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부활의 노래
쏴아! 휘이익! 처얼썩!
산더미 같은 파도가 하얀 포말을 만들며 엄청난 기세로 해변을 강타한다.
새하얀 번갯불 사이로 쏟아지는 빗줄기는 모랫바닥에 손가락 두께의 구멍을
숭숭 뚫어놓는다.
끝없이 펼쳐진 백사장 가운데 다가오는 파도를 망연한 눈으로 쳐다보는 한
인물이 있었다. 불구. 꽤 큰 키에 건장한 체격을 지녔지만 오른손에 쥐고
있는 어설픈 목발 같은 막대기는 그가 불구임을 나타내주고 있었다.
오른쪽 무릎 아래쪽이 텅 비어 있는 이 남자.
일휘였다.
해남도(海南島). 패웅에 의해 구함을 받은 일휘가 그를 따라 이곳 해남도
에 도착했다. 그러나 어떻게든 무공을 회복하여 팽가로 돌아가겠다던 그의
의지는 시간이 지날수록, 거세게 밀려왔다 부서지는 파도처럼 희미해져갔다
.
몸을 지탱하고 중심을 잡게 해주는 다리 때문이었다. 차라리 팔이 없었다
면 무엇이든 해볼 터인데, 다리가 없어진 그로서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
도 없었다. 기본적으로 걷기가 되지 않았기에 한쪽 팔에 의지할 수밖에 없
었고 남은 것은 왼손이 전부였다.
그 왼손으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도를 잡을 수도, 빠른 속도
로 움직이지도 못한다. 무공을 펼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어떻게든 걷
기 위해 나무를 다리 삼아 밑에 받혀보기도 했으나 불편하기는 매한가지였
다. 단지 불편하기만 하고 무공을 펼칠 수 있으면 된다 싶었지만 그마저도
불가능했다.
내공이 칠 할 정도 회복되었으나 그게 전부였다. 삼 할 정도의 내공이 영
원히 찾을 수 없는 곳으로 가버렸다. 그나마 무공을 펼칠 때는 살아난 내공
의 절반의 힘도 사용하지 못했다.
절망. 세월이 흐를수록 남는 건 절망밖에 없었다. 형제들의 죽음을 딛고
이곳까지 왔는데 그들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게 그를 더욱 절망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었다.
"으아!"
터질 것 같은 가슴을 부여잡고 분노의 고함을 질러보지만 자꾸만 밀려오는
허무감은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어쩌란 말이냐, 나보고 어쩌란 말이냐. 말을 해보란 말이다! 말을 하라고
!"
막막한 수평선을 쳐다보며 고함을 지르던 일휘의 몸이 급기야 그 자리에
무너지듯 쓰러졌다. 살아남은 사람이 나머지 일을 하기로 했는데,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자괴감만 남았다. 더 이상 견디고 살아간다는 것 자
체가 힘들었다.
결국 모든 희망을 잃어버린 일휘의 선택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그래, 추몽아. 내가 간다. 어차피 이 상태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몸,
갈 수 없으면 혼이라도 돌아가기로 했지 않느냐."
나무 막대기를 던져버린 일휘가 파도 속을 향해 기어가기 시작했다. 이 편
이 더 낫겠다 싶었다. 이 상태로 몸을 완전하게 회복한다 해도 삼류무사 수
준밖에 안 되기에…. 무공을 완성하지 못하면 혼만 돌아오라 했던 약속은
지키고자 하였다. 그리고 다른 녀석들이 돌아오는 걸 지켜볼 것이다. 누구
보다 먼저 가서 기다릴 것이다.
짭짤한 바닷물이 입 안으로 밀려들었다. 바다 속에서는 걷지 않아도 된다.
가만히 있기만 하면 물살이 알아서 데리고 갈 터이다. 살기 위해 팔을 휘
저을 필요도 없다. 이곳에 오기까지 최선을 다했고, 운남은 아니었지만 중
원을 횡단하겠다고 했던 약속도 지켰다. 그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이다. 그
것으로…….
입 안으로 넘어오는 짠물을 계속해서 삼켰다. 조금이라도 빨리 가라앉기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바보 같은 놈! 이 정도밖에 되지 않았더냐? 이 정도 가지고 동생들의 복
수를 한다고 하였더란 말이냐?"
"더 이상 뭘 어쩌라고, 이 몸으로 뭘 할 수 있단 말이오, 뭘……."
"왜 못해! 아직 살아 있지 않느냐. 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죽
은 사람밖에 없다. 숨을 쉬고 살아 있으면 전부 할 수 있는 게다. 살아 있
다는 것은 할 수 있다는 의미란 말이다."
패웅이었다. 이곳에 도착해서부터 줄곧 일휘를 지켜보고 있었다. 지난 육
개월 동안 일휘의 처절한 노력도 보았다. 사라져버린 삼 할의 내공을 찾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해 운공을 하는 모습도 보았고, 잃어버린 다리를 대신
하기 위해 조금이라도 가능성 있는 방법은 전부 사용해보는 것도 보았다.
그러나 사라진 그의 다리를 대신할 수 있는 기구는 어디에도 없었다.
패웅도 백방으로 찾아다녔다. 과거와 똑같이 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최소
한 무공 정도는 펼칠 수 있는 방법을 찾았고, 마침내 발견했다.
"죽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보거라. 사 년이면 결코 긴 세월이 아니
다. 그러나 마음가짐에 따라서는 사십 년의 세월로도 바꿀 수 있는 게 인간
의 의지인 게다. 따라와라."
패웅이 일휘를 데리고 간 곳은 어선의 닻을 만들어주는 허름한 대장간으로
, 육십 대 노인 한 명이 전부인 곳이었다.
"이곳에서 직접 다리를 만들어라. 너의 손으로……."
그 한마디만 남기고 패웅이 몸을 돌렸다. 그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여기까
지였다. 이곳에서마저 일어나지 못하면 더 이상 미련을 버려야 함이다. 나
머지는 전부 일휘의 몫이었다.
"좋은 몸을 가지고 있구먼. 난 해상일세."
"일휩니다."
"마침 잘됐네, 지금 일이 좀 바빴거든. 여기서 풀무질 좀 해주겠나?"
"네?"
일휘의 표정이 멍하니 변했다. 노(爐)에 불을 강하게 해달라는 말임은 알
겠는데, 자신은 한쪽 다리가 없다. 발판을 눌러줄 다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노인은 풀무질을 해달라는 것이 아닌가.
"아, 무릎 아래쪽이 없지? 그럼 이렇게 하지, 뭐."
일휘를 향해 빙긋 웃어 보인 노인이 발판 위에 잘려나간 다리 높이만큼의
통나무를 하나 올려놓더니 그 위에 도톰한 솜뭉치를 얹어놓는 것이었다.
"알겠습니다."
힘없는 노인이 도와달라는데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매끈하게 잘려나간
다리를 솜뭉치 위에 올려놓고 풀무질을 시작했다.
그러나 거의 일 년 이상을 사용하지 않아서인지 과거에 비해 너무나 약해
져 있었다. 얼마 하지도 않았는데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오른
쪽 다리의 허벅지 근육이 고통에 겨워 아우성을 쳐댔다.
"쯧쯧. 허우대만 멀쩡했지, 힘이 없구먼. 아무리 잘려 없어진 다리라도 운
동을 해주어야 하는 게야. 보겠는가."
일휘를 보고 혀를 차던 노인이 일어서서 그에게 다가왔다. 그런데 노인의
걸음걸이도 이상했다. 오른쪽 다리를 약간씩 절뚝거리는 모양새가 여느 사
람들과는 다른 걸음걸이였다.
"나는 이게 이쪽에 필요하다네."
노인 또한 오른쪽 다리가 불구였다. 일휘처럼 무릎 아래쪽이 아니라 오른
쪽 허벅지 부근부터 전부 의족이었던 거였다.
발판 위에 올려주었던 나무판을 아래쪽으로 내려놓더니 그 위로 올라서서
는, 곧게 펴진 오른쪽 다리는 그대로 둔 채 왼발을 이용해서 풀무질을 하는
것이었다. 화력이 거세졌는지 순식간에 노에 있는 쇳물이 조금씩 녹아들기
시작했다. 거의 일 다경 이상을 하고 있었음에도 노인의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전혀 없었다.
"이거? 배 타고 나갔을 때 상어에게 당했지. 한 삼십 년 되었나? 그때만
해도 살지 못할 거라 여겼어. 상어 이빨이 원체 강해야 말이지. 이곳 섬에
약이 있기를 하나, 아니면 의원이 있기를 하나. 그냥 피만 멈추게 해두고
죽기만을 기다렸던 거야. 그런데 모진 목숨을 가진 인간이라 그런지 죽지를
않더군. 거의 십여 일 동안 정신을 잃고 있다가 깨어나 버렸다네. 그런데
말이네, 살아났다는 기쁨보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가 더 겁나더군.
"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고 실제 자살도 몇 번 시도했었다. 그
러나 살 운명이었는지 계속해서 구해주는 사람이 있었다. 다리가 잘린 상태
로 거의 오 년간을 방황하다 결국 이곳 대장간에서 일을 배워 지금에 이르
렀던 것이다.
"자넨 무릎이 살아 있지 않은가."
무릎이 살아 있다는 말은 일반 사람과 별반 차이가 없다는 말이었다. 자신
처럼 허벅지 부분이 없는 사람과 비교하면 정상인이라 해도 하등 이상할 게
없다는 의미였다.
