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영광(榮光), 그리고 격변(激變)
강호무림에 새로운 시대가 태동했다. 무림공적이 머물고 있는 감숙성 토벌
에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무인들이 제갈수연의 이름을 외치며 제천
맹으로 모여들었다.
그곳에 참여하는 많은 무인들의 공통적인 생각은 우선 세력을 키워야 한다
는 쪽으로 바뀌었다. 그들의 생각이 바뀌게 된 결정적인 요인이 몇 개월 전
일어났던 사건 때문이었다. 무림공적을 치러 갔던 토벌대가 거의 전멸지경
에 이르렀던 거였다. 제천맹이 바로 서지 못하면 감숙성 정벌은 불가능하다
는 사실을 몸소 체험하는 계기가 되었다.
제갈수연이 의도한 대로 이루어지고 있음이다. 봇물처럼 밀려드는 무림인
들을 받아들인 제갈수연은 발 빠르게 제천맹의 조직을 확대해나갔고, 감숙
성을 제외한 강호전역에 제천맹의 지부를 만들며 더욱더 세력 확대를 꾀했
다.
제천맹의 위상이 높아감에 따라 강호인들에게 생긴 또 한 가지 변화는 천
하제일인으로 제갈수연이라는 여장부를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는 것이었
다.
과거의 천하제일인이었던 철목승은 강호공적으로 낙인찍혔고, 태상맹주로
있던 담운천 또한 거의 활동이 없었기에 점점 잊혀가는 인물이 되었다. 오
직 제천맹주 제갈수연의 이름만이 강호무림인들 사이에 오르내릴 뿐이었다.
천부(天府).
제천맹의 대소사가 결정되는 대 회의실로, 제갈수연의 지시사항이 전 중원
으로 퍼져나가는 곳이다. 그 천부에 삼십여 명의 무인들이 누군가를 기다리
는 듯, 가장 안쪽에 보이는 내실 출입문을 주시하며 서 있다. 제천맹 열세
개 지부의 지부장 예정자들과 이곳에 있는 수뇌부들이었다.
천무맹과 천마맹이 제천맹으로 통합된 지 일주년, 그 창립 기념일이 바로
오늘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맹주님!"
내실의 문이 열리고 금색의 화려한 복장을 한 제갈수연이 나오자, 안에 있
던 모든 무인들이 고개를 숙이며 우렁찬 고함을 질렀다. 오체투지(五體投地
)는 아닐지라도 그들이 보낼 수 있는 최고의 공경을 보내고 있는 거였다.
"앉으세요."
가볍게 손을 들어 인사를 대신한 제갈수연이 무인들을 쳐다보며 앉으라고
하였으나 누구 하나 자리하는 사람이 없었다. 단지 제갈수연의 다음 행동만
주시할 따름이었다.
이윽고 제갈수연이 그녀의 자리에 착석하자 그제야 각자의 자리를 찾아 앉
는다. 그런 무인들의 모습을 쳐다보던 제갈수연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어
렸다. 권력의 힘을 절감하는 순간이었다. 앞에 있는 자들치고 자신보다 강
자 아닌 사람이 없었다. 무공으로만 따진다면 자신이 가장 하수인 것이다.
그럼에도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눈길 한 번 받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이러한 것들 때문에 천하제일을
원하는 것이다. 이런 기분을 느끼기 위해.
이어 시비들에 의해 음식들이 차려지고 제천맹 탄생 일주년을 축하하는 축
배가 시작되었을 즈음하여 제갈수연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여기 계시는 여러분들은 제천맹의 창업 공신입니다. 제천맹은 이 제갈수
연의 개인 소유물이 아니라, 여러분 모두의 것입니다. 저는 이 제천맹을 명
실 공히 강호무림의 영원한 금자탑(金子塔)으로 만들고 싶습니다. 많이 도
와주십시오. 여러분이 어떻게 해주느냐에 따라 제천맹의 역사는 곧 무림의
역사가 될 수 있습니다."
"염려놓으십시오, 맹주님. 반드시 그렇게 될 것입니다. 저희들은 맹주님을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맹주님!"
실내에 있던 모든 무인들이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들을 쳐다
보는 제갈수연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어렸다.
자신의 세력, 아직은 시작에 불과하지만 이곳 천부를 채워나갈 사람들이
점점 늘고 있다. 이제는 선별의 시기가 도래했다. 수많은 인재들 중 필요한
사람을 골라서 제천맹에 충성하는 사람을 만들어야 한다. 지금 고개를 숙
이고 있는 저들처럼.
'철목승, 그대는 조금 더 살아주어야 하오.'
굳이 철목승을 제거할 필요가 없다. 그가 건재함으로써 제천맹의 힘은 더
욱 커지고 더욱 강해질 것이다. 더 이상 제천맹을 키울 필요가 없을 때까지
철목승은 살아 있어야 한다.
새해에 시작된 제천맹의 주연(酒宴)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
고, 권력의 흥취에 흠뻑 젖어 있는 제갈수연의 얼굴에선 미소가 떠나질 않
았다.
그러나.
밀천에서 들어온 소식에 의해 천부 안은 한순간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또다시 들려온 황제의 붕어(崩御)소식, 당금 황제인 홍희제가 보위 일 년
만에 승하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이었다. 북경의 피바람을 예고하는 사건
이었다.
"잘 들으세요. 모든 관심을 관부 쪽에 두되, 어떠한 세력에도 가담해선 안
됩니다. 모든 업무를 중단하고 지켜보기만 하세요."
북경에서는 또다시 황권을 둘러싸고 권력다툼이 일어날 것임에 분명할 터
이고, 제갈수연의 선택은 중립이었다.
서둘러 주연을 끝마친 제갈수연이 그녀의 거처로 돌아와 일비를 찾았다.
"그들은 지금 어디 있느냐."
"북경 서쪽 소오태산에 주둔 중입니다."
혈맹의 병력에 관한 말이었다. 이미 지금의 일은 예상하고 있었고, 단지
시간이 문제라 여기고 있었는데 결국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주고후는?"
"그 또한 측근과 함께 북경을 빠져나왔습니다."
"한순간도 놓치지 말고 그들을 주시하라."
"네! 맹주님."
"백랑! 서둘러 북경으로 가셔야겠어요."
"그럼 이번 건으로 석숭의 입지가 약화되겠군."
"그래야지요."
제갈수연이 빙긋 미소를 지었다. 석숭의 반대파인 동창제독 유량에게 주고
후의 모반사실만 알려주면 되는 것이다. 아울러 무림의 세력이 관련되었다
는 사실까지. 그동안 백무천이 북경에서 만들었던 연줄이 동창제독인 유량
이었다. 그 유량의 성장과 같이하여 제천맹도 안정되어갈 것이다.
"백랑! 한 시진 정도만 쉬었다 가세요."
드디어 담운천의 손발을 묶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인지 제갈수연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며 호흡이 가빠졌다.
완전한 천하제일인의 자리가 보이고 있음이다. 최고의 자리가.
* * *
"어서 오너라."
"심려가 크시겠사옵니다, 제독합하!"
제천맹을 떠난 백무천이 도착한 곳은 금의위 영반인 석숭과 더불어 황실의
최고 권력자인 제독동창(提督東廠) 유량(劉粱)의 저택이었다.
동창(東廠).
반정에 의해 황권을 잡았던 영락제가 창설한 단체로, 그들의 임무 또한 금
의위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석숭이 영반으로 있는 금의위가 주로 외부의
일을 담당해오고 있다면, 동창은 북경에서 정적(政敵)을 제거하는 활동을
해왔다. 그 동창의 수좌가 환관인 유량이었다.
제갈수연의 선택이었다. 현 황실에서 석숭을 견제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
이 그인 것이다. 사실 동창의 지위는 금의위보다 위라 할 수 있었다. 직급
자체가 더 위임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영락제와 사적인 친분
관계에 있던 석숭의 존재로 인하여 권력에 있어서는 언제나 금의위보다 뒷
전이었다. 그랬던 동창이 영락제의 죽음과 함께 서서히 기지개를 펴고 있는
것이다.
"지금 어디에 있나."
마치 여인의 음성인 양 가냘픈 목소리가 유량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앞에
서 가까이 듣지 않았더라면 탁한 여자의 목소리라 착각을 해도 하등 이상해
보일 것 같지 않은 그런 목소리였다. 그러나 외부로 표현되는 목소리만 그
럴 뿐이었다.
백무천을 쳐다보고 있는 유량의 눈은 그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심연이었다. 일말의 감정도, 느낌도 나타나지 않는 무심한 눈. 초극의 고수
인 백무천을 제압하는 눈빛이었다. 아울러 권력의 핵심에 있는 자들에게서
만 볼 수 있는, 타인을 압도하는 눈인 게다.
'빌어먹을, 저놈의 눈빛은…….'
싸늘하게 자신을 노려보는 유량의 눈빛에 등골이 서늘해진 백무천이 속으
로 중얼거렸다. 육 개월 전, 유량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그저 높은 권력
을 쥐고 있는 사람일 뿐 환관이 얼마나 대단하랴 싶어 무시하는 마음이 더
컸었다. 그러나 유량과의 첫 대면에서, 별 볼일 없는 인간으로만 여겼던 인
식이 완전하게 바뀌어버렸다. 초극의 고수가 풍겨내는 기운에 비할 바 아니
었다. 아니, 더 강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추상같은 위엄만으로 상대를 제압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 생경스러움이었다.
"소오태산으로 갔습니다."
제천맹에서만 알고 있는 사실이 아니었는지, 주고후의 위치를 알리는 백무
천의 말에도 유량의 표정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바로 치시겠습니까?"
"아니야, 적을 치는 것도 시기가 필요한 게야. 동조자들이 전부 모일 때까
지 기다렸다가 한꺼번에, 그것도 새로운 황제가 등극한 다음에 해야 하는
게야."
'그리고 당신의 시대도.'
주고후의 반란은 유랑에게 있어서 최고의 기회를 제공해주었다. 금의위를
뒤로하고 동창이 앞서 나갈 수 있는 기회. 그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석숭을 밀어내고 금의위마저도 휘하에 두고자 하는 유량의 야심
. 그런 유량의 욕심과 같은 배를 탄 세력이 제천맹이었다.
"그들과 같이 움직이며 계속해서 연락을 보내거라."
"네! 합하."
* * *
유량이 넘어뜨리려는 석숭이 머물고 있는 곳, 그곳의 지하에서는 세상의
군상들이 꿈꾸는 야심과 상관없이 오직 한 가지 목표를 위해 모든 힘을 쏟
아 붓고 있는 인간이 있었다.
