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7화 (78/84)

8장 공적이라 불리는 자들

 강호 전역으로 퍼져나간 제갈수연의 두 번째 포고는 육 개월 전 혈광마겁

이상의 파급효과를 가지며 전 무림을 술렁거리게 하였다. 명실 공히 천하제

일인으로 인정받고 있는 철목승을 강호공적으로 지목하는 발언이었기 때문

이었다.

 철목승으로 인하여 꿈을 접어야 했던 수많은 무인들, 철목승만 없으면 자

신이 천하제일이 될 수 있다고 여겼던, 스스로 강자라 생각하고 있던 많은

고수들이 그동안 갈고 있던 검과 도를 챙겨들고 세상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

다.

 넘을 수 없는 벽이라 여겼던 철목승이 무림공적으로 선포되었다. 수십수백

의 무인들이 합공을 하여도 본인들의 명예에는 전혀 흠집이 나지 않는 공적

. 일대 일 비무에 의한 승리가 아니라 할지라도 꿈을 접게 만들었던 그 벽

을 깨트릴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아울러 천하제일인으로 등극할

수 있는 새로운 희망도.

 철목승의 인간 됨됨이가 정파인 못지않게 공명정대하다는 세인들의 평가도

 별다른 의미가 없었다. 이미 과거의 일이 되었을 뿐이다. 강호무림을 장악

하고 있는 제천맹주의 선언이기에, 설혹 어폐가 있다 하더라도 믿어야만 한

다.

 얄팍한 동정심보다는 새로운 꿈을 꿀 수 있는 미래가 더 중요하기에.

 강호전역에서 천하제일인이 되고자 하는 꿈을 가진 은거 고수들이 세상으

로 나오고 있는 그 시간, 철목승을 공적으로 지목한 제갈수연은 새로운 모

험을 감행하고 있었다.

 "그래서 병력이 더 필요하다, 이 말이냐?"

 제천맹의 장생원. 명목상 천하제일인은 철목승이지만 그것은 무공에 국한

된 사항일 뿐, 이 시대의 진정한 천하제일인은 지금 제갈수연을 내려다보고

 있는 제천맹의 태상맹주인 검제 담운천이다.

 제갈수연을 응시하는 담운천의 얼굴에 언뜻 차가운 기운이 스쳤다. 광혈지

옥비를 회수하는 데 너무 많은 희생이 있었던 까닭이었다. 천여 명에 달하

는 혈맹 소속 무인들의 죽음은 크게 문제될 게 없다. 다만, 그에게 가장 강

력한 힘이었던 사혈마강시 파괴는 생각지도 못했던 타격이었다.

 오십 년을 공들여 만든 세력이 하루아침에 사라져버렸다. 누구를 탓할 수

도 없는 자신의 실책이었기에 더욱 화가 났다. 광혈지옥비에 연연하다가 더

 큰 걸 놓쳐버렸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리고 마냥 노예라 치부하

며 무시했던 제갈수연, 그녀를 다시 보게 된 계기가 이번 사건이었다.

 "광혈지옥비도 회수하지 못한 너를 어찌 믿고 다시 병력을 준단 말이냐."

 "광혈지옥비는 소천주님이 회수하기로 하였사옵니다."

 담진룡이 맡았던 광서성과 감숙성에서만 마차를 회수하지 못했다. 광서성

으로 도망쳤던 자들은 남만 오지로 숨어들었고, 감숙성으로 갔던 자들은 철

목승이 나와 구해가 버렸다. 따라서 광혈지옥비를 회수하지 못한 책임은 전

부 담진룡이 져야 한다는 말이었다.

 "으음!"

 담운천에게서 난감해하는 침음성이 흘러나온 경우는 처음이었다. 타인과의

 만남에서 단 한 번도 표정 변화가 없었던 그의 얼굴이 곤혹스럽게 변했다.

 결국 일의 실패에 대한 책임은 천신가의 후손인 담진룡이 져야 한다. 신의

 후손인 자신의 증손자가.

 "그럼 내가 병력을 주면, 철목승을 제거할 수 있겠느냐."

 "불가능합니다. 철목승을 제외한 나머지 인물들이야 저희 선에서 해결이

가능하겠지만, 그는 신가의 무공을 익히고 있습니다."

 객관적으로 판단했을 때 현 강호상에서 철목승과 겨룰 수 있는 인물은 담

운천과 각인대사밖에 없다는 사실은 담운천 본인도 알고 있는 일이다. 그러

나 그는 나설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황권(皇權), 전대 황제인 영락제를

 시해하여 조성한 최고의 시기였기에 무림 쪽에는 눈을 돌릴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당신을 견제해주는 유일한 인물인데 죽일 수야 없지요.'

 철목승이 아무리 대단한 무공을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수백의 무림인들이

달려들면 처리하지 못할 리가 없을 터이다. 몇 날 며칠을 벌떼처럼 달려드

는데 지치지 않는 인간은 없을 것이기에.

 하지만 결코 그럴 수는 없고 그리해서도 안 된다. 그가 신가의 무공을 어

느 정도까지 익혔고, 담운천을 상대할 수준이 되는지 아닌지는 중요한 사실

이 아니다. 그가 살아 있음으로 하여 담운천을 견제할 수 있다는 사실이 중

요한 것이다. 철목승이 살아 있어야 할 이유였다. 세력을 키우고자 하는 그

녀에게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이기에.