"제가 하겠습니다."
부끄러웠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일 년이란 시간을 허송세월만 했다.
안 된다고만 생각했지, 해보려고는 하지 않았다.
"거, 무공인가 뭔가 하는 것은 사용하면 안 되네. 일단 원래의 힘을 찾아
야 하니까. 그리고 자네 다리를 어떤 모양으로 만들 것인가 생각해보게."
"무슨……."
일휘의 얼굴이 의아하게 변했다. 그냥 버팀목 역할만 하면 되지, 모양은
무슨 모양이란 말인가. 제대로 사용할 수도 없는 다리인데.
"나는 이 다리를 이용해서 가끔 먹을거리를 잡기도 한다네. 산짐승 말이네
. 나를 잡아먹으러 왔다가 이 다리에 의해 저가 먼저 저승으로 가곤 하지."
"가능하겠습니까?"
처음으로 일휘의 얼굴에 빛이 들어왔다. 철각으로 맹수를 잡았다는 노인의
말은 다리가 곧 무기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몸의 중심을 잡아주는 버팀
목보다 휘두를 수 있다는 뜻이 아닌가.
"철을 다루는 사람인데 무얼 못 만들까? 내 특별히 녹이 안 나는 놈으로
만들어주지."
"감사합니다, 어르신!"
"이 사람아, 불 약해져!"
"네! 알겠습니다."
일휘의 눈에 물기가 비쳤다. 형제들의 죽음에도 울 수 없었던 그에게 다시
희망이 생긴 것이다. 힘이 좀 든들 어떠리, 몸이 좀 피곤한들 어떠리. 과
거에는 이것보다 더 힘든 일도 견디고 살아왔는데 녀석들의 복수를 해줄 수
있는 방법이 생겼다는 기쁨에 정신없이 다리를 놀렸다. 하루라도 빨리 몸
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만 철각을 낄 수 있을 테니.
그날부터 일휘의 일터는 허름한 대장간이 되었다. 노인의 옆에서 풀무질을
하고 망치질을 배우면서, 잘린 다리였지만 옛날의 힘을 되찾기 위해 안간
힘을 다했다.
한 달. 그가 예전의 다리로 만들 때까지 걸린 시간이었다.
"다됐구먼. 이젠 한번 차볼 텐가. 자네가 원하는 대로 만들었으니 날 원망
하지 말게나. 어이쿠! 손 베겠다, 이거."
너스레를 떨며 노인이 일휘에게 철로 만들어진 다리를 내밀었다.
기묘한 모양이었다. 무릎 밑 종아리 부분은 십(十)자 모양으로, 아래쪽으
로 갈수록 그 폭이 점점 좁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십자 모양의 끝에는
시퍼런 날이 서 있어 예리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또한 발 역할을 하게 되는 철판도 특이했다. 크기와 모양은 발과 같이 생
겼는데 뾰쪽한 앞축과 뒤축, 그리고 양옆도 전부 벼려진 칼날이었다. 한마
디로 일휘의 새로운 다리는 전부가 무기로 만들어진 거였다. 다리를 만들기
시작할 때 일휘가 했던 주문이었다. 왼다리는 사용이 불가능하다 할지라도
, 오른쪽 다리는 사용할 수 있게 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익숙해지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릴 터이지만 삼 년의 시간 동안 해내야
할 일인 게다.
다음 날부터 일휘의 훈련이 시작되었다. 밤낮이 따로 없었다. 밤에는 오직
운공을 하며 내공을 회복하는 데 전력을 다했고, 낮에는 철각을 익숙하게
사용하기 위한 연습에 모든 노력을 집중했다.
그가 수련 장소로 택한 곳은 해남도의 중심에 우뚝 솟은, 다섯 개의 봉우
리가 손가락 모양처럼 생겼다 하여 오지산(五指山)이라 불리는 곳이었다.
약간의 경공을 이용하여 오지산에 당도하면 그때부터 등산이 시작된다. 거
의 칠백 장에 달하는 높이를 가지고 있지만, 곳곳에 산재해 있는 절벽과 무
수한 덩굴로 둘러싸인 십여 장 높이의 나무들은 수련을 위해선 천혜의 조건
이었다.
가장 중점적으로 하고 있는 수련이 새롭게 만들어진 철각에 강기를 불어넣
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아직은 자신의 몸으로 완전하게 인식하지 못
했는지 여전히 따로 노는 기분이었지만 어느 때보다 편했다. 뭔가 할 수 있
다는 느낌, 해낼 수 있다는 기분이 전신을 감싸고 있었다.
오지산 등반을 마치고 나면, 그 다음에는 해변에서의 백사장 훈련이 기다
리고 있었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지만 딱딱한 지면인 산과 달리, 쑥쑥 빠
지는 백사장은 걷는 데 새로운 기술을 익힐 수 있는 장소였다. 부드러운 곳
에서 철각을 이용하는 방법이었다. 평범한 사람 같으면 그런 과정이 필요
없겠지만, 순간순간 죽음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무인이기에 익힐 수 있을
때 모든 경우의 수를 접해봐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하루 일과의 마지막은 그에게 다리를 제공해주었던 대장간에서 마
무리를 했다. 지금은 풀무질보다 앞으로 사용할 무기를 만드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소모하고 있었다.
"자네에게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예전에, 그러니까 자네들에게 잡히기 전
에 사혼창이라는 자를 만난 적이 있었네. 그 친구가 가지고 있던 사혼창은
손잡이 부분을 제외한 창간 전부에 칼날을 달고 있었다네. 창과 검의 역할
을 할 수 있는 무기를 스스로 만들어낸 거지."
일휘가 도를 사용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해준 말이었다. 처음 일휘를 구
했을 때 그가 했던 말처럼, 보법이 죽어버린 일휘는 더 이상 도를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도나 검은 빠르게 움직이면서 휘둘러야 그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병기가 아닌가. 물론 철각을 이용하여 빠른 보법을 펼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아무리 익숙하다 하더라도 원래의 다리만 못한
법이다.
결국은 죽어버린 보법을 보강하기 위해서 단병기가 아닌 장병기를 선택해
야 하는데, 이제 와서 창술을 배울 수도 없는 일이고 보니 창과 도를 합친
모양을 고안해냈던 것이다. 그때 패웅의 머리를 스쳤던 생각이 사혼창 도양
상이었다. 창을 변형해버렸기에 창의 최고 경지라는 환영창을 얻질 못했지
만, 일휘는 원래부터 도를 사용했기에 문제가 없을 터였다. 오히려 보법의
문제를 해결하는 최상의 방법인 것이다.
땅! 땅!
해서 일휘가 직접 자신의 무기를 만들고 있었다. 일 장 길이의 창을 이용
해 양끝으로 날을 세우고 있었던 거였다.
"철을 이용해서 물건을 만들 때는 혼을 담아야 하네. 비록 그 물건이 집에
서 쓰는 하찮은 식칼이라 할지라도 말일세. 마음을 싣지 못하면, 그놈은 결
국 자신을 만들었던 사람에게 화풀이를 하게 되지."
대장간 노인이 해준 말이었다. 단순히 대장간에서 물건을 만들 때만 적용
되는 말이 아니었다. 살아가면서 행하는 모든 일에 정성을 다하라는 의미였
다. 삶의 철학이었다.
조금씩 모양을 잡아가는 무기를 쳐다보던 일휘의 얼굴에 만족한 미소가 어
렸다. 이제 며칠만 있으면 새로운 무기가 완성될 터였다.
과거의 무공을 회복하는 일은 아직 요원하지만 패웅의 말처럼 많은 시간이
있다. 시간이란 사용하기 나름이라는 것을 알았다. 마음만 먹으면 일 년을
십 년처럼 사용 가능한 게 시간이었다.
매일매일 단조로운 생활인 것 같았지만 일휘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아니었다. 미약했지만 없어졌던 내공이 조금씩 돌아오고 있었고, 새롭게 생
긴 철각에서도 붉은빛이 어리기 시작했다.
철각이 자신의 다리가 되어가고 있다는 증거였던 것이다.
"완성했구먼."
드디어 원하던 무기가 완성되었다. 패웅의 철창보다 조금 긴, 일 장 이 척
의 길이였다. 가운데 사 척은 손잡이였고 양끝의 사 척은 칼날을 만들었다.
어떻게 보면 좁은 날을 가진 미첨도 두 자루를 붙여놓은 것 같았다.
"구혼도(九魂刀)라 지었습니다."
자신과 같이 운남행 마차를 탔던 아홉 형제들의 혼백을 담았다 하여 구혼
도라 지었다. 앞으로 그들의 혼백이 담긴 이 구혼도와 함께 복수를 하고 다
닐 것이다.
"보아라! 이놈이다! 너희들의 혼과 나의 혼을 담았다!"
구혼도를 집어든 일휘가 자신의 팔목을 향해 슬쩍 내리그었다.
아침햇살을 받아 선연하게 빛나는 핏줄기가 솟아오르고, 그 피를 새롭게
만들어진 구혼도에 먹이기 시작했다. 과거 뇌룡현에서 했던 피를 먹이는 형
제의식을 이곳 해남도에서도 홀로 행하고 있었다.
"자, 보게! 창이란 무조건 휘두른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네. 흔히 백일창
이라고들 하지만 그건 창을 다루는 기술이 몇 가지 안 되기 때문이지. 허나
그 몇 가지 안 되는 기술에서 나오는 응용은 검이나 도가 따르질 못한다네
."