강구두였다. 운공을 하고 있는지 가부좌를 하고 있는 그의 몸에서 전율적
인 기운이 흘러나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온몸에 있는 각 혈도로부터 사
방에 깔려 있는 어둠보다도 더 검은 운무가 뭉클거리며 새어나왔다. 지극히
차갑고 묘하게 짜증스러운 기운, 그러면서 또 한편으로는 강한 패력(覇力)
마저 느껴지는 저 기운의 정체는 무엇인지. 딱히 마기(魔氣)라 부르기에는
그 내재된 힘이 너무 강했고, 패기(覇氣)라 말하기에는 뭔가 부족했다.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아는지 모르는지, 강구두의 몸에서 흘러나
온 검은 기운은 더욱 농밀해졌다. 그 검은 기운이 그의 몸을 완전하게 가려
버리는 순간, 새로운 변화가 생겨났다. 마치 서편 하늘로 넘어가던 태양이
마지막 힘을 소진시키며 쏟아내는 황혼 노을처럼, 검은 구름 속으로부터 붉
은 기운을 간직한 빛무리가 조금씩 스며나오기 시작했다.
강호상에 수많은 무공이 있지만 운공 중에 저런 현상을 보이는 무공은 단
한 가지밖에 없다. 천마심공, 천장지옥마공, 패천마공, 그 다음으로 강한
무공이라 알려진, 바로 낙일혈마공(落日血魔功)이었다.
낙일혈마공이란 마공이 처음 등장한 시기는 이백 년 전이다. 처음 강여충
이란 자가 한 자루의 검을 들고 등장했을 때는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계속되어지는 그의 행보에 중원무림인들이 경악 속으로 빠져들었다
.
혈보(血步).
그가 가는 곳마다 시산혈해(屍山血海)를 이루었다. 보다 못한 강호무림인
들이 그를 막아보기 위해 나섰으나 차디찬 주검이 되어 쓰러졌을 뿐 누구도
그의 발길을 저지하지 못했다. 낙일마제(落日魔帝)와 낙일혈마공(落日血魔
功). 그가 무공을 펼칠 때, 마치 일몰직전의 상황과 같다고 하여 유래된 말
이었다.
그렇게 이십여 년 동안, 중원 각처를 헤매고 다니며 살겁을 저지르던 낙일
마제는 나타났을 때와 같이 홀연히 사라졌다.
"그분은 나의 선조이셨다. 송나라 마지막 무장(武將)이셨고."
더 이상 운공을 할 수 없었던지 자세를 푼 강구두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젊은 나이에 천무맹의 전사대 대주가 될 수 있었던 건, 그의 가문에 내려
오던 낙일혈마공이란 무공 때문이었다. 그것도 완전하게 익힌 것이 아니었
다. 팔 성 이상을 익히게 되면 낙일혈마공의 특징인 붉은 노을이 생겨나기
에 그 이상 익힐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딱 한 번 능력 이상의 무공을 펼치게 되었는데 영운진인과의 비
무 때였다. 자신도 모르게 투지가 일어 전력으로 낙일마검법을 펼치게 되었
고, 그의 몸에서 황혼의 빛무리가 터져나온 거였다. 그가 천무맹에서 파문(
破門)된 주된 이유가 그때 드러난 낙일혈마공 때문이었다.
"하지만 낙일혈마공은 마공이 아니다. 처음 시작은 패도를 추구하는 무공
이었단 말이다."
오직 강함만을 추구하는 무공이었던 가문의 비공이 점차 바뀌기 시작한 건
그의 선조인 낙일마제 강여충 때부터였다. 그가 천하를 헤매며 혈겁을 저
질렀던 주된 이유는 배신자 처단을 위해서였다. 나라를 팔아버린 자들, 무
장으로서 적에게 동조하여 송나라의 멸망을 가져오게 했던 자들을 단죄하기
위한 행보였다.
그런 강여충의 행보를 알지 못했던 강호무림인들은 낙일마제의 혈겁을 종
식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공격해왔고, 그 와중에 무공의 성향이 바뀌었다.
패기 속에 마기마저도 포함되면서 점점 강해졌던 거였다. 강호인들의 공격
에 견디며 배신자들을 처단하기 위해선 더 강해져야 했고, 결국 어둠의 기
운에 의존하게 되었다. 더 강해지기 위한 수단으로 마(魔)를 이용했던 것이
었다.
그러나.
정도의 무공을 최고라 생각하는 정파인들은 인정하지 않았다. 자신들의 무
공만을 인정할 뿐 마공은 무조건 죄악이라 하였다. 그래서 팔 성까지만 익
히고 말았었는데……. 결국 자신의 젊은 혈기로 인하여 무공을 제거당하고
천무맹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무당의 영운진인을 탓할 필요가 없는 일이었
다.
"허나 이제는 완전하게 익힐 것이다. 몸속에 끓고 있는 그분들의 염원과
돌아올 그 아이들을 위해."
지금껏 자신의 내공으로 만들지 못하고 있는 미증유의 거력, 팽가 가신 두
사람의 내공이 자신의 몸속에서 살아 있다. 그 사람들의 힘을 다시 세상
밖으로 끄집어내야 할 사람이 자신인 것이다. 수십 년 동안 그들이 갈았던
칼을 휘둘러야 할 사람이 자신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마지막 눈빛을 보내며 떠났던 광풍대원들. 그들이 쳐다보고 있기에, 그들
을 기다려야 하기에 익힐 수밖에 없다.
"해낸다. 반드시 해내고 만다."
다시 자세를 잡은 강구두가 운공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그에게 있어 가장
시급한 일은 몸속에서 따로 놀고 있는 두 내공을 합치는 것이었다. 내공을
물려주었던 팽가의 두 가신은 동일한 내공심법을 익혔다 하였지만 같은 내
공이 아닌 것이다.
이미 초극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은 동일한 내공심법으로 익혔다 하더라도
자신만의 독특한 색채를 지니게 된다. 결국 하나이면서도 별개의 내공이었
다. 그것을 하나로 합쳐 자신의 내공으로 만들어야 하건만 그 첫 번째 과정
도 쉽지가 않았다. 두 사람의 내공 중 친화성이 있는 부분은 서로 합치는
데 성공했고, 낙일혈마공을 구 성까지 성취하는 데 반년의 세월이 걸렸다.
그러나 절반이었다. 남아 있는 내공이 각각의 무공을 특징짓는 핵이었기에
하나로 합치는 작업은 물과 기름을 섞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라 할 수 있었
다. 그것을 해내야 하는 것이다.
'구두야. 절대적인 강함이란 모든 것을 포함한다. 너무 강하기에 부러진다
함은 강함이 아닌 게다. 그냥 곧은 것이라 말할 뿐이다.'
폐관에 들기 전 팽무도가 해준 말이었다. 그도 강구두가 닥친 상황에 대해
서 알고 있었다. 타인의 내공을, 그것도 하나가 아닌 두 가지를 섞어야 하
는 어려움을 알고 있었기에 강함을 이야기했다. 그 두 가지 별개의 기운을
눌러버릴 수 있는 절대적인 강함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결국 낙일혈마공으로 해결하는 수밖에 없군."
결론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시도하지를 못했다. 우선은 낙일혈마공에 의한
내공이 없었고 몸 또한 만들어지지 않았었다. 그래서 육 개월이란 준비 기
간이 필요했다. 이제는 할 수 있을 터였다. 세 가지의 내공이 몸속에서 충
돌을 일으킨다 하더라도 몸이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음을 굳힌 강구두가 낙일혈마공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구 성의 성취로
두 가지의 이질적인 기운을 누를 수 있을는지 장담하지는 못하지만 시작해
야 한다. 운기를 시작함과 동시에, 단전에 머물러 있던 세 가지 기운이 한
꺼번에 솟구쳐 오르며 서로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가부좌를 하고 있던 강구
두의 몸이 급격한 떨림을 보였다. 온몸의 혈맥들이 연약한 피부를 뚫어버릴
듯 불쑥불쑥 튀어나와 이곳저곳으로 휘젓고 다녔다. 견디기 힘들었는지 잔
뜩 고통스럽게 일그러진 강구두의 얼굴에 땀방울이 맺혔다.
'한다! 한다!'
두 주먹을 불끈 쥔 강구두가 낙일혈마공의 운기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다
른 두 내공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아예 신경을 끊어버린 채 오직 자신의 내
공에만 모든 정신을 집중했다. 심장이 터질 듯한 고통이 밀려왔으나 그마저
도 개의치 않았다. 먼저 간 아이들을 생각하고, 내공을 물려준 두 노인들을
생각했다.
한 시진. 두 시진.
온몸이 땀에 젖어들었다 마르기를 수차례.
슈아악!
검은 운무 속으로부터 해질녘의 붉은 노을 같은 빛무리가 터져나오기 시작
했다. 검은색의 운무가 소용돌이치고 그 사이를 헤집으며 터져나온 황혼 빛
은 승자의 미소처럼 아름다웠다. 막혀 있던 생사현관(生死玄關)이 뚫리게
되고 온몸의 세맥들이 교통되었다. 입고 있던 옷이 가루가 되어 떨어지고
강구두의 알몸이 허공을 향해 솟구쳐 올랐다. 반 장 높이에 머물러 있던 그
의 몸에서 비늘 같은 가루가 끊임없이 떨어지며 뼈마디 부딪치는 소리가 들
려왔다.
환골탈태(換骨奪胎), 무공을 익힌 무인들이라면 누구나 바라는 꿈의 경지
인 환골탈태를 겪고 있었다. 드디어 초극의 경지로 들어서고 있음이다.
무림인이 되어 두 번의 무공을 잃었다. 그러나 무공을 잃은 것에 대해선
아쉬울 게 없었다. 다만 한 가지, 사랑하는 아이들에게 짐이 되었다는 사실
이 그를 못 견디게 했다. 조금만 더 강했더라면, 낙일혈마공만 완전하게 익
혔더라면, 녀석을 살릴 수 있었을 거라는 죄책감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쉴 수가 없다. 모든 것을 완성하기 전까지는 웃을 수도 없는 것이
다.
"이제 시작일 뿐이다. 아직 멀었다."
무인으로서 최고의 경지라는 환골탈태까지 겪었지만 강구두의 얼굴엔 기뻐
하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더욱 투지를 불태웠다. 낙일혈마공을 바탕으로
펼치는 낙일마검법, 일 초만 익혔기에 일검무적(一劒無敵)이란 별호를 얻
었던 그 무공을 완벽하게 익혀야 한다.
그래야만 자신에게 당당해질 수가 있기에.
* * *
북경에 있는 석숭의 저택 지하에서 강구두가 새롭게 태어나기 위한 진통을
겪고 있는 사이, 황도(皇都) 서쪽에 있는 소오태산에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전쟁을 준비하는 자들이 있었다.
북야평(北野坪). 수십만 평의 평원 위에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군막들
이 세워져 있는 곳, 이황자(二皇子)인 주고후의 진지였다.