 "그렇다면 감숙성으로 갈 필요가 없지 않느냐."

 "아닙니다. 제천맹의 세력을 키우기 위해선 감숙성으로 가야 합니다. 그들

에 대한 공포심은 더 많은 무림인들을 이곳으로 몰려오게 할 테니까요."

 이른바 공포정치라는 것이다. 무림인들에게 극단적인 두려움을 심어주어

자신들이 기댈 곳은 제천맹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것.

 해서 이번 토벌은 반드시 필요한 사항이라는 것이다. 담운천 또한 반대하

지 않으리라는 생각에서였다. 어차피 제천맹을 본인의 세력이라 여기고 있

는 사람이 그가 아닌가.

 "그리고 한 가지 더 있습니다."

 담운천도 인정했다는 생각에서였는지 이곳을 방문하고자 했던 본래의 목적

을 꺼냈다.

 "뭐냐."

 "북경을 칠 세력은 저의 제천맹과는 연관 없는 별도의 세력으로 했으면 싶

습니다."

 담운천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이었지만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사안이

었다. 직접적으로 표현을 하지 않고 있다 할지라도 그도 후일을 생각하고

있을 것이기에 하는 말이었다.

 비록 북경의 일에 기회가 왔다지만 성공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더

군다나 혈광마겁으로 인하여 그가 보유하고 있던 강시 대부분을 잃었기에

그의 세력은 지난 오십 년 내에 가장 약한 시기가 되었다. 이번에 실패하면

 다음 기회를 노려야 할 터이고 제천맹은 재기하는 데 초석이 될 것이다.

그로선 선택의 여지가 없다.

 제갈수연의 생각대로였다.

 "그렇게 해라, 대신……."

 "금제를 받겠습니다."

 제갈수연이 먼저 선수를 치고 나왔다. 이미 이 상황을 예상하고 있었고 대

비할 방법도 생각해두었다. 다만 피할 수 있다면 피해보자는 생각에서였다.

 하찮은 인간 하나를 다루기 위해 제령침 따위에 의존하려 하느냐는 비난이

었던 것이다.

 교묘하게 담운천의 자존심을 자극하여 그냥 넘어가기를 바랐으나.

 "잘 생각했다. 노야는 몰라도 나는 너를 믿지 못했다."

 "으윽!"

 뒷골에 느껴지는 극심한 고통에 제갈수연이 나직한 비명을 토했다. 어느새

 들어왔는지 여태껏 보이지 않던 각인대사가 나타나며 그녀에게 제령침을

날려버렸던 거였다.

 "죄송합니다, 노야. 한 번 들어가면 저도 뽑아내지 못합니다."

 괜한 짓을 했다는 듯 엄하게 쳐다보는 담운천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변명

을 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결코 잘못된 행동이라는 표정이 아니었다. 진

작 해두었어야 했는데 늦었다는 얼굴이었다.

 "족쇄쯤으로 생각하면 될 게다. 노예들이 차고 있는 쇳덩어리 말이다."

 '능구렁이 같은 놈들!'

 고개를 숙이고 있는 제갈수연이 입술을 깨물었다. 입으로는 신이니 어쩌니

 하며 떠들어대면서도 하는 짓은 저잣거리의 소인배와 하등 다를 바 없다.

담운천 본인도 금제에 찬성했으면서 짐짓 아닌 것처럼 행동하는 저 표정.

 저 따위를 신들의 자존심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

 '당신들은 날 몰라.'

 벌써 백무천과 상의했던 일이었다. 신가의 무공을 익히고 있으면서도 그

활용에 대해선 정확하게 모르고 있는 저들의 허점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천

오백 년, 무공이 만들어지고 흐른 세월이다. 간신히 구결만 전하는 무공일

진대 다른 사실은 알 리가 없다.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강한 무

공이었지만, 오신가의 무공은 상호 견제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광혈지옥비가 그러한 사실을 증명해준다. 무공의 강함이야 익힌 자의 자질

에 따라서 우열이 갈릴 수 있다지만 반신오천역의 힘은 거의 동일하다. 즉,

 사신가의 제령침은 백무천이 익힌 화룡파천비공의 힘으로 얼마든지 없앨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익히고 있는 본인들은 그러한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한다. 아니, 알

려고도 하지 않는다. 강자의 자존심을 그런 식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제령침에 의한 통제는 일반 무인이나 강시들에게 통할 수 있는 수법일 뿐

이다.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은 머릿속에 박혀든 제령침을 제거하는 것이었

는데 그 또한 해결이 되었다. 제령침과 유사하게 생긴 침을 이용하여 이미

시험을 해보았다.

 때문에 금제를 받겠다고 자신 있게 말했던 거였다.

 "그만 물러가겠습니다."

 "좋다. 계속 수고하거라."

 원하는 대로 되었다는 것 때문인지, 미묘한 감정이 담운천의 얼굴에서 머

물렀다. 어쩌면 안도감인지도.

 "북경 상황은 어떠하던가."

 뒤돌아서는 제갈수연을 응시하고 있던 담운천이 각인대사를 향해 물었다.

