일방이 주축이 되었던 천무맹의 음모에 의해……."

 소림의 방장인 요인대사와 무당 장문인인 영운진인의 공동 명의로 발표된

포고문, 그 포고문이 강호전역을 강타했다. 가히 청천벽력(靑天霹靂)같은

일성이 아닐 수 없었다. 오십 년 전 백살마대의 사건이 천무맹의 음모 때문

이었다고 하였다. 그 음모의 주역이 지금 대역죄인으로 추격을 받고 있는

담운천과 각인대사였고, 구파일방은 알면서도 방조했다는 말이었다. 강호무

림의 최고가 되기 위해, 오천맹을 무너뜨리기 위해, 구파가 야합하여 저지

른 일이라 하였다.

 강호가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정의수호라는 대 명제 속에 전 강호인들이

나서서 추격했고, 가차없이 주살하였던 백살대마의 백여 명이 무고한 사람

들이었다고 한다. 천무맹에 의해 주입된 약에 의해 붉은 혈광을 쏟아내는

마인(魔人)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얼뜨기 미친 자들의 소리가 아니었기에, 무림의 태산북두라 일컫는 정도무

림의 영원한 수호자인 소림과 무당이 한 말이기에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더구나 개방의 장문인인 용두개(龍頭쾬)마저도 그때의 잘못을 인정하고, 두

 장문인의 포고문을 중원전역에 뿌렸다.

 그렇다면.

 사 년 전 백살마대의 후예라 하였던 혈광마인들은 어찌 된단 말인가. 백살

대의 대주와 부대주의 제자들이라 하였고 그로 인하여 강호공적이 되었던

그들은, 이미 재가 되어 사라진 남궁세가와 팽가는 또 어쩌란 말인가.

 강호무림인들이 극심한 혼란에 빠져들었다. 그런 강호에 이번에는 황실의

포고문이 터져나왔다.

 "사 년 전 무림인들에 의해 쫓기던 금색 복장의 인물들, 강호무림인들이

혈광마인이라 부르던 그들은 금의위 위사들이었다. 더구나 그들 속에는 명

나라 최고 공신인 천기대장군 사마휘 장군의 일점혈육이 있었다. 그들은 황

실을 위해 일한 충성스런 위사들이었다. 이에 황실에서는 그때의 사건을 철

저하게 조사하여 진실을 밝히고자 하니 전 무림인들은 열과 성을 다해서 협

조하기 바란다."

 쿠웅!

 황제 칙령으로 선포된 포고문에 무림인들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고 들고

있던 검을 놓쳤다. 금의위 복장으로 위장하고 있다 하였던 그들이 실제 금

의위였다는 말이었다.

 지금 강호무림에서 혈겁을 자행하고 있는 흉수들은 강호공적이 아니었다.

억울한 피해자들이 무림인들만의 방식으로 복수를 자행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들의 혈겁을 막아야 할 모든 명분이 무림의 두 문파와 황실의 포고에 의

해 사라져버렸다. 무고한 사람들을 강호공적으로 몰아서 매장시켜버린 것이

었다. 오직 자신들의 영달을 위해 힘없는 자들을 이용해먹었던 것이다.

 어쩌면 황실의 죄인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 발생하고 말았다. 출세의 꿈을

 안고 길을 나섰던 모든 무림인들이 발걸음을 돌렸다. 조금이라도 제천맹에

서 멀어지는 게 오래 사는 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도망치듯 서둘러 떠나고 있지만 그들의 귀와 시선은 이 시대의 절대자가

있는 제천맹을 여전히 향하고 있었다. 과거 백살마대 사건의 피해자 가문이

었고 그 백살마대의 후예들을 이용하여 천하제일가가 된 가문, 제갈세가의

가주인 제갈수연을 주시하고 있었던 거였다.

 "석숭, 이놈!"

 와장창!

 제갈수연이 던진 집기들이 벽에 부딪히며 요란한 소리와 함께 산산이 부서

졌다. 산발한 머리와 붉어진 눈, 그리고 거친 호흡 등은 분노한 그녀의 심

경을 충분히 대변하고 있었다. 제천맹이 세워진 지난 사 년 동안 언제나 화

사한 미소만 머금고 있던 제갈수연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소림과 무당, 그리고 황실이 발표한 포고문은 그녀의 꿈을 접게 할 수 있

는 엄청난 내용이었다. 결코 밝힐 수 없다 여겼던 구파일방의 치부, 소림과

 무당뿐만 아니라 구파일방 전체가 감추고 있던 치부를 만천하에 공개해버

렸다.

 스스로를 매장시키는 행위가 아닌가. 더구나 황실의 포고문은 또 어떠한가

. 혈광마인을 강호공적이라 선포했고, 그들을 처단했던 강호무림인들의 행

위가 잘못되었다는 말이었다. 그 모든 행위의 정점에는 제천맹이 있다. 아

니, 제갈수연 자신이 있는 것이다.

 소림과 무당 장문인의 한마디는 같은 피해자면서도 팽가와 남궁세가를 배

신한 패악의 가문으로 제갈세가를 낙인찍어버렸고, 제천맹은 음모에 의해

세워진 단체가 되어버렸다. 존재의 의미가 사라진 것이다.

 정의구현의 가치를 걸고 세워진 단체였고, 강호공적으로 선포된 혈광마인

과 그들의 배후조정자인 두 가문의 몰락을 발판으로 성장한 곳이 제천맹이

었다. 그런데 이번에 발표된 두 건의 포고문 때문에 그들은 공적이 아니었

다는, 음모의 희생자였다는 게 밝혀졌다. 결국 제천맹은 시작부터가 잘못되

었다는 말이다. 죽은 토양 위에 씨를 뿌린 격이 되었다.

 "금의위 영반자리와 바꾼 게 이것이었더냐?"

 이 모든 사건의 원흉이 석숭이다. 그가 아니었다면 소림과 무당이 설득 당

했을 리가 없다. 석숭을 견제하기 위해 유량에게 접근했었고 결국 원하는

바를 얻어냈다 여겼는데, 그곳이 천 길 만 길 낭떠러지였다. 어쩌면 파멸로

 가게 될지도 모르는 깊고 깊은 구덩이.

 그러나 제갈수연이 모르고 있는 사실이 있었다. 백산의 신분이 소림사의

소사숙이었다는 것과 영운진인 또한 강구두와 인연이 있었다는 사실을. 소

림과 무당이 그런 결정을 내리게 된 이면에는 석숭의 말보다 광풍대원과 인

연 때문이었던 것이다.

 "수연아, 생각을 해라. 아직은 끝난 게 아니다. 이곳에 있는 부하들은 큰

문제가 없다."

 사면초가의 위기에 빠진 제갈수연이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곳은 제천맹이

었다. 사방에서 제천맹을 성토하는 소문이 들려오고 있으나 아직 맹은 조용

했다. 일비에 의해 수시로 올라오는 보고에 의하면 침묵을 지키고 있을 뿐

아직 이탈자가 생기지 않았다 하였다.

 "그들은 이곳이 아니면 기댈 곳 없는 자들이다. 나와 같은 공동운명체일

뿐이다."

 제천맹을 구성하고 있는 무인들의 성향 때문이었다. 거의 사 할 정도의 병

력이 과거 천무맹과 천마맹에 속했던 자들이고 그들에 의해 제천맹이 움직

이고 있는 것이다. 그들 역시 제천맹 외에는 갈 곳이 없는, 죽든 살든 제천

맹에서 운명을 같이해야 하는 자들인 것이다. 제갈수연이 마지막 기반으로

믿고 있는 자들이었다.

 "백랑이 도착하고 난 후에 승부를 건다. 유량도 감히 우리를 치겠다고 나

서지 못함은 분명할 터."

*     *     *

 그 시간 제갈수연이 기다리고 있는 백무천은 유량의 집에서 그와 독대를

하고 있었다.

 "제독합하, 어찌 그럴 수가 있습니까!"

 백무천이 억울한 표정으로 고함을 질렀다. 이번에 황실이 보여준 행위는

배신이다. 주고후의 반란 때부터 시작하여 이듬해 있었던 오랑캐의 침입까

지, 제천맹은 모든 힘을 다해 협조를 했었다. 제갈수연을 무림왕으로 책봉

하려는 논의가 있었다 함은 그 공로를 인정했다는 의미인 게다. 그랬던 자

들이 하루아침에 입장을 바꿔버렸다. 그것도 제천맹주인 제갈수연과의 담화

가 있고 난 바로 다음 날에.

 "부맹주, 나도 어쩔 수 없었네. 황제폐하의 어명이네. 더구나 자네들이 제

거했던 그자들 속에 있었던 한 인물이 문제였네."

 "사마기란 친구 때문입니까?"

 "그렇다네. 그 친구의 부친은 명 황실의 은공일세. 영락제 선황제님을 대

신하여 죽어간 충성스런 인물이었네. 비록 모르고 저지른 일이라 하지만 명

 황실에서 최고 공신으로 제수(除授)된 그분의 혈육을 해쳤다는 벌을 면하

기 어려울 게야."

 "그럼……."