전장에 나가 있던 일황자 주첨기가 돌아오면서 작금의 반란은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북경에 있던 기득권층의 지지를 받고 있었고 또한 황제가 되어
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뛰어난 인물이 주고후였다. 자연스럽게 정권교체가
일어났더라면 오늘의 반란은 없었을 터인데 두 황제의 갑작스런 죽음이 가
장 큰 원인이 되었다. 특히 홍희제의 죽음은 주고후를 지지하고 있던 기득
권층을 다급하게 만들었고 결국 반란이라는 초강수를 두고 말았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주첨기의 등극은 새로운 질서를 의
미하고, 자신들의 기반이 사라짐을 의미하기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오군
도독부의 최고 수장인 제석공 여홍진을 필두로, 황성수비군에 소속되어 있
는 병력 팔 할이 주고후의 편에 섰다. 도합 십팔만의 병력이었다.
"제석공은 이길 수 있으리라 보시오."
북야평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산등성이에서 초탈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천자(天子)의 자리를 노리고 형님인 주첨기를 향해 검을 뽑아든 주고후였다
. 그러나 그의 얼굴에는 야망을 이루고자 하는 투지가 보이지 않았다. 단지
, 어쩔 수 없는 운명에 끌려가는 착잡함만이 있을 뿐이었다.
자신의 의지에 의해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었다. 북경을 쥐고 있던 실세들
과 새롭게 등장하는 신진들과의 권력다툼에 형인 주첨기와 자신이 연루되어
있을 뿐인 게다. 누가 황제가 되든, 한쪽은 제거당해야 하는 비극적인 운
명을 가진 형제가 바로 자신들이었다.
"물론입니다, 폐하! 하늘의 뜻입니다."
번쩍거리는 은색 갑옷을 입고 있는 여홍진이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외쳤
다. 주고후와 달리 여홍진의 얼굴에는 투지가 넘쳐났다. 이길 수 있다는 자
신감이었다. 황도에 남아 있는 병력은 이곳에 비하면 거의 절반 정도의 수
준밖에 안 된다. 금의위나 동창의 무사들이 있지만 그들에 대한 대책도 이
미 세워두었다. 이쪽을 돕고자 나선 무림인들, 거의 이천에 달하는 그들이
있기에 더더욱 승리를 장담하고 있는 것이었다.
"들어가 보시오. 기다리고 있을 텐데."
"네, 폐하."
주고후에게 고개를 숙인 여홍진이 몸을 돌렸다. 마지막 작전회의가 남아
있다. 이번의 전략회의를 끝내고 북경을 향해 진군해나가면 모든 일이 마무
리될 터였다.
'무슨 명분으로 전쟁을 한단 말이오.'
여홍진의 뒷모습을 쳐다보던 주고후가 내심 중얼거렸다. 명분, 나라를 침
략한 오랑캐와 싸우는 전쟁이 아닌 내란이다. 내란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
은 병력의 우위가 아니라 나라 안의 모든 이들이 인정하는 명분에 있다. 명
분을 얻지 못하면 승리한다 하더라도 결코 오래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역사
가 증명해주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자신에게는 그런 명분이 없다. 오히려 황제가 되고 싶어 형에게 칼
을 겨누었다는 패륜만 있을 뿐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대장군님."
고뇌하는 주고후를 뒤로하고 군막에 들어선 여홍진을 병부상서인 양광지가
맞이하였다. 그 또한 여홍진이나 나머지 두 장군들과 마찬가지 입장이었다
. 일황자인 주첨기가 황제가 되면 제거당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기에 선택
의 여지가 없었다. 이번 거사에 남은 일생을 걸어버렸다.
그리고 이곳과는 전혀 어울려 보이지 않는 세 명. 담운천, 각인대사, 백무
천이었다. 이번 일은 직접 해결하겠다는 말을 그대로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
"적들은?"
"황도에 남아 있는 모든 병력을 서문 쪽으로 집결시켰다고 합니다."
"일황자도 왔겠지?"
"그렇습니다, 대장군."
이미 황제에 등극하였음에도 여홍진의 호칭은 여전히 일황자 주첨기였다.
황제로 인정할 수 없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혹시 신기영(神機營)에 관한 소식은 없는가?"
"아직 그런 기미는 감지되지 않았습니다."
"내가 알기로도 신기영의 이동은 없었소이다."
양광지가 여홍진을 향해 걱정하지 말라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신기영이 무엇이오."
신기영이란 부대에 꽤나 신경을 쓰고 있는 듯한 두 사람의 대화에 궁금증
을 참지 못한 각인대사가 물었다.
"그곳이 참여하면 승리를 장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대단한 곳이오?"
"그렇습니다. 신(神)의 무기로 무장한 부대를 말합니다."
신기영(神機營). 창과 도가 아닌 오직 화기(火器)만으로 무장한 포병대를
말한다. 영락제 때 창설된 부대로서, 거의 팔만에 달하는 병사로 구성되어
있다. 보유한 무기에 대해서는 대부분 비밀에 붙여져 있고 가장 흔하게 알
려진 무기가 철포(鐵砲)와 진천뢰(震天雷)라는 화탄이었다. 제조창마저 황
제 직속으로 되어 있어, 어떠한 무기가 얼마만큼 개발되었는지 군부의 가장
핵심인물이라 할 수 있는 병부상서조차 완전하게 파악하지 못한 곳이 신기
영이란 부대였다.
"걱정하지 마시오. 혹여 그들이 나와 있으면 우리가 맡도록 하지요."
쓸데없는 곳에 심력을 낭비하고 있다는 듯, 각인대사가 미소를 띠었다. 신
기니 화기니 해봤자 일반 장병들일 뿐, 무인의 눈으로 보면 어린아이 수준
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자신하지 마시오, 각인대사.'
각인대사의 뒤편에 있던 백무천이 내심으로 중얼거렸다. 그의 호기에 대한
비웃음이었다. 전부를 다 보지 못했지만 그도 철포라는 무기를 보았다. 이
백 관이나 나가는 엄청난 무게답게 그 위력 또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가공
했다. 강호에서 가장 위력이 강한 화기로 통하는 광천뢰 정도는 애들 장난
감 수준에 불과했던 거였다. 그 엄청난 포탄이 날아가는 사정거리가 천 장
이상이라 하였고 살상력은 광천뢰에 비할 바가 아니라 하였다.
"저는 이만 떠나겠습니다, 천주님!"
백무천이 담운천을 향해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제는 떠날 때였다. 어차피
제천맹을 끌어들이지 않기로 하였기에 이곳에 있을 필요가 없음이다.
"그동안 수고했다, 백무천! 다음에 보자꾸나."
그 또한 제갈수연의 말을 따르기로 하였기에 별다른 말없이 백무천을 보내
주었다.
"아마 내일이 지나면 당신들은 도망자가 될 것이오. 반역도당으로 말이오.
"
밖으로 나온 백무천이 담운천 일행이 머물고 있는 군막을 쳐다보며 나지막
이 중얼거렸다. 이미 몇 개월 전부터 동창에서는 이들의 반란을 눈치 채고
있었을 터이고 대비도 했을 것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백무천에게 더욱
그런 확신을 심어주었던 건 주고후의 반란을 알렸을 때, 동창제독 유량이
보여준 행동 때문이었다. 병력 상으로 보면 황제파가 불리한 위치에 있는
게 분명할진대 유량의 표정은 태연했다. 오히려 기다리고 있다 하지 않았던
가.
* * *
"서둘러라, 오늘 밤 안으로 전부 매설해야 한다."
저 멀리 북경 외성이 보이는 장소에서 수천 명의 병사들이 땅속에다 무엇
인가를 묻고 있었다. 작포라는 화탄이었다. 일명 무적지뢰포라 불리는 이
작포는 마디를 뚫은 대나무에 열 개 이상의 화탄을 매달아 만든다. 대나무
속으로 도화선을 연결하고, 양끝에는 자동으로 점화되는 발화장치를 부착해
두었다. 적이 지나가다 이 발화장치를 밟으면 대나무에 연결된 화탄이 폭발
하여 많은 수의 적을 죽이게 되는 살상무기인 것이다.
이 작포가 최초 사용된 시기는 연왕과 건문제가 싸웠던 백구하 전쟁 때였
다고 한다. 그때 연왕의 군대에 막대한 손실을 입혔던 무기가 지금 묻고 있
는 작포였다. 훗날 반정에 성공한 연왕이 그 사건을 기억해내고는 화약에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신기영이란 부대를 창설하기에 이르렀다. 그가
바로 이대 황제인 영락제였다.
멀리 서문(西門)이 보이는 수만 평의 대지 위에 수천 기의 작포가 매설되
고 있었다. 신기영의 참여가 없다 하였던 반란군의 판단은 잘못된 것이었다
. 팔만 명에 달하는 신기영 병력이 전부 이곳에 진을 치고 있었던 거였다.
동창과 금의위 무인들의 힘이었다. 그들이 나서서 이백 관 이상이나 되는
철포를 전부 옮겨왔다.
이천 문, 이번 작전에 동원된 철포의 수였다. 그러나 실제 보이는 건 성벽
위에 있는, 원래부터 설치되어 있던 백 문의 철포가 다였다.
그럼 나머지는…….
또한 최대 육십 장 정도의 사정거리를 가진 화승총 부대가 만 명, 신쟁을
다루는 병사가 이만 명 등 명나라의 모든 화력이 전부 이곳에 집중되어 있
었다.
"어서들 오시오."
작업하고 있는 병사들을 쳐다보던 금색 갑옷의 인물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
는 일단의 무리를 반겼다.
선덕제(宣德帝) 주첨기(朱瞻基).
영락제를 따라 전장을 누볐던 군인 출신답게 거의 두 배에 달하는 적이 오
고 있음에도 걱정하는 기색이 없었다.
"배치는 다 했소?"
"네, 폐하!"
동창의 유량과 석숭, 그리고 반란에 참여하지 않았던 오군도독부의 두 장
군이었다.
황제 진영의 배치는 대부분 신기영 화기를 주축으로 편제되었다. 가장 먼
저 무적지뢰포를 설치하였고 그 다음에 신쟁 부대가, 그들 뒤에는 진천뢰를
매설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화승총 부대를 배치하였다. 물론 성벽 아래
에는 이천 문의 철포가 북야평을 향해 있었다. 지금 이곳에 있는 화력만 가
지고도 변방의 웬만한 소국 정도는 순식간에 날려버릴 수 있는 엄청난 양이
었다.
"푹 쉬도록 하시오. 내일부터는 바빠질 테니……."
"폐하!"
"왜 그러시오, 석영반."
"이번 전쟁이 끝날 때까지만 이들을 호위로 두시길 청하옵니다."
석숭이 그의 옆에 있던 세 사람을 가리켰다. 팽무도와 철목승, 그리고 사
진악이었다.
"무슨 소리요, 영반. 신원도 분명하지 않은 천민들을 호위로 쓰다니."
유량이 펄쩍 뛰며 소리를 질렀다. 또한 신원도 분명하지 않은 천민이라 하
였다. 석숭이 데리고 온 무인들을 믿지 못한다는 말인 게다. 아울러 석숭도
…….
