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1화 (82/84)

4장 광풍의 노래 Ⅰ

 백산을 비롯한 살아남은 광풍대원들이 잠들어 있던 사 년 동안 제천맹에

의해 다스려지고 있던 무림은 비교적 조용한 반면에, 영락제의 사망과 함께

 시작된 황실의 파란은 끊이질 않았다. 홍희제의 죽음과 함께 겪었던 주고

후의 반란과 그 이듬해 일어났던 우량하이의 침공 등, 계속되는 내우외환에

 시달리던 황실이 작금에 와서야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많은 전

쟁을 경험했던 선덕제의 통치력이 가장 주요했지만 그 이면에는 지친 몸을

이끌며 전장을 넘나들었던 금의위의 죽음이 있었다는 걸 누구도 부인하지

못했다.

 또한 외팔이 노인 한 명도.

 "어르신, 떠나겠습니까?"

 "이제는 우리의 일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팽무도와 강구두였다. 지난 사 년간을 석숭의 별원에 기거하며 그의 일을

도왔던 팽무도가 드디어 약속장소로 가기 위해 길을 나선 것이다.

 "쉽지 않을 것입니다."

 두 사람을 배웅하는 석숭의 얼굴에 우려의 표정이 역력했다. 자신들의 일

을 찾아가는 이들인데 즐거운 마음으로 보낼 수가 없었다. 상대가 제천맹이

기 때문이었다.

 지난 사 년간 제천맹의 성장은 세인들의 상상을 초월했다. 제천맹이 세워

져 있는 하남을 기준으로 중원전역에 지부를 만들었고 서서히 안정되어가고

 있는 시점이었다. 그런 제천맹에도 위기가 없었던 건 아니었다. 제천맹의

태상맹주로 있던 담운천이 역적으로 선포되었을 때였다. 결코 피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제천맹에 관련된 모든 무인들이 참수당할 위기에 처했던

 것이다.

 그런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제갈수연이 보여주었던 대응은 눈부셨다.

재빨리 담운천과 제천맹은 별개임을 선포하고 적극적으로 황실의 일을 도우

며 자신들의 무고를 주장했다. 더구나 주고후의 반란 때 그들의 역모를 가

장 먼저 발견하여 동창에 알려왔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오히려 황실의 전

폭적인 신뢰를 얻어냈던 것이다. 결국은 제갈수연이 원했던 대로 황실의 비

호까지 얻어냈다. 역대 어느 단체에서도 해내지 못했던 일을 그녀가 해낸

것이다. 비록 오십 년 전에 도왕 팽인덕이 무림왕이란 칭호를 하사받았지만

, 그건 한족 무인들을 달래기 위한 원나라 황실의 조치였을 뿐 진정한 관직

이라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제갈수연은 해낸 것이다. 언제나 천민으로 멸시받던 무림인들의 위

상이 그녀로 인하여 한 단계 더 높아졌다는 말이었다. 해서 그녀를 제천신

뇌라 부르는 무림인은 어디에도 없었다. 무림왕 또는 무림태후 제갈수연으

로 칭해지고 있었고, 황실에서마저도 그녀에게 무림왕이란 관직을 내려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는 실정이었다. 유래가 없던 관직도 아니고 오십

년 전 원나라 조정이 도왕 팽인덕에게 무림왕이란 관직을 내렸다는 전례를

들어 황제에게 주청을 드리고 있었다.

 "인원수 가지고 세력을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란 건 자네도 알지 않은가."

 제갈수연이 이룩해놓은 제천맹이 별것 아니라는 말이었다. 덩치야 역대 어

느 세력보다 커 보이지만 외형적으로 드러나 보이는 모습일 뿐이다. 그 세

력이 진정한 세력인지 아닌지는 위기상황에서 확연하게 드러난다. 해서 전

통이 없는 단체는 금방 멸망하곤 하는 것이다.

 전통이란 게 무엇이던가. 특별한 그 무엇이 아닌 소속감인 게다. 즉 자신

이 제천맹의 인물이고 제천맹의 발전이 곧 나의 발전이라는 연대감이 없다

면, 아무리 많은 인원이 모여 있다 하더라도 그들은 세력이 아니다. 사 년

이 아니라 적어도 사십 년의 세월이 흘러야 될 일인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지금의 제천맹은 사상누각일 뿐이란 게 팽무도의 생각

이었다.

 "우리야 어차피 선택의 여지가 없지만 자네가 더 걱정이네."

 석숭의 입지가 점점 약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안정기에 접어든 황실에

서 조부의 친구인 석숭의 존재는 선덕제에게 부담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었

다. 더구나 두 사람의 가장 큰 의견 차이는 제천맹에 대한 처우였다.

 그동안 제천맹에서 보여주었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제갈수연에게 무림왕

의 관직을 내리려 하였으나, 석숭의 결사적인 반대에 부딪쳐 있었다. 유량

의 술수였다. 석숭이 제천맹에 안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

 유량이었으므로 금의위 영반의 자리를 노리고 압박을 가하고 있는 거였다.

 평민으로 있을 때의 제갈수연과 무림왕으로 책봉되고 나서의 제갈수연의

지위는 천양지차다. 황실에서야 아무렇게나 던져주는 관직이지만, 그 관직

을 받았다 함은 곧 명의 관리가 됨을 의미한다.

 광풍대원들의 복수행에 크나큰 지장을 초래하게 될 것임은 자명한 일이 될

 터이고, 어쩌면 복수행 자체를 접어야 할 사태가 올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런 상황을 막고자 제갈수연의 무림왕 책봉을 반대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저도 그만둘 때가 되었지요."

 벌써 세 사람의 황제를 모시고 있다. 다른 이들이야 금의위 영반으로 권력

의 핵심부에 있다며 부러워할지 모르지만, 친구인 영락제와 광풍대원들만

아니었던들 진작 그만두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나저나 어떤 방법으로 깨트릴 겁니까."

 전부가 살아온다 할지라도 오십 명 내외인데, 과거 천무맹 이상의 전력을

가진 그들을 무슨 수로 없애려 하는지 걱정이 앞섰다. 물론 감숙성의 천마

맹 자리에 철목승과 양대 세가가 있지만, 제천맹에 비해선 조족지혈일 뿐이

다. 그들에 대한 제갈수연의 대응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더욱 강하고 큰 제

천맹을 만들기 위해 강호공적인 그들을 방치하면서 간간이 토벌대만 보내고

 있었다.

 제갈수연의 무서움이었다. 강호무림인의 머릿속에 끊임없이 적의 존재를

인식시켜주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제천맹을 성장시키는 원동력이

 바로 그들이었다.

 "자네, 광풍대원들의 성정을 잊었나?"

작전이니 뭐니 필요 없이 무조건 깨부순다는 말이었다. 몇 명이 살아남았는

가 하는 것은 중요치 않다. 사 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 만나기로 하였고, 드

디어 그 세월을 견디었다. 이제는 시작만이 남았을 뿐인 게다.

 "제천맹의 전통을 확인해볼 참이네."

 "어르신!"

 석숭의 얼굴이 흠칫 굳어졌다. 강호무림에 극단적인 공포를 심어주려 하고

 있다. 일반적인 복수의 개념이 아니라 도살을 원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것

도 남기지 않는, 백산이 많이 쓰던 완전한 박멸을.

 "제가 도울 일이 있는지 찾아보겠습니다."

 "고맙네, 자네도 몸조심하게. 가자, 구두야."

 "네, 어르신. 석대인,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석숭에게 작별을 고하고 있는 강구두의 기도 또한 엄청나게 변해 있었다.

팽가 가신 두 사람이 물려준 내공과 선대의 무공인 낙일혈마공을 전부 그의

 것으로 소화했다.

 지난 사 년간 석숭의 집 지하에서 거의 나오지 않았던 그였다. 조금이라도

 더 완전하게 익히기 위해 수백 수천 번을 펼쳤고, 조그마한 허점이라도 발

견되면 밤잠을 설쳐가며 보완해나갔다. 이제는 낙일혈마공이나 낙일마검법

에서 더 이상 얻을 게 없었다. 새로운 무공을 창안하기 전까지는…….

 팽무도와 강구두 두 사람이 사 년 전 떠났던 팽가로 가기 위해 석숭의 집

을 나섰다. 동짓달 어느 한 날이었다.

 "나도 가볼까. 그 불알 없는 녀석에게."

 두 사람의 배웅을 마친 석숭이 유량의 집을 향해 몸을 날렸다. 마지막 흥

정을 하기 위해서였다.

 "어서 오십시오, 석영반. 어인 일로 소생의 집을 다 방문하셨습니까."

 유난스레 호들갑을 떨며 석숭을 맞이하고 있으나 늘 그렇듯 반가워하는 건

 입뿐이고 차가운 눈동자는 석숭을 예리하게 살폈다.

 "나하고 흥정 한 번 하지 않겠나?"

 "무슨 말씀이시오. 그녀는 무림왕으로 책봉될 것이외다."

 "그럼 이건 어떤가."

 "진정이시옵니까?"

 "그러하네. 수락하게 되면 이제부터 자네의 시대가 열리게 될 걸세."

 "그것 외에 다른 조건은."

 "한 가지 더 있네. 물론 대가를 지불할 터이고."

 "좋습니다. 제가 황제폐하께 아뢰도록 하겠습니다."

 "고맙네, 제독."

 "아닙니다. 퇴임을 앙축하옵니다, 합하!"

 떠나는 석숭을 향해 유량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     *     *

 산서성과 하북성의 경계를 이루며 남북으로 달리는 산인 태행산맥. 그 산

맥의 중간 지점에 우뚝 솟은 백석산을 등진 광활한 분지 위에, 불에 탄 흔

적이 곳곳에 남아 있는 건물 수십 채가 차가운 겨울바람을 맞고 서 있다.

아직 남아 있는 검게 그을린 기둥들은 이미 죽어버린 가문을 세우기 위해

힘든 노력을 하고 있는 감숙성의 팽가인들 모습처럼, 초라하게만 보였다.