 백무천의 얼굴이 해쓱하게 변했다. 지금 유량의 말로 보건대 황실에서 강

호무림의 일에 관여하겠다는 뜻이질 않는가. 더군다나 사마기란 놈이 이미

죽었다면 그 파장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허나, 자네들이 도와준 것도 있고 하니 폐하의 시선을 막아보겠네. 강호

무림은 무인들끼리 해결하도록 말이네. 그리고 앞으로는 찾아오지 말도록

하게. 혹여 황제폐하의 귀에라도 들어가면 서로 좋을 게 없으니까."

 "합하!"

 "손님 나가신다."

 축객령이었다. 더 이상 찾아오지도 말라 함은 그동안 쌓아왔던 관계의 단

절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진 백무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림왕이란 호칭은

꿈이 되어버렸고 황실과의 관계도 끝났다는 것을 알았다. 다만 한 가지 소

득이 있다면, 포고문에서 하겠다 하였던 무림에 대한 조사는 없을 것이라는

 언질뿐이었다.

 "저 친구 속이 좀 쓰리겠군."

 힘없는 표정으로 떠나가는 백무천의 뒷모습을 노려보며 나지막이 읊조리는

 인물, 이번 일의 주모자인 석숭이었다.

 중원을 떠돌며 복수를 하고 있는 광풍대원들에게 그가 해줄 수 있는 최선

책이었다. 금의위 영반의 자리를 놓고 유량과 벌인 흥정.

 "석대인께서 원하시던 물건도 준비했습니다."

 "그것을 황상께서 윤허하셨던 말씀이오?"

 석숭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강호에서 일어나고 있는 살겁에 대해 묵

인해달라고 청을 올렸던 거였다. 주로 내치에 치중하고 있는 선덕제의 눈에

 비친 강호상의 혈겁은 그대로 방치될 수 있는 사항이 아니었다. 외적의 침

입도 아니고 자국의 신민들끼리 전쟁을 일삼으며 수백의 인물이 죽어나가는

 현실이 아닌가. 군을 동원해서라도 잡아들이고자 하였으나 석숭의 말을 듣

고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다.

 주고후 반란 때 자신 옆에 있던 삼 인이 그들이라 하였던 것이다. 아울러

천기대장군 아들까지. 철목승과 나눈 두 번의 대화에서 그의 인간 됨됨이를

 믿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천기대장군의 아들이라는 석두의 존재가 가장

크게 작용했다. 같이 전장을 누볐던 영락제가 시간 있을 때마다 언급했던

사람이 천기대장군이었다. 그가 없었다면 자신은 이미 죽었을 거라며, 반드

시 그의 후손을 찾아 보답하라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가 나타났고 강호무림인이 되었다고 하였다. 오히려 도움을 주고

자 하였으나 모른 척하는 게 도와주는 길이라는 석숭의 말에 참고 있는 것

이었다.

 "그뿐만 아닙니다. 무림이란 단체에 황실의 힘을 보일 필요가 있다고까지

언급하셨습니다."

 제천맹의 멸망시키되 황실의 무기를 사용하라는 말이었다. 선덕제의 그런

결정에 가장 영향을 끼치게 한 자들은 담운천과 각인대사였다. 벌써 삼 년

의 기간 동안 추격하고 있지만 아직 그들의 흔적을 찾지 못하고 있었던 것

이다. 다시는 담운천과 같은 무림인이 나오지 못하도록 징계를 내리라는 어

명이었다.

 "그런데 이길 수 있으리라 보십니까?"

 유량이 석숭의 행동에 대해 가장 의아하게 생각하는 부분이다. 사 년 전

떠났던 그들이 돌아왔다는 건 알지만 아직 얼굴 한 번 보지 못했다 하였다.

 그가 알고 있는 유일한 사실은 열 명이 살아왔다는 것이었다. 누가 돌아왔

는지 확인도 없이 모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오직 전부 끝냈다는 믿음

 하나로.

 "세상에는 질 수 없는 사람들이 있소. 바로 그들이고."

 "하기야 그때 그자들만 보아도 동창이나 금의위 위사들이 일초지적도 안

되게 강해 보이기는 했지만……. 참! 퇴임식 때 사마기란 그 친구도 같이

오라 하셨습니다. 살아 있다면 말입니다."

 "그렇게 하도록 하지요. 살아 있다면……."

 무림을 치겠다는 황제를 말릴 때야 석두가 살아 있다 하였지만 그도 확신

하지 못하고 있었다. 다만 살아 있기를 바라는 마음뿐이었다. 유량에게 작

별인사를 한 석숭이 길을 나섰다.

 이제 모든 게 정리되었다. 원하는 물건도 얻었고 기다리기만 하는 된다.

 "대인, 너무 많이 주신 것 아닙니까. 더구나 유량 저 사람 아직도 제천맹

에 미련을 떨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던데."

 무림인들에 대한 조사를 그만둔다고 했던 대목에 대한 말이었다.

 "그로선 당연한 선택이겠지. 누가 이겨도 상관없는 사람이니까."

 석숭도 이미 유량이 그렇게 나오리라는 걸 짐작하고 있었던 일이었기에 아

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렇게 해주는 게 광풍대원들에게 더 편하

다는 생각에서였다.

 "금령, 언제까지 숨어 있을 텐가."

 "이거…… 습관이 돼서."

 석숭의 곁으로 사십 대의 중년인이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나타났다. 뇌룡

현까지 따라갔던 네 명 중 마지막 남은 호위였다. 그 또한 석숭과 같이 금

의위를 그만두었다.

 "돈이 아까운 모양이지?"

 "아깝기보다는 백공자가 방방 뛸 것 같아서……."

 "넘치는 게 돈인데 주면 되지 않느냐. 줘봐야 쓰지도 못하는 바본데. 오히

려 벌어서 돌려줄 거다."

 백산을 떠올리는지 석숭의 입가에 따스한 미소가 맺혔다. 이번 유량과의

흥정에 만상투인루에서 벌어들였던 모든 돈을 다 썼다. 물론 요구사항을 관

철시키기 위해 쓴 돈이기도 했지만, 황실에 해줄 수 있는 그의 마지막 일이

었다. 친구였던 영락제의 북벌과 해외원정으로 인하여 국고가 거의 바닥난

상태였던 것이다. 아마 그 돈으로 해서 조금은 여유 있는 정책을 하게 될

터이다.

 "그나저나 제갈수연이란 그 여잔 최악의 패를 선택하고 말았군요. 그 성질

 더러운 백공자를 건드렸으니 말입니다."

 "그래, 맞다. 최악의 선택인 거지. 씨가 말라버리는 더러운 패."

*     *     *

 "어떻게 되었습니까?"

 석숭이 더러운 패를 선택했다고 생각하는 제갈수연은 북경에서 돌아온 백

무천을 향해 초조한 얼굴로 결과를 묻고 있었다. 이미 예상하고 있었지만

혹여 하는 마음에서였다. 유량의 지지만 잡아두면 설사 무당과 소림이 뭐라

 하든지 제천맹의 생존에는 문제가 없기 때문이었다. 혈광마인에 대한 조사

도 형식적으로 마무리 지을 수 있다는 것이다.

 "유량의 도움은 틀렸소. 더 이상 찾아오지 말라더군. 대신 한 가지 언질은

 받았소. 무림의 일은 무림인들끼리 해결하라는."

 "진정 그랬단 말입니까?"

 제갈수연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전부 잃은 게 아니었다. 유량이 활로

를 만들어주었다. 무림인들의 일은 무림인들끼리 해결하라는 말은, 혈광마

인에 대한 처리를 일임한다는 의미인 게다. 비록 금의위 위사들이었다고 하

였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석숭과의 흥정에 의한 조치였던 것이다. 혈광마인

을 전부 처리하고 강호가 다시 조용해지면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다는 언질

인 거였다.

 "석숭이 문제가 아니오. 그가 어느 선까지 손을 썼는지 알 수가 없으니 말

이오."

 "어쩔 수 없습니다. 일단 혈광마인만 제거하면 모두 해결됩니다. 더 이상

문제될 일이 없다는 말이지요."

 석숭이 어느 정도까지 관여했는지 걱정스러운 면이 없지 않아 있었고, 지

금까지 드러난 사실만으로 싸움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못내 부담스러웠으나

 제갈수연의 입장에서는 다른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지금 제천맹에서 가장

 시급한 문제는 남아 있는 지부를 안정시키는 일이었다.

 이미 제천맹에 대한 신뢰가 무너져버렸기에 각 지부에서는 이탈자들이 더

욱 증가하고 있었던 터였다. 지부장의 힘으로는 통제가 불가능한 지경에 이

르러 있었다. 게다가 가장 문제가 되는 곳은 지금껏 강호공적으로 선포되어

 있던 감숙성이었다.

 지난 세월 동안 감숙성으로 들어가는 무인들을 철저하게 통제해왔기에 외

형적인 성장은 없었지만 내적인 힘은 더욱 강해졌다. 일 년에 한 번씩 보냈

던 토벌대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매년 같은 수준을 보냈는데 그들이 당하

는 시간이 점점 당겨졌던 거였다.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전 지부에 알려라! 즉시 제천맹으로 집결하라고."

 그녀가 선택한 최선의 방법은 숭산에서 마지막 결전을 하겠다는 거였다.