"반역도들에 동조하고 있는 자들은 보통 무인이 아니오이다."
"그만 하시오."
두 사람의 언쟁을 중지시킨 선덕제가 철목승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
"왜 이곳에 있느냐?"
많은 세월을 전장에서 보냈던 인물답게 세 사람의 몸에서 풍기는 기운만으
로 절대고수임을 알아보았다. 아울러 너희 같은 무림고수들이 왜 황실을 돕
고 있느냐는 물음이기도 했다.
"저들도 폐하의 위대함을 알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묵묵히 선덕제를 쳐다보고 있는 세 사람을 대신하여 유량이 재빨리 대답을
했다. 사실 명의 신민(臣民)된 입장에서 그 말밖에는 달리 할 말이 없다.
비록 입에 발린 소리라 하지만 듣는 사람도 알고 지나가기 때문인 게다.
그러나.
"아니외다."
철목승의 입에서 뜻밖의 대답이 흘러나왔다. 과거의 철목승 같았으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언제나 상대의 입장을 먼저 생각하고, 배려의 말
을 건넸던 사람이 그였다. 그랬던 그가 변했다. 아니, 변하지 않고는 견디
기 힘들었던 탓이었다.
유량을 비롯하여 황제 곁에 있던 인물들의 얼굴이 흠칫 굳어졌다. 그러한
무리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철목승의 입에서 폭탄 같은 발언이 쏟아졌다.
"당신네들 전쟁놀이에는 관심이 없소."
"무엄하다, 이놈! 어느 안전이라고."
얼굴이 해쓱하게 변한 유량의 호통소리와 함께 선덕제 주변에 있던 모든
동창무인들에게서 자욱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감히 대명의 천자를 향해 반
공대를 하는 것도 모자라 당신이라 하였다. 여벌의 목숨을 몇 개 더 가지고
다니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럴 수가 없는 것이다.
"이 따위로 날 죽일 수 있다고 보는가."
유량을 직시하는 철목승의 나직한 목소리에 진득한 기운이 묻어났다. 이곳
에도 천하를 가지고자 전쟁을 일삼는 자들이 있었다. 자신들의 야욕을 위해
죄 없는 부하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자들이 있었다. 그러면서도 천의(天
意)니 하는 말로 포장을 해댄다. 무림을 정복하고자 하는 자들이 정의(正義
)를 외치는 것과 하등 다를 바 없다. 더구나 저들이 아직까지 이 자리에 서
있을 수 있는 이유가 누구 때문이던가. 하찮은 천민들이라며 인간 취급도
안 하는 광풍대원들 때문이었다. 그들이 시간을 벌어주었기에 황권이 유지
되고 있는 게다.
하지만, 이곳에 있는 자들 중 어느 누가 광풍대원들을 알고 있을 것인가.
오직 자신들이 잘나서 하늘이 허락했기에 황제가 되었고, 이 세상의 주인이
되었다고 생각할 뿐이다. 그 때문에 더욱 화가 났다.
"이런 죽일 놈이……."
챙! 차앙!
유량을 비롯한 동창무인들이 동시에 무기를 뽑아들었다. 대명 천자를 모욕
한 대역죄인인 것이다. 황제가 고개만 끄덕이면 곧바로 목을 쳐버릴 심산인
듯 유량의 시선이 줄곧 선덕제를 향했다.
철목승의 그런 행동을 지켜보던 석숭의 얼굴이 해쓱하게 변했다. 황제의
한마디면 적과 싸워보기도 전에 이곳에서 자멸하고 만다. 그 또한 철목승이
저러는 이유를 알고 있다. 가진 자들의 권력다툼 속에서 이유도 없이 사라
져간 그들 때문인 게다.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광풍대원들 때문에 화를 내
고 있다.
"철대협!"
철목승을 말리기 위해 다가서던 석숭이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아니,
더 이상 움직이지를 못했다. 철목승에게서 뿜어져나온 기세(氣勢) 때문이었
다. 과거의 철목승이 아니었다. 구룡천가의 후예인 석숭을 단지 기세만으로
묶어버렸다. 마신가의 무공인 천마심공을 완벽하게 익히고 있다는 말이다.
오신가의 무공 중 가장 강하다는 무공을…….
"무슨 짓인가, 유량!"
선덕제에게서 추상같은 고함소리와 함께 엄청난 기운이 흘러나왔다.
위엄(威嚴). 무공에 의해 형성되는 기운이 아닌 제왕지재에게서만 볼 수
있는 그런 기세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만인을 압도하는 무형의 기운이 결
코 철목승에 의해 형성된 기운에 비해 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압도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직 대답을 안 했다."
'놀랍군. 제왕기세라는 것인가!'
변해가는 선덕제의 모습을 쳐다보던 철목승의 얼굴에 감탄의 빛이 어렸다.
선덕제 또한 무공을 익히고 있는 사람이긴 하지만 고수 수준이라고 볼 수
없었다. 그럼에도 그의 몸에서 흘러나온 기운에 스스로 위축되는 기분이 들
었던 터였다. 무공이 강하다 해서 보일 수 있는 그런 기운이 아닌, 선천적
으로 타고나는 기운인 것이다.
"적이 저쪽에 있기 때문이오."
"그럼 그대의 적이 이곳에 있었다면?"
"저쪽이 이 나라를 다스리게 되겠지요."
광오한 말이다. 자신의 선택 여하에 따라 대명 황제가 바뀔 수 있다는 발
언인 것이다. 그러나 그런 엄청난 말을 하고 있는 철목승이나, 듣고 있는
선덕제 또한 별다른 표정 변화가 없다.
"남의 도움을 빌어 차지하는 건 자기 것이 아니다, 이 말인가."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다행으로 생각해야겠군. 그대들의 적이 저곳에 있다는 것을 말이네. 내일
좋은 활약 기대하겠네."
철목승을 향해 빙긋 웃어 보인 선덕제가 몸을 돌렸다. 민심이 무엇인지를
알았다는 표정이었다. 반역자를 몰아내는 전쟁같이 보이지만 골육상잔(骨肉
相殘)의 비극인 게다. 형과 동생이 서로를 향해 검을 겨누고 있는 패악일
뿐, 그 무엇도 아니라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하지만 질서라는 건 반드시 지켜져야 하네. 동생이 형을 죽이려는 행위가
인정되는 세상이면 그곳은 이미 인간세상이 아니기 때문이네."
처소로 가기 위해 계단을 내려가던 선덕제가 중얼거림 같은 혼잣말을 남겼
다.
이때 나눈 대화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선덕제는 더 이상 정복사업을 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사항이 민생안정이었고 내치에 치
중하는 정치를 행했던 것이다.
"철대협!"
석숭이 안도의 한숨을 쉬며 철목승에게 다가왔다. 저승에 발을 담갔다가
빠져나온 듯한 표정이었다. 겉보기에는 온화한 모습의 선덕제이지만 그의
성정마저 그런 건 아니었다. 누구보다 자존심이 강한 군왕이었던 거였다.
가장 단순한 예로 이번 친정(親征)만 보아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전장까
지 직접 나와서 군의 배치까지 지시할 정도로 적극적인 성정을 가진 사람이
그였다. 그런 사람에 대고 당신 운운하면서 자극을 했으니.
"산이 녀석 흉내를 한 번 내본 것뿐이오. 그나저나 석대인도 이 짓 그만두
어야 하겠소이다."
조금 전 선덕제가 보여준 행동 때문이었다. 석숭에 대한 신뢰감이 보이지
않았다. 그를 믿고 있었다면 가장 먼저 자신들에 대해 의문을 표시했어야
했는데 소개를 시켜줄 때까지 모른 체하고 있었다. 조부의 친구였던 석숭의
존재가 부담이 된다는 의미인 게다.
"그래야 하겠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떠난 사람들이 돌아와야지요. 그 다음
입니다."
물러나야 한다는 걸 알고 있지만 조금만 더 버텨볼 참이다. 목숨을 구해주
었고 대명을 위기에서 건져낸 사람들인데 아무런 보답도 하지 못했다. 그렇
다고 그들의 복수를 해줄 수도 없다. 오히려 제천맹이 유량과 접촉하고 있
는 것을 보고만 있어야 하기에 더욱 힘들었다.
"얻을 게 있습니다. 제 자리를 놓고……."
"들어가세, 가서 술이나 한잔 하지."
"쿡! 유량이 또 난리를 치겠군요."
"그 불알도 없는 놈이? 그런 놈에게 신경 쓸 일이 뭐 있나."
팽무도가 나직한 웃음을 흘렸다.
다음 날.
새벽 일출과 함께 적의 대군이 진격해오고 있다는 전갈이 왔다.
"해진하라!"
성벽 위에 있던 석숭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금색 복장의 금의위들이 사방
을 휩쓸고 다녔다.
휘리링!
금의위들의 움직임에 따라 아래쪽 공간이 이상한 변화를 일으키는 것 같더
니 엄청난 광경이 드러났다. 셀 수도 없이 많은 철포들이 떠오르는 태양빛
을 받아 번쩍거리며 그 모습을 드러냈다.
환상미로진. 석두로부터 배웠던 환상미로진을 이용하여 이천여 문의 철포
를 숨겨두었던 것이다. 전부 다섯 줄로 설치되어 있는 철포는 가히 공포 그
자체였다.
"준비하라!"
다시 한 번 석숭의 고함소리가 터져나오고 모든 철포에 포탄이 장착되었다
. 사정거리가 무려 일천 장이나 되는 가공할 무기인 것이다. 포탄 또한 갖
가지 종류가 있었다. 공심작열탄(空心作裂彈)처럼 사방으로 터져나가는 포
탄이 있는가 하면, 독가스가 들어 있는 탄환을 발사하는 철포도 있었다.
"무시무시하군."
검은 광채를 발하며 평원에 서 있는 수천 문의 철포를 쳐다보던 팽무도가
중얼거렸다. 무림인이 황실을 넘보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저 때문인 게다.
지금 배치되어 있는 철포만 있어도 무림 최고 세력이라 할 수 있는 제천맹
은 흔적도 없이 사라질 터였다. 저런 어마어마한 무기들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한 수준이라 하니…….
"왔습니다, 폐하!"
망루에서 적을 감시하던 자의 외침소리와 때를 같이하여 저 멀리서 빛이
번쩍거리는 신호가 나타났다. 적의 선발대가 천 장의 사정거리에 들어오기
시작하면 보내기로 하였던 동경(銅鏡) 신호였다.
"발사하라!"
황제검을 뽑아든 선덕제의 외침이 떨어지고, 가장 선두에 있던 사백 문에
달하는 철포의 도화선에 일제히 불이 붙었다.
찌이익! 치이익!
과앙! 콰앙! 과과광!