 하북팽가.

 황도가 있는 하북성에 자리한 전통적인 무가로 사 년 전 강호공적으로 지

목되었던 가문, 그 가문을 치기 위해 강호무림인들이 몰려갔을 때는 이미

불타고 있는 팽가만 있었을 뿐 처단해야 할 공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 잊혀진 가문에 신년의 시작과 함께 사 인의 방문자가 찾아들었다. 두

번째로 뇌룡현을 떠난 백산 일행이었다.

 "어디로 자릴 잡을까요."

 소살우가 등에 매고 있던 커다란 술통을 내려놓으며 세 사람을 쳐다보았다

. 황량하게 변해버린 팽가는 어느 한 곳 바람 피할 곳도 없었다.

 "저기 가운데."

 아직 건물의 잔해가 남아 있는 곳 중 가장 가운데로 자리를 정한 일행은

타다 만 나뭇조각들을 주워 모아, 모닥불을 피워놓고 조용히 앉아 술잔을

돌리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하루 동안 이곳에서 기다려야 한다. 누가 살아서 올지 알 수 없

지만 두 번째 해가 떠오르면 죽음의 항해를 시작해야 한다. 사 년 전에 진

빚을 갚기 위해.

 어스름한 새벽이 지나고 일출과 함께 두 명의 흑의인이 불빛이 있는 곳으

로 다가왔다.

 "어서 와라, 술 한잔 하게."

 "씨팔! ……깨어났소?"

 "멋있어졌다."

 소살우가 두 사람을 향해 술을 권했다. 섯다와 모사였다. 이사와 함께 운

남으로 들어갔는데 두 사람만 돌아왔다. 그것도 온몸이 새카맣게 변해서.

과거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사는 어찌 되었냐고 묻지도 않는다. 둘

만 돌아왔다는 건, 이사 또한 다른 형제들처럼 이곳에 와 있는 것이리라.

육신은 버리고 혼백만 와서 술을 먹고 있을 터였다.

 두 사람에게 술을 한 잔씩 따라준 소살우가 이사의 몫으로 한 잔의 술을

더 따라 한편에 놓았다. 그곳에는 이미 따라둔 대여섯 개의 술잔이 있었다.

 먼저 간 광풍대원과 낙양 청루에서 왔던 동한과객 일행의 술잔이었다.

 "늦어서 미안하오. 올 때 독령곡에 들렀다 오느라고."

 술을 한 잔 들이켠 섯다와 모사가 주머니 속에서 무엇을 꺼내더니 으적으

적 씹어 먹는다. 독령곡에 있던 독물들이 이곳 하북성까지 외출을 나온 모

양이었다.

 "뭘 그리 쳐다보오. 하나 줘?"

 "강해졌구나. 독천가의 무공을 익혔더냐?"

 독천비, 백산의 몸에 있던 독천비에서 강렬한 반응이 왔다. 섯다와 모사가

 익힌 무공이 과거 천가(天家)의 무공이란 뜻이리라. 독공 중에 가장 강한

무공.

 "귀신이네. 독천가는 또 어떻게 알았소."

 "살다보니 저절로 알게 되더라."

 더 이상은 묻지 않았다. 지난 사 년의 세월을 어떻게 보냈는지. 일단 살아

서 돌아왔고 일할 사람이 있으니 그걸로 되었다.

 "그려, 크게."

 "좋소. 안 그래도 손이 근질근질했는데."

 사 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소살우의 말을 바로 알아들었는지, 앉은 자세

그대로 섯다가 손을 휘저었다. 모사의 손길에 따라 전부 열한 개의 칸이 만

들어졌다.

 투자판.

 뇌룡현을 떠난 후 가장 골몰했던 두 가지 중에 하나. 무공은 이미 완성을

보았고, 남은 것은 투자밖에 없다. 목숨을 건 탈출의 순간에도 끊임없이 했

었던 투자, 그때는 죽음을 선택하기 위한 투자였지만 이제는 죽음을 내리기

 위한 투자판이 되었다.

 그 위에다 석두가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광살검이다. 풍기가 지어주었고."

 전부 아홉 개로 되어 있는 각각의 검에 먼저 간 광살조의 이름이 적혀 있

다. 그리고 마지막 석두의 손이 되고 있는 부분에 있는 여풍기란 이름. 그

광살검이 섯다가 만들어놓은 네모 칸을 채워나가고 있었다.

 "칠 번은 천신가로 써라."

 열 개의 칸을 채웠을 때 백산이 나지막이 말했다. 이곳에 써지지 않을 세

곳은 감숙성에 있는 팽가와 남궁세가의 몫인 것이다. 그들에게도 기다림은

무섭고 힘들었을 터였기에.

 "제천맹은 맨 마지막이다. 제갈세가와 같이."

 "형님, 이거."

 "뭐냐?"

 모사가 백산에게 둥근 물체 두 개를 내밀었다. 독기운에 의해 검게 변색되

어 있었지만 사 년 전 광견조원들이 들고 있던 광천뢰 중 남은 두 개였다.

자폭용으로 자신들에게 배정되어 있던 것.

 "외부에만 독이 있으니 아직은 쓸 만할 거요."

 "고맙다."

 광천뢰를 받아든 백산이 가볍게 내력을 운용하자, 무서운 속도로 독이 빨

려들었다. 곧이어 독기로 인해 번쩍거리던 광천뢰가 사 년 전 가지고 놀던

원래의 색을 되찾았다. 오직 광천뢰만 사 년 전 그대로일 뿐이었다.

 "저 새끼들 독도 그렇게 뽑아내면 안 되오?"

 "글쎄? 나중에 한번 해보지, 뭐."

 "안 되오. 피까지 전부 독이라서. 더구나 불완전하거든."

 "씨팔놈들, 좆같은 무공도 익혔다. 밥이나 먹자."

 소살우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전부가 마찬가지인 게다.

백산의 얼굴이 원래로 돌아올 수도, 석두의 팔이 다시 나올 수도, 일휘의

다리가 다시 생겨날 수도 없는 것처럼 녀석들도 그렇게 되어버렸다. 강해지

기 위한 선택들일 뿐이었다.

 "숯 검둥이, 너희들은 안 먹어도 되지?"

 주섬주섬 몇 가지 음식을 꺼내더니 석두와 일휘에게 주고 백산에게는 멀건

 죽을 내밀었다.

 "신년이니까 특별식이오."

 "나만 왜 다르냐."

 "이도 없는 노인네가 뭘 씹어 먹을게요. 그래서 토끼풀을 갈아놓은 거요."

 "풋!"

 소살우의 말에 석두와 일휘가 먹던 음식을 쏟아냈다. 토끼풀이란 말 때문

이었다. 저주가 풀렸음에도 백산의 눈은 본래의 색을 회복하지 못하고 여전

히 붉은 상태였던 터였다. 또한 이마저 없으니 늙은 토끼라는 말이 아닌가.

 "내공으로 부셔 먹으면 되지 뭐가 걱정이냐, 임마."

 "내공은 죽일 때만 쓰쇼. 이제 낭비할 내공은 없소?"

 이제는 생활 속의 무공이니 하는 건 없어졌다. 오직 적을 죽일 때만, 복수

를 할 때만 무공을 사용하라는 말이었다.

 "맛있다야."

 한 입 둘러 마시던 백산이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토끼풀이라 했던 그것이

 만두를 갈아 만든 죽이었다. 천영을 처음 만났을 때 먹었던 만두, 마지막

으로 그녀를 보냈을 때 먹었던 바로 그 만두였다.

 "온다, 다섯!"

동시에 기척을 느낀 일행의 얼굴이 환해졌다. 한꺼번에 다섯 명이나 오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죽지 않고 살아난 사람들. 북쪽에서는 팽무도와 강구두

가, 남쪽에서는 남궁세우와 오구, 그리고 철목승이 나타났다. 앉아 있던 일

행이 벌떡 일어나며 남궁세우와 팽무도를 향해 큰절을 올렸다.

 "왔느냐!"

 "저주를 풀었소, 사부."

 "산아……."

 팽무도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백산을 쳐다보았다. 저주를 풀었다는 백산

의 말. 마지막 남은 소운마저 떠났다는 뜻인 게다. 얼굴조차 알아볼 수 없

게 망가져버렸고, 사랑했던 모든 사람들이 떠나버렸다.

 그 모든 일이 자신의 잘못이지 싶었다. 광혈지옥비라는 마물을 주는 게 아

니었는데.

 "사부, 누구의 잘못도 아니오. 그냥, 그냥 운명이라 생각하기로 했소."

 '이놈아. 그렇게 생각한다는 놈이, 그냥 운명으로 치부하고 만다는 녀석이

 눈은 왜 그러고 있느냐.'

 팽무도가 내심으로 오열했다. 분노를 삭이고 있는 게다. 터져버릴 것 같은

 분노 때문에 눈만은 광혈지안의 상태로 있는 게다. 그런 놈이 미소를 짓고

 있다. 차라리 왜 그런 걸 주었냐고, 왜 그런 빌어먹을 운명을 주었냐고 울

부짖기라도 하면 더 편할 텐데 오히려 살아 있어주어서 고맙다는 표정이다.

 "장인어른, 절 받으십시오."

 따님을 주었는데 감사하단 말도 하지 못했다. 세상 누구보다 행복하게 해

주고 싶었는데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죄스러울 뿐이었다. 다시 살아온 모

진 목숨이, 그녀들과 같이 떠나지 못해서 더욱 미안했다.

 "그래……. 잘 왔다."

 그 말밖에는 무슨 말을 할 것인가.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했던 딸을 지켜

주지 못한 녀석인데, 추렴이를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하였던 그 약속을 깨트

린 녀석인데, 나무랄 수도 원망할 수도 없다. 자신보다 녀석이 더 아파하고

 더 힘들어하기에. 온몸을 잠식해오는 분노를 삭이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는

 모습이, 죽을힘을 다해 참고 있는 모습이 가슴속 깊이 느껴지기에. 어깨를

 두드리는 것 외에는 해줄 말이 없다. 백산의 몸에서 소용돌이치고 있는 혼

돈의 기운, 그 기운이 분노하고 있음이 느껴졌다. 추렴이는 자신의 딸이기

전에 녀석의 부인이었다.