묵창을 들고 있던 패웅이 가볍게 모랫바닥을 향해 내리쳤다.
"단순하게 때리는 것 같지만 여기에도 두 가지 방법이 있다네. 첫 번째는
땅에서 올라오는 반동을 이용해서 창을 퉁겨 위를 찌르는 방법이고, 두 번
째는 창은 그대로 둔 채 몸을 튕겨 올리는 방법이지."
경이로운 광경이었다. 찌르기 외에는 뭐가 있을까 하였던 창에서 무궁무진
한 변화가 생겨나고 있었다. 자신이 사용했던 도와는 또 다른 묘용이었다.
들고 있던 무기에 의존해 몸을 움직이는 기술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단병
기인 도나 검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광경이었던 것이다.
"자네는 무기가 두 가지네. 철각이 있다는 말이지. 허공으로 솟구쳐 오르
는 행위 역시 공격의 한 가지라 할 수 있네."
평생을 창만 연구한 사람답게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창의 단
점마저도 완벽하게 파악하여 보안할 수 있는 방법마저도 찾아두고 있었던
터였다. 장병기를 처음 다루어보는 일휘에게 있어서 패웅은 누구보다 훌륭
한 사부가 되었다.
"왜 저를 도와주시는 겁니까?"
일휘가 가장 궁금해하는 것이었다. 어떻게 보면 자신들과는 하등 상관이
없는 사람이 패웅이었다. 아니, 오히려 원수라 해야 옳았다. 그런 사람이
두 번이나 목숨을 구해주었고 철각에, 무기까지 주었다. 물론 다리는 대장
간 노인이 만들어주었고 구혼도는 자신이 직접 만들긴 했으나, 패웅이 없었
다면 지금의 자신은 없었을 것이다.
"자네들은 왜 나를 살려주었나?"
"처음 저희들은 대협을 죽이자 했었습니다. 갈노인이 살려준 거지요."
"어찌 되었든 나는 살아 있지 않은가. 그런 게 인연이라면 인연이겠지."
묘한 인연이다 싶었다. 저들에 의해 목숨을 구했고 깨달음을 얻었다. 결국
고향을 찾아오다 저 친구의 목숨을 구하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돌
고 도는 인생이란 말을 하는 것인지, 인연이란 참으로 불가사의하다는 생각
이 들었다.
"이건 내가 만든 창술의 보법일세, 도움이 될 걸세."
단순한 보법만이 아니었다. 패웅의 일생이 그 책자 안에 들어 있었던 거였
다. 그러나 책자를 받아든 일휘의 표정이 기괴하게 변했다.
"경지에 이른 자네에겐 필요 없을지 모르지만……."
"그게 아니고……."
오해하는 것 같아 재빨리 말을 잘랐지만 뭐라 할 말이 없었다. 평생의 심
득을 전해주겠다는 뜻은 알겠는데, 자신에게는 그림의 떡일 뿐 아닌가. 책
이라는 건 알지만 속에 있는 내용을 알 수 없다. 일휘와 광견조원들의 비애
인 것이다. 글을 모른다는 사실.
"허허! 정말 글을 모른단 말인가!"
패웅의 얼굴에 어이없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심검의 경지를 이룬 사람이
일자무식(一字無識)이었다니 가히 경악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더구나 혼
자만 글을 모르는 게 아니라 일행 중 가장 강했던 친구들이 전부 글을 모르
고 있다는 말이 아닌가.
"세상 사는데 글이 굳이 필요하오? 지금껏 아무 불편 없이 잘만 살았는데
…. 몸으로 배우는 건 자신 있소."
"그래서 끝까지 글을 안 배우겠다 이건가?"
"안 배우겠다는 게 아니고 시간이 없다는 거지요."
이제 이 년 반밖에 남지 않았다. 아니, 돌아갈 시간을 빼면 그 정도도 안
된다. 지금보다 더 많은 시간을 무공 익히는 데 사용해야 하기에 글 배울
시간은 없는 것이다. 오직 무공, 무공에 모든 것을 쏟아야 할 때이다.
"서두른다 해서 일이 이루어지는 건 아니네, 잔말 말고 하루에 한 시진 정
도라도 글을 배우게."
"그게……."
일휘의 얼굴이 곤혹스럽게 변했다. 몸으로 때우는 거야 자신 있지만, 손으
로 무엇인가를 그리며 배운다는 건 영 체질이 아니었다. 왜인지는 자신도
알 수 없었지만 책을 보면 졸리는 걸 어쩌란 말인가.
"그도 무공이라 생각하면 되는 게야."
"…알겠소."
패웅의 엄한 말에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무공이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 저런다는 걸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평생의 심득을 전해줄 후계자
로 자신을 선택한 거였다.
"이제야 좀 자네다워졌구먼."
일휘의 달라진 말투에 패웅이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몸을 돌렸다. 이제 혼
자서 익히도록 두어야 한다. 구혼도라는 무기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 그
때부터 필요한 사람이 자신인 것이다.
돌아서는 패웅을 쳐다보던 일휘가 늘 하던 일을 시작했다. 오지산을 등반
하는 일. 그러나 오늘부터는 그의 몸에 한 가지 물건이 더 늘어났다. 구혼
도. 형제의식을 거행한 무기였기에 언제나 한 몸처럼 움직여야 한다. 과거
뇌룡현에서 백산이 처음 시켰던 일이다. 신검합일을 이루는 과정이라 했던
그 짓을 하고 있는 것이다. 굳이 그럴 필요까지는 없지만 마음가짐 때문이
었다. 처음부터 새롭게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무공을 익히기 위해서였다.
빨라졌다. 불과 몇 개월 전만 해도 오지산을 등반하는 데 반나절 이상이나
걸렸던 그였지만 지금은 거의 한 시진 만에 올랐다. 또한 십여 장 높이의
고목들 위에 걸쳐 있는 덩굴을 건널 때도 자연스럽게 지나다녔다. 이제 더
이상 오지산을 오를 필요가 없다는 의미였다. 앞으로는 백사장에서 구혼도
를 휘두르는 수련과 내공을 회복하는 일에 모든 힘을 집중해야 함이다.
"타핫!"
"요홉!"
챙! 챙챙챙!
건장한 체격을 가진 두 명의 인물이 백사장을 가로지르며 서로의 무기를
휘둘러대고 있었다. 무서운 속도로 전방을 향해 나아가고 있지만 모래 위에
발자국이 남지 않는다.
일휘와 패웅이었다. 패웅의 경지야 과거와 전혀 변함이 없지만, 일휘의 무
공은 하루가 다르게 일취월장하고 있었다. 옆에서 지켜보는 패웅이 놀랄 정
도로 빠른 회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가공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글을 모른다 하였을 때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는 마음뿐이었는데 막상 가
르쳐보니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신이 한 번 시전해준 무공은
거의 바로 따라하고 있었다. 진기의 운행도 방법만 알려주면 그것으로 끝이
었다.
"묵령찰(墨靈札)!"
일휘를 따라서 움직이던 패웅이 자신의 묵창을 일휘의 미간을 향해 빛살처
럼 찔러갔다.
슈앙!
거센 창음과 함께 일휘의 허리가 뒤로 젖혀지고 그 위를 창두가 스쳐 지나
갔다.
"묵혼지절세(墨魂地切勢)!"
일휘의 몸통 위쪽에 머물러 있던 패웅의 창이 검은 기운을 머금은 채 아래
쪽을 향해 무섭게 떨어졌다.
"우욱! 엄청나군!"
창에서 밀려오는 강력한 힘 때문이었다. 단순하게 아래쪽을 향해 내려치는
타격이 아니었다. 전혀 피할 방향을 남겨두지 않는, 기다란 몽둥이일 뿐인
창이 허공을 완전하게 장악해버렸다. 수십 개의 창이 한꺼번에 쏟아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밀리면 진다. 부딪쳐나가야 한다."
몇 번의 비무에서 일휘가 깨달은 바였다. 불편한 다리의 약점 때문에 한
번 밀리기 시작하면 절대적으로 불리한 싸움이 되었다. 오직 전진하여 나아
가는 길만이 비무를 유리하게 끌어가는 방법이었다.
"혈극참!"
같은 명칭의 혈극참이지만 과거에 도를 사용하던 것과는 달랐다. 구혼도를
이용한 혈극참은 위로 찔러 올리는 방법으로 시전되고 있었다. 순식간에
수십 개의 도강이 생겨나며 패웅의 창간을 향해 밀려갔다.
과앙!
"우욱!"
비명을 토하면서도 쉴 수가 없다. 앞으로 내밀었던 구혼도를 뒤쪽으로 찔
러 넣으며 모랫바닥을 힘차게 찍었다. 마치 활이 구부러지듯 휘어진 구혼도
를 튕기며, 일휘의 몸이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혈극참!
위쪽으로 밀려 올라가는 패웅의 몸보다 구혼도의 반동으로 솟구쳐 오른 일
휘의 몸이 좀더 빨랐다. 솟구쳐 오르는 탄력을 이용하여 몸을 회전시키며
철각을 사용한 회선각을 펼쳤다. 도(刀)가 아닌 철각으로 혈극참을 시전한
것이다. 손에 의해 펼쳐지는 것보다 만들어낸 도강의 수효는 적었지만, 그
도강에 내재된 힘은 구혼도로 펼친 도강에 비할 바 아니었다.