각각이 떨어져 있는 지부에서는 감숙성에 있는 자들을 감당하지 못한다는

판단에서였다. 더구나 강호공적이 아니라는 사실까지 밝혀졌기에 그들이 움

직이는 곳마다 새로운 무인들이 영입될 가능성이 커졌다.

*     *     *

 그의 예상대로 소림과 무당, 그리고 황실의 포고문이 나오자마자 감숙성에

 있던 무인들이 살기를 뿌려대며 천마맹을 나섰다. 잃었던 이름을 찾기 위

해서였다. 그들의 첫 목표는 과거 철마궁이 있던 자리에 세워진 제천맹 섬

서지부.

 "섬서지부의 총 병력은 이천이었습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이탈자가 생기는

 바람에 지금은 얼마가 남아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파면신개가 좌중을 돌아보며 섬서지부의 상황에 대해 설명했다. 그런데 상

당수의 무인들이 보이지 않았다. 남궁세가와 팽가 무인들, 그리고 악천의

직할대 대부분이 먼저 떠났던 것이다.

 먼저 떠난 그들의 목표는 낙양에 있는 제갈세가였다. 그들의 발목을 묶기

위함이 목적이었다. 지난 사 년간 자신들을 감시하고 있었던 섬서지부에 대

해선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살아남은 광풍대원들의 혈겁과 세간에 퍼진

소문에 의해 이미 전의를 잃어버린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악대협, 개방에 연락해서 시작하라고 하십시오."

 "제천맹의 밀정 말입니까?"

 "네, 그녀의 눈과 귀를 없애버릴 때가 되었습니다."

 광풍대원들이 복수의 칼을 갈고 있을 때 풍신개와 파면신개의 사문이었던

개방 또한 놀지 않았다. 제갈수연의 최대 세력이라 할 수 있는 제천맹 밀천

각의 모든 인원을 파악해두었다. 그들을 제거하는 일이 개방의 임무였다.

 소림사와 무당파와는 달리, 개방은 광풍대원의 일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여

풍신개의 복수를 준비하고 있었다.

 영마산(靈馬山) 만자평.

 수백 채의 건물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는 이곳이 제천맹의 섬서지부였다.

 과거 철마궁에 비해 거의 두 배 이상 커진 규모였다. 감숙성에 있던 철목

승 일행을 방어하기 위해 매년 증축을 거듭해왔기 때문이었다.

 섬서지부가 증축되어감에 따라 가장 기뻐하는 사람은 이곳의 책임자인 문

상이었다. 감숙성에 있는 무림공적들 때문이기도 했지만, 바로 자신이 다스

리는 곳이 아닌가. 갈수록 부리는 사람이 많아진다는 것 또한 가진 자의 즐

거움 중에 하나였다.

 지난 세월의 즐거움 때문이었는지 초리하에 나타났을 때보다 훨씬 비대해

진 몸을 한 문상이 잔뜩 찌푸린 얼굴로 초조한 듯 연신 손바닥을 비비고 있

었다.

 "어떻게 되었나, 맹에선 아직 소식 없나?"

 굳은 얼굴의 문상이 밖을 향해 고함을 내질렀다. 강호공적이란 말이 유명

무실해진 철목승 일행이 가장 먼저 노릴 곳은 이곳 섬서지부가 분명할진대,

 제천맹에서는 어떤 지시도 내려오지 않았다.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이었다. 마음 같아선 섬서지부를 비우고 맹으로 복귀

하고 싶었지만, 지시도 떨어지지 않았는데 독단으로 일을 처리할 수가 없었

다. 혹여 잘못되면 그 모든 책임을 자신이 지게 될 터이고, 제갈수연의 성

정상 잘못한 부하는 바로 문책이 이어지기 때문이었다.

 "왔습니다, 지부장님!"

 전령각을 담당하고 있던 부하 한 명이 급한 걸음으로 다가와 종이쪽지를

내밀었다.

 "이런 빌어먹을."

 다급한 심정으로 전서를 읽던 문상이 거친 욕설을 뱉어냈다. 전 병력을 하

남성으로 물리라는 후퇴명령서였다. 문상의 얼굴이 잔뜩 굳어졌다. 감숙성

에 있는 적이라 해봐야 삼천이 전부다.

 본맹에서 지원병만 보내주면 한바탕 싸워볼 수 있을 터인데 몸만 후퇴하라

니. 지금도 이탈자가 속출하고 있는 판인데 무슨 수로 제천맹까지 병력을

이끌고 간단 말인가. 아마 제천맹이 있는 하남성에 도착할 즈음이면 절반도

 남지 않을 것이다. 그것도 최대한 잡았을 때의 수치였다.

 "어쩔 수 없지, 앉아서 당할 순 없으니. 전 대원에게 당장 출발준비를 하

라고 알려라. 목적지는 제천맹이다."

 뾰족한 수가 없었다. 사기나 병력으로 볼 때 무조건 필패였기에 맹의 지시

에 따라야만 한다. 서둘러 준비를 시킨다고 하였으나 몸만 가는 출발준비라

 하여 쉬이 끝날 리가 없었다. 중간에 빠질 이탈자를 최대한 줄이기 위한

조 편성을 해야 했다. 한 조를 연대 책임으로 하여 하남성까지 데리고 가겠

다는 복안이었다. 하지만 이천에 달하는 대 병력이다. 한 조에 오십 명으로

 구성한다 하여도 전부 사십 개 조, 각 조마다 간단한 비상식량까지 준비시

키다 보니 어느 사이 밤이 되어버렸다.

 "이 시간에 출발해야 하는가."

 어둠과 함께 왠지 모를 불안함이 밀려왔다. 감숙성의 천마맹에서 수일 전

에 적들이 떠났다는 보고를 이미 접했다. 시간상으로 볼 때 지금쯤 이곳에

도착할 시기였던 터였다. 그런데 어떠한 조짐도 없이 조용했기에 더욱 걱정

이 앞섰다. 어둠을 틈타 기습이라도 당하게 되면 속수무책, 그들을 물리칠

어떤 대안도 없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섬서지부원들은 전부 떠날 준비를 하

고 있기에 싸우고자 하는 의지가 없었다. 지금 상황에서 적의 공격을 받게

되면 바로 전멸로 이어질 터였다.

 "만약 아직 오지 않았다면?"

 쉽게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이곳 섬서지부는 자신의 모든 곳이다. 본

산인 청성파를 등지고 얻었던 자리가 아닌가. 휘하에 있는 부하들의 수도

청성파보다 더 많다. 청성파 문주를 아래로 볼 수 있는 자리에 올랐다고 좋

아했었는데, 드디어 원하는 바를 성취했다고 여겼었는데, 그 모든 게 끝장

나려 하고 있다.

 오십 년 인생이.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그들은 밤을 기다리고 있다. 차라리 수성(守成)

이 더 편하다. 밝은 날 떠나야 한다, 밝은 날."

 결국 문상이 내린 결론은 수성이었다. 한밤중의 출발은 적에게 기습을 당

할 수 있는 최적의 기회를 제공해주는 결과밖에 안 되기에, 더군다나 그 틈

을 이용해서 부하들이 도망을 친다면 진령산맥을 빠져나가기도 전에 전멸하

고 말 것이라는 우려에서였다.

 "고대랑! 고대랑, 어디 있나?"

 "부르셨습니까, 지부장님."

 삼십 대 중반의 탄탄한 체격을 가진 검객이 황급히 들어왔다. 소우검 고대

랑. 문상이 청성파를 떠날 때 데리고 왔던 자로 그가 믿고 있는 심복 중의

한 명이었다. 고대랑의 얼굴 또한 불안함이 가득했다.

 결코 강호경험이 적어서가 아니었다. 사 년 전 혈광마겁에 참여하여 공도

세웠다. 그러나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전혀 달랐다. 그 당시에야 적당한 거

리를 두고 적을 추격하다가 확실한 기회가 아니다 싶으면 몸을 사렸었다.

먼저 나서는 자가 일찍 죽는다는 무림의 철칙을 이미 깨닫고 있었던 터였다

. 그런데 이번에는 그때와 반대의 입장이 되었다. 도망치는 적을 쫓는 게

아니라, 공격받을 걱정을 해야 하고 다음 날 도망을 쳐야 한다. 죽음에 대

한 공포였다. 비단 그뿐만 아니라 섬서지부에 있는 모든 대원들이 불안에

떨며 마음을 잡지 못했다.

 "모든 구역에 불을 밝히고 전투준비를 하라."

 그나마 밤에 출발하지 않아서인지 고대랑의 얼굴에 안도의 표정이 서렸다.

 잠시 후, 섬서지부의 모든 건물에 불이 켜지고 곳곳에 횃불이 세워졌다.

싸워 이기고자 하는 투지는 없지만, 지부원들이 안정을 찾아가고 있는 듯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나누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그런 부하들을 쳐다보는 문상의 얼굴에 만족의 미소가 어렸다. 어찌 되었

든 바로 떠나지 않기로 한 결정은 현명한 선택이었다. 부하들의 동요가 진

정되었다는 사실만으로 만족해야 했던 것이다.

 "오늘 밤만 넘기면 된다. 오늘 밤만……."

 그러나.

 그런 문상의 바람과는 달리, 그가 그렇게도 피하고자 하는 적은 이미 영마

산에 도착하여 섬서지부를 지켜보고 있었다.

 "오늘 밤 출발하지 않을 모양이군."