사실 제갈수연보다 그가 더욱 신경을 쓰고 있던 곳은 북경의 일이었다. 황

제, 혼자만의 신이 아닌 모두가 인정하는 진정한 신이 되는 길이 그곳에 있

는 것이다.

 "좋지 않습니다. 혼란스럽기는 하지만 파고들 틈이 없습니다."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각인대사가 북경을 다녀온 모양이었다. 혼란한 정국

을 이용해 황실 공략계획을 세우고자 하였는데, 언제 황제가 죽었냐 싶게

안정되어가고 있었던 거였다. 더구나 황실에 숨겨두었던 첩자들이 색출되어

 무더기로 처형당하고 있었다. 북경에 만들어두었던 혈맹의 거점이 대부분

와해되어버린 것이었다.

 "석숭이 그 정도였던가!"

 "광혈지옥비 때문인 게지요."

 결국 자신들의 행보를 제지시켰던 것은 제거했다고 여겼던 혈가의 후예였

다. 그들을 치는 과정에서 너무 많은 피해를 입었고 석숭에게 시간을 주고

말았다.

 순서가 잘못되었던 터였다. 광혈지옥비 회수보다는 북경을 먼저 접수했더

라면 하는 생각뿐이었다.

 "다행이 소득은 있었습니다."

 "누구인가."

 "황제의 둘째 아들인 주고후(朱高煦)입니다."

 주고후.

 현 황제인 홍희제의 둘째 아들이다. 큰아들인 주첨기가 영락제와 같이 전

장에 나가 있을 때, 그는 아버지 홍희제의 그늘에서 태자 교육을 받았다.

큰아들이 언제 죽을지 모르는 전쟁터에 나가 있었기에 후일을 대비한 포석

으로 이루어진 일이었지만, 주첨기가 귀환한 지금에 와서는 오히려 부담스

러운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더구나 그를 지지하는 자들이 군권(軍權)을 쥐고 있는 병부상서와 오군도

독부의 장군들이어서 불안의 불씨는 더욱 커지고 있었다.

 이른바 신구(新舊)세력 간의 권력다툼이었다. 그동안 전장을 떠돌던 장성

들이 대거 귀환하여 황실의 각 자리를 차지하게 되자, 북경에서 군수를 조

달하는 위치에 있던 군벌들의 위치가 흔들리기 시작한 거였다.

 "그럼 주첨기가 황제자리에 오르면 반란은 필연적이겠군."

 "그렇습니다, 주첨기가 황제로 등극하면 주고후를 지지하던 자들은 전부

물러나야 하니까요."

 "서두르게, 올해 안에 처리하세나."

 "노야!"

 각인대사의 얼굴이 흠칫 굳어졌다. 너무 서두르고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비록 황실이 안정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겉모습일 뿐이다. 앞으로 주첨기와

주고후의 대립은 필연적이고 두 형제의 싸움이 시작될 즈음해서 일을 벌이

는 게 더 효과적인데 담운천은 바로 시작하자는 것이 아닌가.

 "그거 아는가, 혼란은 연이어 일어나야 그 효과가 더 크다는 걸."

 말은 그리하고 있지만 그의 속내를 들여다보면 다른 이유가 있었다. 자칭

신이라는 그도 세월을 느끼고 있음이다. 나이 때문인 게다. 더구나 광혈지

옥비를 회수하는 과정에서 겪은 실패는 그를 더욱 초조하게 만들었다.

 본인이 나서서 행했던 일이 실패한 것은 아니었지만, 천신가의 가주가 된

이래로 처음으로 맛본 좌절이었다. 세상을 너무 우습게보았다는 자각. 그

실패가 더욱 조급하게 하였다. 자신의 대에서 이루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

안감이 불쑥 머리를 내밀었던 거였다.

 "이번에 분위기가 조성되면 직접 가야겠어."

 "알겠습니다, 노야."

 직접 나서겠다는데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부하 된 입장이었기에 따를 수

밖에는.

 '하지만 무림이 먼저라는 생각입니다.'

 지금껏 각인대사가 주장해온 바였다. 황실보다는 무림에 집중하여, 그 힘

을 바탕으로 북경을 도모해야 한다는 생각. 그러나 담운천은 두 곳을 동시

에 얻고자 한다. 아니, 무림은 이미 얻었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지 황실에만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껄끄럽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철목승의 존재에 대해선 애써 무시하고 있는

게다. 황실을 장악하면 그들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건지, 제

갈수연이 결코 처리할 수 없는 사람이란 걸 알면서도 그녀에게 일임하고 있

다. 아마 혈가의 후예를 처리할 때처럼 할 것으로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 애도 보통이 아니라는 걸 아시지 않습니까.'

 제갈수연에 대한 처우도 서로 의견이 달랐다. 각인대사는 처음부터 제갈수

연에게 금제를 가하자 하였는데 담운천이 반대했다. 하찮은 인간이 뭘 하겠

느냐는 자만심이 지금의 사태를 불러오고 말았던 터였다.

 비록 담진룡의 실수에 의해 대부분의 강시를 잃었고, 또한 광혈지옥비도

회수하지 못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내면에 제갈수연의 농간이 있었음은 쉽

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이제라도 금제를 가한 게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또한 자신이 주장하

여 하게 된 것이었다.