엄청난 힘이 허공을 찢어버린다. 자신에게 밀려오는 붉은 강기덩어리들을
쳐다보던 패웅의 눈에 감탄의 빛이 어렸다. 이 또한 새로운 방법이었다. 발
에 의한 강기의 경지를 펼치고 있는 게다. 딱히 생각하면 이상할 것도 없는
무공이지만 강호상에 별로 사용하는 사람이 없기에 생소함마저 느껴졌다.
"묵혼극(墨魂極)!"
비무를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세 번째 초식을 펼쳤다. 지금까지는 일휘가
준비가 되지 않았기에 펼치지 못했는데 이제는 가능해졌다. 가진 힘의 구
할 정도까지 사용해도 일휘가 받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파바방! 카앙!
패웅의 창두와 일휘의 철각에 의해 만들어진 강기가 부딪히며 거친 굉음이
터져나왔다. 도양상과의 비무 때도 이미 보았지만 패웅의 창술은 진정 경
이로웠다. 단순히 찌르기만으로 일휘의 철각이 만든 도강기를 전부 차단해
버리고 있었다.
다시 구혼도를 이용하여 모랫바닥을 찍은 일휘의 몸이 이번에는 재주를 넘
듯이 허공에서 회전을 했다. 이어서 터지는 통렬한 외침.
"묵혼지절세!"
천지를 양단해버릴 듯 하늘에서부터 패웅의 머리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방금 패웅이 보여주었던 묵혼지절세에 비해 그 경지는 약해 보였지만 동작
이나 구혼도가 생성하는 강기는 거의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똑같았다.
"허허!"
패웅의 입에서 허탈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자신이 평생을 두고 터득했
던 무공을 너무도 쉽게 빼앗아가고 있었다. 이미 구술로써 진기의 운행방법
과 펼치는 방법을 알려주었다지만 그것이 열흘도 채 지나지 않았다. 아직은
어색하다 하더라도 그 습득 속도는 믿어지지가 않았다.
물론 일휘의 무공습득 속도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빠르기는 하지만
단지 천재적인 능력을 가진 것 때문만은 아니다. 오구에게 배운 박투술이
가장 중요한 기초가 되고 있었다. 검을 들고 있든, 도나 창을 들고 있든,
모든 무공의 기초는 두 팔이고 두 다리다. 즉 팔과 다리가 해야 할 행위를
검이 대신한다고 보면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무공동작의 가장 근간이
되는 행위는 박투술의 동작에서 유래하였다고 보아야 한다. 내기를 이용하
는 방법이 아닌 단순한 동작이라면, 박투술이 경지에 달해 있는 사람이 익
히는 속도는 빠를 수밖에 없다. 그 동작에 내기를 불어넣는 기술만 본인의
능력에 달린 것이다.
그러나 감탄만 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허공에 떠 있는 상태에서 묵혼극
보다 더 강한 무공은 펼칠 수도 없었다. 패웅에게 위기의 순간이 다가온 것
이다.
일휘도 그런 패웅의 상태를 알아차렸는지 약간의 미소마저 머금고 있었다.
이제야 대등하게 싸워볼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묵령찰!"
뜻밖에도 가장 위기의 순간에 패웅이 펼친 무공은 가장 약한 일 초인 묵령
찰이었다. 단 한 점을 향해 찔러가는 방법.
"헉! 무극도(無極道)!"
일휘가 경악스런 표정을 지으며 뒤로 물러났다. 해남도에 오기 전까지는
자신도 익히고 있었던 경지, 설마 창으로 무극도의 경지를 펼칠 수 있으리
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익숙함이라네. 검이 되었든 도가 되었든, 자신의 일부분처럼 익숙해지면
어떤 경지라도 가능한 것이네. 창으로 펼치는 이기어창이 있다면 또 어떤가
. 지레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에 할 수 없는 것일 뿐."
창술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일휘가 목매어 찾고자 하는 내공에 관한
말이었다. 몸이 기억하고 있으면 노력 여하에 따라서 찾아진다는 말이었다.
완전하게 비어버린 단전이 아닌 일정 부분만 없어졌기에, 새로 만드는 과
정이 아닌 잃어버렸던 것을 찾아오는 과정이기에.
"창술의 최고 경지라 하는 환영창을 얻는 방법이 무엇인지 아는가. 무심일
심이라 하네. 아무 생각 없이 무조건 매달려보게. 자네들은 잘하지 않나.
죽기 살기로 매달리는 방법 말일세."
"쿡! 안 그래도 그럴 참이었습니다."
스스로를 인정해야만 한다. 패웅이 자신의 상대가 안 되었던 때는 과거일
뿐이다. 그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면 더 이상 발전이 없다는 것도 알았다.
마음은 인정했다고 하면서도 머리로는 인정하지 못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패웅이 그것을 알아보았다. 현실을 인정하고 부족한 것을 먼저 찾으라는
말. 그것도 단순히 노력하라는 의미가 아니고 죽을힘을 다해 찾아내라는 것
이었다.
새롭게 시작한다는 마음을 가지고 수련에 임했음에도 어느 정도 힘이 돌아
오자 망각해버렸다. 아무것도 없었다는 사실을.
"그래, 한천팽무도법도 잊는 거다. 모든 능력이 돌아오면 어차피 다시 내
것이 된다. 한 번 잡은 놈은 절대 도망을 가지 못하니까."
지는 석양을 쳐다보며 백사장에 가부좌를 한 일휘가 다시 운공에 들었다.
잃었던 것을 찾기 위한 노력이 시작되었다.
* * *
부글부글!
까마득하니 그 끝을 알 수 없는 절벽 아래쪽에, 오 장 크기의 못으로부터
검은 안개들이 스멀스멀 솟구쳐 올랐다. 이상한 못이었다. 살아 있는 생명
체가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주변의 땅마저도 검은색이었다. 그리고 죽어버
린 그 땅을 기어가는 무수히 많은 곤충들, 대부분이 이곳 남만에 서식하고
있는 독물들이었다. 단순한 독물들이 아닌 최고의 극독을 가지고 있다는 그
것들, 그 독물들이 끊임없이 검은 못을 향해 움직여가고 있었다.
만독지(萬毒地). 독공을 익힌 자들이 꿈에서라도 발견하기를 원하는 절대
독지가 바로 이곳이었다. 인간이라면 살 수 없다 하였던 이곳에 사람이 살
고 있었다.
"클클클! 오늘은 이놈들이 약을 좀 많이 흡수했나 모르겠네."
절벽 아래쪽에 있는 동굴 속에서 쉰 듯한 노인네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등
에 붙어 있는 불쑥 튀어나온 혹에 작달막한 키, 선천적인 꼽추임을 나타낸
흔적이리라.
고개를 들어 밖을 쳐다보는 꼽추의 얼굴은 수년 동안 햇빛을 보지 못했는
지 시체처럼 새하얗다. 밖에 있는 검은 못과는 전혀 상반되는 얼굴이었다.
독인마타(毒人魔駝). 과거 뇌룡현에 있던 만상투인루에서 귀혼마강시를 만
들던 독인마타가 그 폭발 속에서 죽지 않았는지 생생한 얼굴로 자신 앞에
놓여 있는 검은 시체들을 주물거리고 있었다.
"그때는 운이 좋았지."
연동립의 명령으로 귀혼마강시의 상태를 확인하러 갔던 그가 대월산에서
강시를 주살하고 다니던 무인들을 발견했던 거였다. 그런데 그들의 무공이
엄청났다. 전부 도강ㆍ검강을 사용하고 있는 자들이었다. 오랜 강호 경험에
의해 그들이 위험한 자들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었고 그 길로 바로 떠
났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만상투인루가 있던 곳이 폭약에 의해 무너졌고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하였다. 그리고 연동립의 죽음도. 결국 그가 기댈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해서 과거 사문이 있던 독문(毒門)으로
돌아왔다. 아무도 없는 이곳에서 생활하다 계곡 깊숙이 숨겨져 있던 검은
못을 발견한 거였다.
아울러 독문의 최대비전인 독공까지.
"클클! 앙천혈독공(殃天血毒功)이란 무공이다, 이놈들아."
두 개의 석관 속에 들어 있는 인물들을 향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살아
있는지, 아니면 죽었는지도 알 수 없는, 검게 변해가고 있는 이 인을 마치
자식이라도 되는 양 사랑스런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과거 만상투인루
에서 귀혼마강시를 만들 때 보여주었던 바로 그 표정.
섯다와 모사였다. 광견조원들이 끌고 왔던 마차의 마지막 인물들, 소살우
와 소운을 내려두고 남만을 향해 마차를 몰았던 이들이 왜 이곳에 와 있는
것인가. 그리고 시커멓게 변해 있는 피부는 또 어떻게 된 것인지, 마치 귀
혼마강시를 보는 것 같았다.
"네놈들은 귀혼마강시하고는 격이 달라! 너희들에 비하면 귀혼마강시는 애
들 장난 수준이라고. 이 독인마타가 최고의 작품을 만들어낼 것이다. 영원
불사의 천독마강시를……."
독인마타의 입에서 천독마강시라는 이름이 흘러나왔다. 강호무림인들이 들
었다면 경악할 만한 이름인 것이다.
천독마강시. 강시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에게 무림역사에 등장한 강
시 중 최고를 꼽으라면 당연 천독마강시를 꼽을 것이다. 물론 현 무림에서
가장 강한 강시는 오십 년 전에 나타났던 사혈마강시를 언급하지만, 그건
천독마강시를 제조할 수 없었기에 나온 말일 뿐이었다.