 재회의 인사가 끝나고 도합 열한 명이 된 일행이 다시 자리를 잡았다. 동

쪽에서 솟구쳐 올랐던 태양이 하늘 가운데 걸려 있다, 다시 서산으로 넘어

갔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몰아치는 밤이 될 때까지 누구 한 명 말이 없다.

소살우가 던져주는 음식을 씹으며 묵묵히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다시 새벽이 왔지만 더 이상 돌아오는 광풍대원은 없었다. 사 년 전 탈출

때 살아남은 사람은 이곳에 있는 일행이 전부였다. 백산, 일휘, 석두, 소살

우, 모사, 섯다 이 여섯 명의 광풍대원과 팽무도, 남궁세우, 강구두, 오구,

 그리고 철목승.

 철목승을 제외한 열 명만이 사 년 전의 약속을 지킨 것이다.

 "던져라!"

 두 번째 태양이 떠오르자 백산의 입에서 조용한 울림이 있었다. 이제는 가

야 할 시간이 되었다. 지금 와 있는 사람들을 제외한 광풍대원 전원과 한수

 형님은 못 올 곳으로 간 것이다.

 "강소성이오."

 쳐야 될 적을 선택하는 투자였다. 섯다의 주머니 속에 있는 주사위 두 개.

 그것들 역시 몸에서 흘러나온 독기 때문에 검게 변해 있었으나 숫자 정도

는 확인할 수 있었고 강소성으로 선택되었다. 이곳 하북성 다음의 장소로,

두 번째 재물인 것이다.

 "어떻게 하면 됩니까."

 이번에 백산의 시선이 가 있는 사람은 남궁세우였다. 사 년 전에 만들었던

 대통진에 대해 묻고 있음이다. 비록 그때에 비해 인원수는 줄었지만 방법

을 찾았을 거라 확신하는 눈빛이었다.

 "공격까지도 가능하다."

 남궁세우의 얼굴에 희미한 살소가 맺혔다. 지난 사 년간 오직 진에만 매달

렸던 그였다. 과거에는 이동수단으로서의 역할밖에 하지 못했던 초라한 진

이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진을 유지한 상태에서 공격까지 할 수 있게 발전

시켰다.

 더구나 이곳에 있는 모두는 거의 절대자의 반열에 올라 있다. 천하제일의

무적진(無敵陣)이 될 터였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가공할 살진(殺陣)이……

.

 "그럼 갑시다."

 첫 번째 목표물은 하북성 남쪽 성안에 있는 하북지부였다. 남궁세우의 지

시에 따라 자리를 잡은 일행들의 모습이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며 빈 공간만

이 남았다.

 "제천맹 하북지부의 지부장은 적홍이란 자로서, 북경으로 달리던 마차를

추격했던 놈이다. 지부에 있는 무인의 수는 거의 오백 명 정도 된다."

 이동 중에 있는 진(陣) 속에서 팽무도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동안 석숭

의 일을 도우면서 그가 한 일이었다. 제천맹에 대한 모든 것을 전부 조사해

두었다. 오늘을 위해 준비한 사항이었다. 오십 년 전처럼 숨지 않기 위해,

그때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모든 준비를 다했다.

 이제는 실행만 남은 것이다. 진득한 복수행만, 미미하게 떨리는 듯한 팽무

도의 어투에 유난히 차가운 살기가 맺혀 있었다.

 "저곳인가?"

 팽가를 떠난 지 이틀 만에 하북지부가 있는 성안에 도착했다. 서두르지 않

기로 했다. 할 수 있는 한 가장 잔인하게, 가능한 한 가장 공포스럽게 강호

를 짓밟아버리기로 하였다. 팽무도의 생각이었고 백산의 생각이었다. 아니,

 전 광풍대원들의 생각인 게다.

 아침햇살 따라 길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수십 채의 건물을 쳐다보던

백산이 스산한 살기를 쏟아냈다.

 "드디어 시작점에 섰다."

 마불성승이 자비를 베풀라고 했었다. 세상에 인정을 두라고 하였다.

 지금의 경우를 미리 예견하고 했던 말인지, 아니면 천살성(天殺星)의 기운

을 감지해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분의 말대로 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철

저하게 부숴버리기로 하였다. 가지고 있는 모든 힘을 다 짜내서 짓이겨줄

것이다. 열 배, 스무 배 갚아줄 것이다.

 '나를 너무 잔인하다 욕하지 마시오.'

 양손 새끼손가락에 각각 끼고 있던 애명환과 목걸이로 만들어 차고 있던

소운의 애명환을 전부 왼손으로 옮겨 끼웠다. 세 개의 애명환이 맞붙자 떠

나간 그녀들의 흐느낌처럼 애절한 울음소리가 퍼지기 시작했다.

 '오라버니, 반지는 있잖아! 우리들 약지에 끼워진 반지가 오라버니의 새끼

손가락에 꼭 맞으면 그게 천생연분이래.'

 '그런 게 어디 있어.'

 '그런 게 있으니까 손가락 내놔! 말 안 들을 거야? 거봐, 맞잖아!'

 '남자도 없었으면서 그런 건 어떻게 알았어?'

 '원래 거지는 그런 쪽에 있어서 확실하지. 밥만 구걸한다고 해서 거지가

아니라고.'

 지그시 눈을 감은 채, 구슬피 울어대는 애명환 음률에 맞춰 들려오는 소운

과의 대화를 생각했다. 행복했던 시절, 더 이상 슬픔이 없을 거라 여겼던

시절이었다.

 새끼손가락에 끼워진 세 개의 애명환을 가만히 쓰다듬던 백산이 번쩍 눈을

 떴다. 그와 동시에 지금껏 붉은 기운만 간직하고 있던 눈에서 시뻘건 혈광

이 쏟아지고, 열두 자루의 천비들이 일제히 튀어나왔다.

 그리고.

 백산의 눈빛과 똑같이 붉은색으로 빛나는 천비비, 소운의 피마저 전부 흡

수해버렸던 천비비가 요요로운 혈광을 뿌려대며 천천히 일렁대고 있었다.

 그런 백산의 모습을 응시하던 일휘가 자신의 오른쪽 다리를 가리고 있던

바지가랑이를 걷어 올려 허벅지 부분에 질끈 동여맸다. 이미 붉게 변해 있

는 십자형 날을 가진 철각(鐵脚)과, 사방 전체에 날을 세운 발 모양의 의족

에선 진득한 살기가 묻어나왔다.

 부웅!

 자신의 도를 힘차게 휘둘러본 일휘가 백산의 뒤를 따라 천천히 뒤뚱거리는

 걸음을 옮겼다.

 "구혼도(九魂刀)다."

 "좋은 이름이오, 좋은 이름……. 가자."

 일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소살우가 섯다와 모사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그들이 움직이는 방향은 백산과 석두, 그리고 일휘가 가고 있는 하

북지부가 아니었다. 혹시라도 도망치는 자가 생길까봐 그들을 잡으려는 것

이었다.

 오백의 적을 앞에 두고 있음에도 아무런 걱정이 없는 듯했다. 오히려 그들

을 피해 도망자가 생길까봐 그걸 더 걱정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결코 죽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결코 패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절뚝거리는 다리병신

한 명과, 팔 자체가 검집으로 변해 있는 팔 병신, 그리고 얼굴 자체가 뭉개

져버린 파면인 한 명. 두 번째로 뇌룡현을 떠났던 세 사람이 새해 벽두에

제천맹 하북지부를 방문했다.

 "웬 놈들……. 으악!"

 콰앙!

 경계를 서고 있던 무사 두 명의 목이 떨어져나감과 동시에, 제천맹 하북지

부라 적힌 현판과 대문짝이 터져나갔다.

 "저승사자!"

 "적이닷!"

 살기를 머금은 묵직한 음성과 함께 들어선 괴인들을 발견한 하북지부 무사

의 외침소리와 함께 혈전의 서막이 올랐다. 훗날 세인들에 의해 귀마겁(鬼

魔劫)이란 불리게 될 혈겁이.

 서두름이 없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정면은 백산이, 좌측은 석두가, 그리

고 우측으로는 일휘가 나아가며 달려드는 무인들을 도륙하기 시작했다. 방

문에 대한 아무런 말도 없이, 얼굴 표정조차 바꾸지 않고 다가오는 적을 향

해 묵묵히 자신들의 무기만 휘둘러댔다.

 "이야압!"

 분노한 고함을 토해낸 일휘가 적을 향해 몸을 날렸다. 다가오는 적만으로

는 성에 차지 않았다. 좀더 빨리, 좀더 많이 피를 묻히고 싶었다. 붉게 변

한 일휘의 구혼도가 춤을 추고 오른발의 철각이 허공을 갈랐다. 추몽의 혼

백이 떠돌고 한열의 눈빛이 주시하고 있다. 허리를 기점으로 회전하는 구혼

도 끝에 대여섯의 생명이 잘리고, 회전하는 몸을 따라 허공을 찢는 철각으

로 인해 몸통을 잃어버린 머리만 남는다.

 슈아악!

 과거에 바람을 가르던 다리는 어디 가고, 날 선 철각만 남았는지…. 이어

지는 회선각에 여지없이 상대의 목이 잘린다.

 이 피 냄새를 맡아보기 위해 지난 사 년을 기다렸다. 이 뜨거운 피맛을 보

기 위해 사 년간을 참았다.

 붉은 살기를 머금은 뱀처럼 석두의 광살검이 핏빛 궤적을 남긴다. 위에서

아래로 잘라내고 아래에서 횡으로 베어낸다. 형제들의 혼이 머물고 있는 아

홉 마디의 광살검이 피를 마신다. 꺾여진 검 끝에 상대의 목이 걸려들고,

튕겨진 검면에 상대의 목이 잘린다. 땅을 치면 땅이 갈라지고, 하늘을 찌르

면 하늘이 죽어간다. 여풍기가 지었던 구천광살무, 석두가 휘두르는 검이

아니었다. 먼저 간 광살조원들이 구천에서 추는 검무(劍舞)였다. 허공으로

솟아오른 몸에서 붉은 광망이 쏟아지고, 그 광망의 끝에 죽음이 걸렸다.

