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오십 년 만의 귀환
멀리 우뚝 솟아 있는 팔달령 장성을 뒤로하고 거용관 아래를 지나는 초라
한 몰골의 인물들. 퀭하니 들어간 두 눈과 차가운 겨울바람에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푸석푸석한 피부를 가진 야윈 얼굴은 지난해 몰아쳤던 흉년으
로 인하여 모든 가족을 잃고 세상을 떠도는 유랑민의 모습과 하등 다를 바
가 없어 보였지만, 두 사람의 눈과 발걸음은 아니었다. 깊숙이 들어간 두
눈으로부터 새어나오는 눈빛과 비록 천천히 걷고 있지만 한 걸음씩 내딛는
발걸음은 마음이 죽어버린 자의 모습이 아니었다.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있
는 눈이었고 가고자 하는 목적지가 있는 걸음걸이였다.
팽무도와 강구두.
지니고 있던 모든 내공이 사라지고 이제는 평범한 양민으로 변해버린 두
사람이 팽가로 가기 위해 하북성으로 들어온 것이다. 내공이 없다는 게 이
런 것인지, 한 시진 정도 걷고 나자 호흡이 가빠지고 다리가 후들거리는 것
같았다.
"피곤하십니까."
강구두가 안타까운 눈으로 팽무도를 쳐다보았다. 팔십이 넘어가는 나이 때
문인지 조금만 걸어도 힘들어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삭풍이 몰아치는 겨울
임에도 팽무도의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다.
"그래도 나는 집으로 가고 있지 않느냐."
가장 먼저 죽어야 할 자신이 죽지 못하고 살아남았다. 채 피지도 못한 아
이들을 가슴속에 묻어버리고 말았다. 자신이 키웠던 아이들인데, 과거의 동
료들에 의해서 그 애들이 죽었다.
운명.
과연 이런 게 운명인지, 세상사 모든 일이 서로 연관되어 흘러간다지만 이
건 아니다 싶었다. 또한 그 애들과 같이 죽지 못한 자신의 욕심에 대해 환
멸마저 느껴졌다.
"구두야, 그만 떠나거라."
다른 시절 같았으면 가문으로 데리고 가서 치료라도 해주었을 테지만 지금
은 그럴 수가 없다. 자신이 도착할 때까지 팽가가 남아 있을까 하는 것도
의문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미 팽가나 남궁세가는 강호공적으로 지목되었다. 봉문 중에 있는 상태임
에도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지 않고, 오히려 악도들을 길러 강호를 어지럽혔
다는 죄목이 그 이유였다. 이런 시기에 팽가로 간다 함은 곧 죽음을 의미한
다. 아마 그곳에는 아버지와 몇몇 분들을 제외하고 아무도 없을 것이다. 어
쩌면 자신을 기다리기 위해 남아 있는지도.
"어르신, 저도 팽가에서 기다리고 싶습니다."
강구두가 간절한 눈으로 팽무도를 쳐다보았다. 무공이라도 있다면 사 년의
세월을 견디어 보겠지만 그것도 아니다. 아무도 없는데 어디서 무엇을 하
며 살아간단 말인가. 다시 시작할 여력이 없음이다. 오직 한 가지 바라는
게 있다면 사 년 뒤에 돌아올 아이들을 기다리고 싶다는 것뿐이었다. 살아
서 기다리든, 아니면 죽어 혼백이 기다리든 그건 문제될 게 없다. 그들이
다시 시작할 장소로 팽가를 택했고, 그 시작점에 같이 있고 싶다는 생각.
단지 그것만이 유일한 바람이었다.
"그래, 가보자. 그곳에 가면 뭔가 방법이 있을지도……. 아직 있다면 말이
다."
뒷말은 혼자만의 중얼거림이었기에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같
이 가자는 팽무도의 말에 강구두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어르신, 금의위 영반의 명패나 써먹지요?"
"말이나 얻어 타자고? 그것도 좋은 방법이구나."