천독마강시를 제조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전설의 만독지와 앙천혈
독공이라는 독공이다. 그런데 만독지가 흔하게 찾을 수 있는 그런 장소가
아니다. 오죽했으면 전설이란 말까지 나왔을 것인가. 설사 만독지를 찾았다
하더라도 일반인은 접근조차 할 수 없는 곳이라, 천독마강시를 만든다는
것은 정말 요원한 일인 것이다.
"왜 과거에 무림에서 독문을 공격했는지 아느냐. 바로 앙천혈독공 때문이
었다. 우리 독문의 시작은 천오백 년 전이었다. 독천가(毒天家)라는 곳이었
지. 내려오는 말에 의하면 사신가라 하는 놈들의 가신이었다고……."
독인마타의 독백 또한 놀라운 말이었다. 천오백 년 전 천하를 지배했던 육
대 천가 중 한 곳이 바로 독문의 시조였던 것이었다. 바로 백산의 광혈지옥
비 중 독천비의 힘의 기원이 되었던 천가, 그 천가가 아직도 명맥을 유지하
고 있었다. 이곳 남만(南蠻)의 오지에서.
"그런데 우리 독문에 중원무림인이 나타났다. 한 놈이었지, 그가 독문 문
도의 절반을 도륙하고 귀혼마강시 제조법이 적힌 책자를 훔쳐서 달아나 버
린 거다."
그 때문에 독문에선 귀혼마강시를 제조하여 중원에 풀어버렸다. 그러나 중
원무림에 복수하겠다는 그들의 염원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자파의 멸
망만을 불러오고 말았다.
"그런데 이젠 방법을 찾았다. 우연히 왔던 이곳에서 독문의 최대비공인 앙
천혈독공을 찾았고 만독지까지 있으니 말이다. 그놈에게 복수가 가능하다
이 말이 아니겠느냐."
독인마타의 얼굴에 희열의 빛이 떠올랐다. 앙천혈독공과 만독지를 찾은 그
는 하늘을 얻은 듯 기뻐했다. 이 두 가지만 있으면, 독공을 익힌 고수들이
꿈에도 그리던 독성지체(毒聖之體)를 이룰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아울러 그
의 짐이었던 혹을 떼어버릴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물론 앙천혈독공을
완전하게 익혀 환골탈태를 했을 때만 가능한 일이겠지만.
그러나 독공 수련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절망에 빠지고 말았다. 불
완전한 무공. 천하제일의 독공이라 여겼던 앙천혈독공의 후반부가 없었던
것이다. 천하제일은 고사하고 독성지체조차도 꿈이 되어버렸다. 남아 있는
앙천혈독공으로 익힐 수 있는 독공의 경지는 독인이었다.
독인도 강한 경지이기는 하지만 독성지체와는 천양지차다. 독성지체가 인
간이라면, 독인은 괴물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이다. 섭취하는 음식물도 독밖
에 없고 인간 자체와 접촉이 불가능한 신체, 심지어는 입김과 콧김이 전부
절대독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네 녀석들이 하늘에서 떨어진 게야. 최고의 조건을 갖춘 너희들이
말이다."
절벽 위에서 떨어진 두 명을 받아든 독인마타는 새로운 희망에 부풀었다.
앙천혈독공의 전반부에 적혀 있는 천독마강시를 제조할 희망이 생겼기 때문
이었다. 더군다나 위에서 떨어진 자들이 엄청난 무공을 가진 자들이었다.
비록 모든 내공을 써버려 단전이 텅 비어 있었지만 그 편이 천독마강시를
만드는 데는 훨씬 유리한 조건이었다. 텅 빈 단전에 만독지의 독기를 바로
채워버릴 수 있었기에.
일 년 동안 녀석들의 몸에 독기운을 채우는 작업만 했었다. 앙천혈독공에
적혀 있는 방법대로만 할 뿐 그로선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귀혼마강시 제조
와는 근본적으로 달랐기 때문이었다. 지금껏 해온 작업은 녀석들의 단전에
만 독기를 채우는 일이었다. 일반적인 방법은 되지 않았고 피부에 의한 흡
수만 가능했다.
"이제 한 가지만 남았다. 네놈들의 피를 만독지의 독기운으로 바꾸어 독혈
을 만드는 것이다."
마지막에 해당하는 작업이고 또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그 일을 마친 후
천 일 동안 만독지 속에 담가두면 천독마강시가 완성된다. 자신의 말을 듣
는 절대강시가.
"그런데 왜 아직 검은색이 나오지 않는 거지?"
사실 독인마타가 가장 고민하는 부분이었다. 천독마강시 제조법의 일 단계
를 마무리했는데도 녀석들의 상태가 책에 나온 사실과 차이가 났다. 아직
인간의 피부를 간직하고 있었던 거였다.
섯다와 모사의 상태가 그랬다. 둘의 피부가 마치 햇볕에 그을린 사람처럼
검게 변하기는 했지만 아직 원래의 색을 잃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앙천혈
독공에 있는 그대로 시행했는데 결과가 다르게 나왔기에 며칠 동안을 고민
하고 있었던 터였다.
독인마타의 잘못이었다. 두 사람이 과거에 중화독지대라는 장소에서 기연
을 얻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고, 고민을 하고 있던 며칠이 두 사람의 정신
을 돌아오게 하는 시간이었다는 사실도. 그곳에서 만독불침에 달하는 신체
를 얻었기에 만독지의 독에도 저항력을 보이고 있었던 것이었다.
"아따, 그 새끼 앙천혈독공인가 뭔가 하는 놈 구결이나 좀 읊을 일이지."
"허억!"
갑자기 들려오는 말소리에 독인마타가 경악스런 표정을 지으며 한 걸음 물
러났다. 늙어서 환청이 들리는 게 아니라면 분명 강시를 만들 재료에게서
들려오는 말소리였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이성이 없어야
할 자들에게서 인간의 목소리라니.
왼쪽에 있던 관에서 한 인물이 벌떡 일어나더니 재빨리 독인마타의 혈도를
집었다. 모사였다. 그동안 혼미한 상태 속에서 자신의 몸에 무슨 일이 일
어나고 있음을 알았으나 그것이 현실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거였다. 계속
해서 만독지 속에 담가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외부에 나와 있는 시간이 길어졌고 드디어는 완전히 정신
이 돌아왔다. 광견조원들 중에서는 그래도 신중한 편에 속했기에 가장 먼저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이상한 대법에 걸려 있다는
것도 알아차렸다. 단전을 가득 채우고 있는 이질적인 기운은 결코 자신의
내공이 아닌 터였다. 그래서 방법을 찾아보고자 늙은이가 하는 말을 듣고
있었는데 강시를 만든다는 말을 듣고 바로 독인마타를 제압했다.
"일어나, 새끼야!"
바로 옆 관에 누워 있는 섯다의 머리를 툭 치며 소리를 지르자 빙그레 웃
으며 섯다가 관에서 몸을 세웠다.
"이런 씨벌 놈, 죽지도 않았는데 벌써 관에다 집어넣어?"
순식간에 몸을 날린 섯다가 독인마타의 입을 향해 발을 날렸다.
우두둑!
독인마타의 모든 이가 부서져 내렸다. 자결을 방지하기 위한 광견조만의
방법이었다.
"어라! 힘이 더 좋아졌다야?"
놀랍게도 두 사람의 내공이 과거에 비해 더욱 높아져 있었던 것이다. 그게
만독지의 독 때문이란 걸 아직 알아차리지 못했다.
"말해!"
"어떻게……."
아혈이 풀렸고 입 안이 완전하게 부서졌다는 것도 인식하지 못했다. 다만
강시대법의 마지막만을 남겨두고 있었는데 어째서 이들이 멀쩡하니 정신을
차렸는지, 그 이유가 더 궁금했다. 앙천혈독공이 잘못되었다고는 생각할 수
가 없었다. 거의 칠백 년 만에 찾은 문파의 비전비공인 게다. 잘못된 무공
이 만독지 옆에 있을 리 없지 않겠는가.
"등에 있는 혹을 전부 깎아버리기 전에 말하라 했다."
"뭘……?"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독인마타가 막연히 중얼거렸다. 느닷없이 깨어
난 것도 기가 막힌 일인데 무작정 말하라고 한다.
"이런 개새끼가."
독인마타를 향해 한 걸음 다가가는 섯다의 손바닥이 검붉게 변했다. 강기
였다. 만독지의 독기운 때문인지 과거의 붉은색은 나오지 않고 검은 묵광
사이로 붉은 기운만이 은은히 비쳐나왔다. 그런 그의 손이 더욱 강하게 느
껴졌다.
"아, 알았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말을 더듬은 독인마타가 지금까지의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
했다. 하늘에서 떨어진 두 사람을 자신이 간신히 받은 일이며, 천독마강시
를 만들기 위해 만독지에 집어넣었던 일, 그리고 독문에 관한 사항까지.
"그러니까 네 녀석이 귀혼마강신가 하는 그 괴물을 만든 장본인이라고?"
"쿡! 정말 좆같은 인연이구먼."
모사가 나직한 웃음을 토해냈다. 대월산에서 내기를 했던 그 강시를 만든
장본인이 자신들을 구해냈다는 말이었다.
"그거 아냐? 그 사신가의 새낀가 하는 놈이 각인대사란 중놈이었다는 걸?"
"그가 천무맹 인물이라는 것은 알았네. 그래서 연동립에게 협조했었고."