 나직한 노랫소리가 흘렀다.

 한 구절의 노랫소리가 흐를 때마다 열두 명의 무인들이 사라져간다. 몸 주

위에서 휘날리던 비도가 사방으로 터져나가면, 그 끝에는 새로운 죽음이 탄

생했다.

 몸에선 더 이상 혈광이 나오지 않는다. 오직 새빨간 두 눈과, 그 눈과 같

은 색으로 빛나는 열두 자루의 비도. 이 장 거리를 전진해 있는 놈도 있고,

 일 장 거리에 나가 있는 놈도 있다. 열두 자루의 비도가 전부 살아 있었다

. 화천비가 불을 뿜어내면 건물이 불타고, 독천비가 독을 뿌리면 시체가 녹

는다.

 천영이 죽었고, 추렴이가 죽었다. 소운이 죽었고, 소령이 죽었다.

 미쳐야 하는데, 정신을 잃어야 하는데, 피를 보면 볼수록 가슴은 더욱 식

어간다. 그녀들의 마지막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붉은 화마에 몸이 찢

기면서도 웃어주었다. 아혈이 파괴되었는데도 말을 해주었다. 사랑한다고,

다시 태어난다 해도 당신을 사랑할 거라고 말해주었다. 억겁의 세월이 지나

, 축생으로 태어나도 알아볼 수 있다 하였다.

 말을 할 수가 없다. 목이 메고 가슴이 답답해진다.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

는데 자신만 살아남았다.

 "크아악!"

 좀더 거세게 타올라라, 분노여! 좀더 힘차게 솟아나라, 한이여! 애명환아,

 저들의 죽음을 보아다오, 이 무능한 남편이 추는 춤을 보아다오!

 백산의 입에서 분노에 찬 괴성이 흘러나오며 그의 몸이 점점 빨라지기 시

작했다. 두 손과 두 다리의 움직임이 눈에 잡히지도 않았다. 극도로 펼쳐진

 무상신법과 광혈지안에 의해 생성된 하늘의 힘이 열두 자루의 비도를 통해

 사방으로 뿌려졌다.

 잘라도 잘라도 분노가 사그라지지 않고, 베어도 베어도 가슴속 응어리가

풀리지 않는다.

 "저럴 수가. 어디서 저런 자들이……."

 타오르는 화마를 뒤로하고 대 연무장으로 들어선 삼 인의 괴인을 쳐다보며

 넋을 잃어버린 인물, 제천맹 하북지부의 부지부장인 호접검 군자명이었다.

 신년 인사차 맹에 가 있는 지부장을 대신하여 지부를 관리하고 있는데 날

벼락을 맞은 것이다.

 도저히 인간으로 볼 수가 없었다. 양끝에 날이 달려 있는 기다란 장도와

칼날로 만든 다리, 거의 일 장에 달하는 구절편 같은 이상한 검을 손 대신

달고 있는 자, 그리고 붉은 눈만 보이는 괴인. 누구 하나 정상적인 사람은

없었지만 그들의 무공 또한 인간의 무공이 아니었다.

 결코 물러섬이 없었다. 아니, 아예 피하질 않는다. 오직 앞으로 전진하며

하북지부의 무사들을 도륙하고 있다.

 "물러서라!"

 부하들을 향해 고함을 내지른 군자명이 앞으로 나섰다. 어디서 나타난 놈

들인지 정체를 파악하고자 함이었다.

 지금은 제천맹의 세상이다. 제천맹에 도전해올 세력이라 해봐야 감숙성에

있는 공적들이 전부일 텐데, 상부에선 어떠한 지시사항도 없었다. 그랬기에

 지부장이 신년하례를 위해 하남으로 간 것이 아니겠는가.

 "네놈들은……. 허억!"

 삼 인의 광인을 향해 무엇인가 물으려던 군자명의 얼굴이 해쓱하게 변했다

. 하북지부의 부지부장으로 있을 정도면 그 또한 무공의 고수라 할 수 있었

다. 그런 그가 움직임도 보지 못했는데 붉은 눈을 한 자가 바로 앞에 다가

와 있었던 것이다.

 형언할 수 없는 공포에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인간이라면 절대 이런 몸놀림

을 보일 수 없다. 그의 머릿속에 떠오른 마지막 생각이었다.

 "사신(死神)!"

 "꺼어억!"

 순식간에 군자명의 목을 틀어쥔 백산이 그대로 꺾어버렸다. 그러나 백산만

 움직인 게 아니었다. 그가 움직임과 동시에 석두와 일휘도 물러나 있던 무

인들 사이로 뛰어들며 다시 칼춤을 추었다.

 "우우! 사신이다! 지옥의 사신이다!"

 절대적인 공포에 절어버린 하북지부 무인들이 주춤주춤 물러나더니 급기야

 몸을 날려 사방으로 도망을 치기 시작했다. 들고 있는 칼이라도 휘두를 수

 있다면 대항이라도 해볼 터인데 그마저도 불가능했다. 방어하기 위해 들어

올렸던 검조차 전부 잘려버렸다. 오직 도망치는 길만이 조금이라도 오래 살

 수 있는 길이었다. 눈앞에 있는 자들만 피하면 살아날 수 있으리라 여겼다

.

 그러나.

 담을 넘어 사신(死神)들로부터 멀어졌다 하여 살아난 게 아니었다. 안도의

 숨을 내쉬며 화마가 솟구치는 하북지부를 쳐다보는 순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목이 잘리고 몸이 녹았다.

 지옥의 사신은 밖에도 있었다. 소살우, 섯다, 모사, 강구두, 오구 이 다섯

 사람이 사방을 지키며 담을 넘어 도망치는 자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

 "단 한 놈도 살려주지 않는다, 단 한 놈도……."

 소살우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어렸다. 지난 사 년의 세월 동안 잃어버렸던

 살기 가득한 미소. 기다리고 기다리던 순간인 것이다. 이날을 기다리며 칼

을 갈아오지 않았던가. 오직 이날을 기다리며…….

 안쪽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비명소리가 아니다. 가슴속에 쌓여 있던 분노란

 독소를 조금씩 걷어가는 해독제일 뿐이다.

 어느덧 살육이 마무리되고 있는지 처절하게 울리던 비명소리가 잦아드는

듯하더니 한순간 모든 소음이 그쳤다. 오직 넘실대는 화마만이 더욱 거세게

 솟구쳐 올랐다.

 죽음의 불길을 뒤로하고 백산과 일휘, 석두가 들어갔던 곳을 통해 다시 밖

으로 나왔다. 아직도 못다 푼 분노의 잔재인지, 붉은 핏물만 그들의 뒤쪽으

로 떨어져 내렸다.

 "말려라!"

 피를 말려야 한다. 적들을 전부 없앨 때까지는 그들의 피를 털어내지도,

몸을 씻을 일도 없을 것이다. 얼마의 시간이 걸리더라도 전부 끝장낼 터이

고, 그 다음에 손을 씻을 것이다.

 "갑시다."

 대통진을 구축한 일행이 공간 속으로 사라졌다.

 두 번째 행선지인 강소성(江蘇省). 안휘성 동쪽의 황해(黃海)와 접해 있는

 곳이다.

 타다닥! 툭! 툭!

 살아 있는 생명체가 남지 않은 제천맹 하북지부. 하늘을 향해 솟구쳐 오르

는 불길이 나머지 건물마저 태워나가며 모든 것들이 재로 스러지고 있었다.

 귀(歸).

 혈겁의 혈장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것이다.

 잘린 시체들로 조합한 글자, '돌아왔다'였다.

 신년(新年) 벽두(劈頭)에 터져나온 제천맹 하북지부의 멸망소식은 무서운

속도로 중원전역을 휩쓸었다. 칼을 든 무인들뿐만 아니라, 황실의 녹을 먹

고사는 관인들조차도 작금의 현실을 믿을 수 없다는 듯 경악스런 표정을 지

었다.

 가히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천하에 제천맹을 상대로 검을 뽑은 무모

한 자들이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음이다.

 황실에서조차 인정한 제천맹이었다. 신년에는 제천맹주인 제갈수연의 무림

왕 책봉을 기다리고 있었던 무림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하북지부의 참상을 목격한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소문이 아닌 사실임이

밝혀지자, 모든 무인들의 관심은 흉수의 정체에 모아졌다. 또한 시체들을

이용해서 써놓았다는 글자인 귀(歸). 죽은 시체를 이용하여 글을 써둘 정도

로 잔인한 짓을 하였다면 원한이 골수에 맺혀 있다는 의미인 것이다.

 누구인가. 떠났던 누군가가 다시 돌아왔다는 의미가 분명할진대, 누가 돌

아왔다는 말인가. 한순간 생각에 빠져 있던 강호인들이 온몸을 부르르 떨며

 두려운 표정을 지었다.

 혈광마겁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사 년 전 한날에 일어났던 혈겁. 그들의

 손에 죽어간 무인들의 수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라 하였다. 투항하라는 제

천맹의 권고를 무시하고 사상 유례 없는 혈겁을 저지른 자들, 지금까지도

척결대상 일 순위가 바로 그들이었다. 지금 제천맹을 구성하고 있는 대부분

의 수뇌들이 그때부터 두각을 나타낸 자들이 아니던가. 제천맹의 하북지부

멸망은 강호무림에 다시 한 번 재앙이 들이닥쳤음을 알리는 신호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그런 강호무림의 우려 섞인 시선과는 달리, 정작 피해 당사자인 제천맹의

수뇌부는 약간 놀란 표정만 지었을 뿐 크게 호들갑을 떨거나 당황하지 않았

다.

*     *     *

 "뭐 좀 알아낸 것 있나?"