희뿌연 연기가 솟구쳐 오르고 천지를 관통할 듯한 거대한 폭음소리가 진동
했다. 순간 새벽하늘을 가득 채우며 날아가는 수백의 검은 덩어리들, 전쟁
의 시작을 알리는 죽음의 구체였다.
"발사!"
다시 한 번 울려 퍼진 선덕제의 목소리에, 대기하고 있던 철포들이 불을
뿜었다.
"이럴 수가……."
반란군 진영의 선두에서 말을 달리던 여홍진의 표정이 해쓱하게 변했다.
하늘을 가득 메우고 이쪽을 향해 날아오고 있는 검은 우박들, 거의 수천 문
의 철포에서 발사된 포탄이리라.
"여장군! 물러나야……."
병부상서 양광지가 다급한 표정으로 여홍진을 불렀다.
슈우우! 슈우!
광! 과앙! 과앙!
"으아악! 아악!"
사방에서 잘려진 팔다리와 함께, 주고후 진영이 순식간에 아비규환의 지옥
도로 변했다. 달리던 말이 찢겨나가고 그 사이에 병사들의 살점이 튀어 올
랐다.
"방법이 없소이다. 진격해야 하오이다. 진격하라!"
사방에서 처절한 비명소리와 함께 병사들의 죽음이 잇달았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자신들에게는 마지막 기회인 것이다. 지금 진격해나가지 못하면 국
경 수비대마저 들이닥칠 테고 게다가 그들의 병력은 수십만에 달한다. 패배
는 불 보듯 자명한 일일 터였다.
쿠웅! 쿠웅!
저 멀리서부터 죽음을 알리는 철포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오고 있었지만 진
격을 해야 한다. 어차피 이기지 못하면 죽어야 하는 상황이지 않는가. 얼굴
을 굳힌 여홍진이 더욱 거세게 말을 몰았다. 그의 뒤를 따르고 있는 오만의
기병대, 그들 또한 뿌연 먼지와 화약 냄새를 뚫고 박차를 가했다.
"놀랍군. 이게 황실의 힘인가……."
넋을 잃어버린 사람은 또 있었다.
기병대와 같이 가장 선두에서 달리던 각인대사와 담운천이었다. 무공을 익
힌 무인에 비해 황군이 얼마나 대단하랴 싶었던 두 사람에게는 하늘에서 빗
발치는 포탄이 가히 경악 그 자체였다. 자신들에게 날아오는 포탄이야 큰
위협이 될 수 없지만, 부하들에게는 아니었다. 포탄을 향해 장풍을 날리면
허공에서 그대로 폭발하여 수많은 파편에 벌집이 되어 죽어나갔다. 심지어
는 독을 가득 담은 포탄마저 있었으니, 적과 조우하기도 전에 수백의 무인
들이 사라져갔다.
"철포는 한 번 공격하게 되면 무용지물입니다, 노야."
이미 철포에 대해 알아보았는지 각인대사가 담운천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철포의 가장 큰 단점이 지금 각인대사가 지적하는 것이었다. 엄청난 사거
리(射距離)와 가공할 살상력을 지니고 있지만, 가장 큰 단점은 발포하고 난
후에 생기는 반동력 때문에 재장전이 어렵다는 것이었다. 즉 빠르게 이동
한다면 두 번째 포탄이 발사되기 전에 적의 면전까지 도달할 수 있다는 결
론이었다. 자신들이 기병과 무림인들을 가장 선두에 둔 이유 또한 철포에
대응하기 위한 방안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각인대사가 알지 못한 사실이 있었다. 지금 선덕제 진영에서 철포
를 쏘고 있는 자들은 기존의 신기영 병사들이 아니라, 동창과 금의위들이란
사실이었다. 포탄의 낙하지점을 조정하는 사람들이야 전문가인 병사들이었
지만, 뒤로 물러나는 철포를 잡아주는 자들은 무인들이다. 자신의 전 내공
을 이용하여 물러나는 철포를 다시 원위치로 밀고 가서 준비되어 있던 포탄
을 장착하고 있는 것이었다. 평상시에 비해 수배나 빠르게 일이 진행되고
있었다.
"신기영이 왔다지만 이쪽이 유리합니다."
십팔만이라는 병사들의 수를 믿고 하는 말이었다. 비록 철포의 공격이 강
하다고 하지만 전 병력을 몰살시킬 능력은 안 되기에 이길 수 있다는 의미
였다.
"혈맹의 무인들은 들어라! 전력의 경공으로 나아가라. 결코 멈추지 마라."
내공을 가득 실은 각인대사의 외침이 폭발하는 포탄 사이를 뚫고 전장에
울렸다.
"와아! 와아아!"
"서둘러라! 일찍 도착하는 자만이 살아남는다."
혈맹무인들을 비롯한 여홍진의 기병들이 전력을 다해 전방으로 튀어나갔다
. 그들이 사는 방법은 한시라도 빨리 적이 있는 곳에 도착하여 혼전을 벌이
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신기영의 공격은 시작일 뿐이었다.
과과과광! 과아앙!
"으아악! 아악!"
무서운 속도로 치달리고 있던 반란군의 발밑으로부터 붉은 화광이 솟구쳐
오르며 또다시 폭발음이 터져나왔다. 번쩍이며 터져오르는 화염이 가득한
수천 평의 대지 위에, 매캐한 화약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리고 뒤따르는
병사들과 무인들의 죽음.
"이건 또 뭐란 말이냐."
급기야 달려가던 담운천이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설마 땅속에서 터지는 화
탄까지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던 터였다.
황군에 대한 두려움이 일었다. 황군 전체가 삼백만 명이 넘는 엄청난 대군
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또한 그들과 싸워서는 이길 수 없다는 사실도. 그
러나 그 많은 병사들이 싸울 준비를 하고 있는 건 아니다. 평소에는 농사를
짓고 있다가 징집령이 내리면 그때서야 전쟁에 나서는 자들이 대부분이다.
빠른 시간에 황실만 접수하면 모든 일이 끝날 것이라 생각했는데 적군 한
명 보지도 못한 상태에서 아군의 피해만이 속출하고 있었다. 기껏 오백여
장 전진해왔을 뿐인데 얼마의 피해가 났는지 파악조차 되질 않았다.
"지뢰포라는 무기오이다. 보병대를 앞으로 세워라!"
간밤에 황제군 병사들이 땅속에 묻었던 화탄을 말함이다. 얼마나 묻혀 있
는지 끊임없이 폭발음이 들려오고 있었다. 병사들의 발에 의해 터져나가고
하늘에서 떨어지는 포탄에 의해서도 같이 터져나갔다.
기병대(騎兵隊)의 피해가 속출하자 결국 보병을 앞세우는 수밖에 없었다.
적과 일전을 결하는 데 가장 중요한 병사들은 보병이 아닌 기병이었기에 택
한 방법이었다.
"빌어먹을……."
처음으로 담운천의 입에서 욕설이 흘러나왔다. 약간의 놀람은 있을지언정,
결코 패하리라는 생각은 없었는데 돌아가는 상황이 점점 불리해지는 것 같
았다. 허공을 격하고 부하들의 뒤를 따르는 담운천의 시야에 점같이 흩어진
살점과 피가 스며들어 붉게 변해버린 땅거죽이 들어왔다.
끝나지 않는 붉은 땅이…….
"엄청난 대군이군요."
끝없이 펼쳐진 평원을 가득 메우고 달려오는 반란군을 쳐다보며 팽무도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진정한 전쟁을 보고 있는 것이다. 수만 평의 대지 위
를 붉게 물들인 화염과 그 사이를 뚫고 달려오는 십만이 넘는 병사들, 수천
의 동료들이 죽어갔지만 그에 개의치 않는 듯 계속해서 전진을 해오고 있었
다. 마치 한 여름의 메뚜기 떼가 밀려오는 것 같았다.
오직 무기로만 싸우는 무인들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광경이었다.
"신쟁 부대를 준비시켜라!"
"네, 폐하!"
"전달하라."
외성으로부터 삼백 장 떨어진 곳에는 거의 이만에 달하는 신쟁을 든 병사
들이 풀숲에서 위장하고 있었다. 신쟁. 거의 반 장 길이에 달하는 기다란
막대기처럼 생긴 개인 화기였다. 한꺼번에 이십 개 정도의 납탄을 발사할
수 있는 무기로, 탄환 역시 보통의 납이 아니었다. 독극물 속에 담갔다가
사용하기 때문에 굳이 한 번에 목숨을 취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효율적인 살
상무기였던 것이다.
"온다, 준비하라."
둥둥둥! 둥! 둥둥!
전진을 알리는 북소리와 함께 가장 선두에 있던 보병들이 황군의 신쟁 부
대가 있는 곳을 향해 다가왔다.
"발사하라!"
어디선가 들려오는 발사 명령과 함께 가장 선두에 있던 수천 명의 병사들
이 일어서면서 그들의 화기로부터 붉은 불이 쏘아져나갔다.
"크아악! 으악!"
반란군 선두에서 진격해나가던 보병들이 처절한 비명소리와 함께 마치 썩
은 집단처럼 무너져 내렸다.
투투투! 툭툭!
"으음!"
급기야 담운천의 입에서 곤혹스런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자신이야 호신강
기로 날아오는 탄환을 튕겨내고 있지만 나머지 부하들은 그렇지 못했다. 달
려가던 병사들과 함께 무더기로 쓰러지고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스쳐 지나
가기만 해도 피를 토해내고 있었다.
"노야! 무인들을 먼저 내보내야 하겠습니다."
각인대사가 담운천을 보고 소리를 질렀다. 금의위나 동창의 무사들을 상대
하기 위해 혈맹무인들을 앞서 나가지 못하게 하였는데 소용이 없었다. 앞에
있던 보병들 사이를 뚫고 들어온 납탄환이 혈맹무인들의 몸속에 틀어박혀
버린 것이다. 오히려 방해가 되고 있음이다. 약간의 희생을 감수하고 먼저
나가서 화기를 들고 있는 병사들을 처치해야 그나마 승기가 보일 것 같았다
.
"그렇게 하게나."
"혈맹무인들은 적을 주살하라!"
각인대사의 고함소리에 붉은 옷을 입고 있던 무인들이 허공으로 솟구쳐 오
르며 전방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뛰쳐나갔다. 바로 옆에서 동료들이 쓰러지
고 있음에도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내가 살기 위해선 조금이라도 빨리 화
기를 들고 있는 적을 처치해야만 했다.
"크악! 으아악! 아악!"
황군과 붉은 옷의 혈맹무인들이 섞이며 양편에서 처절한 비명소리가 들려
오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당했던 분풀이라도 하듯 혈맹무인들의 무기는 사
방을 향해 죽음의 살기를 뿌려댔다. 그러나 그들 또한 다른 병사가 쏜 신쟁
에 의해 속절없이 죽어나가고 있었다.
"도화선에 불을 붙여라!"