 '어쩌면 그 하찮은 계집 때문에 몰락할 수도 있었습니다.'

 각인대사가 본 제갈수연의 능력은 그만큼 대단했다. 단지 능력뿐만 아니라

 운이 따르고 있다는 게 문제였다.

 세상살이에서 가장 우선하는 게 있다면 실력보다는 운이다. 남보다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다 하여 모두 성공하는 세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능력

을 발휘하고 못하고는 전적으로 운에 달려 있다. 그런데 제갈수연에게는 그

런 운이 따르고 있다. 본인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유리한 쪽으로 일이 이루

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각인대사를 두렵게 하였다. 하지만 이젠 그 운도 끝

이 났다. 어차피 자신의 꼭두각시가 되었기에.

 그러나 각인대사가 자신의 꼭두각시가 되었다고 마음을 놓고 있는 제갈수

연은 금제를 벗어나기 위한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그녀의 거처에 도착

하자마자 백무천을 불러 제령침을 제거하고 있었던 거였다.

 "으으으!"

 엄청난 고통이 그녀의 심령(心靈)을 강타했다. 머릿속을 온통 헤집어버릴

것 같은 강렬한 고통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백무천 또한 그녀와 다를

 바 없었다. 그에게 있어서는 고통이 아니었다. 제갈수연의 머릿속에 있는

제령침을 진기에 의해 제거하고 있었기에 모든 정신을 그곳에 집중하고 있

었던 터였다.

 자칫 잘못하면 제갈수연의 머릿속을 태워버릴 수 있는 위험한 작업인 게다

. 그의 심정을 대변하듯 온몸이 땀에 젖어들었다. 각인대사가 눈치 채지 못

하게 하기 위해선 전부를 태워버릴 수도 없다. 심령이 크게 영향을 받지 않

을 정도는 남겨두어야 했다. 삼분지 이 정도. 전부를 태우는 것보다 더 힘

든 작업이었다.

 "휴우! 됐소, 연매."

 긴 한숨을 몰아쉬며 백무천이 물러앉았다.

 "수고했어요, 백랑!"

 "정말 독하군, 그 고통 속에서도 웃다니."

 백무천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직도 엄청난 고통이 몰려오고 있을

 터인데 제갈수연은 웃고 있다. 예전부터 알고 있던 그녀가 맞나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언제나 새로운 모습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웃을 수 밖에요. 자유를 얻었는데."

 운신의 폭이 훨씬 커진 게다. 금제가 성공했다고 여길 터이고 그들의 명령

을 이행하면서 원하는 바를 얻을 수가 있다.

 "지금부터 만든 세력은 우리들 것이잖아요."

 그들의 금제가 오히려 득(得)이 되었다. 이젠 마음껏 세력을 만들어도 된

다. 자신만의 세력을.

 "철마궁에서부터 시작하세요."

 감숙성에 있는 철목승 일당을 공격하기 위한 전진기지로 사용하고 있는 철

마궁을 제천맹의 제일 지부로 만들려는 복안이었다.

*     *     *

 감숙성 최북단에 있는 홍석산(紅石山)의 천목애.

 불과 일 년 전만 해도 만여 명의 무인들이 집단으로 거주하고 있던 이곳에

 죽음과 같은 정적만이 감돌고 있다.

 무려 백 년 동안을 무림삼천의 한 곳으로, 마도(魔道)의 패자로, 천하를

지배해왔지만 이제 과거의 일이 되어버렸다. 중원을 차지하겠다는 야망을

가지고 이곳을 떠났던 검마 요대철의 운명처럼 천마맹의 건물 또한 그 이름

을 잃었다. 그 검은 건물 속에서 분노를 삼키고 있는 사람들, 그들의 이름

도 강호상에서 사라졌다.

 개천신마 악천, 남궁세가와 하북팽가 인물들, 철목승과 무욕인들, 그리고

개방의 파면신개가 그들이었다. 위명을 날리던 과거의 이름을 잃어버린 그

들에게 새롭게 불리는 호칭이 있었다.

 무림공적.

 천마맹의 검은 건물 속에 숨 쉬고 있는 모든 무인들의 이름은 강호공적이

라는 한 가지로 통일되었다.

 "악대협, 개방은 피해가 없겠습니까."

 서문천이 악만금을 향해 물었다. 남궁세가나 하북팽가는 모든 세가인들이

이곳으로 이주해왔기에 큰 문제가 없지만 개방만큼은 그럴 수가 없다. 그런

 개방을 제갈수연이 치자고 한다면 못할 것도 없기 때문이었다.

 "별문제 없을 겁니다. 공식적으로 저는 개방의 인물이 아닙니다. 그리고

개방은 강합니다."

 그도 풍신개와 같은 길을 걷고 있었다. 아니, 풍신개의 일을 대신하고 있

는 중이었다. 개방의 인물이면서 개방 소속이 아닌 자. 공식적으로는 개방

에서 파문되었지만 비공식적으로는 그들로부터 정보를 받고 있었다. 무림공

적이 된 파면신개 악만금, 그건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일일 뿐이다.

 설사 개방과 관련되었다 하더라도 제갈수연의 입장에서는 개방을 치겠다고

 나서지도 못한다. 제천맹이 완전하게 자리를 잡았다면 모르되 무당과 소림

이 건재한 이상에는 마음대로 움직일 수도 없다.