 맹주인 제갈수연의 표정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별로 긴장된 표정 없이

담담한 얼굴로 밀천각주인 일비의 보고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른바 가진 자의 여유였다. 이미 천하는 그녀의 것이기에 조그마한 사건

으로 치부해버리는 것이었다. 절대적이라 할 수 있는 제천맹의 힘을 믿는

터였다. 강호무림에 거미줄처럼 뻗쳐 있는 제천맹의 이목을 속이고 하북지

부를 멸망시켰다고 하지만, 기습에 의한 성공일 뿐 더 이상의 의미를 두지

않고 있었다. 한 번의 시도 이상은 없을 것이라는 게 그녀의 생각이었다.

 "아직은 아무것도 드러난 사실이 없습니다. 신원은 물론이고, 인원수조차

도."

 일비가 곤혹스런 표정으로 보고를 했다. 소문이 난 지 상당기간 지났고,

그동안 흉수들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도무지 흔적이

없었다. 하북지부를 멸망시킬 정도의 세력이면 벌써 제천맹의 정보망에 걸

려들었어야 한다. 그러나 강호상 어디에도 수상한 자들을 보았다는 보고가

없었다. 한 번의 살겁을 끝으로 사라져버린 거였다.

 "그래?"

 일비의 보고를 접한 후에야 제갈수연의 표정이 약간 변했다. 드러나지 않

는 적이라면 사태가 심각해진다. 제천맹은 밝은 태양 아래 있는 반면에 적

은 암중에 있다. 더구나 지부 한 곳을 멸망시킬 정도의 무력이라면 보통 문

제가 아닌 것이다.

 그런 제갈수연의 예상은 적중했다. 일비의 보고를 받고 있는 그 순간, 밀

천각으로부터 새로운 소식이 올라왔다.

 강소지부의 멸망소식이었다.

 그곳 역시 하북지부와 같은 상황이었다고 한다. 생존자는 아무도 없었고,

모든 건물이 태워졌다는 보고였다.

 "어떻게 된 거냐? 일비!"

 밀천각에서는 어떠한 흔적도 발견하지 못했다는 보고를 방금 접했는데 강

소지부의 멸망소식이라니. 어이없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무리 은밀하게

 움직인다 한들 제천맹의 이목에 걸리지 않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결론은 한 가지밖에 없다.

 "밀천각이 많이 해이해진 모양이구나."

 "기다려주십시오, 맹주님. 반드시 알아내겠습니다."

 얼굴이 해쓱하게 변한 일비가 황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일 처리에 있어,

가신이라 하여 용서하는 법이 없는 사람이 제갈수연이었다. 신분 여하에 상

관없이 잘한 일에 대해선 포상을 했고, 잘못한 일에 대해선 엄중하게 문책

을 가했다. 그녀의 그런 정책이 사 년이란 짧은 시간 안에 제천맹을 이만큼

 성장시킨 기반이 되었다.

 "모든 지부에 소식을 보내라. 비상체제에 돌입하라고. 그리고 이 시간부로

 모든 권한을 지부장에게 위임한다고 해라."

 "즉결처분도 말입니까?"

 일비가 놀란 얼굴로 제갈수연을 쳐다보았다. 지부장의 전횡을 막기 위해

부하들의 처벌을 금지시켜왔는데 지금 제갈수연의 명령은 그마저도 허락하

겠다는 의미로 들렸던 것이다.

 "그렇다. 조직을 안정시키는 선에서 허락한다."

 제갈수연도 그녀가 일궈놓은 제천맹의 약점을 알고 있었다. 많은 인원수가

 있지만 조직력이 가장 취약했다. 즉 소속감이 아직은 부족했던 거였다. 그

런 단점을 알고 있으면서도 세력의 확대에 전념할 수밖에 없었다. 거의 몰

락해가는 담운천이지만 언제 다시 등장할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지금보다 더 많은 지부를 만들고 더 많은 무인들을 영입했을

터였다.

 "알겠습니다, 맹주님!"

 자신의 거처로 돌아온 일비가 붉어진 얼굴로 부하들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

 "전 밀정에게 전달하라! 지금 하고 있는 모든 업무를 중단하고 두 지부를

공격한 흉수의 정체를 밝히는 데 전념하라고!"

 일비의 추상같은 엄명에 의해 밀천각 지붕 위로 수천 마리의 전서구가 날

아올랐다. 중원전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제천맹 정보원들에게 날아가는 명령

서였다. 아울러 각 지부에도.

*     *     *

 "아이고, 이번에는 안휘성이네? 가까워서 잘됐다야."

 남궁세우가 싱긋 웃으며 일행을 쳐다보았다. 섯다가 투자판을 그리는 것을

 보고 이번에는 자신이 한 번 던져보겠노라 하여 나온 번호가 안휘성이었다

. 자신의 가문이 있었던 곳이고, 아버지가 최후를 맞이하였던 장소.

 "그곳의 지부장으로 있는 놈이 하우돈 맞습니까."

 "맞다. 옛날 살우에게 귀를 잃어버린 그놈이다. 병력은 천 정도이고."

 "그놈이 제 팔을 가지고 갔습니다. 풍기의 목숨도요."

 석두의 몸에서 차디찬 살기가 흘러나왔다. 혹시 죽었으면 어쩌나, 제천맹

의 권력다툼에 벌써 한직으로 밀려나 있으면 어쩌나 하고 걱정을 했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광살조원들을 도륙한 공로로 최고의 자리에 올라 영광스

런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다.

 "갑시다."

 절로 마음이 급해졌는지 서둘러 대통진을 구축한 일행이 안휘성을 향해 몸

을 날렸다.

 제천맹의 안휘지부.

 과거 천무맹 안휘분타가 있던 자리를 새롭게 개축한 곳이지만, 규모 자체

는 그때와 비교가 되지 않는다. 거의 두 배 가깝게 세력이 커진 것이다.

 무풍검 하우돈. 천무맹 무룡대의 부대주였던 그가 제천맹이 세워지면서 안

휘지부장이라는 막강한 자리로 승진했다. 물론 부맹주인 백무천의 심복이었

다는 과거 경력이 크게 작용한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이제 삼십 대 초반

인 그가 안휘지부의 지부장이 된 가장 큰 이유는 사 년 전 혈광마겁 때의

활약 때문이었다.

 그가 잡은 혈광마인의 숫자가 셋이었다. 한 명은 목을 취했고, 절벽을 향

해 몸을 날리던 두 명은 그의 검과 장을 맞고 추락했다. 그 당시 몇 명 남

지 않았던 제천맹의 무인들이 전부 목격했던 광경이었기에 그의 공적은 최

고로 평가되었다. 제천맹주인 제갈수연이 원하는 곳을 선택하라 할 정도로

절대적인 신뢰를 얻어낸 것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그래서 고른 곳이 이곳이었다. 제천맹에 남이 있는 게 출세에 도움이 된다

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남 밑에 있기보다는 작은 곳이라 할지라도 수장

이 되기를 원했다. 상부단체인 제천맹의 지시를 제외하면 지부에서는 최고

가 될 수 있다. 이곳에서는 자신이 왕인 것이다. 그의 바람을 읽은 제갈수

연은 흔쾌히 수락하였고 하우돈은 원하는 바를 이루었다.

 "경계를 철저히 하라고 일러라."

 바로 옆인 강소지부가 멸망을 당했음에도 하우돈은 긴장한 얼굴이 아니었

다. 오히려 안휘지부에 들러주기를 은근히 기대하는 눈치였다. 무력을 믿기

 때문이었다.

 강호전역에 퍼져 있는 열세 개의 지부 중, 감숙성을 감시하고 있는 섬서지

부를 제외하고는 안휘지부가 가장 강하다. 섬서지부야 강호공적들을 견제하

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한다면, 그 외에는 안휘지부만 한 곳이

없다는 말이다. 병력도 천여 명으로, 다른 곳에 비해 두 배 수준에 달하고

있다.

 "어떤 놈들이기에……."

 그로선 도무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돌아왔다는 말을 남긴 것으로 보건대

사 년 전 그놈들임에 확실한 것 같지만, 그 또한 의문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당시 맹에 파악된 사실에 의하면 생존가능성이 있는 혈광마인의 숫자는

 열 명 안팎이었다. 그 정도의 인원수로 무얼 한단 말인가. 단지 열 명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더구나 지부의 멸망이라니.

 "만나보면 알겠지……."

 하북지부와 강소지부를 멸망시킨 자들임에도 자신감을 보이고 있는 게다.

과거 구파일방에 버금간다는 안휘지부의 전력에 대한 믿음이었다.

 "아아악! 크악!"

 황혼이 막 사라질 즈음, 검은 어둠이 밀려옴과 때를 같이하여 비명소리가

터져나왔다.

 "왔는가!"

 자신의 검을 챙겨든 하우돈이 재빨리 밖으로 나섰다. 혹시 모를 공격에 대

비하여 만반의 준비를 해두었던 터였다. 정문으로부터 시작하여 곳곳에 기

관을 설치했고 수백의 무인들이 매복해 있었다. 신이 아닌 이상 빠져나오지

 못하리라는 생각이었다. 결코 당하리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다. 비

명소리가 들려오고 있는데도.

 "궁수들은 준비하라!"

 대 연무장 주변의 담벼락 위로 수백의 인물들이 일어나며 시위를 먹였다.