저 멀리 다가오는 반란군을 쳐다보던 선덕제의 입에서 천둥 같은 고함소리
가 터져나왔다. 신쟁 부대 뒤쪽에서 반란군을 기다리고 있는 화기는 가장
흔하게 알려진 진천뢰였다. 진천뢰 또한 엄청난 분량이었다. 수천 개의 구
덩이를 파서 각 구덩이 속에 이삼십 개의 진천뢰를 한꺼번에 묻은 다음, 도
화선만을 밖으로 빼두었다.
찌이익! 치지직!
삽시간에 매캐한 연기가 북야평에 가득 들어찼고 수천 개의 불꽃이 전방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나아갔다.
과앙! 과아! 콰과광!
"으아악! 아아악!"
살아남은 신쟁 부대원들이 빠져나감과 동시에 지반이 들썩거릴 정도의 거
대한 폭음이 일었다. 뿌연 연기와 화광이 충천하고 수많은 비명소리가 들려
왔다. 수천 개의 진천뢰가 한꺼번에 터져버렸다. 불의 폭풍이었다. 지진이
일어났다 해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어 보였다. 붉은 속살을 드러내고 파헤
쳐져 있는 땅거죽 위로 찢겨진 살점이 흩어져 내렸다.
"공격하라! 멈추지 말라!"
계속되는 희생에도 불구하고 여홍진이 고함을 내질렀다. 놀랄 틈도 없었다
. 조금이라도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는 서둘러 공격해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진천뢰라는 막강한 포탄에 의해 또다시 수천 명이 목숨을 잃는 사태가 발
생했지만 더 이상 두려워할 수가 없었다. 무수히 죽어가는 동료들과 사방에
서 퍼지는 피 안개 때문에 이미 이성을 잃어버렸다. 더 이상 전술이라든가
작전이라는 말은 필요 없었다. 뒤쪽에서 물밀듯이 밀려드는 동료들 때문에
라도 전진해나갈 수밖에 없었다.
"죽여라! 전부 죽여라!"
바로 앞에서 화승총이 불을 뿜어대고 있었지만 병사들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빨라지고 있었다. 마치 서둘러 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처럼……. 얼마의 병사들이 죽었는지, 누가 사라졌고 누가 떠났는지 알
수가 없다. 다만 숙명인 것처럼 앞으로 전진해나갈 뿐이었다.
반군이 지나간 팔백여 장의 평원에 온통 죽은 이의 시체로 가득했다.
이백 장. 황제인 선덕제가 있는 외성과 반란군과의 거리였다. 이제 더 이
상 화기의 공격은 없었다.
단지.
"쳐라!"
"와아아! 와아!"
그들이 있는 양편으로부터 수만의 기마병들이 물밀듯 쏟아져나오며 반군을
향해 지쳐들었다. 창과 검이 부딪히고 피와 살이 튀기 시작했다. 피아(彼
我)의 구분이 없었다. 살기 위해선 적보다 빨리 검을 휘둘러야 했다.
"혈맹의 무인들은 나를 따르라!"
각인대사의 고함소리와 함께 살아남은 혈맹무인들이 외성 쪽을 향해 무서
운 속도로 몸을 날렸다. 무공을 익힌 무인들답게 그들의 몸놀림은 경이로웠
다. 서로를 향해 검과 도를 날리고 있는 병사들의 머리를 밟고 비조처럼 날
아가고 있었다.
"동창의 위사들은 나를 따르라!"
"공격하라!"
유량과 석숭이 동시에 고함을 내지르며 성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지금부터
가 진정한 전쟁인 것이다. 각 진영의 최고 수뇌들끼리의 싸움, 이 싸움에서
살아남는 자들이 황실의 주인이 될 터였다.
순식간에 성벽 앞에는 금색과 남색의 물결이 일었다. 거의 이천에 달하는
동창과 금의위 위사들이 설치되어 있던 철포를 밟으며 혈맹무인들을 향해
달려나갔다.
"자네들 두 사람은 이곳에 있게. 담운천과 각인대사 놈이 나타나면 그들만
잡아두면 되네."
혼원벽력도(混元霹靂刀)를 뽑아든 팽무도가 철목승을 쳐다보며 말했다. 붉
게 상기된 그의 얼굴에선 진득한 살기가 배어나왔다. 그리고 그의 몸으로부
터 흘러나온 혈기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아버지, 숙부! 보십시오, 두 분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무도야, 이 애비는 너를 위해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했다. 나는 이곳을 집
이라 생각했었다. 아비와 자식이 같이 살아가는 집 말이다. 그런데 아니었
더구나. 무림왕 팽인덕의 야욕덩어리가 이곳이었다. 조금만 더 빨리 깨달았
던들…….'
자식의 가슴을 향해 도(刀)를 날릴 정도로 철심(鐵心)을 가졌던 분이었는
데 처음으로 눈물을 보이셨다. 잘못 살아왔다는 자책을 하고 계셨다. 돌아
온 아들을 위해,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아들들을 기다릴 힘을 주신다 하였
다. 자신에게 남아 있는 건 쓸모없는 내공밖에 없다며 작은아버지와 같이
내공을 넘겨주신 후 팽가에 불을 질렀다. 당신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떠
나간 백산의 마지막 눈빛이 그랬고, 불 속에 계시던 아버지와 숙부님의 마
지막 눈빛이 그랬다. 결코 실망하거나 절망하지 않는 눈빛, 자신들의 마지
막 선택에 대해 만족해하는 그런 눈빛이었다. 그분들의 힘이, 아들들의 눈
빛이 사방에서 솟구쳐 오르며 팽무도의 분노와 합쳐졌다.
죽음을 원하는 혼원벽력도가 붉은 혀를 날름거렸다.
"보아라, 아들들아! 너희들이 남겨준 힘이다."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었다. 전방에서 잔인한 살기를 품어내는 열 마리의
강시를 향해 수중의 도를 날렸다. 그의 분노를 싣고 허공을 비상해가던 혼
원벽력도가 스치는 곳에는 검은 가루만 남았다. 달탄으로 도망칠 때와는 비
교도 할 수 없는 가공함이었다. 단 일 도, 검강ㆍ도강도 뚫을 수 없다 했던
강시 열 마리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열 마리의 강시를 전부 없애버린 그의 도(刀)는 원래의 위치인 팽무도의
손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다시 사방을 휘감아 돌며 혈맹무인들을 향해 죽음
을 뿌렸다. 잘린 목과 함께 붉은 피가 허공으로 솟구쳐 오르며 무지개를 만
들어냈다.
한참을 홀로 비상하다 되돌아오는 도를 잡은 팽무도의 몸이 움직이기 시작
했다. 마치 구름이 흐르는 것처럼 붉은 혈운이 이리저리 움직이고 그 뒤에
는 잘린 육신과 피가 남았다. 자신의 빈 공간을 뚫고 들어오는 도조차 무시
해버렸다. 막아낸다는 생각조차 없는 듯했다. 오히려 더욱더 붉어진 혈광을
발하며 호신강기를 이용해 상대를 격살했다. 아들들이 그랬던 것처럼 팽무
도도 그렇게 싸우고 있었다.
그들과 같이 입었던 금의위 옷을 여전히 벗지 못했다. 뜯어진 곳은 다시
꿰맸고, 떨어져나간 곳은 천을 덧대어 깁었다. 녀석들이 돌아올 때까지 그
렇게 살리라. 더욱더 무공을 정진시켜 부끄럽지 않은 아버지가 되리라. 마
음속으로 부르짖은 혈극참에 백여 개의 혈광이 사방을 휘젓는다. 인성을 잃
어버린 야수의 모습으로 혈맹무인을 향해 도를 날리고 있었다. 사방으로 휘
돌며 도를 날려대는 팽무도의 가공스런 무위에 그를 향해 다가들던 혈맹무
인들이 주춤주춤 물러났다.
"검공, 도공! 저자를 잡아라!"
동요하는 부하들의 모습에 깜짝 놀란 담운천이 자신을 호위하고 있던 두
노인을 불렀다. 설마 강시 열 구를 일수에 없애버릴 정도의 가공할 고수가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동창과 금의위 무인들의 무공은 거의 파악했었
다고 여겼었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우리는 황제의 목을 따겠다."
"천주님!"
"그게 가장 빨리 끝내는 길이다. 저자의 목만 취하면 전쟁은 끝난다."
오연한 자세로 아래쪽을 쳐다보고 있는 선덕제를 가리켰다. 이 전쟁의 열
쇠를 쥐고 있는 자가 바로 그인 게다. 그가 죽으면 곧바로 전쟁이 끝날 터
였다. 담운천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심장이 폭발적으로 뛰었다.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인간의 감정이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흥분하지 않을 거
라 여겼는데 황제의 자리가 바로 눈앞에 있다는 생각에서인지 격앙된 마음
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자신도 모르게 거친 숨을 뱉어냈다.
그러나.
담운천과 각인대사는 선덕제 옆에 서 있는 두 사람에 대해 간과하고 있었
다. 비록 멀리 떨어져 있다고는 하지만 그들 역시 태연한 표정으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직 완전하게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이리라. 마치 새로운 세상에 온 듯한 느낌인 터였다. 거의 백여
년 동안 비무 한 번 하지 않고 살아왔기에 실전 감각이 살아나지 않고 있
었던 거였다.
"알겠습니다, 천주님!"
담운천을 향해 고개를 숙인 두 사람이 팽무도가 있는 곳으로 몸을 날렸다.
그들의 무공 또한 대단해서 막아서던 금의위나 동창무사들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천신가의 가신들, 먼 옛날 천하를 지배했던 천신가의 무공이었
기에 그리도 강한 것인지 누구도 두 사람의 근처에선 살아남지 못했다.
"담운천 놈의 개들이더냐?"
자신에게 다가오는 자들의 기세를 감지한 팽무도가 거친 욕설을 토해냈다.
진정으로 죽이고 싶은 놈들이 왔다. 담운천이나 각인대사의 목은 주인이
따로 있지만 다가오는 저놈들은 아닌 것이다. 먼저 잡는 놈이 임자인, 주인
없는 목인 것이다. 광풍대원들을 위한 첫 제물로 놈들이 적당할 것 같았다
.
"닥쳐라, 이놈!"
도공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자신이 하늘처럼 모시는 천주더러 놈이라
하는 게 아닌가.
"쿡! 담운천 그놈을 대단하다고 여기는가? 아니야, 그놈은 개종자일 뿐이
야. 그것도 아주 욕심 많은 똥개."
"죽일 놈!"
팽무도의 도발에 분노한 검공과 도공의 몸에서 전율적인 살기가 흘러나왔
다.
"이야합! 천도무극파!"
"천검무극탄!"
두 사람의 입에서 천둥 같은 고함소리가 터져나오고 남색의 도강기와 검탄
강기가 팽무도를 향해 물밀듯이 밀려들었다. 팽무도의 강함을 알고 있기에
일 초부터 전력을 다하는 것이었다.