 "닭대가리가 아닌 이상 못 가겠지요."

 이미 문상의 행동을 예측하고 있었다는 듯 서문천이 중얼거렸다. 자신들의

 희생을 조금이나마 줄여보기 위해 지금껏 기다렸는데 그 계획이 수포로 돌

아가고 말았다. 그러나 별로 걱정하는 얼굴은 아니었다. 단지 약간의 착오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왕 준비했는데 우리도 불꽃놀이 한번 하자."

 초상이 싱긋 미소를 지으며 서문천에게 말했다. 그러나 웃는 건 입술 뿐

그의 눈에서 살을 엘 듯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살기(殺氣)였다. 결코 용서해서는 안 될 적에게나 보일 수 있는 전율적인

살기가 흘렀다. 그뿐만 아니었다. 그의 뒤쪽으로 어둠 속에 포진해 있는 무

욕인들의 몸에서도 사방을 얼려버릴 듯한 차가운 기운이 퍼져나갔다.

 단 한 번도 강호무림에 욕심을 낸 적이 없었다. 명예를 원한 적도, 세상에

 이름을 날리고자 한 적도 없었다. 오직 무공에 인생을 걸었고, 무공에서

기쁨을 찾고자 하였다. 그랬던 자신들을 공적이란 허울로 묶어버렸다. 가만

히 살고자 하는 자신들을 건드린 것이다.

 "저놈들의 가장 큰 죄가 뭔지 아오? 추렴이오. 추렴이를 만나지 못하게 했

다는 것이오."

 반동의 입에서 씹어뱉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수양산에서 다시 보자

며 헤어졌는데 그때가 마지막이었다. 자신들 때문에 백산이 오지만 않았던

들 추렴이는 죽지 않았을 터였다. 그 애를 구하기 위해 천마맹을 나섰었는

데, 구하기는커녕 자신들 때문에 죽게 하고 말았다.

 "전부 태워 죽일 거요. 추렴이가 당했던 것처럼 전부 태워 죽인단 말이오.

 사위 녀석이 하고 다니는 것처럼……. 준비해!"

 뒤쪽을 향해 고함을 지른 반동이 자신의 어깨에 걸려 있던 활을 내렸다.

맨 처음 혈겁이 일어날 때부터 시작하여 지난 육 개월간 궁술을 익혔다. 적

을 태워 죽이기 위해서였다. 추렴이가 당했던 것을 고스란히 돌려주기 위해

, 불길 속에서 죽어가는 놈들을 보기 위해 익혔다.

 "모든 건물이 불타기 시작하면 그때 친다."

 서문천의 고함소리와 함께 밤하늘을 가득 채우며 불꽃이 날았다. 천여 명

의 무욕인들이 동시에 섬서지부를 향해 활시위를 당겼다.

 "이제 시작인 게야. 오늘 밤부터. 가자!"

 사풍도를 거머쥔 초상이 불타고 있는 섬서지부를 향해 몸을 날렸다.

 그의 뒤를 이어 나머지 무욕인들의 몸이 허공을 가르고 있었다. 태어나 처

음으로 강호를 향해 무기를 뽑아든 무욕인. 그들의 힘이 얼마나 되는지 아

무도 알지 못했다.

 "뭐 하나? 불은 신경 쓰지 말고 방어대형을 유지하라!"

 다급한 표정의 문상이 부하들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이미 예상하고 있는

적이었지만 막상 공격이 시작되자 안정을 찾아가던 부하들이 급격히 동요하

기 시작했다. 잔뜩 겁에 질린 얼굴을 하고는 우왕좌왕 정신을 차리지 못했

다. 신념이 무너진 탓이었다. 왜 전쟁을 해야 하는지, 왜 자신을 희생해야

하는지 그 이유가 없기에. 싸워야 할 명분이 없기에.

 이미 진 싸움이었다. 그나마 싸우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는 무인들이 절반

정도 있어서 현 상태가 유지되고 있는 것이었다.

 "막아랏!"

 문상을 절대적으로 따르는 무인들이 사방을 향해 고함을 내질렀지만 이미

전의를 상실한 부하들은 잔뜩 겁먹은 얼굴로 사방을 두리번거릴 뿐이었다.

 "결국 끝났나……."

 담을 타고 넘어오는 자들과 정문을 뚫고 들어오는 자들의 행색을 확인한

문상이 절망적인 얼굴로 중얼거렸다. 자신더러 강호제일 단체를 꼽으라고

한다면 가장 일 순위가 사 년 전의 혈광마인들이고 그 다음이 무욕인일 것

이다. 한 명 한 명이 자신과 버금가는 고수들.

 이제 막 시작일 뿐인데 검을 버리고 투항하는 자들이 생겨났다. 싸우고자

하는 자들이 아무리 독려하고 고함을 질러도 소용이 없었다. 검을 버리며

그 자리에 무릎을 꿇는 자들이 급속하게 늘어갔다.

 섬서지부 무인들의 그런 행동에 당황한 사람은 오히려 무욕인들이었다. 전

의와 살기를 일으키며 이곳으로 쳐들어왔는데 너무 허무하게 끝나고 있지

않은가. 가슴속에 들어차 있는 울분을 풀어낼 겨를도 없이 종반으로 치닫고

 있었다.

 "이런 씨팔!"

 초상에게서 거친 욕설이 흘러나왔다. 사풍도를 몇 번 휘둘러보지도 못했는

데 끝이라니. 완전 개 같은 경우를 당했음이다.

 "대형과 사위 녀석이 너무 잔인하게 해대서 그런 거 아뇨!"

 "그래도 마음에 안 들어. 전부 단전을 완전하게 파괴시켜버려. 다시는 무

공을 익히지 못하도록."

 결국 무욕인들의 복수는 투항해온 무인들의 무공을 폐하는 것밖에 없었다.

 항복한 적에게마저 살수를 쓸 수가 없기에.

 "에이, 기분 잡쳤네. 근데 대장이란 놈은 어디 갔어?"

 문상이라도 잡아야 직성이 풀리겠다는 듯 사방을 돌며 그를 찾았으나 어디

에도 보이지 않았다. 투항하는 부하들이 급속하게 늘어가자 바로 도망을 쳐

버린 것이었다.

 "남궁세가의 최고 고수가 있는 곳으로 갔네, 뭐."

 서문천이 빙긋 웃으며 서쪽을 가리켰다.

 "쯧쯧, 이곳에서 죽는 게 더 편했을 것을. 여인의 한을 어찌 감당하려고…

…."

 초상이 혀를 차며, 서문천이 가리켰던 곳을 쳐다보았다. 그쪽엔 무욕인들

보다 더 무서운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지난 사 년간 폐관에 들었던 여인. 큰아버지인 남궁세우처럼 단 한 번도

햇빛을 보지 않았던 남궁미령이 광풍대원들이 돌아온 것과 때를 같이하여

출관했다. 그녀를 알고 있던 모든 사람들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 사 년

의 세월 동안 남궁세우가 창안했던 혈우창궁검법을 완벽하게 익혀버렸던 것

이다. 남궁세가에서 두 번째로 강한 무인이 그녀가 되었다. 남궁세우 다음

으로…….

 "커억!"

 초상과 서문천이 혀를 차고 있는 그 순간, 풍뢰검객 문상은 고통스런 비명

을 지르며 앞에 서 있는 여인을 쳐다보았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음이다.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 앞을 가로막는 인물을 보며 냉소를 했다. 아직

운이 다하지 않았다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여인, 아직 서른도 안 돼 보이는 여인이 자신을 막겠다고 서 있는 게 아닌

가. 서둘러 끝내고 떠나야 하겠다는 생각에 무작정 달려들며 공격을 가했다

. 그런데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자신의 공격이 전혀 먹히질 않는 것이었다

.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할 무렵, 지금껏 방어만 하고 있던

여인이 처음으로 공격을 했는데 그 결과가 지금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자

신의 왼팔이었다.

 "누구냐? 어찌 남궁세가에 너 같은 인물이 있단 말이냐?"

 감숙성에 있는 남궁세가 인물들에 대해선 대부분 파악을 하고 있었지만 저

 정도 고수가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었다.

 그런데 자신은 그에게 일초지적도 되지 않는다.

 "당신은 실수했어. 제갈수연 같은 계집을 따르는 게 아니었단 말이야."

 언제나 차분하던 남궁미령의 몸에서 질식할 듯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제갈

수연, 그리고 제천맹. 결코 같은 하늘 아래서 공존할 수 없는 자들이다.

 "그리고 그분을 공격했다는 게 가장 큰 죄야."

 넋을 잃고 자신을 쳐다보는 문상을 향해 제왕검을 던졌다.

 그녀의 분노였다. 태어나 처음으로 정을 주었던 그 남자가 적에게 쫓기고

있었는데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다. 약했기 때문이었다. 강하지 못했기에

 그를 돕지 못했고, 그의 형제들이 죽어가는 현실을 지켜보기만 했다.

 그래서 지난 사 년간 죽을힘을 다해 무공을 익혔다. 그가 살아오지 못하면

 자신이라도 나가서 복수를 하기 위해 익혔던 무공이었다. 그런데 그가 돌

아왔다. 비록 한 팔이 없어진 상태라 하였지만 혼자만 살아왔단다. 당장 달

려가 그의 품에 뛰어들고 싶었다. 왜 소식 한 번 없었냐고 투정을 부리고

싶었다. 허나 아직은 참아야 한다. 그의 일이 끝날 때까지.