 "그보다는 앞으로의 일이 걱정입니다. 수많은 무림인들이 철마궁으로 몰려

들고 있습니다."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제갈수연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의 존재는

필요악이지요. 아니, 대형의 존재가 그렇겠지요."

 서문천도 제갈수연의 입장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장차 적이 될 줄 알면

서도 제거하지 못하는 입장에 있는 게 그녀다. 결국 그녀가 자신을 가지고

감숙성을 도모할 시기는 담운천이 완전하게 몰락한 다음이 될 것이라는 말

이었다.

 "담운천 때문인가. 그 신가의 후예라 하는 놈."

 진득한 살기가 잔뜩 배어 있는 저음의 목소리가 철목승에게서 흘러나왔다.

 평소에 알고 있던 그의 모습이 아니었다. 과거의 단아하고 고고해 보이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덥수룩하게 자란 수염과 움푹 들어간

눈자위는 그동안 그가 받았던 심적 고통이 얼마나 컸는지를 대변해주었다.

 철목승이 분노하고 있음이다. 세상 사람들이 천하제일인이라며 치켜세웠지

만 결코 야망을 꿈꾸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꿈을 위해 살아온 인생이었

고 그것만큼은 반드시 이루고자 했었다. 일생을 통틀어 유일하게 사랑했던

여인이었지만 친구의 품으로 떠나간 여인, 그 여인이 마지막 남겨준 냉추렴

의 행복이 그의 꿈이었다.

 그런데 그 아이가 죽었다. 불과 일 년 전에 웃으며 헤어졌는데 다시 못 올

 곳으로 떠나버렸다. 자신 때문이라 하였다. 고금오천무라 여기고 있었던

천마심공이 아득한 상고시대에 존재했었다는 신가라는 곳의 무공이었고, 그

 무공을 익히고 있는 자신 때문에 냉추렴이 죽었다는 것이다.

 무공을 폐하라 했으면 그리하였을 터인데, 목숨을 달라 했으면 주었을 터

인데, 어떤 선택도 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아무것도 알지 못한 상태에서

그녀의 죽음에 대한 소식만 들었다.

 분노(忿怒).

 외조부의 죽음에도 침묵했던 그가 처음으로 살기를 드러내며 분노하고 있

었다.

 "그렇습니다. 담운천을 넘기 위해서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세력과 시간입

니다."

 "그럼 수성만 하자는 말씀입니까."

 남궁세가의 현 가주인 남궁천우가 서문천을 쳐다보며 말했다.

 "우리도 힘을 길러야지요. 지금 전면전을 벌이면 자멸밖에 없습니다."

 결코 제천맹이 강해서가 아니다. 벌써부터 많은 인물들이 제천맹으로 모여

들었지만 아직은 오합지졸일 뿐 확고한 세력이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

과 전쟁을 벌일 수가 없다. 어찌 되었든지 민심은 그쪽에 있고 이곳에 있는

 자신들은 강호공적이다.

 육 개월 전 떠나갔던 광풍대원들과는 사정이 다르다. 광풍대원들은 무공이

 강하기는 했지만 전부가 무명(無名)이었기에 무림에서 강자라 알려진 자들

이 나서지 않았다. 이름도 없는 그들을 이긴다 하여 돌아올 이익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칼을 차고 있는 무인들이라면 이름만

들어도 전부 알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다. 즉 이곳에 있는 사람들을 죽인다

 함은 곧바로 강호유명인이 되는 지름길이 된다.

 누구누구를 이겼다는 명예. 더구나 상대는 강호공적이질 않는가. 강호무림

인들의 찬사와 함께 명예를 거머쥘 수 있는 기회가 왔다는 것이다. 때문에

현재의 상태에서 전쟁을 벌이게 됨은, 상대는 제천맹이 아닌 강호 전체가

되어버린다.

 "석대인을 기다려야 합니다."

 현 상황에서 서문천이 가장 믿고 있는 사람은 석숭이었다. 그 또한 영락제

 시해의 원흉이 담운천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고, 그들을 응징하고자 한다.

그리고 황실에서 이곳에 있는 사람들을 도와주고자 한다면 강호공적이라 선

포했던 제갈수연의 말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다.

 오히려 제천맹을 칠 명분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사항이 황실의 안정인 게다. 그 일 역시 시간이 필요한 일이고.

 그리고.

 '저는 광풍대원들을 기다립니다. 그들이 심판자가 될 겁니다, 강호를 심판

하는 집행자가.'

 설사 제천맹을 없앨 수 있는 여력이 있다손 치더라도 아직은 자신들의 몫

이 아닌 것이다. 중원 각처로 죽음의 여행을 떠난 그들, 백산을 비롯한 그

들이 돌아올 것을 믿는다. 몇 명이 되었든지 사 년 뒤 팽가에서 모일 것이

다. 다시 살아온 그들과 지금 절혼곡에 있는 남궁세우가 합쳐지면 천하에

무서울 게 없다. 강호인들은 진정한 귀신을 보게 될 터이다. 형체를 잡을

수 없는 살귀(殺鬼)들을…….