몸을 일으킨 두 사람이 거용관 수비대가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팽무도와 강구두 두 사람이 말을 구하기 위해 장성수비대로 몸을 움직이고
있는 그 순간, 안휘에 있는 남궁세가에서는 오십 년 만의 부자상봉이 이루
어지고 있었다.
남궁세우.
감숙성에서 철목승에 의해 목숨을 구한 그가 오구를 남겨둔 채 본가로 왔
다.
"왔느냐……."
자신에게 절을 하는 아들을 바라보는 남궁일몽의 눈에 뿌연 물막이 어렸다
. 죽었을 거라 여겼던 아들의 생존소식을 들었을 때 얼마나 기뻤던가. 그
아들을 기다리는 지난 몇 개월이 만금뢰에서 보낸 오십 년의 세월보다 더
길었다. 아들의 거처에서 생활하며 하루에도 수십 번씩 대문 밖으로 나가보
았다. 혹여 자신이 없을 때 아들이 찾아올까봐 언제나 자신의 행선지를 밝
히고 다녔다. 그렇게 기다리던 아들이 돌아왔는데 반겨줄 사람이 없다. 자
신과 오대가신 여섯이 전부였다.
"씻어라, 술이나 한잔 하게."
"네, 아버님!"
집이란 이런 것인가. 광풍대원들과의 생활이 정이라면, 이곳에는 편안함이
있다. 거의 오십 년 만에 찾은 곳이지만 전혀 어색함을 느낄 수가 없다.
그곳에서는 자신이 가장 연장자였고 돌봐야 할 자식들이 있었지만, 이곳에
서는 아니다. 보호를 받을 어린아이일 뿐인 것이다.
잘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먼저 간 아이들에게 미안하고 죄스럽지만 살기
를 잘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낳아주신 아버지가 있고 외숙이 있다. 사촌
형이 있고 숙부가 있다. 그리고 그분들의 따스함이 있다.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남궁세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사람 사는 냄새였다
. 모든 것이 과거 자신이 떠났던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아마 아버지일
게다. 다시 돌아올 아들에게 적적한 방을 보여주지 않기 위해 일부러 기거
하셨을 게다.
"물 부족하면 불러라. 더 가져다주마."
"외숙!"
뜨거운 물을 한 통 가득 들고 들어오는 사람, 외삼촌인 서연후였다. 백이
십이 넘은 노인들이 아들을 위해, 조카를 위해 불을 피워 물을 데웠던 것이
다.
"세우야…… 잘 왔다."
남궁세우를 안은 서연후의 노안에도 눈물이 흘렀다. 여동생의 큰아들, 녀
석을 보내고 얼마나 번민했던가. 자식들을 지켜주지 못하고 자신들의 손으
로 그들을 죽음으로 인도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 자식이 살아 돌아왔다. 비록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지만 다시
살아서 돌아온 것이다. 이제는 동생에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 팔십이 다
된 녀석의 목욕물까지 데워서 주었노라고.
"씻고 주방으로 오너라."
이미 늙어버린 조카의 얼굴을 더 이상 지켜보기가 힘들었음인지 간단한 말
만 남기고 서둘러 나가버린다. 단지 그 때문이 아닐 것이다. 잃었던 자식이
아니라 버렸던 자식이 살아 돌아왔기에, 자신들을 용서하고 다시 찾아주었
기에……. 너무 고마워서, 너무 대견해서 펑펑 울어버릴 것 같아 미리 자리
를 피한 것이리라.
"알았습니다, 외숙!"
남궁세우의 얼굴에 훈훈한 미소가 어렸다. 다시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 같
았다. 조금 일찍 돌아올 것을, 하는 생각도 들었다.
'꼭 길어서 좋은 건 아니니까.'