독인마타의 얼굴에 회한의 빛이 서렸다. 놈의 정체는 정확하게 몰랐지만,
귀혼마강시의 제조법이 천무맹에서 왔다고 했을 때 과거 독문에 침입했던
자가 그곳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더욱 열성적으로 강시 제조에 매
달렸다. 그놈들로 하여금 강호를 쓸어버리게 하려는 마음에서였다.
"좋소. 이젠 우리의 상태를 말해보시오."
섯다의 얼굴이 처음보다 많이 풀어졌다. 알고 보니 꼽추노인도 피해자였다
. 광풍대원들과 똑같이 천무맹에 의해 한이 맺혀 있는 사람이었다. 더구나
추몽하고 똑같은 꼽추.
"자네들 상태는 나도 잘 모르네. 단지 만독지의 독에 영향을 별로 받지 않
았다는 것밖에는…. 혹시 만독불침인가?"
가능성이라고는 그것밖에 없었지만 그 또한 이상한 일이다. 만독불침이라
면 만독지의 독에 의해 중독현상이 나타나지 말아야 한다.
"맞다. 혹시 중화독지대?"
"설마……."
"그랬소. 일 년 전쯤 우리 둘은 중화독지대라는 곳에 들렀던 적이 있었소.
물론 많은 독물을 생으로 잡아먹었고."
"그 때문이네. 자네들은 거의 만독불침에 근접하는 몸을 가지고 있었기에
만독지의 독이 상당 부분 중화되어버렸던 것이네."
단지 그뿐만이 아니었다. 섯다와 모사가 익힌 내공심법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터였다. 팽무도가 만든 내공심법에는 혈뇌문의 내공심법도 포함되
어 있었기에 만독지의 독기를 조금씩 내공으로 만들어가는 역할을 해주고
있었다. 두 사람이 정신을 차릴 수 있었던 원인이 바로 중화독지대와 익히
고 있던 내공심법이었다.
"이젠 말해보시오. 어떻게 해야 할지를."
"자네들은 이미 독인이 되어가고 있네. 다시 되돌릴 수도 없고."
"독인이 되면 얼마나 강해지오."
"과거의 수준은 어느 정도였는가."
"이기어도인가 하는 것까지 해보았소. 한 번에 삼십 명 정도가 한계고."
"고수였군."
독인마타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고수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기어
도까지 구사하는 무인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거의 초극에 달하는 경지에
있는 자들이었다.
"자네들이 날리는 검에 독공을 실어 보내면 어찌 되겠나."
"좋소, 구결을 불러주시오. 그놈을 없애주겠소."
"약속할 수 있겠나."
"우리를 이렇게 만든 놈이 그놈들이오. 담운천과 각인대사, 그리고 제갈
년."
섯다의 몸에서 전율적인 살기가 흘렀다. 마지막으로 이사를 보냈다. 자신
이 형이라며, 형님에게 우선순위가 있다며 먼저 갔다. 고맙다는 말도 하지
못했다. 다만 다음에 보자는, 또 만나자는 말만 남기고 도망을 쳤다.
그런데 독인이 된다고 한다, 인간이 아닌 괴물이.
"상관없지, 강해진다는데."
독인이면 어떠랴, 괴물이면 어떠랴. 죽어간 녀석들에게 부끄럽지만 않게
되었으면 그걸로 된 거다.
"야, 그거 아까워서 어쩌냐?"
모사가 빙긋 웃으며 섯다의 아랫도리를 가리켰다. 광견조원들 중에서 최고
의 성능을 발휘했던 섯다의 물건이 검은색으로 변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괴
물의 그것처럼.
"제갈수연, 그년의 속에다 확 박아버릴까 보다."
"그거 좋은 방법이다. 하지만 안 돼. 그년은 형님 몫이야. 마지막 남은 광
천뢰 몫이고."
"영감! 검은색으로 변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시오."
남만의 오지, 과거 독천가의 후예가 있는 독문의 성지에서 두 복수자는 힘
을 기르는 작업을 시작했다. 힘을 기르기 위한 그들만의 방법은 독인. 움직
일 때마다 주변의 생명체가 사라지는 괴물이었다.
* * *
"오랜만에 보는 달빛이군."
일휘가 있는 해남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동사군도(東沙群島). 그곳의
동쪽 해변에 곧 쓰러질 듯한 초막 안에서 나직한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파도에 부서지는 달빛을 막연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 인물. 오른손 팔꿈
치 아래를 잘렸던, 석두를 데리고 바다로 뛰어들었던 여풍기였다.
두 사람이 이곳에 도착한 지 삼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석두는 잘린
팔을 제외한 모든 것을 되찾았고 무공마저도 완성했다.
그러나 중원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하루하루 죽어가는 여풍기 때문이었다. 단전이 파괴된 상태에서 이곳까지
석두를 데리고 왔던 후유증이었다. 벌써 죽음의 나락으로 떠나야 했던 그가
초막 한켠에 누워, 지난 삼 년 동안 석두의 부활과정을 지켜보고 있었다.
"몸은 좀 어떠냐?"
이제는 안타까워하는 것도, 미안해하는 것도 그만두기로 했다. 오직 바다
밖에는 그 무엇도 없는 이곳에서 여풍기를 치료할 방법도 없었거니와 마을
에 있던 돌팔이 의원조차도 이미 기가 빠져나간 사람이라며 쳐다보지 않았
다.
"쿨럭! 쿨럭!"
격렬한 기침을 쏟아내는 여풍기의 손바닥 위로 붉은 피가 흥건히 떨어졌다
. 각혈을 시작한 지도 삼 년이 지났다. 이곳에 도착한 해부터 시작된 각혈
은 해가 갈수록 심해졌고 이제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피를 토해내고 있다.
"오늘은 최고요. 힘이 솟는단 말이오."
여풍기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그동안은 죽을 수가 없었다. 먼저
간 녀석들에게 해줄 말이 없었기에 생명의 끈을 붙들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말할 수 있다. 피를 토하면서도 형님의 모든 것을 지켜보았노라고,
너희들이 흘린 피만큼 나도 흘렸노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 석두 형님
이 모든 무공을 완성했으니 복수할 걱정은 하지 말라고 말할 수 있다.
"이번에 새로 만들어온 놈 한번 끼워보시오."
두 사람이 앉아 있는 바로 옆에 검은 묵철로 만들어진 둥그런 모양의 쇠뭉
치가 놓여 있었다. 석두의 잘린 오른팔에 끼워질 의수였다. 잘려진 팔꿈치
에 끼워 넣는 부분은 일반의수와 같은 방식이었지만 그 끝에 있는 것은 아
니었다. 검이었다. 전부 아홉 개의 검이 연결된, 마치 구절편 모양으로 된
일 장 길이의 기다란 검이었던 것이다.
그동안 보통의 무쇠로 된 의수를 사용했었는데 염기 때문인지 많은 녹이
슬어 얼마 사용하지도 못하고 버려야 했었다. 그런데 육 개월 전에 진주조
개가 있는 군락을 발견하였고, 그곳에서 채취한 진주로 최고의 철을 주문할
수 있었다. 해서 만들어진 무기를 지금 석두에게 차보라고 하는 것이었다.
"좋다."
석두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어렸다. 지금껏 많은 의수를 끼어보았지만 최
고의 착용감이었다. 과거에 쓰던 것보다 좀 무거워졌고, 살기 또한 더 강해
졌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다. 자신의 분노를 바로 토해낼 수 있
을 것 같았다. 오른팔에 내공을 주입하자 힘없이 늘어져 있던 검이 일직선
으로 펴지며 붉은 광망을 토해냈다.
"광살검(狂殺劒)이오."
여풍기가 곧바로 검의 이름을 말했다.
처음 석두의 팔에 검이 끼워질 때부터 생각해두었다. 자신이 조장으로 있
던 광살조를 그대로 딴 것이다. 미쳐버린 살기를 쏟아내라는 뜻이었다.
"맨 마지막 검에는 나의 이름을 새겨주시오."
아홉 개의 마디로 만들어진 각각의 검에는 먼저 떠났던 광살조원들의 이름
이 하나씩 적혀 있었다. 가장 먼저 죽은 만열이는 맨 앞마디에, 그 다음부
터 순서대로 적었다.
그리고 석두의 손이 되고 있는 마지막 마디에는 여풍기란 이름이 적힐 것
이다.
"보여주시겠소? 광살(狂殺)의 춤을……."
"풍기야……."
광살검이라 명명된 의수를 쳐다보던 석두가 안타까운 눈으로 여풍기를 응
시했다. 마지막 부탁을 하고 있다. 녀석이 드디어 여행 떠날 준비를 하는
것이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긴 여행을…….
"급하오, 형님!"
힘없이 중얼거리던 여풍기가 몸을 일으켰다. 지켜보고자 함이다. 지금껏
이 순간을 위해 버텨온 세월이었다.
"그래……!"
안타까운 눈으로 여풍기를 주시하던 석두의 몸이 달빛 부서지는 백사장으
로 날았다.
"보아라, 풍기야. 이 광살검이, 미친 검이 춤추는 것을 보아라."
잔잔하게 일렁대는 바다를 배경 삼아 석두의 춤이 시작되었다.
일 장 길이에 달하는 붉은 광살검이 하늘을 향한다. 허공으로 솟구쳐 오르
고, 이리저리 휘감기며 핏빛 안개를 토해낸다. 앞으로 뻗어진다 싶으면 고
개를 돌려 뒤를 찌르고, 뒤쪽에서 일렁인다 싶으면 어느새 하늘을 찢는다.