일반인이 쏘는 단순한 화살이 아니었다. 무인이 내공의 힘으로 쏘는 화살이

기에 그 위력 또한 대단했다. 과거 혈마궁의 궁사대를 그대로 재현한 조직

이 지금 담과 지붕 위에 있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여유 있는 얼굴로 자신감을 보이고 있는 하우돈이 모르는 게 있었다. 지금

 안휘분타를 공격해 들어오고 있는 자들은 개개인이 이미 절대자의 반열에

올라 있는 자들이고, 강호무림인들의 서열을 매긴다면 전부 최고의 자리에

올라설 수 있는 초극의 고수들이란 사실도. 아울러 사 년 전 자신이 목을

잘랐던 자들의 동료들이란 사실 또한 알지 못했다. 다만 그들이 아닐까 하

는 막연한 추측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궁금한 얼굴로 적을 기다리고 있는 하우돈과는 달리 무섭게 병장기를 휘두

르며 안휘지부원들을 도륙하고 있는 인물들. 이번 안휘지부를 공격하기 위

해 안으로 들어선 인원은 전부 여섯이었다. 자신의 가문이 있던 안휘 땅에

타인의 존재가 있음을 인정하지 못하는 남궁세우와 하우돈의 목을 따야만

하는 석두, 지난 사 년간 누구보다 처절하게 노력했던 강구두와 오구, 그리

고 숯 검둥이 모사였다.

 그들의 행동 또한 지금껏 다른 동료들이 보여주었던 행동과 다르지 않았다

. 여전히 물러섬을 모르는 사람들인 양 천천히 앞으로 나아갈 뿐이었다. 그

러다 땅속에서, 혹은 나무 위에서 적이 다가들면 가차없이 무기를 날려 주

살하고 있었다.

 누구 하나 앞서 나가지 않는다. 전부 일렬로 서서 달려드는 적을 향해 자

신들의 무기만 휘둘러대고 있었다.

 "어르신, 한바탕 해야겠습니다."

 무기가 없는 오구가 한발 앞으로 나서며 남궁세우를 쳐다보았다. 자신의

몫이 없었던 까닭이었다. 천마장법도 익혔고 천장지옥마공도 익혔지만, 장(

掌)을 날려 상대를 격살하는 건 체질에 맞지 않았다. 양손과 다리에서 느껴

지는 생생한 감촉을 맛보고 싶었다. 죽음의 느낌을…….

 "같이 가자!"

 오구의 뒤를 강구두가 따라붙었다. 그 또한 열매를 따고 싶었다. 지난 사

년간의 결과를 시험해보고 싶었다. 녀석들에게 짐이 될지, 아니면 지켜주는

 사람이 될지를.

 "보아라! 내가 바로 투귀 오구다. 자식 같은 녀석들의 죽음으로 살아난 오

구란 말이다."

 강한 진각(震脚)을 쏟아내는 오구의 몸에서 푸른색의 뇌전(雷電)이 번쩍거

렸다. 백산이 심어주었던 뇌정의 기운이 완전하게 그의 것으로 변했다. 푸

른 뇌정의 잔상을 남긴 오구의 몸이 전면을 항해 튀어나갔다. 적의 존재를

확인하지도 않는다. 무작정 앞을 향해 달려들 뿐이었다. 기다렸다는 듯 십

여 명의 인물들이 불쑥불쑥 일어서며 검을 찔러오자, 통렬할 고함소리가 터

졌다.

 "타핫!"

 뛰어나가던 탄력 그대로 허리를 뒤로 젖힌 채, 오구의 다리가 허공에서 번

쩍였다. 두 명의 무인을 향해 한순간 십여 번의 발길이 터졌다.

 "으아악! 크악!"

 머리가 터져나간 자들의 몸을 지지대 삼아 한 단계 도약한 오구의 몸이 허

공에서 회전을 하고, 두 다리를 일자로 내지른다. 양쪽 다리 끝에서 전해져

오는 촉감을 음미할 사이도 없이 그 자리에서 몸을 회전시킨다. 일자로 벌

어진 그의 다리에 십여 개의 검이 수수깡처럼 부서져나가고, 부러진 검을

들고 있는 무리 속으로 오구의 몸이 뛰어든다. 왼손에서 천장지옥마공의 멸

파(滅破)가 터지고 오른손에선 천마장법의 사혼(死魂)이 맺혔다. 결코 장이

 아니었다. 장법의 기운이 손과 발에 맺혀 있는 상태에서 상대를 격살하고

다녔다.

 "낙일광마혼(落日狂魔魂)!"

 오구와 십여 장 떨어진 곳에서 광폭한 강구두의 외침이 터졌다. 뭉클뭉클

피어오르는 검은 운무가 강구두의 몸 주위에서 회오리치듯 돌아가고 그 사

이로부터 황혼 빛이 스며나왔다. 마치 석양의 저녁놀 같은 아름다움이었다.

 그러나, 그 황홀한 빛은 죽음의 빛이었다. 그 빛에 걸려든 안휘지부 무인

들이 비명을 지를 사이도 없이 무더기로 쓰러져나갔다. 아름답다고 느낀 순

간, 이승에서 저승으로 떠나버린 것이었다.

 자욱한 피비린내가 사방으로 퍼지고 검은 어둠 속에서 살아남은 자들의 분

노가 터졌다.

 "지부장님! 적들이 너무 강합니다. 아무 소용 없습니다."

 오백의 무인들과 같이 대 연무장에 대기하고 있던 하우돈을 향해 한 팔이

잘린 부하 한 명이 공포에 질린 얼굴로 말을 더듬었다. 사백 명 정도의 무

인이 매복을 했는데 한 식경도 안 되어 전부 도살당해버렸다. 인간의 몸이

아니었다. 검(劒)과 도(刀)가, 사방에서 날려대는 암기가 전부 무용지물이

었다. 무인이 아닌 괴물들이었다.

 "피해야……."

 "닥쳐라! 감히 제천맹의 최고 무인인 우리가 도망을 친단 말이냐. 안 그런

가, 제군들!"

 "그렇습니다, 지부장님!"

 오백여 명의 무인들이 우렁차게 고함을 질렀다. 아직은 상황을 제대로 인

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들이 어떤 처지에 놓여 있는가를, 숫자의 많음

만 믿고 있을 뿐 두 개의 지부가 멸망당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었던 것

이다.

 "오늘 우리는 다시 한 번 보여줄 것이다, 안휘지부가 왜 최고인지를! 준비

하라!"

 "놀고 있네! 씨발놈!"

 하우돈의 고함소리가 나오자마자 어디선가 상스러운 욕설이 흘러나왔다.

석두였다. 잔뜩 살기를 머금은 석두가 광살검을 앞세우며 안휘지부 무인들

이 진영을 이루고 있는 곳을 향해 다가들었다.

 그리고 그의 뒤를 따라 들어서는 인물들, 입고 있는 옷에서 흘러내린 피가

 자신들의 발 위를 적시고 있건만 전혀 개의치 않는 듯, 오직 전방을 쳐다

보고 있을 뿐이었다.

 "네놈은? 어떻게……."

 아직 기억하고 있었는지 하우돈의 얼굴이 해쓱하게 변했다. 사 년 전, 제

천맹 무인들을 가장 많이 도륙했던 자. 자신이 던진 검에 의해 팔이 잘린

채 절벽 아래로 추락했던 그가 돌아왔던 거였다.

 "보고 싶었다, 무이검!"

 석두의 얼굴에 진득한 살기가 묻어나왔다. 누구보다 보고 싶었던 놈이 바

로 하우돈이었다. 가장 잔인하게 죽이리라 마음먹었었다. 조금이라도 더 강

해져 있기를 바랐고, 좀더 영광된 자리에 있기를 바랐다.

 "다행이군, 나 또한 네놈들에게 못 받은 빚이 있었는데. 그때 그냥 죽는

게 나을 뻔했어. 쏴라!"

 여전히 여유 있는 음성이었다. 자신의 귀를 가져간 놈들이었음에도 원하는

 만큼 복수를 하지 못했었다. 일생을 치욕스럽게 만들었고 지금도 머리를

내놓고 다니지 못한다. 바로 앞에 있는 저놈들 때문인 게다. 놈들이 귀를

가져갔기에 이 지경이 되었다. 천여 명의 수하들 앞에서도 머리에 두건을

쓰고 있어야 하는 신세. 그런데 다시 살아와서 기회를 주고 있는 게다. 다

시 한 번 그 치욕스러웠던 과거를 없앨 기회를.

 "이번엔 완전하게 없애주마.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도록."

 그러나 하우돈의 적의 어린 말을 듣고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무수

한 화살이 빗발치는 가운데 있으면서도 석두 일행의 표정은 태연했다. 오히

려 화살을 가만히 쳐다보던 모사가 뒤를 돌아보며 한마디 하는 것이었다.

 "나도 몸 좀 풀어야겠소."

 말을 그렇게 하면서도 그가 하는 행동은 적을 향해 뛰어가는 게 아니었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옷을 벗더니 한편으로 조심스럽게 치워놓는 것이었다.

 그의 옷 역시 마찬가지로 사 년 전에 입었던 그 옷이었다.

 "작아서 장가가기도 힘들겠다."

 검은 몸뚱이. 마치 철골강시의 몸마냥 검게 변해 있는 모사의 몸을 보며

석두가 놀리듯 말했다. 그러나 말은 그렇게 하고 있지만 얼굴은 웃지 못했

다. 두 눈 가득 아픔이 서려 있었다. 이미 만독불침의 경지에 도달해 있는

자신들이나 녀석들과 어울릴 수 있을 뿐, 세상과 단절되어버린 몸이다. 발

가벗고 있어도 수치심을 느끼지 못하는 짐승과 다름없이 되어버렸다.

 "어차피 써먹지도 못하오. 나보다는 섯다가 안 됐지, 뭐. 그 실한 놈이 무

용지물이 되었으니."

 자신의 물건을 살짝 쥐어본 모사가 안휘지부의 무인들을 향해 걸음을 옮겼

다.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그의 몸에서 지독한 냄새와 함께 묵운이

피어올랐다.

 "내기하려오? 나는 일 수에 백 명이오. 이 한 방에 말이오. 형님보다 많이

 보낼 수 있소."

 석두를 향해 슬쩍 웃음을 날린 모사의 신형이 지면에서 약간 떠올랐다. 극

도의 내공을 끌어올리자 저절로 떠올랐던 것이다. 바람이 흐르듯 안휘지부

무인들을 향해 다가가던 모사의 입에서 분노의 찌꺼기를 토해내듯 강렬한

외침이 터져나왔다.