서둘러 목욕을 마치고 주방으로 들어선 남궁세우의 입에서 나직한 탄성이
흘렀다. 활활 타는 불길 위에 달궈진 솥에서 야채를 볶아내고 칼질을 하고
있는 노인네들의 모습이 주방의 전경과 너무 어울려 보였기 때문이었다. 일
평생 동안 주방 문턱 한 번 넘어보지 않았던 분들이었다. 그런 분들이 검을
쥐던 손에 식칼을 들고 고기를 썰고 있다. 검법을 시전할 때보다 더 능숙
하게 칼질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앉아라. 뭘 그리 멍청하게 서 있느냐."
요리를 접시에 담던 남궁일몽이 미소를 지으며 남궁세우를 쳐다본다. 아들
이 돌아온다 했는데도 해줄 만한 게 없었다. 이미 늙어버린 아들이고 가문
의 환영도 없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지금의 요리였다. 아들이 돌아오면
자신의 손으로 만든 음식을 먹이고 싶었다. 지난 삼 개월간 돌아올 아들을
기다리며 성도의 가장 유명한 객잔에서 요리를 배웠다.
"어떠냐?"
자신이 만든 음식을 맛보는 남궁세우를 잔뜩 긴장한 얼굴로 쳐다보며 물었
다. 여섯 사람의 표정이 전부 똑같았다. 마치 새롭게 객잔을 개업한 주인이
첫 손님을 쳐다보는 표정과 같은 얼굴이었다.
"이 길로 나서도 되겠습니다."
음식의 맛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백이십이 넘은 아버지가 팔십이 된 아
들을 위해 손수 만들어준 사랑인데, 이 세상 어떤 음식이 이런 맛을 낼 수
있겠는가. 천상의 음식인들 이 맛을 낼 수 있으랴. 목이 메여 음식이 넘어
가질 않는다. 최고의 성찬이건만 눈앞을 가리는 눈물 때문에 보이질 않는다
.
"고맙구나. 계속 만들어주고 싶어도 시간이 없구나."
"아버지!"
"네가 이곳에 왜 왔는지 알고 있다."
아들이 자신과 함께 죽기 위해 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가문을 구하기 위
해 온 것이 아닐 것이다. 아버지와 숙부들을 보기 위해 온 것이리라.
"아들을 두 번 죽이는 아비가 되고 싶지는 않구나. 그리고 염치없는 부탁
이다만 복수를 해주었으면 한다."
큰아들의 의무를 지우는 것이었다. 아비의 복수를 위해 살아나라는 말인
것이다. 그리고 녀석이 아들로 생각하고 있다는 그 아이들, 자신을 향해 광
천뢰를 던지고 작은아들을 죽이겠다고 달려들었던 그 아이들을 기다려야 한
다.
"세우야! 우리는 너를 기다렸지만 너 또한 기다릴 자식이 있지 않느냐. 너
는 밥이 아닌 더 좋은 것을 만들어주어야 한다."
"외숙!"
그랬다. 자신의 목숨은 이미 하나가 아니다. 이 시간을 만들어준 아들들의
몫인 것이다. 그들을 위해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걸 잊었다.
대통진, 그 진을 완성하여 사 년 뒤 돌아올 아이들에게 선물을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아버지의 말대로 살아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어서 떠나라. 이미 진이 뚫리기 시작했다."
"알겠습니다, 아버님."
"저놈들은 말이다. 남궁세가를 칠 수는 있어도 남궁세가의 땅을 갖지는 못
한다. 이곳은 영원히 남궁세가의 터전일 뿐이다."
남궁일몽이 환하게 웃으며 남궁세우를 쳐다보았다. 이제는 아들을 죽이는
아비가 아닌, 아들을 지키는 아비가 되는 것이다.
'잘살거라, 아들아!'
떠나는 남궁세우를 지켜보는 여섯 명의 노인들, 더 이상 회한에 찬 얼굴이
아니었다. 모든 한을 풀었다는 홀가분한 표정들이었다. 더 이상 미련이 없
다는 얼굴.
"자, 시작해보세, 남궁세가가 죽지 않았다는 걸 보여주어야 할 것 아닌가.
"
"알겠습니다, 가주님!"
"화룡지천무!"