"이 따위로 천하를 조롱했더냐? 이 정도로 세상을 가지려 했단 말이더냐?"
천중을 향해 치켜든 혼원벽력도에서 새빨간 기운이 흘러나와 두 사람의 공
격을 차단시켜나갔다. 단순하게 들어올린 상태만으로 전력을 다한 두 사람
의 공격을 막아버린 것이었다.
"자, 보아라! 평범한 인간의 무공이 어떤 것인가를."
천중을 향하던 팽무도의 도가 지면을 향해 힘차게 내리쳐졌다. 이번 역시
아무런 무언(武諺)이 없었다. 그러나 무언이 없다 하여 무공마저 없는 게
아니었다. 지면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내려가는 도(刀)로부터 수십 개의 새
로운 도가 생겨나는 것이었다. 마치 환영을 보고 있는 듯, 백팔 개의 혼원
벽력도가 수평으로 서 있었다.
더욱 놀라운 광경은 그 다음에 나타났다. 팽무도의 도가 지면에 닿는 순간
그것들이 검공과 도공을 향해 빛살 같은 속도로 날아가는 것이었다. 도탄
강기의 기술이 분명할진대 과거와는 또 달랐다. 주체할 수 없는 내공과 가
눌 수 없는 분노 때문에 탄생한 무공이었다. 무당산에서는 광풍대원들의 도
를 이용했었는데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백팔 개의 도탄강기가 아
니라 천팔백 개의 강기도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천도무극강!"
"천검무극만!"
해쓱하게 변한 도공과 검공에게서 다시 한 번 통렬한 고함소리가 터져나왔
다. 자신들에게 밀려오는 도탄강기에 포함되어 있는 기운을 알아보았기 때
문이었다.
무극도(無極道)였다. 하나의 도가 아니라 백팔 개 전부에 무극도의 기운이
서려 있었다. 피하고자 해도 피할 공간이 없는 경지. 조그마한 틈만 주면
그곳을 향해 모든 기운이 파고들게 되는 극고의 경지였다.
팽무도가 강해졌다는 것은 지금의 공격만 보아도 확연하게 알 수 있었다.
과거에는 들고 있던 도에 의해서만 가능했던 무극도의 경지가, 지금은 도탄
강기에도 실어 보낼 수 있게 되었다.
하수(下手)의 한 단계와 고수의 한 단계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초극의 고
수가 한 단계 더 성장했다 함은 최소한 두 배 이상 강해졌다는 걸 의미한다
. 그것은 그의 무공을 막기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는 검공과 도공의 표정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도탄강기를 막기 위해 검과 도를 휘둘러보고 있지만, 그들의 얼굴에는 이
미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크아악! 으아악!"
후두둑!
처절한 비명소리와 함께 머리를 제외한 검공과 도공의 몸이 조각조각 분리
되어 떨어져 내렸다. 조금 전만 해도 혈맹무인들을 가루로 만들어버리던 팽
무도가 이번에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들의 육편이 허공에 솟구쳐 오르도
록 일부러 잘라버렸던 것이다.
"저 양반도 강해졌군."
팽무도를 쳐다보던 철목승의 얼굴에 감탄의 빛이 어렸다. 유형마지에서의
깨달음이 있고 난 후 그보다 강한 무공은 나오지 않으리라 여겼다. 자신이
익혔던 무공이 과거 신가의 비공이었던 오신가의 무공이라 했을 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지금 와서 보니 오신가의 무공이 전부가 아니었다. 천역의 힘을 빌
리지 않고도 오신가의 무공에 육박하고 있는 무공을 보고 있는 것이다. 팽
무도가 그 증거였다.
"어떻게 하면 저리 강해질 수 있는가."
철목승보다 더 놀란 사람은 다름 아닌 선덕제였다. 그도 무공이란 걸 익히
고 있었고, 동창의 무인이나 금의위 위사들이 전부 무공의 고수라 알고 있
었다. 그러나 그들이 아무리 강하다 할지라도 신기영의 무기에는 당할 길이
없다.
그런데 지금 보고 있는 저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있는
곳까지 느껴지는 거력이라니, 더구나 무사들이 전력을 다해 휘두른 검과 도
가 그냥 퉁겨지고 있지 않은가. 과연 피와 살로 만들어진 인간인가 싶었다.
"간절한 바람과 노력입니다, 폐하!"
"간절한 바람과 노력이라……. 그래! 노력이 없으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
지. 저 둘을 맡아주겠나."
선덕제가 성벽 쪽으로 다가서고 있는 두 사람을 가리켰다. 담운천과 각인
대사, 허공을 밟으며 일행이 있는 곳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저들 때문에 이곳에 있는 겁니다."
"고맙소. 그대들 때문에 지금 해야 할 일이 생각났소. 따라와라."
자신을 호위하기 위해 남아 있던 동창무인들에게 명령을 내린 선덕제가 성
벽 아래로 몸을 날렸다.
"멈춰……."
선덕제를 향해 고함을 지르며 쫓아가려던 담운천이 갑자기 밀려오는 가공
할 기운에 깜짝 놀라며 서버렸다. 자신이 있는 허공 쪽으로 솟구쳐 오르는
인물들 때문이었다.
"그대가…… 마신가의 무공을 익혔던가?"
철목승에게로 시선을 주던 담운천의 표정이 이내 굳어지기 시작했다. 그의
감각에 철목승의 기운이 걸려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무공을 익힌 고수가
상대방의 무공수위를 알아보지 못했다 함은 무얼 의미하는가. 적어도 자신
과 동등하거나, 아니면 더 강하다는 의미인 게다.
지금 담운천이 느끼는 기분이 그랬다. 천역 두 곳의 힘을 얻어서 오신가의
무공을 아래로 두었다고 여겼었는데 잘못된 생각이었다.
"너무 겁먹지 마시오. 기운을 죽이고 있었던 것뿐이니까."
담운천의 놀란 마음을 조롱이라도 하듯 철목승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입술만 웃고 있을 뿐 그의 눈은 아니었다.
세 번째로 경험하는 투기(鬪氣), 한 단계 더 강해진 이후에 처음 느껴보는
투기였다. 담운천의 무공이 그만큼 강했던 탓이었다.
"성공하리라 보는 게요?"
철목승이 아래쪽을 가리키며 담운천에게 물었다. 이미 반란군이 졌다는 사
실은 확연하게 드러나 보였다. 혈맹의 무인들은 더 이상 반란군에 도움을
주지 못하였고, 금의위와 동창의 무인들을 막기에도 급급해하고 있었다. 더
구나 팽무도까지 가세한 금의위는 그야말로 파죽지세로 몰아치고 있었던 터
였다. 그나마 버티고 있는 곳은 여홍진이 이끌던 병사들이었는데, 그들마저
도 한 인물의 등장으로 지리멸렬해가고 있었다.
선덕제, 철목승과 대화를 나누다 서둘러 자리를 떴던 그가 새하얀 백마를
타고 전장의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 비록 동창무인들의 호위 속에 있다지
만, 그들과 같이 움직이며 적을 향해 검을 휘두르는 그의 모습은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우기에 충분했다. 그런 황제의 모습에 기겁을 한 석숭과 유량이
가세해들었고, 반군들의 선두는 급격하게 무너져 내렸다. 후미에 있던 여
홍진과 양광지가 부하들을 독려하기 위해 고함을 내질렀지만 이미 가망은
없어 보였다.
"그대들만 처리하면 성공하겠지."
부하들이야 아무리 많이 죽는다 해도 상관없다. 지금과 같은 역모에서는
상대 수장을 누가 먼저 잡느냐에 따라 성패가 좌우된다. 빠른 시간 내에 철
목승을 제거하고 선덕제를 사로잡으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천신검(天神劒). 천신가의 가주지검(家主之劒)을 일컫는다. 혈가의 후예에
의해 천신가가 몰락한 이래 단 한 번밖에 뽑히지 않았다. 오백 년 전 혈수
천마와의 싸움 때였다. 천신검의 수호자는 패배할 수 없기에, 아니 패해서
는 안 되기에 힘이 부족하다 싶으면 감히 뽑지를 못한다. 천신검을 뽑는다
함은 천상천하 유아독존이 가능한 상태이어야 했다. 그랬던 천신검을 백 년
전부터 뽑을 필요가 없었다. 천신가의 무공에 필적할 만한 무공이 없었기
에, 검을 뽑는 행위 자체가 검(劒)에 대한 모욕이라 여겼다.
그 천신검이 지금 묘한 떨림을 보이고 있다. 자신의 호적수를 만났다는 의
미인 게다. 싸우고 싶다는 열망에 스스로 울고 있는 것이다.
"보겠는가, 천신가의 무공을……."
천신검의 떨림이 그에게까지 전해졌는지 담운천의 목소리에 묘한 흥분이
느껴졌다. 하찮은 인간이라 여기며 애써 무시했던 철목승을 필생의 적수로
인정하고 있다는 반증인 셈이다. 자신의 그런 심정이 못마땅했는지 인상을
찌푸리던 담운천이 들고 있던 천신검을 거칠게 내던졌다.
"천검천무류(天劒天無流)!"
나직한 외침과 함께 담운천의 손을 떠난 백색의 장검이 허공을 갈랐다. 이
미 호적수로 인정했기에 철목승에 대한 선공은 천검무극류의 삼 초인 이기
어검술이었다.
"천역 두 곳을 합치셨던 게요?"
천마파천수라무를 준비하고 있는지 푸른 기운과 붉은 기운이 급격하게 섞
여들고 있는 가운데, 철목승이 담운천을 향해 물었다. 담운천의 검에서 느
껴지는 색다른 기운 때문이었다. 불연성지의 기운을 흡수했다면 맑고 온화
한 기운이어야 하건만,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그의 기운은 왠지 모를 사악함
이 포함되어 있었다.
"당신도 혼돈을 원했던 모양이군."
혼돈의 기운. 갈태독이 원했던 무공이었고, 백산이 익히고 있던 무공이었
다. 우주의 기운을 몸속에 만드는 방법. 그러나 그건 인간의 힘으로 이룰
수 있는 무공이 아니었다. 철가의 후예들이 했던 것처럼 신기의 도움이 있
어야 가능할 뿐이었다. 또한 그런 운명을 타고난 인재도……. 완전한 무공
도 아니었다. 인간의 심성을 파괴하는 불완전한 무공이었던 터였다.
"혼돈이란 건 말이오. 불완전한 인간의 무공이오. 결코 당신들이 얻을 수
있는 무공이 아니외다. 천마파천수라무!"
과거 귀혼곡에서 한 번 펼쳐졌던 천마파천수라무의 마신상이 검은 마기를
뿜어내며 담운천의 백색 검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나갔다.
기이잉! 과앙!