 "그 정도였더냐……."

 날아오는 검을 쳐다보던 문상이 허탈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자신의 힘으

론 감당할 수 없는 여인이었다. 가슴에서 느껴지는 화끈한 통증과 함께 정

신이 아득해졌다.

 "빌어먹을……."

 풍뢰검객 문상, 청성파의 제자였던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석공자, 한 명 보냈어요."

 무심한 눈길로 문상의 가슴에 박혀 있는 제왕검을 뽑아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조그마한 복수일 뿐이었다.

 "누님, 너무 싱거워."

 고대랑을 처치한 남궁무가 입맛을 다시며 남궁미령이 있는 곳으로 왔다.

그 또한 많이 변해 있었다. 과거의 오만하고 치기 어린 모습은 사라지고 잔

잔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내적인 성장이 있었다는 의미인 게다.

 "근데 매형은 어디 있을까."

 "너~?"

 남궁무의 매형이란 말에 남궁미령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러나 싫어하는 표

정은 결코 아니었다.

 "저 하늘 어딘가에 있겠지. 아마 붉은 광기를 휘날리고 있을지도…."

 하늘을 쳐다보던 남궁미령이 남궁무와 같이 몸을 날렸다. 이곳에 남아 있

던 오십여 명의 남궁세가 인물들은 이제 낙양으로 갈 터이다. 그곳에서 제

갈세가로부터 받았던 빚을 그대로 돌려줘야 한다. 받았던 대로….

*     *     *

 남궁미령이 그리워하고 있는 당사자인 석두와 광풍대원들은 산서성의 제천

맹 지부에서 그들만의 분노를 쏟아내고 있었다.

 철수무정(鐵手無情) 좌홍. 제천맹 산서지부 지부장으로 벼락출세의 표본이

 된 자였다. 사 년 전 혈광마겁 때 추격대의 선두에서 움직이고 있었던 관

계로, 모든 힘을 소진하고 죽어가던 공적의 등판에 자신의 우수를 찔러 넣

을 수 있었다. 순전히 운이었다. 몇 개의 검이 꽂혀 있던 상대의 등이 앞에

 있었고 그곳을 향해 전력을 다한 장을 뻗어냈을 뿐인데, 그게 마침 그놈의

 마지막이었던 거였다.

 그런 다음, 좌홍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영광의 세월이었다. 죽어가던 놈에

게 뻗어낸 한 번의 손짓이 제천맹 산서지부의 지부장이라는 명예를 안겨주

었다. 물론 무공이 약한 것은 아니었지만 남들 눈에 비친 그의 모습은 벼락

출세한 대표적인 인물로 부각되었고, 수많은 무인들을 제천맹으로 모여들게

 한 장본인이 되었다. 제갈수연의 머리 씀씀이였다. 외부인물들을 영입하기

 위한 얼굴 노릇이 그의 역할이었다.

 그랬던 그가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바로 조금 전에

 철수 지시를 받았는데, 그 지시를 내리기도 전에 흉수들이 들이닥쳐 버렸

다. 대항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즉결처분까지 하며 이탈하는 부

하들을 잡아보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감시의 눈길이 조금만 느슨해져도 여

지없이 도망을 쳤다. 오백의 병력 중 남아 있는 부하들은 백여 명도 채 되

지 않았다. 이곳보다 몇 배나 강한 안휘지부마저 당했는데 산서지부는 말할

 나위가 없다.

 "도망을 가야 해. 빨리 피해야 해."

 밖에서 들려오는 비명소리를 들으며 비밀통로가 있는 곳을 향해 몸을 날렸

다.

 그러나.

 "아이, 씨팔! 만들려면 좀 높게 할 일이지."

 신경질적인 표정을 지으며 외팔이 한 명이 통로 안에서 나왔다. 소살우였

다. 다른 동료보다 일찍 뛰어들었던 그가 산서지부 무인들을 도륙할 때마다

 비밀통로의 존재 유무를 물었던 거였다. 결국 열 번째 도를 날릴 때쯤 해

서 이곳의 존재를 알고 있는 놈을 찾을 수 있었다.

 "응?"

 두려움에 떨고 있던 좌홍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아니, 희망의 표정이라

해야 옳았다. 비밀통로를 타고 들어온 소살우의 행색이 그에게 안도감을 심

어준 원인이 되었던 거였다. 불구, 한 팔이 없는 병신이 자신을 잡겠다고

온 게 아닌가. 저 정도면 처치하고 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겨났다.

 "이봐, 내 등이야. 어서 쳐, 네놈이 가장 잘하는 짓이잖아."

 좌홍이란 놈에 대해서는 이미 들었다. 이놈도 형제의 머리를 들고 제천맹

으로 개선(凱旋)했던 놈이라 하였다. 이미 죽어버린 광풍대원의 목을 잘라

간 놈. 또한 남 등쳐먹는 걸 즐겨하는 놈이라 하였다.

 "이야합!"

 얼굴이 붉어진 좌홍이 전력으로 몸을 날렸다. 말이 필요 없는 상황이다.

사 년 전에 그랬던 것처럼 등을 보이고 있는 놈을 향해 일 장을 먹이고 도

망가면 그뿐인 게다.

 "헉!"

 좌홍의 얼굴이 해쓱하게 변했다. 분명 눈앞에 있던 자의 몸이 꺼지듯 사라

져버린 거였다. 그리고 왼팔에 느껴지는 이 느낌은.

 툭!

 "으아악!"

 왼쪽 손목에서 피가 솟구쳐나왔다. 어떤 무기가 스치고 지나갔다는 느낌도

 없었는데 손목이 잘려버렸다. 너무 빨랐기에 알아차리지 못했던 거였다.

 "등이다!"

 여전히 반 장 거리에 등을 들이밀며 웃고 있었다. 반 장, 한 걸음 앞으로

나가며 손만 뻗으면 되는 거리인데 너무 멀게 느껴졌다.

 "빨리 하고 도망가야지. 시간 없어."

 "놈!"

 거의 무방비 상태로 등을 열어둔 채 자신을 우롱하고 있는 게다. 거친 고

함을 지르며 하나 남은 오른팔을 찔러 넣었다.

 "잡았다!"

 눈앞으로 다가오는 등을 쳐다보며 좌홍이 쾌재를 불렀다. 놈이 너무 방심

했던 터였다. 굳이 죽일 필요까지도 없다. 놈을 쓰러뜨리고 비밀통로를 향

해 뛰어들기만 하면 살아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퍽!

 "끄아악!"

 소살우의 등에 붉은 기운이 어리는가 싶더니 선연한 핏방울이 날렸다. 좌

홍의 오른손이 완전하게 부서져버렸다. 마치 돌로 짓이겨버린 것처럼 너덜

너덜해져 있었다.

 "등을 줘도 안 되는 모양이구나."

 비릿한 미소를 머금은 소살우의 다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 방에 죽음

을 내리지도 않았다. 팔부터 시작하여 전신의 뼈마디란 뼈마디는 전부 부러

뜨리고 있었다. 좌홍의 키가 조금씩 줄어들었다. 처음 다리 쪽이 짧아지고

이어 허리가, 마지막엔 목만 남자 소살우의 행동이 멈췄다.

 제천맹 산서지부의 멸망이었다.

 불타고 있는 산서지부를 쳐다보고 있는 자들. 수많은 살겁을 저지르고, 셀

 수 없이 많은 인간들의 숨통을 끊었지만 여전히 그들의 눈에는 살기가 맺

혀 있다. 풀리지 않음이다. 조금이라도 더 거세게 반항을 해주길 바랐는데

너무 맥없이 쓰러진다. 가슴속에 타오르는 분노의 불길이 식질 않는데, 적

의 숫자가 줄어들고 있다. 그래서 더더욱 빨리 움직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혼자 갈 테냐?"

 밤하늘을 밝히는 불빛을 뒤로하고 모든 일행이 움직이고 있을 때 떠나지

않는 한 사람, 백산이었다. 이젠 대부분의 지부들도 정리되었기에, 늙은 귀

신을 찾아나서야 할 때가 되었다.

 "천오백 년 전에도 혼자 했다고 하더만요."

 어디에 숨어 있는지 굳이 알 필요가 없다. 그동안 석숭이 조사해왔던 사실

을 바탕으로 찾아가면 된다. 근처에 도착하기만 하면 나머지는 천비가 알아

서 찾아줄 것이다. 몸속에 있는 기운 중 천신가의 기운에 해당하는 놈, 생

천비에서 풍기는 기운만 따르면 될 터이다.

 과거 자신과 같은 운명을 가졌던 그는 혼자서 오신가와 천가들을 전부 없

앴다. 천신가와 사신가는 너무 쉬운 상대일 뿐이다. 숭산이라 하였다. 숭산

 어느 구석에 쥐새끼처럼 숨어 있다 하였다.

 "끝나고 하남성에서 봅시다. 석두야, 전부 파악하는 것 있지 말고."

 "네, 형님!"