금일 남궁세가를 치는 데 선봉장으로 나선 사람은 제천맹의 부맹주가 된
정천무룡 백무천이었다. 백무천이 잔뜩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전방을
향해 사정없이 자신의 절기를 뿌려댔다.
진식.
제갈세가에만 있는 것으로 알았던 진식이 이곳 남궁세가에도 있었다. 남궁
세가가 있는 전 지역을 감싸고도는 검은 안개는 일반 무인의 접근을 막아버
렸다. 지독한 독무였던 거였다. 화룡파천비공을 익힌 자신에게야 아무런 영
향을 주지 못하지만 나머지 무인들에게는 아니었다. 일각을 버티지 못하고
전부 쓰러지고 있었던 것이다.
제갈수연도 언급이 없었던 진식이었다. 그녀가 알고 있었다면 자신에게 말
해주지 않았을 리 없었다. 결국 같은 배를 탔던 동료였음에도 오천맹의 다
섯 가문에는 각자의 비밀이 있었다는 말이다. 제갈세가가 벽하곡의 만겁불
회귀역이 있는 위치를 숨기고 있었듯이, 검공과 검진으로만 알려졌던 남궁
세가도 지금과 같은 절진에 대해선 함구하고 있었던 거였다.
"끄아악! 커억!"
"이런 빌어먹을……!"
백무천의 얼굴이 붉어졌다. 자신이 진을 뚫는 시간보다 부하들이 죽어가는
시간이 더 빨랐다. 단순하게 독무만 있는 게 아니었다.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어둠 속 여기저기서 무수한 암기들이 쏟아져나오고 있었던 거였다
.
철컥! 철컥!
"크윽!"
쇳소리가 한 번 들릴 때마다 제천맹 무인들이 사방으로 쓰러졌다. 다시 한
번 남궁세가의 저력을 실감할 수 있었다. 남궁세가의 무사들은 한 명도 보
지 못한 상태에서 벌써 절반 이상의 부하들이 당하고 말았다.
"화룡지천무! 화룡천멸무! 화룡사멸무!"
백무천이 연거푸 화룡파천비공을 펼쳐냈다. 인간도 아닌, 단순한 진식에
의해 진로가 막힌다 생각하니 분노가 솟구쳐 올랐던 것이다.
그의 손에서 솟아나온 화룡들이 사방으로 비상하며 검은 독연들을 태워나
가기 시작했다. 장관이었다. 백산과 싸울 때를 제외하곤 단 한 번도 사용하
지 않았던 삼 초식의 무공을 동시에 펼쳐내자 그가 있던 주변이 지옥 같은
열기로 휩싸였다. 그 열기에 영향을 받은 부하들이 견디질 못하고 쓰러지고
있었지만 그것까지 신경 쓸 수가 없었다. 자신이 서두르지 않으면 전멸하
게 생겼기에 취한 행동이었다.
실책이었다. 자신의 화룡파천비공만 믿고 독연인지 알면서도 부하들을 데
리고 들어왔다. 자신의 무공이면 부하들이 중독되기 전에 진을 통과할 수
있을 것으로 믿었던 터였다.
돌아나가고자 해도 방법이 없다. 미로에 갇혀버린 것처럼 방향을 찾을 수
가 없었다. 오직 앞으로 전진해나가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 한 번, 두
번, 세 번. 세 번에 걸쳐 화룡파천비공을 펼쳐내자 드디어 그 끝이 보였다
.
"어서 오게, 젊은이!"
"당신들이 전부인가?"
남궁세가 안으로 들어선 백무천의 얼굴이 흠칫 굳어졌다. 전부 여섯 명,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는 남궁세가 인원의 전부였다. 제갈수연과 혈맹의 이
목을 속이고 모든 인원이 떠나버렸다는 뜻인 게다.
그러나 자신을 기다리는 여섯 명의 무공은 상상외로 강했다. 패천마궁의
궁주인 패무극보다 더 강해 보였다. 신가의 무공이 아니라면 결코 제압할
수 없는 자들이었다.