검이 가자 몸이 따르고, 몸이 따르자 마음이 간다. 휘감치는 손길에 형제의
웃음소리가 들리고, 뿌리치는 발끝에 형제의 슬픔이 떠난다. 울부짖는 목
소리에 형제들의 한이 맺히고, 터져나가는 고함소리에 형제들의 눈물이 따
른다.
"새끼들아, 보이냐. 저 아름다운 모습이 보이냐고! 눈을 크게 뜨고 보란
말이다! 저 광살검이 세상을 찢어내는 것을 똑바로 보란 말이다!"
석두의 모습을 지켜보던 여풍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하늘을 향해 삿대
질을 하며 고함을 내질렀다. 자신의 할 일을 다 했다는, 원하던 모든 것을
다 이루었다는 환희의 표정이었다.
"구천광살무(九天狂殺舞)요, 구천광살……."
석두가 펼치는 검법을 보며 구천광살무라 외치던 여풍기의 목소리가 점점
잦아들었다. 서 있던 자세가 풀리며 무릎이 서서히 꿇려지고 있지만, 그의
시선은 석두의 모습만 좇고 있다. 단 한순간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구천광살……."
끝내 말을 맺지 못했으나, 아는지 모르는지 석두의 춤사위는 멈추지 않았
다. 오히려 더욱 격렬해지며 사방을 향해 폭풍 같은 기세를 쏟아냈다. 백사
장 위에 있던 그의 몸이 어느새 수면 위로, 수면 위에서 춤추던 그의 몸이
다시 백사장으로, 붉은 광채를 쏟아내는 석두의 춤사위는 끝날 줄을 몰랐다
.
"구천광살무(九天狂殺舞)!"
떠오르는 태양과 함께 석두의 입에서 한스러운 외침이 터지고 엄청난 기운
이 뻗어나갔다. 잔잔하던 수면이 수십 수천 조각으로 잘리며 붉은 파도를
만들어냈다. 마지막 분노를 토해냄과 동시에 석두의 춤사위는 끝났다.
"풍기야, 뇌룡현으로 간다. 팽가에 먼저 가서 기다려라."
태양빛을 받아 환하게 빛나는 여풍기를 뒤로한 채 석두는 끝없이 이어진
백사장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부활의 노래.
살아남은 광풍대원들의 부활의 노랫소리는 중원 구석구석에서 울렸다. 남
만에서는 섯다와 모사가 독물을 깨물며 노래를 불렀고, 해남도에서는 일휘
가 고함을 질렀다. 동사군도에서는 석두가 죽음의 춤을 추었고, 감숙성 홍
석산의 한 동굴에서는 붉은 기운이 일렁이는 뇌전(雷電)이 울었다.
그러나.
생존한 모든 광풍대원들에게서 울려 퍼지는 노랫소리가 단 한 곳에서만 들
려오지 않았다.
뇌룡현. 용미폭포 안쪽에 있는 조그마한 분지, 그 안에서는 백산의 외침
대신 소운의 중얼거림만이 들려왔다.
오늘은 비가 왔어요.
당신이 가장 싫어했던 그 비가 하염없이 내렸어요. 빗줄기를 따라 천영 언
니와 추렴 언니, 소령이의 소식이 왔어요. 잘 지내고 있다고.
당신에게 고맙다고. 마지막 얼굴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고 하네요.
저보고도 빨리 오라는 것 같아요. 아직은 안 된다고, 조금만 더 기다려달
라 했어요.
당신을 깨워놓고, 당신의 웃는 모습을 보고 가겠다고 했어요.
힘들지 않냐고요?
힘들어요. 너무 힘들어서 미칠 것만 같아요.
아마 당신을 업어주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일 것 같아요.
더 이상 힘이 없어요.
후들거리는 다리로 걷고 있는 소운의 얼굴이 처연하게 변했다. 이제 더 이
상 님의 몸을 씻어줄 수도, 길어진 수염을 잘라줄 수도 없다. 동굴 속에서
나올 수도 없을 것이다. 그곳에서 님의 환생을 지켜볼 것이다.
슬퍼하지 하지 않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몸속에서 내 피가 숨쉰다.
결코 죽는 게 아니다. 언니들보다 더 많은 시간을 이 사람과 보냈고 더 많
은 사랑을 받았다.
"우리 약속 잊으면 안 돼요."
분명히 약속했다. 다른 세상, 다른 얼굴로 태어나도 알아보기로…. 그때
다시 만나서 사랑하고, 지금보다 더 행복하게 살기로 약속했다.
그럼 된 것이다. 그걸로 만족하면 되는 것이다.
"형수님!"
거의 이 년 만에 찾아왔다. 형수님의 말대로 했다. 죽을 각오로 무공을 익
혔고 더 이상 바랄 게 없자 이곳으로 왔다. 형님의 정신이 돌아와 있기를
간절히 바라며, 형수님이 웃으며 반겨주기를 바라며 연못 위로 올라왔다.
그러나.
아무것도 변한 게 없다. 이 년 전보다 더 약해져 있는 소운과 여전히 정신
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백산. 삼 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백산은 돌아오지 않
았다.
"으윽!"
"형수님!"
갑자기 몸을 비틀거리는 소운의 모습에 깜짝 놀란 소살우가 몸을 날렸다.
거의 이 장 거리를 아무런 사전준비도 없이 단축해버리는 가공한 움직이었
다.
"오셨군요, 도련님!"
소운의 얼굴이 환해졌다. 드디어 소살우가 무공을 완성하고 돌아온 것이다
. 굳이 님이 아니더라도 복수를 해줄 사람이 생겼다.
"괜찮으……?"
소운을 부축하던 소살우가 석상이 된 듯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그것 때문
이었다. 그 때문에 힘없이 쓰러졌고, 그것 때문에 자신이 불렀어도 듣지를
못했다.
백산의 팔에 있던 천비비, 백산이 계속 깨어나지 못하면 그의 심장에 찔러
넣으라 하였던 그 천비비가 소운의 심장에 박혀 있었다.
"왜 이러셨습니까, 왜 이랬냐고요!"
소살우의 처절한 고함소리가 허공으로 울려 퍼졌다.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왜 천비비를 자신의 심장에 꽂고 있단 말인가.
왜….
"도련님. ……이분을 깨우는 유일한 방법이에요. 죽는 게 아닙니다. 이분
의 몸속에서 사는 겁니다. 영원토록……."
"그래도 형님이 못 돌아오면, 끝까지 돌아오지 않으면, 어찌하려고요. 그
때는 어떻게 하실 거냐고요."
급기야 소살우가 울음을 터트렸다. 형제들의 죽음을 대하면서도 단 한 번
의 눈물도 보이지 않았던 그가 오열을 하고 있었다.
"그것도 괜찮겠지요. 하지만 산이 없으면……."
소운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렀다. 산이 돌아오지 못하면 자신도 살아갈 방
법이 없다. 사랑하는 사람이 없는 세상에서 무엇을 의지하고, 무엇을 보고
산단 말인가. 같이 하고자 했던 이들은 다 떠났는데 혼자 남아 무얼 어쩌란
말인가.
"그리고 떠날 때까지 이분이 돌아오지 않으면 천목환을 뽑아주세요. 원래
는 제가 하려 했었는데 힘이 없을 것 같아요. 도련님, 저기 동굴로 좀 데려
다주실래요."
"빌어먹을, 빌어먹을……."
소살우의 주먹이 정신없이 뻗어나가고 있었다. 절벽이 부서져 동굴이 만들
어지고 있는데도 끊임없이 돌덩이를 부숴댔다. 화가 났다. 더러운 운명에
너무 화가 났다. 잃을 게 뭐가 남았다고. 두 부인을 잃었고, 자식을 잃었다
. 대부분의 형제들이 죽었다. 얼굴도 잃고 이도 잃었다.
그런데.
이제는 마지막 남은 사랑마저도 하늘이 가져가고 있다.
저런 선택을 해야 하는 소운이 불쌍했고, 깨어날 백산이 불쌍했다. 차라리
같이 죽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떠나버린 사람
을 그리워하지는 않아도 될 테니까.
"살우야……."
그때 등 뒤에서 소살우를 부르는 목소리가 있었다. 흠칫 놀라 뒤돌아선 소
살우가 그 뒤에 있던 두 사람을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거의 사 년, 얼굴을 보지 못한 지 사 년 만에 두 사람이 돌아왔다.
일휘와 석두였다.
"왜 이제 왔소! 왜 이제 왔느냐 말이야!"
"따라와라."
소살우의 울부짖음에도 석두와 일휘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형
제들의 죽음에 너무 익숙해져버린 탓이다.
두 사람도 이미 동굴에 다녀왔다. 심장에 천비를 꽂고 있는 소운의 모습을
보고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천오백 년 전의 서러운 운명이 그대로
이어져 있었다.
"어디로 가는 거요."
"마지막 가는 형수님을 안 볼 참이냐?"
지켜봐야 한다. 형수님이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어떤 표정이었는지 백산에
게 알려주고 다시 만난 형제들에게 알려주어야 한다.
기괴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노려보던 소살우가 성큼성큼 뒤를 따랐다.
"어서들 오…세요."
끊어질 듯 이어지는 소운의 말속에 반가움이 묻어나왔다. 일휘 도련님이
살아 있고 석두 도련님이 살아 있다. 저들도 준비가 되었다.
"고생이… 심했겠군요."