 석두의 얼굴도 이젠 소살우와 같이 변했다. 수천의 죽음을 말하면서도 웃

고 있었다. 백산이 원하는 건 별게 아니다. 제천맹에 대해서 완전하게 알아

두라는 말이었다. 제갈세가는 이미 발목이 묶여 있기에 신경조차 쓸 필요가

 없음이다. 단지 제갈수연을 미치게 할 제물이 그들인 것이다.

 "그럼."

 일행의 시야에서 백산의 모습이 아득하게 멀어졌다.

 "자네도 따라가게."

 "알겠습니다, 사돈어른. 둘 중 한 놈은 제몫입니다."

 철목승의 얼굴에 슬쩍 미소가 걸렸다.

 살기(殺氣). 알량한 무공 좀 익혔다 하여 세상을, 아니 인간을 우습게 보

는 자들. 자신들의 인생만 생각하는 그런 자들. 이번에는 뿌리를 뽑을 참이

다. 영원히 지옥의 구렁텅이 속으로 던져버릴 것이다. 심판당하는 기분이

어떠한 것인가를 확실하게 알려줄 테다.

 일행을 향해 가볍게 목례를 한 철목승의 모습도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삼 년 전에 비해서 더욱 가공해진 몸놀림이었다. 마신가의 무공을 극성으로

 익혔다는 의미인 게다.

 철목승이 자신을 따르고 있음을 알지 못한 백산은 빛살 같은 속도로 숭산

을 향해 날았다. 거의 바닥에 내려서지 않았다. 파멸안의 세 번째 단계인

광혈지안의 위력이었다.

 "결국은 그놈들이 원흉이었어."

 모든 일의 원흉이 담운천과 각인이었다. 칠성리에 혈랑 떼를 몰고 와 어머

니와 마을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간 놈도 그놈이었고, 연동립을 시켜 아버지

를 살해한 놈도 그놈이었다.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해주마. 지옥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준단 말이다."

 백산의 몸에서 흘러나온 전율적인 살기에 전방에 있던 초목들이 터져나갔

다. 또다시 분노하고 있음이다.

 그러나.

 금방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던 담운천의 천신가는 숭산에 도착한 지 한 달

이라는 기간이 지났지만 그 어디에서도 흔적을 찾지 못했다.

 "이곳이 어디 동네 뒷산인가. 너무 조급해하지 말게나."

 철목승이었다. 숭산 언저리에서 백산을 따라잡았던 거였다. 처음엔 의아하

게 여겼던 백산도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만의 원수가 아닌 것이다. 추

렴의 아버지인 철목승도 복수할 권리가 있다.

 "알겠습니다."

 '그래, 차분하게 하는 거다. 남는 게 시간이지 않느냐.'

 철목승의 말대로 동네 뒷산도 아니고, 중원 오악이라는 숭산이다. 그런 곳

에서 수백 년 동안을 발견되지 않고 숨어살았던 가문을 찾는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닐 터이다. 석숭도 발견하지 못했던 곳이 아닌가.

 그러한 사실을 알면서도 조급해지는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다. 벌써 수십

개의 계곡을 들어갔다 나왔고, 수십 곳의 절벽을 내려갔다.

 준극봉. 숭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였기에 도착하자마자 조사했던 곳이다.

 자신을 신의 자손이라 여기는 자이니, 숭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인 준극

봉에 둥지를 틀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에서였다. 한 번 뒤졌던 곳이지만

 다시 시작하기 위해 찾았다.

 "저기서 물이나 좀 마시세. ……응?"

 갑자기 철목승의 표정이 흠칫 변하더니 나뭇잎에 받았던 물을 자세히 살폈

다. 달빛에 비쳐진 물의 표면에서 칠색의 무지갯빛이 잠깐씩 나타났다 사라

지는 것이었다. 기름기. 음식을 만들 때 사용하는 미세한 기름기가 달빛에

반사되어 그 빛을 발했다.

 "찾았군!"

 백산을 향해 환하게 웃어 보이던 철목승이 이내 그 물을 마셔버렸다. 마치

 천신가의 모든 것을 마셔버리려는 행위처럼.

 "이곳에 숨어 있었더냐, 이곳에……."

 백산의 눈에서 붉은 혈광이 일렁댔다. 드디어 놈들의 흔적을 찾았다. 몇

백 년을 이곳에서 살았는지 모르지만 과거 혈가의 후예를 피해 도망쳤던 천

신가의 일당이 준극봉 어딘가에 숨어 있는 게다. 마치 쥐새끼처럼.

 흐르는 계곡의 물을 따라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거의 한 시진 정도 물

길을 따라 올랐을 때 백여 장 높이의 절벽이 앞을 막았다.

 "여기는……?"

 전에 와본 곳이었다. 지금처럼 아래쪽에서 올라왔던 게 아니라 위에서 내

려왔었다. 그때와 변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텅 빈 분지에 수십 그루의 노

송만이 서 있는 곳. 초여름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조차 똑같았다.

 "놀라운 일이군."

 따라왔던 물줄기를 쳐다보던 철목승이 중얼거렸다. 절벽 아래쪽에서 그 물

줄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분명 땅속 깊이 박혀 있는 바위일진대 물이 흐

르다니, 처음 대하는 기현상인 것이다.

 "진(陣)이구먼."

 백산을 쳐다보며 어이없는 웃음을 흘리던 철목승이 절벽을 향해 손을 쑥

집어넣었다. 마치 허공을 짚는 것처럼 그의 손이 들어갔다.

 놀라운 진이었다. 아무리 진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지만 천하제일인 두 사

람을 동시에 속이지 않았는가. 이번에도 물길을 따라오지 않았다면 찾지 못

했을 터였다.

 "어이쿠!"

 환상미로진을 경험해보았던 터라 거침없이 진안으로 들어섰던 백산이 나직

한 비명을 질렀다. 불과 반 장밖에 전진해 들어오지 않았는데 이번엔 진짜

바위가 있었다.

 "쯧쯧, 급하기는. 그냥 물줄기만 따르면 될 걸 가지고."

 무작정 앞으로 향해 나아가는 백산의 행동을 보고 철목승이 혀를 찼다. 하

지만 말은 그렇게 하고 있지만, 그의 얼굴도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과연

천신가가 얼마나 대단한 곳인지, 인간을 하찮게 여길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이 왔다. 아울러 복수도.

 '대단한 진이군요.'

 물이 흐르고 있음이 분명할진대 거의 소리가 나지 않는다. 상당히 집중해

서야 간신히 흐름을 잡아냈던 거였다. 진에 의한 효과인 게다. 소음마저도

차단시키는 절대적인 진이었다.

 내부 또한 마찬가지였다. 바로 눈앞에 바위가 있었다. 환영이란 걸 알면서

도 멈칫거려지는 것이었다. 꼭 바위 속을 걸어 올라가는 그런 느낌이었다.

한마디로 가공할 진식임에는 틀림없었다. 숨기에는…….

 미약한 물소리를 따라 나아가기를 반 시진 정도. 동굴의 끝에 도달했는지

무수한 수목들로 가득한 공간이 나타났다. 그리고 십여 장 높이의 수목들

아래 오십여 채의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나타났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쉽게

 구분해내기 힘들 정도로 은밀한 건물들이었다.

 백산과 철목승의 얼굴이 실망스럽게 변했다. 천오백 년 전 천하를 지배했

던 가문이고, 모든 음모의 주역이 있는 곳치곤 너무 초라했다. 기껏 오십여

 채의 집이라니. 잘해야 백여 명이 조금 넘을 그런 놈들이 지금껏 세상을

우롱했던 거였다. 신이라는 명목으로 말이다.

 마음속에서 격렬한 반응이 일었다. 죽여야 할 적을 발견했을 때만 나타나

는 적의가 분노와 함께 솟구쳐 올랐다. 초리하에서 느꼈던 그 기분, 얼마

전 섯다와 모사를 만났을 때, 그리고 철목승을 만났을 때 느꼈던 그 묘한

느낌, 친숙한 듯한 그 느낌이 전신을 타고 흘렀다.

 그리고 백산의 뒤쪽에 있던 철목승 또한 분노하고 있는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저 따위 것들에게, 기껏 오십여 가구의 건물 안에 있는 자들이

남의 인생을 파괴하고 딸의 행복을 가져갔다니 어이없는 일이 아닐 수 없었

다. 세상에 나서지도 못하고 이런 곳에 숨어 있는 자들이 아닌가.

 "어떻게 할 텐가."

 천신가의 처리에 대해 묻는 게다. 막무가내로 들이닥쳐 몰살시킬 것인지,

아니면 한 명씩 잡아 없애버릴 것인지를.

 "일단 담운천과 대머리 녀석만 제외하고……. 시험을 해볼 겁니다. 정말

신인지."

 내일이 무슨 날인지 알 수 없지만 최고로 기억에 남는 날이 될 터이다. 물

에 떠 있는 기름기 때문에 내일이 천신가의 중요한 어떤 날이라는 걸 짐작

할 수 있었다. 평소보다 많은 음식을 장만했기에 그 먼 아래쪽까지 기름기

가 흘러온 것이리라.

 "네놈들은 제갈수연에게 보내는 선물로 쓸 거다. 일생일대의 최고의 선물

말이다."

 백산의 눈에서 붉은 혈광이 쏟아져나왔다. 살심을 먹었을 때, 극도로 분노

했을 때 나타나는 핏빛 광채였다.