 혹여 그들이 돌아오지 못하면 그때야 이곳에 있는 사람들의 일이 될 터이

고, 그때까지는 힘만 기르고 있으면 된다.

 "악대협, 이것을 제갈수연에게 전해주십시오. 그리고 앞으로 개방에서 해

주셔야 할 일이 있습니다."

 서문천이 가지고 있던 책을 파면신개에게 내밀었다. 지금의 상황을 예측했

는지 언제나 품속에 넣고 다니던 혈맹인명록을 서문천에게 주고 벽하곡으로

 떠났던 거였다.

 모두에게 시간을 벌어주는 책자인 것이다.

 "제천맹의 밀정들을 말씀하시는 겝니까."

 "그렇습니다. 저희들이 살아남기 위해선 그들을 전부 파악하고 있어야 합

니다."

 "이미 착수했습니다. 팔 할 정도를 파악해서 감시하고 있고요."

 풍신개의 지시에 의해 수년 전부터 하고 있었던 일이었다.

 "아마 결정적인 순간에 제갈수연의 숨통을 끊어놓을 수 있을 겝니다. 그럼

 구체적인 대응방안을 논의하도록 하지요. 우선은 철마궁에 모여 있는 무림

인들이 이쪽으로 이동할 경로를 파악해야 합니다. 그리고……."

 전면전이 아닌 이상 결코 질 리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이곳은 감숙성의 최

북단이고 장성 밖이다. 초지(草地)보다는 사막이 더 많은 곳이기에 먼 길을

 온 자들은 결코 오랜 시간을 견딜 수가 없다. 지키고자 한다면 수십, 아니

 수백 년도 가능한 곳이 바로 이곳인 것이다.

 이름을 잃어버린 자들이 시간을 벌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있는 그 순간,

천마맹의 죄인을 가두던 곳인 수마옥 건물의 뒤편, 절혼곡이라 이름 지어진

 계곡에는 세 명의 인물이 서 있었다.

 남궁세우와 오구, 그리고 초상이었다.

 "정말 들어가시겠습니까?"

 초상이 사뭇 걱정스런 표정으로 오구를 쳐다보았다. 강해져야 하는 오구의

 열망을 알지만 너무 무모하다 싶었다. 오구가 들어가고자 하는 장소 때문

이었다.

 무욕관.

 과거 천마맹 시절, 무공을 연마하던 무욕인들이 그들의 무공을 시험하던

장소로 만들어진 곳이다. 단순히 가진 바 무공을 시험하는 장소로 불리고는

 있지만, 생각만큼 단순한 장소가 아니었다. 무욕인들의 서열을 정했던 장

소이기도 했기에, 다섯 관문이 전부인 무욕관의 험난함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천여 명들의 무욕인 중에 오관을 전부 통과한 사람은 무욕십대고수가

 전부였으니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랴.

 그런데 지금의 무욕관은 과거 초상이 통과했을 때와는 또 달랐다. 적어도

몇 배 이상은 더 강화되었던 것이다. 오구가 원해서 그렇게 하였다. 무욕관

을 통과했을 때 그 성취도가 지금의 초상밖에 되지 않는다면 들어갈 필요도

 없기에, 더 강하게 만들어주길 원했던 거였다.

 이제는 초상도 삼 관 이상을 통과할 수 있다는 장담을 하지 못한다. 한마

디로 죽음의 관문이 되어버렸다.

 무욕 제일 관은 심마관(心魔關)이다. 사방 일 장 크기의 작은 공간이지만

바닥과 벽, 그리고 천장이 전부 마정석(魔情石)이란 특이한 돌로 만들어져

있다. 끊임없이 마기를 만들어내는 마정석에 둘러싸여 운기를 해야 한다.

외부에서 유입되는 마(魔)의 기운을 이용하여 마음속에 잠자고 있는 마의

기운을 끌어내는 작업인 것이다. 정의 기운에 반대되는 개념이기에 마기가

주는 영향은 엄청나다. 육체적인 고통보다는 심적인 고통에 의해 더 큰 충

격을 받을 수 있는 관문이 이곳이다. 자신이 가장 기억하기 싫어하는 기억

들이 더욱 부풀려지고 확대되어 머릿속을 파고들며 끊임없이 환영을 불러일

으킨다. 눈을 뜨고 있을 때나 잠들어 있을 때를 따지지 않는다. 죽기 전까

지는 끊임없이 환상에 시달려야 하고 이겨내지 못하면 영원히 깨어나지 못

하는 그런 장소가 심마관이었다.

 두 번째 관문은 절혼관(切魂關)이다. 절혼관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자연

발생적으로 발생하는 호신강기이다. 석실의 가운데에 무방비 상태로 서서

사방에서 쏟아지는 쇠구슬을 받아내야 한다. 최종적으로, 내공을 전혀 일으

키지 않은 상태에서 아무런 고통을 느끼지 못하게 되면 절혼관이 끝난다.

 삼 관은 망혼관(亡魂關)으로, 이곳에서부터는 내공을 사용할 수 없다. 금

속제의 무기도 사용하지 못한다. 검을 사용하는 무인들은 목검을 사용해야

하고 도를 사용하는 자는 목도를 사용한다. 전부 백팔 개의 철골동인을 파

괴해야만 관문이 끝난다. 가지고 있는 모든 잠재력을 끌어내야만 하는 관문

인 동시에 통과하지 못하면 그대로 끝나는, 결코 현실로 돌아오지 못하는

관문인 것이다.