"정말 강호는 넓군."
금황신공만으로 강호를 좌시하려 했었던 과거가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그
정도의 무공을 익히고 있는 사람들은 널린 곳이 강호무림이었다. 더구나 신
가의 무공을 익히지도 않았던 갈태독이란 자는 자신에 육박하는 무공을 가
지고 있었다. 광혈지옥비를 가지고 있지 않았던 버러지 놈이 화를 낼 때 그
를 놓아준 이유가 사실은 그자 때문이었다. 버러지 놈보다 그자의 무공이
더욱 가공해 보였기에 물러설 수밖에 없었던 거였다.
그런데 앞에 있는 자들의 무공도 그에 못지않은 것 같다. 물론 그에 비해
서는 좀 부족해 보이기는 하지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실력자들인 것이다.
"전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있소."
"그거야 자네들이 알아내야 하지 않겠나. 그 정도도 못하면 자격이 없는
거라네."
세상을 다스리는 것은 힘으로만 되는 게 아니라는 말이었다. 힘이란 타인
을 굴복시킬 때만 필요한 수단인 것이다. 그 다음부터는 힘으로 누르는 게
아니라, 다스려야 함이다. 그러나 그 다스린다는 게 말처럼 쉽지가 않다.
수천수만에 이르는 강호인들의 존경을 얻어내야 한다. 언제나 말없이 지켜
보기만 하는 것 같지만 숨죽이고 있는 그들의 힘이 가장 큰 힘인 것이다.
"상관없소이다."
그들이 어디를 갔든지 그것이 문제가 아니다. 강호는 이미 자신과 제갈수
연의 손안으로 들어왔다. 남아 있는 적들이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바뀌지
않는다. 그들이 힘을 기를 동안에 자신들도 힘을 기를 터이고, 그들이 세를
불리면 자신들도 세를 불리게 될 것이다. 그들보다 적은 노력으로 더 많은
효과를 볼 수 있는 게 세상을 지배하는 자들인 게다. 더구나 담운천을 경
계해야 하는데 어쩌면 더욱 잘됐다 싶기도 했다.
"시작해봅시다."
육 인의 인물을 쳐다보던 백무천의 몸에서 서서히 새하얀 열기가 솟아나오
기 시작했다.
"자네 무공은 현 무림에서 다섯 번째라던데 맞는가."
신가에 대해선 아들에게 들어 알고 있다. 그런 자들이 있다는 것도 놀라웠
지만, 강호무림 최고의 무공이라 했던 고금오천무가 신가의 무공을 바탕으
로 만들어졌다는 게 더욱 놀라운 말이었다. 그런데 앞에 있는 저 젊은이가
신가의 무공 중 금신가의 무공을 이었다고 하니 호기심이 앞섰다. 나이를
먹었어도 무인인 게다. 또한 상대를 도발하는 말도 서슴지 않고 있다.
다섯 번째라는 말, 백무천의 자존심을 구겨놓는 말이기도 했다. 무슨 의도
로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백무천의 몸에서 전율적
인 살기가 흘러넘치기 시작했다.
"화룡지천무!"
백무천에게서 남궁세가를 날려버릴 듯한 일갈이 터졌다. 분노했음이다. 다
른 신가의 무공에 비해 자신이 약하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러나 그가 인정
하는 사람은 둘밖에 없다. 담운천과 각인대사, 그 둘을 제외하면 아무도 자
신 위에 설 수 없음이다.
그런데 지금껏 강호활동도 없었던 자들이 자신을 다섯 번째라 운운하고 있
다. 철목승보다도 낮고 버러지 놈보다 더 낮다는 말이다. 그의 분노를 대변
하듯 광폭한 열기를 동반한 화룡들이 남궁일몽 등이 있는 곳을 향해 날았다
.
"대단하기는 하구먼!"