 백산의 그런 예상이 맞았는지,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해 있는 건물 속에서

 나직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노야, 경하드리옵니다."

 "허허! 백육십이란 나이가 어디 축복받을 일인가."

 각인대사의 축하인사에 흡족한 미소를 짓고 있으나 담운천의 얼굴에는 공

허함이 가득했다.

 삼 년 전의 실패가 가져다준 충격 때문이었다. 거의 완전한 계획이라 생각

했기에 몸소 나서서 거사를 시작했는데 남아 있던 혈맹의 병력만 잃고 말았

다. 아울러 황제의 꿈도 사라져버렸다. 진정 신으로 군림할 수 있는 기회였

었는데, 천오백 년 전의 영광을 다시 한 번 재현할 수 있었는데, 그 모든

게 꿈으로 끝나버렸다.

 "나의 시대는 이미 끝났어."

 담운천의 얼굴에 회한의 빛이 어렸다. 이제는 강호에 나설 수도 없다. 강

한 무공도 아무런 소용이 없을 터였다. 주변에 사람이 따르지 않는 강함은

결코 강함이 아닌 것이다. 타인들이 강함을 인정하고 떠받들어야만, 강한

사람이 되는 세상 아니던가. 누구도 자신 곁에 다가설 수 있는 사람이 없다

.

 역적(逆賊). 황실에서는 역적으로, 강호무림에서는 모든 음모의 배후로 낙

인찍혀버렸다. 천신가가 있는 이곳이 아니면 갈 곳이 없는 혼자만의 천하제

일인이 된 것이다.

 "제천맹은 어찌 되었는가!"

 여전히 미련이 남았는지 아직 강호무림의 근황에 대해 묻고 있었다.

 "그곳도 쉬워 보이진 않습니다. 전 병력을 제천맹으로 집결시키는 초강수

를 쓰고 있습니다만, 상대는 마신가의 철목승과 파멸안입니다."

 허황된 발악일 뿐이라는 말이었다. 제천맹이 어느 정도 성장했다고 판단했

을 때 제갈수연을 불렀다. 그녀의 머리에 심었던 제령침을 믿었던 터였다.

그러나 제갈수연에게서는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그제야 자신들이 당했다는

 걸 알았고, 은밀하게 죽여버릴까도 생각해보았지만 다 부질없다는 생각에

그만두고 말았다.

 설사 제갈수연이나 백무천을 제거하여 제천맹을 차지한다 하더라도 석숭의

 추적을 피할 수는 없을 터였다. 그렇게 되면 다시 명 황실과 전쟁을 치러

야 할 터이고 결과는 불 보듯 뻔하다. 황실의 힘을 너무 무시했다. 결코 무

인들로는 그들을 이길 수 없음을 삼 년 전 전투로 알게 되었다.

 그런데 다시 파멸안이 등장했다. 비록 정체가 밝혀지지 않았다지만 파멸안

이 아니면 해낼 수 없는 일인 것이다. 더구나 마신가의 철목승까지 파멸안

에 합세해 있다면 제갈수연의 미래는 뻔하다.

 파멸. 그녀의 마지막을 장식할 말일 게다.

 "그녀 또한 최악의 수를 둔 거지요. 파멸안에게 원한을 샀으니."

 각인대사에게서 나직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어쩔 수 없다는 자괴감이었다.

 각인대사가 두려워하고 있는 파멸안의 주인인 백산은 철목승과 함께 죽음

의 향연을 시작하고 있었다. 굳이 비도를 휘날리며 살겁을 자행할 필요도

없었다. 그 또한 바라는 바도 아니었다.

 천신가의 인물들이 잠들어 있는 방 안으로 스며들어 독천비를 이용해 독만

 뿌려주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목숨을 앗아갈 정도로 강한 독이 아니었다.

거의 정신을 잃을 정도의 독으로 천신가의 인물들을 제압해나갔다.

 "이놈들은 담운천의 선물이고, 담운천 그놈은 제갈수연에게 보낼 선물입니

다."

 중독되어 있는 인물들의 혈도를 하나씩 짚어가며 환하게 미소를 짓는다.

광기 어린 악마의 미소였다.

*     *     *

 제갈수연을 파멸시키기 위한 백산의 준비가 이루어지고 있는 그 시간, 당

사자인 제갈수연도 다가오는 전쟁을 준비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었다.

 제천맹의 대 연무장.

 다시 시작된 혈광마겁(血光魔劫), 즉 귀마겁(鬼魔劫)의 혈겁을 피해 급거

맹으로 복귀한 지부원들과 제천맹에 있던 전 무사들이 대 연무장으로 모여

들었다. 맹의 진로를 결정할 발표가 있을 거라는 소식 때문이었다. 비록 최

후까지 제천맹의 잔류를 선택했던 무인들이지만 그들의 얼굴에는 조금씩 다

가오는 적을 두려워하는 공포심으로 가득했다.

 연일 들려오는 소식은 제천맹 지부에 대한 멸망소식밖에 없었다. 제천맹에

 있어봐야 죽음밖에 없다며 떠나는 자들도 부지기수였다. 그러한 와중에도

떠나지 못하고 있는 이들은 제천맹이 아니면 딱히 갈 곳이 없는 자들과, 이

 난세를 기점으로 또 다른 비상을 꿈꾸는 자들이었다.

 삼삼오오 모여드는 제천맹 무인들을 쳐다보는 이 여인. 현시대의 천하제일

인인 제갈수연이었다.

 "선동할 사람은 다 풀었나?"

 최악의 위기상황이 닥쳤음에도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해 보였다. 그러나 차

분하고 침착해 보이는 것은 그녀의 겉모습일 뿐이었다.

 그녀의 내심은 누구보다 불안했다. 자신의 모든 것이고 제갈세가의 영광인

 제천맹이 무너질 위기에 처해 있다.

 '수연아 힘을 내라. 이보다 더한 경우에도 살아남았다. 지금 있는 인원만

뭉치게 만들면 아직 승산은 있다.'

 내심 불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었다. 비록 최대의

위기상황이지만 이번만 잘 넘기면 제갈세가의 영원한 제국을 만들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혈광마인들과 감숙성 무인들만 없앤다면 더 이상 제천맹

을 위협할 세력은 어디에도 없을 터였다. 이 위기만 넘길 수 있다면.

 자신을 다잡기라도 하듯 두 주먹을 불끈 말아 쥐었다.

 "자신이 있는 거요?"

 제갈수연과는 달리, 백무천과 지청인은 연신 바깥쪽을 흘끔거리며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오늘 밤 제갈수연의 연설에 따라 제천맹의 운명이 갈

리기 때문이었다.

 절반, 제갈수연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무인들이 절반이고 그 나머지는 아

직 진로를 확실하게 정하지 못한 상태에 있다. 즉 이쪽이 불리하다 싶으면

바로 떠나버릴 사람들이란 것이다. 그들을 잡지 못하면 제천맹의 전력은 적

과 동일하게 된다. 백이면 백, 패한다는 의미인 게다.

 "해내야지요."

 제갈수연이 굳은 얼굴로 백무천을 쳐다보았다. 다시 한 번의 승부, 구파일

방과의 승부에서 이겼고, 담운천과의 승부에서도 이겼다. 이 또한 무공을

겨루는 승부가 아니기에 자신이 더 유리한 입장이다. 이도 저도 아닌 우왕

좌왕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부하들, 그들의 마음을 붙잡아 제천맹에 충

성하는 최고의 무인으로 바꾸어놓아야 하는 것이 오늘 밤 그녀가 해야 하는

 일이다.

 즉 싸우고자 하는 당위성과, 승리할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고자 지금의

연설이 계획되었다. 오늘 밤 성공 여하에 따라 칠천 명의 병력이 칠만 명이

 될 수도 있다. 아니면 오늘 밤으로 자신들의 운명이 끝장난다. 해서 많은

준비를 했다. 낮보다는 밤이 더 효과가 있기에 한밤을 선택했고, 부하들을

선동할 자들도 미리 심었다.

 "갑시다."

 두 명의 부맹주를 대동한 제갈수연이 대 연무장에 마련되어 있는 단상으로

 올랐다.

 순식간에 정적이 찾아들었다. 칠천의 병력이 모여 있는 곳임에도 숨소리조

차 들려오지 않는, 완전한 침묵의 바다였다. 그만큼 목전의 상황이 중요하

다는 의미였다. 그들을 향해 제갈수연이 연설을 시작했다.

 "이 자리에 있는 여러분들은 근자에 일어난 일로 인하여 많은 혼란이 있을

 줄 압니다. 오늘 제가 이 자리에 선 이유는 여러분들이 궁금해하는 일들에

 대해 그 전모를 밝히고 제천맹의 진로를 결정하기 위함입니다."

 차분한 제갈수연의 목소리가 연무장 안에 울렸다. 결코 선동하려는 목소리

가 아닌, 모든 진실을 밝히고 이곳에 있는 무인들의 의사를 따르겠다는, 맹

의 해체마저도 생각하고 있음을 내비치는 발언이었다.

 "좋습니다. 그럼 우리가 묻는 말에 속 시원하게 답해주실 수 있습니까?"