 "앙천혈독공(殃天血毒功)!"

 슈우웅!

 죽음의 안개였다. 사방으로 움직여대는 모사의 몸으로부터 안개 같은 검은

 기운이 퍼져나가며 안휘지부 무인들 사이로 스며들었다.

 "독이다! 피해……! 으윽!"

 챙!

 "독인(毒人)이다!"

 대 연무장이 순식간에 아비규환의 참상으로 변했다. 검은 안개에 휩싸인

무인들이 이곳저곳에서 녹아내렸다. 대항이란 자체가 무의미했다. 검을 찔

러도 들어가지 않았다.

 단순한 독인만이 아닌 터였다. 천하제일의 강시라는 천독마강시의 제조법

을 그대로 답습했다. 머리만 살아 있는 강시가 모사와 섯다의 몸이었다.

 "앙천혈독공을 익혔더냐……."

 모사의 모습을 쳐다보던 남궁세우가 서글픈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앙천혈

독공이 과거 천가였던 독천가의 무공이라는 사실은 혈가의 후예가 묻혀 있

는 동굴 속의 기록에서 보았다. 그러나 그전에도 이미 그 독공에 대해 내려

온 말이 있었다. 천하제일의 독공. 그러나 익힌 당사자마저도 독공의 제물

이 되어야 하는 저주받은 무공이라 하였다.

 절반의 무공이었기에 그런 약점이 생겼다는 사실은 남궁세우도 알지 못했

다. 다만 섯다와 모사만 독인마타에게 들어서 알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선택한 방법이 천독마강시였다. 조금이라도 육체를 오랫동안 유지시키기 위

해서는 강시가 되는 방법밖에 없었다. 어차피 독인마타가 강시제조술을 펼

쳤던 몸이었기에 계속하기로 하였다. 독성지체를 이루면 풀린다고 하였지만

 그럴 능력도 없다. 복수만 할 수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하기로 하였다. 복

수를 완성하고 핏물로 녹아내린다 해도 좋다는 생각이었다.

 "운명이라면……."

 이미 선택된 운명이기에 도리가 없다. 저렇게 해서라도 강해져야 할 필요

가 있었기에, 죽는다는 것 자체가 더 행복한 삶이기에…….

 "가자!"

 현실에 충실하면 되는 것이다. 핏물로 녹아 사라지든, 아니면 이 전쟁 속

에서 죽어나가든 나중의 일인 게다. 지금은 제천맹 무인들을 죽여야 할 시

간일 뿐.

 다섯 사람이 동시에 모사의 뒤를 쫓았다. 남궁세우의 검이 다시 칼춤을 추

었다. 모사가 만들어놓은 독무 속을 헤치며 상대의 숨통을 끊어버린다. 누

구 하나 정상인 녀석들이 없다. 백산, 일휘, 석두, 모사, 섯다, 소살우. 오

십 명이나 되었던 아들들이 여섯밖에 남지 않았는데 그 애들마저도 전부 불

구다. 오히려 먼저 죽었어야 할 자신들만 정상이었다.

 어찌 이런 일이 있단 말인가. 너무 불공평한 세상인 게다. 가만히 있던 광

풍대원들은 모든 것을 잃었는데, 그들을 공격했던 자들은 더 잘 살고 있다.

 복수라는 한 마디밖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은 저들인데 그럼에도 빌어먹을

운명에 대해선 불평하지 않는다. 오히려 복수할 힘을 얻게 된 지금에 감사

하고 있다.

 "으아아!"

 남궁세우에게서 비통한 고함소리가 터져나오고 붉은 살기를 머금은 기운이

 전방을 향해 밀려갔다. 주체할 수 없는 분노에 혈우창궁검법의 삼 초인 창

궁혈애무를 펼쳐버렸다.

 순간 엄청난 광경이 펼쳐졌다. 검을 들고 달려들던 무인들이 머리부터 시

작하여 가루로 변해가고 있었다. 죽음의 폭풍이었다. 단 한 번에 오십여 명

의 인물들이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이럴 수는……. 이럴 수는 없다고!"

 안쪽을 향해 정신없이 몸을 날리고 있는 자, 안휘지부의 지부장인 하우돈

이었다. 강한 자들이라는 사실은 사 년 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건

상상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저들에게 통할 수 있는 무기가 없었다.

화살은 근처에 접근하지도 못했고 검과 도는 놈들의 피부를 뚫지도 못했다.

 맹에 있는 백무천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상대할 수 없는 괴물들이었다.

 더구나 앙천혈독공(殃天血毒功)에 심검(心劒)이라니.

 "맹에 알려야 한다. 저들은 상대할 수 없다고 알려야 한다."

 목숨도 살려야 했지만 우선 맹에 이 사실을 전해야 했다. 제갈수연이나 자

신이나 전부 착각하고 있었다. 사 년 전 그들을 치는 게 아니었다. 가만히

두었더라면 그냥 사라질 자들이었는데 자신들이 불러들인 게다. 지옥에 있

는 악마를 불러들여 화를 자초해버렸다.

 철컥!

 "허억!"

 비밀통로를 향해 몸을 날리려던 하우돈의 신형이 우뚝 멈췄다. 더 이상 움

직일 수가 없었다. 절편 모양으로 만들어진 검이 자신의 허리를 감아버린

것이었다. 흔적조차 감지하지 못하였는데 어느새 등 뒤까지 접근해 있었다.

 아예 상대가 되지 않았다.

 "몸을 돌려라, 무이검. 조심스럽게. 칼이 좀 날카롭거든."

 석두였다. 달려드는 적을 주살하면서도 하우돈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었다. 그가 몸을 빼내는 것을 보고 은밀하게 뒤쫓아왔다.

 "크윽!"

 "천천히 걸으라 했잖아, 다친다고."

 하우돈의 허리 쪽에서 피가 새어나오자 혀를 끌끌 차며 주의를 주고 있다.

 "남자는 허리가 약하면 안 되는데……."

 석두의 광살검이 천천히 이동을 하고 있었다. 가장 앞에 있는 한 마디의

검이 하우돈의 살갗에 박혀들고 그 뒤를 나머지가 따른다. 마치 가장 앞에

있는 놈이 뒤에 있는 마디들을 끌고 가는 형국이었다.

 한 번에 많이 움직이지도 않는다. 거의 한 뺨 정도의 거리를 유지한 채 꾸

준하게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다 온 모양이다."

 그렇게 올라간 석두의 광살검이 마지막 도착한 곳은 두툼한 하우돈의 목이

었다.

 "죽여……."

 "아아! 말하면 목에 상처 난다니까 그러네."

 석두의 행동이라 볼 수 없을 만큼 잔인한 광경이었다. 사 년 전, 잃었던

것은 형제들이었고 얻었던 것은 잔인한 심성이었다. 어떻게 죽이면 시원해

질까, 어떻게 죽이면 더 고통스럽게 죽일까를 연구한 세월이기도 했다.

 자결하게 해서도 안 된다. 그렇게 되면 너무 편한 죽음이기에. 놈의 모든

것을 제압한 상태에서 조금씩 맛볼 것이다. 복수의 쾌감을.

 "사 년 전 흐릿한 의식 속에서 네놈의 목소리를 들었다. 동생의 목을 들고

 웃고 있었다고 하더구나. 어쨌나."

 "버렸소. 그곳에서 던져버렸단 말이오."

 "거짓말. 네놈은 그 머리를 제천맹까지 들고 갔어. 네놈의 공적을 자랑하

기 위해서 말이다. 내가 알기론 각 지부에 지부장을 하고 있는 놈들이 죄다

 내 동생들 목을 들고 갔던 자들이라던데, 맞나?"

 "맞소이다. 전부 공을 세웠던 자들이었소."

 "좋다. 그럼 그들의 목은 전부 어디에 묻었나. 아니, 어디에 버렸나."

 "그게……."

 "빨리 말해라. 네놈의 심장 뛰는 소리만 들으면 거짓인지 아닌지 금방 알

수 있다."

 "모르오. 정말 모른단 말이오. 크악!"

 발악적으로 소리를 지르던 하우돈이 비명을 토했다. 광살검 맨 앞에 있던

검이 그의 오른쪽 눈을 파고들었던 것이다.

 "제대로 된 답이 나올 때까지 이렇게 하나씩 사라질 거다. 어차피 죽는다

는 건 변함없으니 계속 버텨도 상관없어."

 하우돈의 눈을 찔렀던 그 검이 빠져나와 이번에는 아래쪽을 향해 슬금슬금

 이동을 하고 있었다.

 낭심. 이번에 석두가 노려보고 있는 곳이었다.

 "다시 한 번 묻지, 그들의 머리를 어디에 버렸나."

 지옥의 유부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처럼 섬뜩한 목소리가 방 안 가득 울렸다

. 순간 싸늘한 기운이 몰아치는 듯 차가운 기운이 흘렀다. 하우돈의 얼굴에

 공포의 그림자가 어렸다. 석두의 행동에서 뭔가 느꼈기 때문이었다. 결코

평범하게 처리하지 않겠다는 생각.

 "말하겠소."

 결국 공포를 견디지 못한 하우돈이 먼저 항복을 했다. 차라리 빨리 죽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었다. 어차피 죽으면 그만인데, 알려준다 해서 문제될

리가 없을 것 아닌가.

 "그 당시 혈광마인의 목은 전부 제천맹에 보관되어 있소. 후세에 경각심을

 키운다는 명목으로 전시되고 있소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때 회수되었던 광풍대원들의 목과 광풍대원들을 도

우러 왔던 낙양 무인들의 목까지 백여 개 이상이 전시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 제천맹을 빠르게 성장시키고자 하는 제갈수연의 의도였다.

 이른바 무림공적관(武林公敵館)이라는 전시실.

 "너희들은 언제나 그랬어. 정의? 죽은 시신마저도 이용하는 게 정의인가.

우리는 살인귀지만 너희들도 인간이 아닌 건 마찬가지야. 저승에서 지켜봐

라, 제갈수연을 비롯한 너희 제천맹이 어떻게 없어지는가를."