백색의 기운과 검은색의 마기가 부딪치며 그 여파가 사방으로 퍼져나갔고,
두 사람의 몸이 십여 장 뒤쪽으로 밀렸다. 허공에서 일어나는 신(神)들의
비무였다. 거대한 마신상과 그에 비해 너무나 왜소해 보이는 백색의 검.
"천검신무류(天劒神無流)!"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검을 잡아든 담운천이 좀더 커진 외침을 발하며 하늘
을 향해 천신검을 던져 올렸다.
순간 엄청난 광경이 벌어졌다. 철목승이 떠 있는 위쪽으로 수백의 투명한
검들이 생겨나며 아래를 향해 비처럼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천마지옥폭풍무(天魔地獄暴風舞)!"
천마지옥폭풍무. 유형마지의 깨달음을 얻고 난 후에 만들어진 무공이었다.
천마심공이 마신가의 무공이라 하였지만 과거의 기록 같은 건 없었다. 오
직 천마심공 속에서 무공을 찾아내야 할 뿐이었다. 그래서 찾아낸 무공이
지금의 천마지옥폭풍무였다. 그냥 서 있는 마신상이 아닌 의지를 가진 마신
상(魔神像).
철목승의 손과 발이 움직이자, 처음 나타났던 마신상 역시 그와 같은 동작
을 보이며 위쪽을 향해 검은 기운을 쏘아내기 시작했다. 강림한 지옥마신의
분노가 저러할까, 검은 기운이 스치는 공간이 그대로 찢겨나가는 듯했다.
검은 마기의 폭풍이었다.
"피하라!"
석숭과 유량이 선덕제를 호위하며 부하들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십여 장
이나 아래쪽에 있음에도 상층부에서 일어나는 기운을 감당하기 어려웠기 때
문이었다. 가히 신의 비무라 해도 손색이 없었다.
그들 중 가장 놀란 사람은 선덕제와 제독동창인 유량이었다.
"어찌 인간들의 몸으로……."
유량이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저런 인간을 향해 검을 뽑았던 자신이
아니던가. 자신들을 향해 이 따위라 하였던 철목승의 말은 허언이 아니었
다. 이십여 장 밖으로 피해 있음에도 그 여파가 느껴지고 있지 않은가.
"저자마저도……."
위쪽을 쳐다보던 유량의 시선이 다시 아래를 향했다. 하늘에서 거대한 기
운이 쏟아지고 있음에도 전혀 개의치 않고 도망치는 혈맹무인들의 손발을
묶어버리고 있는 인물. 언제나 석숭 옆에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팽무
도였다. 담운천이 이번 싸움의 승리를 장담하게 하였던 강시들과 검공ㆍ도
공이라는 가신들마저 없애버린 그가 이번에는 혈맹무인들을 향해 무차별하
게 도를 날리고 있었다. 그가 지나갈 때마다 그곳에 있던 철포들이, 마치
종잇장처럼 찢겨져나갔다. 붉은 기운에 싸여 있던 도에서 푸른 벼락같은 기
운이 쏟아져나온다. 이어서 터지는 처절한 비명소리. 아버지와 작은 숙부의
내공을 물려받은 후 팽무도에게 생긴 가장 큰 변화는 혼원벽력도가 과거의
모습으로 돌아왔다는 것이었다.
붉은 혈광 속에 푸른빛의 뇌정기가 포함되어 사방으로 뿌려지고 있었다.
혈뇌문의 내공심법 때문에 사라졌던 뇌기가 다시 세상에 나타난 것이다.
"전부 공격하라!"
쉬지 않고 적을 주살하고 있는 팽무도 때문에 자극을 받았는지, 선덕제에
게서 다시 공격을 알리는 고함이 터져나왔다. 전쟁의 끝을 알리는 마지막
명령인 것이다. 이미 전의를 잃어버린 반군의 무리들이 아예 무기를 버리고
투항을 해오기 시작했다.
"큭큭큭! 이렇게 되는 게 정도(正道)인 게야."
주고후가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이미 신기영의 공격을 받을 때부터 진 싸
움이었다. 아무리 많은 병력이 있다 하더라도 신기영이 있으면 이기기는 불
가능하였다. 그나마 무림인들이 있었기에 이 정도까지 왔을 뿐이다. 차라리
잘되었다 싶었다. 설사 자신이 황제가 된다 하더라도 군신들의 등살에 얼
마 버티지도 못할 터였고, 또다시 새로운 반란이 일어났을 것이다.
형님이 이기는 것이 순리인 것이다.
"커억!"
자신이 있는 곳을 향해 달려오는 선덕제를 막연한 눈으로 바라보던 주고후
가 수중에 들고 있던 검을 자신의 복부로 찔러 넣었다.
"이렇게 끝내는 게 좋은 거야, 이렇게……."
반란의 끝이었다. 주고후가 자결함으로, 그를 옹립하여 황제로 만들고자
했던 여홍진이나 양광지는 모반의 명분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결국 그들의
선택도 자결밖에 없었다.
아래쪽에서 조금씩 정리되어가고 있는 그 순간, 하늘에서는 아직 전쟁을
끝내지 못한 자들이 죽음의 비무를 펼치고 있었다.
"우리가 이긴 것 같소이다, 각인대사."
각인대사를 향해 화황척을 겨누고 있던 사진악이 나지막이 말했다. 비록
내상을 입고 있지만 그의 마음은 흡족했다. 벽력천가의 무공이 사신가의 무
공에 비해 손색이 없었던 까닭이었다. 이번 싸움 역시 이길 순 없었지만 지
지도 않았다. 계속하여 각인대사의 공격을 전부 받아냈던 거였다.
"허허! 신의 무공이라 여겼는데……."
각인대사의 얼굴이 참혹하게 구겨졌다.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얻었던 무공
이었다. 자식을 낳았던 여인을 죽였고 그 자식마저 이용해가면서 얻었던 사
신가의 무공이, 담운천을 제외하고는 상대가 없을 줄 알았고 신이 되었다고
여겼던 그 무공이 최고가 아니었다. 사사지옥혈공 내에 있는 모든 무공을
펼쳤지만 앞에 있는 젊은 녀석 하나를 처치하지 못했다. 사사지옥혈공보다
더 나은 무공은 얼마든지 있었다. 담운천이 있었고, 마신가의 후예가 있었
다. 담운천마저도 상대할 엄두를 내지 못하는 혈가의 후예가 있었다. 백 년
세월이 무너지고 있음이다.
'아니다. 지금 성공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다음에 기회가 또 있다.'
제천맹을 생각했는지 패배의식에 젖어가던 각인대사가 두 주먹을 불끈 쥐
었다. 이렇게, 이런 상태로 끝내기에는 지난 오십 년의 노력이 너무 억울했
다. 신가의 무공을 완성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했던 세월이 아니었던가.
그리고 담운천에 비하면 자신에게는 아직 많은 시간이 남아 있다. 제갈수연
만 조종하고 있으면 된다는 생각에서였다.
'노야! 다음을 기약해야 하겠습니다.'
더 이상 있어봐야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군을 너무 무시했던 게
패인이었다. 철포는 접어두고라도 그들이 들고 있던 개인 화기며 땅속에
매설되어 있던 화탄들, 절대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여겼던 무인들이 속절없
이 죽어나갔다. 제갈수연의 말이 옳았다. 어설픈 무인들이 정복할 수 있는,
그런 곳이 아니었다. 황실을 완전하게 정복하기 위해선 적어도 자신 같은
고수들이 수백은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더구나 감숙성에 있다고 여겼던 철목승의 출현은 더욱 의외였다. 철목승과
사진악만 없었던들 이 정도까지 당하지는 않았을 터인데 하는 생각이 들었
다. 결국 정보에서도, 무기에서도 완전하게 패한 싸움이 되었다.
'노야!'
다시 한 번 들려오는 각인대사의 전음에 담운천의 얼굴이 잔뜩 찌푸려졌다
.
화가 났음이다. 천역 두 곳의 힘을 합쳤음에도 마신가의 무공을 제압하지
못했다. 천검무극류의 모든 무공을 펼쳐냈는데 백중지세였다. 누구 하나 우
세를 점하지 못했다. 오신가의 최고가 마신가였다는, 과거의 기록에 대한
사실만 확인한 꼴이었다. 이제는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다. 제천맹이 완
전한 힘을 가지는 그때를…….
"우리의 승부는 다음으로 미뤄야 하겠구먼."
"도망가시는 게요."
뒤쪽으로 몸을 빼는 담운천을 향해 소리를 질러보지만 그 또한 더 이상 버
티기 힘들었다. 도망가는 담운천을 보고 있을 수밖에는…….
그러나 한 사람, 도망가는 그들을 향해 분노의 외침을 토해내는 자가 있었
다.
"혈극참폭멸!"
허공으로 솟구쳐 오른 팽무도에게서 거친 고함소리가 터져나왔다. 한천팽
무도법의 사 초, 백산이 만들었던 그 도법을 두 사람을 향해 동시에 펼쳐버
렸다.
슈아앙!
사방 천지에 붉은 혈광의 폭풍이 불어닥치며, 담운천과 각인대사에게 죽음
의 기운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이런……."
담운천과 각인대사의 얼굴이 해쓱하게 변하고 말았다. 설마 오신가의 무공
을 제외하고 이 정도의 거력을 쏟아낼 수 있는 무공이 있으리라 생각지도
못했다.
"천검무극류!"
"사사지옥혈공! 탄!"
두 사람이 동시에 전력을 다한 무공을 펼쳤다. 그러나 물러나면서 시전했
던 무공이었기에 완전한 힘을 싣지 못했다.
"커억!"
"으윽!"
허공 가득 핏물을 날리며 담운천의 몸이 비틀거렸다. 그리고 바닥으로 떨
어지는 물체 하나. 각인대사의 왼팔이 팽무도의 혼원벽력도에 잘려버린 것
이었다.
"나의 선물이야, 개자식들아. 우웩!"
멀어지는 두 사람을 쳐다보며 욕을 한바탕 퍼부은 팽무도가 무릎을 꿇으며
피를 토해냈다. 마지막 공격에 그 또한 모든 공력을 실어버린 거였다.
"무리하셨습니다, 어르신!"
철목승이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팽무도의 등을 두드렸다. 그 또한 내상을
입었는지 입가에 피를 흘리고 있었다. 전쟁에 승리한 황제파의 함성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지만, 피를 토하고 있는 세 사람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단지 담운천이라는 적을 상대하기 위해 이곳에 있었을 뿐, 누가 황제가 되
든지 관심 없는 이방인들.
"그래도 우리 덕에 석대인의 입지가 조금은 나아졌겠구먼."
"그 불알 없는 놈에게 협박이나 하고 갈까요?"
"걱정 말게, 나는 이곳에서 계속 그놈을 협박하고 있을 테니."
계속 무엇인가 해야 한다. 돌아올 녀석들을 기다리기 위해서, 빠른 세월을
보내기 위해서, 이곳에 남아 석숭과 같이 일을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