 군웅들이 모여 있는 한곳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평소 같으면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제천맹의 맹주인 제갈수연을 마치 죄인

다루듯 하고 있었다.

 "말씀하십시오."

 "신중하게 대답해주십시오. 소림과 무당에서 발표한 내용이 사실입니까?"

 사실 제천맹이 이런 위기상황으로 치닫게 된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소림과

무당의 포고문이었다. 그러나 모든 무림인들이 전부 믿는 건 아니었다. 무

려 오십 년 전에 일어났던 일이고, 소림이나 무당은 사 년 전에 있었던 전

쟁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세상일이 그렇듯 일부 믿는 사람도 있었고, 설마

하는 사람도 있을 터였다. 오히려 반신반의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고 봐야

맞을 것이다.

 "사실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갈수연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

다. 강호에 나돌던 소림과 무당의 포고문이 사실로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제천맹 자체가 비겁한 음모의 토양 위에서 세워졌다는 말이 아닌가.

 "그러나!"

 다시 한 번 제갈수연의 목소리가 연무장에 울렸다. 이번에는 조금 전보다

훨씬 큰 목소리였다.

 "여기 있는 저도 포고문을 접하고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과거 오천맹의 한

 축이었던 저희 제갈세가가 음모의 희생자였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또한 여

기 계시는 여러분은 전부 알고 있습니다. 비록 음모에 의해 강호공적이 되

었다지만 사 년 전 혈광마인들은 무수한 혈겁을 저질렀습니다. 그 혈겁은

음모에 의한 살육이 아닌 그들 스스로 저지른 것이었습니다. 그런 혈겁을

좌시(坐視)한다면 제천맹의 존재가치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럼 사 년 전, 소림이나 무당에선 백살마대 후예였던 그들에 대해 한마

디 언급도 없었단 말입니까?"

 "그런 상황에 대하여 보고받은 적이 없습니다."

 "그걸 말이라고 하십니까? 소림과 무당은 정도 제일문파입니다! 우리 제천

맹 정도는 우습게 생각하는 그런 대 문파란 말입니다."

 "그 당시에는 분명 그랬습니다. 우리 제천맹의 힘은 소림이나 무당에 비해

 한참 미약했지요."

 "소림과 무당을 모함하지 마시오, 맹주. 정도의 기둥이라는 거대문파 두

곳이 이 따위 제천맹이 두려워 그런 포고문을 발표했다고 하시는 게요?"

 순간 모여 있던 군웅들이 서로를 쳐다보며 다시 한 번 웅성거렸다. 이 따

위 제천맹이라 하였다. 소림과 무당의 발치에도 미치지 못한 그런 곳에서

자신들이 있었다는 말인 것이었다. 더구나 과거 제천맹의 세력이 미약했을

때는 아무런 언질이 없다가, 제천맹의 세력이 최고조에 달하게 되니까 이제

야 오십 년 전의 사실을 발표했다는 말처럼 들렸다.

 "그럴 리가 없지요. 소림과 무당은 무림의 영원한 양대 산맥입니다. 우리

제천맹은 발치에도 따라갈 수 없는 위대한 곳 말입니다. 하지만 저와 여러

분은 최선을 다했습니다. 소림과 무당을 넘어선 제천맹을 만들기 위해서요.

"

 잠시 말을 멈춘 제갈수연이 아래쪽에 있는 무인들을 둘러본 후 다시 입을

열었다.

 "후회하지 않습니다. 또한 혈광마인을 공적으로 선포했던 저의 판단은 옳

았다고 생각합니다. 과거보다는 현재의 일이 더 중요했기에 그들을 강호공

적으로 선포했을 뿐입니다."

 "그건 소림이나 무당의 질시 때문이라 해두고, 그럼 황실의 일은 어쩔 것

이오."

 아예 소림과 무당이 제천맹을 무너뜨리기 위해 퍼뜨린 포고문이라 결론을

내려버렸다. 사실 따지고 보면 백살대를 백살마대로 만든 장본인은 바로 그

들이었기에. 그러나 그들보다 더 중요한 황실이 남아 있다. 잘못하면 황실

에 반란자의 무리로 찍힐 수도 있음이다.

 "그 또한 확답을 들었습니다. 무림의 일은 무림인들끼리 해결하라 하였습

니다. 결정은 여기 계시는 여러분들이 하시는 겁니다. 제가 아닌. 그럼……

."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묻겠습니다. 만일 우리가 제천맹을 해체하자고

하면 어쩔 겁니까?"

 결정적인 질문이었다. 정확하게는 너의 야망이 숨쉬고 있는 이곳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이었다.

 "물론 저는 제천맹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이곳은 저 혼자만의 소유물이 아

닙니다. 여러분이 떠나시면 제천맹은 저절로 없어질 겁니다."

 말을 마친 제갈수연이 쓸쓸한 표정을 지으며 단상을 내려갔다. 그러나 연

무장에 모여 있는 제천맹 소속 무인들은 자리를 뜨지 못했다.

 그런데 그들의 표정이 묘하게 변해 있었다. 처음 연무장에 왔을 때만 해도

 불안한 얼굴이었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마치 모욕을 당한 사람들처럼 잔뜩

 붉어진 얼굴로 하늘을 노려보며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있었다.

 "일비, 부하들의 반응은 어떻더냐?"

 내실로 들어온 제갈수연이 다급히 일비를 찾아 부하들의 상태를 물었다.

 "다행히 우리 측 이야기가 먹힌 것 같습니다. 대부분 무당과 소림의 질시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좋다, 내일부터 은밀하게 소문을 흘려라. 소림의 각인을 들먹이면서 말이

다."

 "알겠습니다, 맹주님."

 "성공한 것 같소?"

 백무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무 서둘러 자리를 떴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조금만 더 그들을 설득했더라면 완전하게 돌아설 수 있

을 것 같았는데 제갈수연이 그만둔 것이다.

 그럼에도 제갈수연은 만족해하는 표정을 짓고 있다.

 "성공입니다. 아니, 성공하게 되어 있습니다."

 제갈수연이 노렸던 것은 군중심리에 의해 만들어진 여론이 아니었다. 스스

로가 판단하여 제천맹에 남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그럴싸한 연설로 군중을 끌어오기는 쉽지만 위기상황이 닥치면 그들은 전

부 흩어지게 된다. 그러나 하루나 이틀 동안 스스로 생각해서 내린 결정은

신념으로 굳어지고, 위기상황에서 더욱더 빛을 발하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정문도 열어두어야 합니다. 목숨이 아까운 자들은 언제든지 떠나라

고 말입니다.

 "그럼 이삼 일 후에 다시 한 번 더 모여야 하겠네?"

 "그렇지요. 그때는 선동을 해야 하고요."

 급하게 먹는 밥은 체한다는 금언을 확실하게 지키고 있었다. 큰일이라 하

여 엄청난 사상이나 하는 것들이 결부되는 건 아니다. 가장 평범하고 단순

하게 추진되는 일이 성공 확률이 높다는 것을 이미 체득하고 있었던 거였다

. 이럴 때일수록 느긋하게 처리해야 한다. 급하게 몰아치면 역효과만 날 뿐

이기에.

 '이젠 제대로 싸워볼 수 있겠군.'

 "참, 본가에서는 아직인가?"

 "그쪽은 이미 진을 설치하고 방어태세에 돌입했다는 전갈을 끝으로, 더 이

상 연락이 되지 않습니다."

 "큰일이군……."

 제갈수연이 걱정스런 얼굴로 백무천을 쳐다보았다. 맹 내에 있는 무사들이

야 문제될 게 없지만 제때에 철수를 시키지 못한 세가인들이 가장 걱정이었

다. 이미 포위되어 나올 수 없다고 하였던 것이었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진을 설치하여 방어 상태에 돌입했지만 상대는 남궁세가와 팽가다. 과거 같

은 오천맹의 일원인 그들이었기에 얼마의 잠재력이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온 세가를 진으로 에워싸 두었는데 무슨 문제가 있겠소.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백무천은 남궁세가에서 진식을 몸소 겪어보았기에 그 무서움을 알고 있었

다. 남궁세가의 진식마저도 자신의 진입을 막았는데, 하물며 진에 있어서

최고라는 제갈세가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는 생각이었다. 더구나 제갈세가

에 펼쳐져 있는 진은 천라만상대혼진(天羅萬狀大混陣)이다. 제갈세가에서

가장 무섭다는 두 가지 중의 하나인 것이다. 그런 진이 펼쳐져 있기에 안심

할 수 있었던 터였다. 제갈세가의 인물을 제외하곤 그 진을 뚫을 수 있는

인물이 없다는 것을 알기에.

 그러나.

 제갈수연이 무림인들보다 더 신뢰하고 있는 진식(陣式)은 정공법, 즉 정면

돌파를 하고자 하는 자들에게나 최고의 위력을 발휘할 뿐이라는 것을 망각

하고 있었다. 아울러 제갈세가의 건물을 새로 지을 때 인부들 중 청루에 있

던 풍신개의 아들들이 대거 참여했었고, 제갈세가의 도면이 완벽하게 유출

되어 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짐작하지 못했다.

 무공이 약했기에 떠나지 못했던 그들, 힘이 없었기에 동참하지 못했던 그

들이 동한과객을 비롯한 형님과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준비한 것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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