흥분해 있던 소살우는 미처 알아보지 못했지만 소운은 두 사람의 상태를
금방 알아보았다. 팔과 다리가 없는 사람들.
"이거요……. 이대로도 별문제 없어요."
석두가 미소를 지으며 팔소매를 걷어붙였다.
"뭐야. 형님들도 병신이 된 거요?"
소살우가 깜짝 놀란 얼굴로 일휘와 석두를 쳐다보았다. 자신처럼 왼팔이
아니질 않는가. 검객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오른팔과, 박투술에 있어 절대
적인 오른쪽 다리. 두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도구들이 없어진 것이었다.
"임마, 하나 정돈 없어도 되니까 두 개씩 있는 거야."
"그래도 그게 뭐요. 좀 품위 있게 만들지 않고. 안 그렇습니까, 형수님?"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함이다. 마지막 가는 길을 편하게 해주기 위해서 즐거
운 모습을 보여주고 싶을 뿐이었다.
"그래, 어떻게 살았소."
"뭐, 힘든 일이 있었겠냐? 팔 빼고는 전부 그대로였는데. 푹 쉬었지, 뭐."
"나도 마찬가지다. 가는 길에 우연히 패웅 그 사람을 만나지 않았겠냐. 그
사람이 해남도에 간다고 해서 같이 갔다. 조용하니 무공을 익히는 것도 괜
찮겠다 싶어서."
"너 해남도에 있었냐? 나는 동사군도에 있었는데. 바로 지척에 두고도 모
르고 있었다야."
"그럼 맛있는 해산물도 많이 먹었겠군요."
"어, 형수님도 해산물 좋아해요? 그럼 좀 가지고 올 걸 그랬네."
"그렇게 좋은 걸 많이 처먹었다면서 몸은 이리 말랐소?"
"그거야 무공을 열심히 익히다보니 그리된 거야, 임마."
평이한 이야기들. 없는 말을 지어내느라 더듬기도 했지만 마냥 즐거운 표
정으로 이야기를 하고, 듣고 있었다.
"도련님……."
"형수님,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형님이 깨어난다면 잘 달랠게요. 우리
가 나이도 더 많잖아요."
소운이 자신들에게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 왜 모르겠는가. 슬퍼할 백
산을 진정시켜달라는 부탁인 것이다.
"고마워요……. 그리고 한 달만 있다가 오실래요?"
"형수님! ……알았습니다."
세 사람이 소운을 향해 큰절을 올렸다. 마지막은 백산과 단둘만 보내고 싶
다는 말이었기에. 아울러 한 달 뒤에 백산이 깨어나지 못하면 보내달라 하
고 있는 것이다.
일 개월. 그녀가 백산에게 준 회생의 기간이었다.
세 사람이 떠나고 난 후 몸을 일으킨 소운이 백산 위로 천천히 몸을 포갰
다.
"당신도 봤죠? 도련님들이 돌아왔어요. 그들도 마찬가지였어요. 아니, 당
신보다 더 했어요. 무공을 펼쳐야 하는데 팔이 없는 석두 도련님이 돌아왔
고, 다리가 없어 걷지도 못하는 일휘 도련님도 이곳으로 왔어요. 두 도련님
들은 당신보다 더 힘들게 왔어요. 비틀거리고 절뚝거리며 이곳으로 왔다고
요. 이젠 당신 차례예요. 당신만 돌아오면 되는 거예요. 당신만……."
사랑하는 님아.
당신은 나의 운명이었습니다.
내 태어남의 이유는 당신입니다.
당신을 만나기 위해 세상에 왔습니다.
억겁의 세월을 거슬러 님에게로 왔습니다.
사랑하는 나의 님아.
당신과 만났음에 행복해서 울었습니다.
당신과 헤어짐이 슬퍼서 웁니다.
짧았던 만남에 긴 이별일지라도,
우리의 만남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나의 님아.
내 떠남을 슬퍼하지 마세요.
만나야 할 운명은 세상이 변해도 다시 만난다 합니다.
인간이면 어떻습니까. 축생이면 또 어떻습니까.
내가 당신을 기억하고 당신이 나를 기억하는데.
사랑하는 나의 님아.
백산의 마른 입술 위로 겹쳐진 입맞춤을 끝으로, 소운의 눈이 천천히 감겼
다. 감겨진 그녀의 눈가에 맺혀 있던 영롱한 보석 같은 이슬방울이 백산의
눈 속으로 떨어져 내렸다.
한 방울 눈물만 남기고 그렇게 소운이 떠났다. 그러나 마지막 남은 소운이
떠났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붉은 눈동자는 동굴 천장만 하염없이
쳐다보고 있었다.
닷새.
소운이 떠난 뒤 정확히 오 일 만에 최초의 변화가 찾아왔다.
그녀의 가슴속에 박혀 있던 천비가 천천히 빠져나오더니 땅속 깊숙이 숨어
들었고, 이어 나머지 열한 개의 비도가 천비비의 뒤를 따랐다. 여전히 백산
의 상태는 전과 같았지만, 죽음만이 감돌던 동굴 안에 생의 기운이 몰아치
기 시작했다.
귀환(歸還).
어둠의 저편에 있던 백산의 혼백이 몸속으로 다시 찾아들며 미약하게 움직
이던 심장이 폭풍처럼 뛰기 시작했다. 동굴 가득 붉은 기운이 들어차며 미
증유의 기운이 백산의 몸으로 흘러들었다. 꼬박 하루 동안 휘몰아치던 붉은
기운이 사라지자, 여전히 소운을 안고 있던 백산의 모습이 나타났다.
주르륵!
아직도 붉게 빛나는 눈동자로부터 한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꿈이라 생각했는데, 천영과 추렴이 죽어가는 순간이 꿈이라 여겼는데, 소
운의 죽음이 꿈이라 여겼는데, 악몽에서 깨어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고
이제야 깨어났는데, 꿈이 아니었다.
"소운…… 소운…… 소운……!"
왜 이리 되었는가. 왜 소운마저 차게 변해버렸는가. 사랑하는 사람을 한
사람도 지키지 못한 무능한 남편. 아무런 힘이 없던 아버지도 자식을 지켜
냈는데, 하늘을 거스르는 힘을 가졌다는 자신은…….
소령이도 지키지 못했고 천영도, 추렴도, 마지막엔 소운도 지키질 못했다.
툭!
소운을 안기 위해 쥐고 있던 손을 펴자 그곳으로부터 새하얀 물체와 붉은
애명환이 떨어졌다.
사라랑!
천영과 추렴이의 손가락 뼈였다.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없지만 그녀들의
마지막 흔적이 자신의 손 안에 있었고 어두운 세월을 같이했던 거였다. 아
울러 자신의 부러진 애명환도.
"당신들도 같이 있었소. 지난 세월을 같이 있었구려."
마치 조천영과 냉추렴을 만지는 듯 떨리는 손으로 두 개의 애명환을 주워
들었다. 그녀들이 남겨준 단 하나의 정표. 그것을 양손에 하나씩 끼운 백산
이 소운의 몸을 안고 철판이 들어 있던 관 속에 집어넣었다.
그녀가 죽어간 이유도 알았고 저주받은 운명도 알게 되었다. 다른 세상,
다른 곳에서 만나도 알아볼 수 있으리라. 그때 다시 만나면 되는 것이리라.
"다녀오겠소."
삼 일 동안 자리를 지키던 백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마나 세월이 지났
는지 세상이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해할 필요가 없다. 적들이 아직 있으면
죽이면 되는 것이고, 숨어 있다면 찾아낼 것이다. 천을 죽여야 한다면 천을
죽일 것이오, 만을 죽여야 한다면 만을 죽일 것이다. 세상을 없애야 한다
면 없애고 말리라.
두 눈 가득 혈기를 머금고 밖으로 나온 백산을 기다리는 사람들. 세 사람
의 불구자였다.
"왔소."
삼 년 반 만에 돌아온 백산을 부르는 첫마디였다.
"……그래."
네 사람이 눈싸움을 하듯 서로를 노려보았다. '왔소', '그래' 단 두 마디
만을 나누고 하염없이 서로를 주시하고 있었다.
"크하하하! 프하하하!"
거의 동시에 네 사람의 입에서 광소가 터져나왔다. 하늘을 쳐다보며 미친
듯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들의 웃음소리에 놀란 산새들이 푸드득 날아가고,
그들의 몸에서 흘러나온 기세에 절벽이 터져나갔다.
분노였다. 슬퍼할 수 없는 분노였기에, 미치지도 못하는 분노였기에 웃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전부냐?"
"모르오. 앞으로 삼 개월 뒤에 팽가에서 만나기로 했소. 사 년 전에."
"사 년 전이라……."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사 년의 세월이 흘렀다고 한다. 셋이 전
부 병신이 되었다. 소살우는 과거보다 더 강한 살기로 무장되어 있고, 일휘
와 석두에게서도 전율적인 살기가 흐른다. 살기만을 극대화시켜 무공을 익
힌 까닭이다. 심검, 심도를 버린 것이다. 더 잔인해지기 위해.
"가자!"
파면에 붉은 눈을 가진 사람과 다리병신 한 명, 팔 병신 둘. 오 년 전 뇌룡
현을 한 번 떠났던 그들이 다시 또 뇌룡현을 떠나고 있었다. 이번에는 꿈을
찾기 위한 여행이 아니었다. 꿈을 짓밟아버린 자들을 응징하기 위해 나선
길이었다.
죽음을 내리는 여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