백무천이 만들어낸 화룡들을 감탄의 눈으로 쳐다보던 남궁일몽과 오대가신
들의 형태가 기묘하게 변했다. 중앙에 남궁일몽을 중심으로 하여 오망성 형
태를 만들며 허공으로 솟구쳐 오르고 있다.
일종의 오행진이었다. 지난 오십 년, 만금뢰에서 자식을 기다리며 만들었
던 검진이었다. 온몸에 쇠사슬을 두른 여섯 명의 죄인들이 머리를 맞댔다.
최고인 줄 알았었는데, 더 이상 도전세력이 없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결
국은 자신들이 약해서, 남궁세가가 약해서 당한 것이었다. 더 강한 세가를
만들기를 원했다. 누구도 넘보지 못하는 최고의 가문을…….
그 결실이 지금 자신들이 펼치고 있는 검진이다. 비급은 아들에게 주었고
자신들은 시험만 하면 되는 게다. 실전에서는 얼마나 효력을 발휘하는지.
"제왕무적탄(帝王無敵彈)!"
남궁일몽의 입에서도 천하를 진동하는 고함소리가 터져나오고 그의 주변을
돌고 있던 오대가신의 몸에서 엄청난 기운이 흘러나와 허공으로 뭉치기 시
작했다. 마치 다섯 마리의 용이 서로 똬리를 트는 것처럼 서로 얽히더니 거
대한 용 모양으로 화했다.
꾸아악!
쿠르릉!
열두 마리의 화룡과 한 마리의 거대한 백룡의 동체에서 기묘한 소리가 흘
러나오며 서로를 향해 거세게 돌진해들었다.
쿠아앙!
거대한 폭음과 함께 두 거력의 부딪침의 충격으로 오백 년 남궁세가의 건
물들이 무너져 내리며 화룡의 영향권 내에 있던 이곳저곳에서 불꽃이 솟아
오르기 시작했다.
"으음!"
백무천의 얼굴에 놀라움이 가득했다. 처음 겪는 일이었다, 신가의 무공이
아닌 일반 무공이 화룡파천비공을 완전하게 방어해내는 건. 자신이 만든 화
룡이 여섯 명이 만든 강기의 벽을 뚫지 못하고 퉁겨버린 것이었다.
또한 저들이 만들어낸 백룡의 위력이란, 남궁세가의 검법인 제왕무적검강
에 천뢰지마저 섞여 있었다. 결국 남궁세가의 무공이 강호의 전설이었던 고
금오천무를 깨트려버린 거였다. 그러나 자신의 무공은 고금오천무가 아니고
금신가의 무공인 화룡파천비공이다. 이제 시작일 뿐이라는 것이다.
"화룡천멸무!"
백무천의 몸에서 예의 열기가 솟구쳐 오르며 다시 모양이 변하고 있었다.
가루라의 형태, 그가 전력을 다했을 때만 나타나는 전설의 신조가 불을 뿜
어내기 시작했다. 마흔아홉 마리의 화룡, 날개를 활짝 편 가루라의 날개와
입에서 쏟아져나온 수십 마리의 화룡이 사방을 유영하기 시작했다.
'저게 신가의 무공인가!'
경이로움이었다. 어찌 한 인간의 몸에서 저런 기운이 나올 수 있는지 남궁
세가도 오백 년의 역사를 가진 가문이지만 결코 저런 무공을 만들 수 없었
다. 반신오천역이 있다 해서 나올 수 있는 무공이 아니었다. 스스로 신이라
칭할 만한 가문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세상은 혼자 사는 게 아니다. 높은 산에 있는 천년고송은 보기에는
고고할지 몰라도 소나무 자신은 아닌 것이다.
외로움. 다른 이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외로움만 그의 유일한 친구일 뿐이
다. 여러 사람이 어울려 서로 감싸주며 살아가는 그런 곳이 세상인 것이다.
신이 되어서 무엇 할 텐가. 외로운 고송이 되어서 무얼 얻는단 말인가. 서
로 합심해서 최고가 되어야 한다. 혼자가 아닌 여럿이 같이 하는 세상.