 사 관은 광혼관(狂魂關)이다. 역시 내공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산공독이 가

득 들어차 있는 곳이고 석실 안쪽이 전부 암기의 천국으로 변하는 곳이다.

심안(心眼)을 배우는 장소가 바로 광혼관이고 미친 듯이 날뛰고 다녀야 살

아남는 곳이다.

 마지막 초마관(超魔關), 진정한 마인으로 거듭나야 하는 장소이다. 이곳

역시 일 관의 심마관과 별반 다를 게 없다. 그러나 외부의 영향이 아닌 마

음의 벽을 넘어야 하는, 극복의 관문이 아닌 깨달음의 관문인 것이다.

 "들어가야지요. 이미 지옥을 겪었는데."

 아무리 힘들어도, 실패하면 백치 내지는 영원한 불구가 되는 그런 장소라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다. 삶에 대한 미련은 이미 버렸다. 살아 있다는

게 부담이 되는 삶이다. 차라리 아이들과 같이 죽었더라면 더 편한 삶이 되

었을 터인데…….

 이루지 못하면 혼만 돌아가야 하는 곳이 팽가일 뿐.

 광풍대원들에게 주어진 시간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인 게다. 무욕

오관을 통과하면 걸어서 팽가를 갈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이곳이 무덤이 될

 것이다. 투귀 오구의 무덤이.

 철목승이 준 천마장법과 갈노인이 주고 간 천장지옥마공, 그 두 가지만 익

히면 돌아올 녀석들과 수준을 맞출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 녀석들

을 넘어서기는 힘들지라도 더 이상 보호받지 않아도 될 것이다.

 "모든 관문의 왼쪽에 보면 나오는 곳이 있습니다."

 더 이상 견디기 힘들면 포기하고 나오라는 말이었다. 그러나 당사자인 오

구는 초상의 말을 듣고 있는지 무욕관을 쳐다보며 미소만 짓고 있다.

 "어르신, 가겠습니다."

 "그래, 수고해라."

 남궁세우의 표정 역시 오구와 같았다. 중도에 나오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냥 잠시 나갔다 오는 사람을 보내는 것처럼 그렇게 배웅하고 있다. 굳이

 살아나오라는 말이 필요 없기에,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는 사람은 결코

죽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에, 격려의 눈빛만 보내고 있는 거였다.

 오구가 무공을 익히고, 살아남은 아이들이 무공을 익히고 있을 때 그도 할

 일이 있다.

 대통진(大通陣).

 초리하에서는 불완전한 진이었지만 삼 년의 시간이 지나면 그때와는 다를

것이다. 최소한 다섯 명만 있어도 펼칠 수 있는 그런 완벽한 진을 만들어야

 한다. 나머지 세월 동안 그가 할 일이었다.

 무욕관으로 들어가는 오구를 지켜보던 남궁세우가 몸을 돌렸다. 그 또한

삼 년의 세월을 보낼 장소는 무욕관 옆에 있는 조그마한 석실이었다. 오구

가 들어간 곳이 그랬던 것처럼, 그가 들어간 석실도 대통진을 완성하지 못

하면 열리지 않을 것이다.

 돌아올 아들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기에.

 '힘내자, 오구야.'

 쿠-웅!

 심마관 안으로 들어서자 밖에 있던 석문(石門)이 닫히면서 묵직한 굉음이

울렸다. 단절의 소리인 게다. 세상과 단절하고 자신과 단절해야 함이다. 오

구라는 인간을 버리고 오직 무공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

 "이게 마기(魔氣)라는 것인가."

 석문이 내려가면서 밀려온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온몸을 타고 흐르는 스

멀거리는 기운이 느껴졌다. 마치 허공을 부유하는 듯한 기묘한 기운에, 자

신도 모르게 와락 짜증이 밀려왔다. 벌써부터 마기에 영향을 받고 있는 게

다.

 "힘을 주는 놈일 뿐이야. 다시는 지지 않을 힘을……."

 즐겁게 받아들여야 한다. 아이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는데 이까짓

거슬림이야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두 주먹을 불끈 쥔 오구가 석실 중앙에 가부좌를 하고 눈을 감았다. 그리

고 혈뇌문의 내공심법인 혈풍뇌전심법을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우웃!"

 내공심법을 운용하자마자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사늘한 기운이 온몸의 혈도

를 통해 급격하게 밀려들었다.

 초상이 말했던 그런 현상이 아니었다. 기다렸다는 듯 석실 가득 들어차 있

던 마기들이 봇물처럼 유입되고 있는 거였다. 마음속에 잠들어 있는 마의

기운을 끌어낼 여유가 없었다. 순식간에 온몸이 마기에 의해 잠식되어버린

느낌이었다.

 '이게 무슨…….'

 혈풍뇌전심법이 일으키는 조화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천지간의 기운을

받아들이는 데 가장 유용한 기능을 가진 내공심법, 과거 오신가의 무공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내공심법답게 어떤 기운을 흡수하는 속도는 엄청났다.

 그러나 결코 기연(奇緣)이 아니었다.