 붉어진 광살검이 움직일 때마다 피가 튀었다. 솟구쳐 오르는 분노를 도저

히 참을 수가 없었다. 소위 정의를 표방한다는 자들이 인간의 시신을 이용

해 세력을 만들고 있었다. 그럼에도 누구 하나 조언하는 자가 없었을 것이

다. 오히려 더 많은 머리가 오지 않았음을 아쉬워했을 것이다.

 밖에서 들려오는 비명소리가 잠잠해짐과 동시에 광살검이 조여졌다.

 툭! 데구르!

 부릅뜬 눈을 하고 있던 하우돈의 머리가 떨어지고, 이곳저곳에서 불꽃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지금껏 그래왔듯이 살육이 끝나면 화려한 불꽃 잔치

가 벌어지고 그 불로 피에 젖은 옷을 말린다. 그런 다음, 또 한 번의 투자

가 있고 다음 목적지를 향해 길을 떠나는 것이다.

 "형님! 녀석들의 목이 제천맹에 있답니다."

 "무슨 소리냐? 아이들의 목이……. 그럼?"

 남궁세우의 물음에 석두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쿡! 잘됐네. 녀석들도 전부 보고 있을 테니."

 백산이 나직한 웃음을 토해냈다. 그에게도 새로운 습관이 생겨났다. 분노

할 때마다 비릿한 웃음을 짓는 버릇. 당장은 참아야 하기에 웃고 만다. 그

리고 일을 한다. 그 분노를 돌려주어야 할 일.

 "조금만 더 기다리라고 하지, 뭐. 원래 좀 참았다 만나면 더 반가운 법이

잖아. 던져!"

 던져라는 말을 하는 백산의 목소리가 차갑게 얼었다. 몰아치는 한풍(寒風)

이 무색할 정도로 차가운 목소리. 과거 광견조원들과 같아져버리고 말았다.

 웃고 있는 입과 살기 어린 눈을 가진 괴물.

 "사천이오."

 "사천은 치곤(値坤)이란 놈이 지부장이고 병력은 칠백이다. 섬서성을 지원

하는 곳이기도 하고."

 "갑시다."

 옷을 다 말린 일행이 다음의 목적지를 향해 길을 떠났다. 이번에는 더욱

잔인해질 것 같았다. 그동안 알지 못했던 새로운 분노가 추가되었기에.

*     *     *

 강호무림이 공포에 젖어들었다. 살겁, 혈겁. 제천맹의 하북지부가 사라질

때만 해도 한 번의 살겁으로 끝나겠지 하는 생각을 했었고 강소지부가 사라

질 때는 제천맹을 쳐다보았다.

 왜라는 의문을 가지고.

 왜 적을 응징하지 않느냐고.

 그러다 안휘지부의 멸망소식이 전해지자 넋을 잃고 말았다. 안휘지부에 대

한 무림인들의 관점은 여타 다른 지부와는 또 달랐다. 제천맹의 존재로 지

금은 거의 유명무실하게 되어버렸지만 과거 구파일방에 버금간다고 생각했

던 곳이 안휘지부였다.

 그런 안휘지부가 풀뿌리 하나 남기지 못했다 하였다. 거의 백여 채에 달하

던 모든 건물들이 전소되어 잿더미로 변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흉수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그 많은 인원을 전부 몰살시키면서도 지금

껏 정체가 드러나지 않았고, 보았다는 사람도 없었다. 한마디로 귀신들이라

는 말밖에 표현할 길이 없었다.

 천하제일이고 역대 최고 단체라 하였던 제천맹의 조직이 급속하게 흔들리

기 시작했다. 각 지부에 있는 지부장들이 맹을 향해 연일 전서구를 날렸고,

 동요하는 부하들을 감시하고 협박해도 소용이 없었다. 급속하게 이탈자들

이 늘어가고 있었던 거였다. 제천맹이 와해되려는 조짐이 일기 시작했다.

 "무슨 소리냐, 일비! 아직까지도 놈들의 흔적을 찾아내지 못했다니!"

 제천맹 제갈수연의 거처에서 날카로운 고함소리가 터져나왔다. 최초 하북

지부의 혈겁이 일어난 지 삼 개월이 지났건만, 밀천각에서는 흉수에 대한

그 어떤 단서도 찾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면목 없습니다. 지금껏 흉수들을 보았다는 목격자조차 없습니다."

 답답하기는 일비가 더 했다. 밀천각이 가진 모든 정보력을 다 동원했음에

도 불구하고 전혀 흔적을 잡지 못했다. 세간에 떠도는 소문처럼 귀신이라고

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밥을 먹고 숨을 쉬는 인간들이라면 제천맹의 정보망

에 걸려들지 않을 수가 없다. 심지어는 대량으로 팔리는 식량까지 조사를

했음에도 다수의 적이 출현했다는 조짐이 없었다.

 어쩌면 일비가 찾지 못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수많은 밀정들이 흉수의

정체를 찾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하고 있다지만, 대통진에 의해 움직이는

자들을 무슨 수로 발견해내겠는가. 더구나 인원은 전부 열한 명. 먹는 음식

조차 흔하게 구할 수 있는 육포뿐이니 흔적이 남을 리 없었다.

 "안휘지부에서는 대량의 독이 발견되었습니다."

 "뭐라고? 그걸 왜 이제야 말하나!"

 지금껏 조사 방향이 잘못되어 있었던 게다. 독을 이용해서 안휘지부를 공

격했다면 다수의 인원이 아니라는 말이 된다. 결국 소수정예로 지금껏 제천

맹의 밀정들을 우롱하고 다녔던 것이다.

 "좋다, 지금부터는 각 지부 근처를 집중적으로 감시하라."

 "과거 그들이라면 잡을 수 없소이다, 맹주."

 백무천이었다. 여전히 제천맹의 일보다는 북경에서 주로 일을 하고 있었고

, 이번엔 제갈수연을 무림왕으로 만들기 위한 물밑 작업을 하고 있었던 터

였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유량이 만나주질 않자 일단 맹으로 복귀했던 것이

다.

 "무슨 소립니까, 부맹주. 지금 혈겁을 벌이고 있는 자들이 혈광마인이란

말씀이십니까."

 "그렇습니다. 그들이 돌아왔습니다. 보이지 않는 건 진(陣) 때문이고요."

 과거 초리하에서 언뜻 보았던 광경 때문이었다. 십여 명 이상이 한꺼번에

사라진 광경을 목격하지 않았던가. 그때는 자신이 착각을 했다 여겼었는데

일비의 말을 듣다보니 갑자기 그때의 장면이 떠올랐다.

 "눈에 보이지 않는 진이라고요?"

 제갈수연의 얼굴이 경악스레 변했다. 진에 있어서 천하제일이라는 제갈세

가에서도 해내지 못한 일을 이루어낸 자가 있다는 말이다. 진을 연구하는

모든 사람들이 꿈이라 일컫는 진을…. 힘에 있어서는 천하제일이 되었는데

진식에서 밀렸다는 말이었다.

 허나 허점이 있다고 하였다. 그들보다 높은 곳에 위치해 있으면 흔적을 잡

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럼 그 보이지 않는 진 때문에 각 지부들이 전부 당했다는 말입니까?"

 "보이지 않는 진과 독이라면 가능하지 않겠소?"

 신가의 무공을 익힌 자신도 알아차리기 힘든 진이었는데 일반 무인들은 오

죽하겠냐는 말이었다. 결국 당할 수밖에 없다는 말인 것이다.

 "차라리 철수를 지시하는 게 더 낫지 않겠소?"

 제천맹에서 놈들을 기다리는 편이 더 나을 것 같았다. 개개인이 이기어검

을 구사하는 고수들이었기에 하는 말이었다. 그들이 숨고자 한다면 굳이 진

이 아니더라도 각 지부로서는 대처할 방안이 없을 것 같았다.

 "그럴 순 없습니다. 사 년간 피땀 흘려 만든 곳입니다. 그들을 제거해야지

요. 확실한 증거를 잡아야 합니다. 그들이 왔다는 증거를."

 대충 적의 정체를 파악했다는 생각에 제갈수연의 얼굴이 약간은 밝아졌다.

 그제야 여유가 생겼는지 새삼스러운 듯 백무천을 쳐다보았다.

 지금 이곳에 있을 시간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유량이 거리를 두기 시작한 것 같소."

 제갈수연의 시선을 접한 백무천이 간단하게 북경 상황을 말했다.

 "무슨 소리예요. 저번엔 그런 말씀 없었잖아요."

 제갈수연의 얼굴이 재차 굳어졌다. 이번에는 혈광마인 때문이 아니었다.

느낌,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뒷머리를 쳤다. 석숭까지 실각시켜

 모든 일이 원하는 대로 풀려나간다 생각했는데 각 지부의 혈겁과 때를 같

이하여 유량의 홀대라니.

 "느낌이 그렇다는 것뿐이오. 방문할 때마다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있어서.

"

 "백랑, 그자도 무공의 고수입니다."

 일부러 피하는 게다. 아니, 그만 관계를 끊겠다는 의사표현을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다.

 "안 되겠어요. 서둘러야 하겠어요."

 "그들의 존재를 알릴 참이오?"

 "그 수밖에 방법이 없어요. 느낌이 좋지 않아요."

 정확한 정체를 확인할 시간이 없다. 하북지부에 쓰여 있었던 '귀(歸)'자는

 그들이 돌아왔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 정도의 세력인지 모르지만 다시 한 번 강호무림을 결집시킬 필요가

생겼다. 혈광마인의 재출현을 알리고 나머지 지부로 무림인들을 불러 모으

면 처리가 가능하리라는 생각에서였다. 아울러 제천맹을 이탈해나가고 있는

 무인들의 발목을 잡는 길이기도 했다.

 정의(正義)수호(守護).

 명예를 최고로 여기는 무림인들에게는 그만큼 훌륭한 명분은 없는 것이다.

 그 명분을 효율적으로 이용하면 어떠한 적이라도 물리칠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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