 지금부터가 시작인 것이다. 온몸 가득 들어차 있는 마기들에 의해 만들어

질 환영, 그 환상을 겪어내고 이겨야 한다. 내공심법을 운용하고 있는 상태

이기에 한순간의 흐트러짐은 주화입마로 이어질 테고 이곳은 영원한 무덤이

 될 터이다.

 힘을 갖기 위한 오구의 절규가 시작되었다.

*     *     *

 기련산(祁蓮山).

 천수(天水)에서 돈황(敦煌)까지 길게 이어진 하서회랑(河西回廊)의 남쪽에

 있는 산이라 하여 남산이라고 불리고, 청해성(靑海省)과 경계를 이루는 수

천 리 길의 장대한 산맥이다. 봉우리마다 쌓여 있는 만년설은 한여름이라

하여 사라지는 법이 없다. 각 산의 정상에 올라서면 그 폭이 이십 리에 달

하는 빙하가 곳곳에 산재해 있는, 감숙성의 젖줄이 되고 있는 산이 기련산

인 것이다.

 그 기련산에서 죽음의 축제를 준비하는 자들이 있었다.

 "이곳은 전략적 요충지입니다. 해서 무림인들이 무리를 지어 다니질 못합

니다."

 산동성 산해관(山海關)에서 시작한 일만 오천 리 장성의 서쪽 끝인 가욕관

이 이곳 감숙성에 있기에, 다른 어느 성보다 많은 군대가 주둔하고 있다.

언제나 전쟁 속에 살아가고 있는 곳이 감숙성이다. 도검을 차고 무리를 지

어 다니는 자들은 군대의 표적이 되기 십상이다. 그러한 사정은 천마맹에

있는 인물들이나 제천맹 무인들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때문에 그들이 올 수 있는 길은 두 곳밖에 없습니다."

 감숙성 최북단에 있는 옛 천마맹이 있던 곳으로 오기 위한 유일한 길은 기

련산맥을 타고 오는 방법과 장성 밖의 달탄 땅이 전부였다. 그러나 달탄 땅

 또한 중원무림인들로서는 올 수 있는 길이 아니다. 등격리사막(騰格里沙漠

)과 파단길림사막(巴丹吉林沙漠)을 가로질러 와야 하는데 사막이라곤 겪어

보지 못한 그들에게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인 것이다.

 "전부 기련산맥에 있으면 됩니다."

 제천맹 무인들을 공략하기 위한 서문천의 작전내용이었다. 혹여 그의 예상

을 뒤엎고 사막을 건너는 무인들이 있다손 치더라도 그들은 결코 상대가 되

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천마맹에 있던 무인들 거의가 기련산맥에 포진해 있는 이유가 그 때문이었

다. 벌써 이 개월 전에 도착하여 자신들이 맡았던 산의 지형을 대부분 숙지

해두었다.

 "또한 전면전을 벌일 필요는 없습니다."

 적당한 공포와 적당한 용서, 이번 작전의 가장 중요한 사항이었다. 적당한

 공포는 담운천의 세력인 혈맹에 대한 처벌을 말함이고, 적당한 용서는 제

천맹 인물들에 대한 처우였다.

 즉 너무 약하지도, 강하지도 않게 하여 시간을 벌고자 하는 것이었다.

 "감숙성에서는 우리가 이긴다."

 저 멀리 구조령(九條嶺)을 넘고 있는 수백의 인물들을 쳐다보며 두 주먹을

 불끈 말아 쥐고 있는 육십 대의 거구 노인. 노인의 몸에서 풍기는 기운은

어디서 많이 접해본 듯 익숙한 기운이었다. 백산의 사부인 팽무도와 흡사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 이 인물은 누구인가.

 적성도(摘星刀) 팽무경.

 하북팽가의 현 가주이자 팽무도의 막내 동생인 팽무경의 몸에서 전율적인

살기가 흘러나왔다.

 중원 하늘에서 팽가의 모든 것이 사라졌다. 아버지와 가신들 전부가 산화

했다고 하였다. 지난 오십 년간을 인내하며 살아온 자신들에게 다시 공적이

라는 음모를 씌운 것이다. 그들에게 보여줄 것이다. 팽가의 진정한 힘을,

비록 많은 수는 아니지만 결코 강호인들이 넘을 수 없는 가문이라는 사실을

 증명해줄 터이다.

 "아버님!"

 팽무경의 앞에 몸을 날려 도착한 이십 대의 청년, 과거 만상투인루에서 백

산으로부터 한천팽무도법을 배워갔던 참마도 팽월이었다. 그 또한 일 년 전

하고는 판이하게 달라져 있었다. 적어도 몇 단계 이상 성장했는지 상당히

정제된 기운이 흘러나왔다.

 "저들의 진행 방향으로 괜찮은 매복지가 있습니다."

 "좋다, 그곳으로 간다."

 '놈들! 기련산의 밤이 얼마나 무서운지 똑똑히 보여주마!'

 팽가의 무인들이 노리는 자들은 전부 없애야 될 목표물인 혈맹의 잔당이었

다.

 팽무도를 비롯한 이백여 명의 도(刀)를 찬 무인들이 구조령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십여 장, 이백여 명 팽가무인 각각이 한 번에 움직이는 거리였다.

10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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