"섬전검뢰풍(閃電劒雷風)!"
화룡파천비공에 있는 무공들처럼 화려하지는 않다. 방법은 제왕무적탄을
시전할 때와 똑같았지만 그 기운은 확연하게 차이가 났다.
뇌룡(雷龍), 이번에 남궁일몽을 비롯한 오대가신이 합심하여 만들어낸 용
은 번쩍거리는 뇌전의 기운을 흘리는 뇌룡이었다. 용이 회전을 한다. 허공
에 놓여진 기둥을 타고 가듯 주변 대기를 휘감아 돌며 백무천의 전신을 향
해 무서운 속도로 돌진해가고 있다.
두 무공의 다른 점이었다.
백무천의 화룡파천비공이 뒤쪽을 제외한 모든 방위를 공격하는 무공이라면
, 남궁일몽과 오대가신이 펼친 무공은 오직 한 방향만 공격하고 있었다. 피
하려 한다 해서 피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오직 정면으로 맞받아칠
수밖에 없는 공격인 거였다.
구구궁! 번-쩍! 콰앙!
"크윽! 허억!"
마치 벼락이 치는 듯한 굉음과 함께 양편에서 나직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
다.
놀라운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고금오천무만으로도 전설이 되었던 신가의
무공이 남궁세가의 검진을 뚫지 못하고 있는 거였다. 입가에 실낱같은 피를
흘리고 있지만 여섯 명의 노인들이 화룡파천비공에 전혀 밀림 없이 대등한
무위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아니, 이미 고금오천무는 깨졌다고 봐야 한다
. 화룡파천비공의 이 공을 막아내고 있지 않은가.
"이익!"
백무천의 얼굴이 화룡보다 더 붉게 물들었다. 화룡파천비공이 무너지고 있
다. 천하에 적수가 없다 했던 신가의 무공이 하찮은 것들이라 여겼던 무공
에 의해 스러지고 있음이다. 또 한 번 다가오는 좌절인 게다. 버러지와 관
련된 모든 놈들이 자신을 막아서고 있다. 버러지가 죽고 버러지의 동료가
전부 사라졌는데, 뇌룡현의 악몽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 빌어먹을 악연
은 언제까지 지속될 것인지. 놈의 흔적은 언제까지 따라다닐 것인지.
'없애버린다. 버러지 놈이 남기고 간 모든 흔적을 전부 날려버린다.'
분노한 백무천의 심경을 대변하듯 거의 투명한 모습으로 변한 가루라의 눈
에서 새빨간 불길이 쏟아져나왔다. 이어 가루라의 입으로 추정되는 부분에
서 더욱 강렬한 외침이 울려 퍼졌다.
"화룡사멸무!"
화염지옥이 탄생했다. 혈뇌문의 무공인 화염폭의 근원이었던 화룡사멸무.
사방 천지에 붉은 화광이 충천하고 그 불길에 의해 남궁세가가 초토화되고
있었다.
"좋군! 과연 신의 무공이라 불릴 만해."
백여 마리의 화룡을 쳐다보는 육 인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자칭 신이
라 일컫던 자들이 만들어낸 최후 무공을 끌어낸 것이다. 남궁세가의 저력인
게다. 이 세상 어떤 가문이 저들의 무공을 받아낼 것인가. 오직, 오로지
남궁세가만이 가능하다는 자부심이었다.
"그것 아는가. 자네는 우리 몫이 아니네, 자네를 잡을 사람들은 따로 있지
. 보아라, 이게 바로 남궁세가의 힘이다."
자신들 여섯이 전부 동귀어진을 펼친다면 같이 죽을 수 있을 터였다. 그러
나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제천맹과 저자를 처리할 사람들은 따로 있다.
아들과 손자들, 중원 어디선가 칼을 갈기 시작했을 그들을 위해 저자의 목
숨을 남겨줘야 한다.
"제왕천풍검뢰(帝王天風劒雷)!"
남궁일몽의 외침과 함께 오행의 방위를 점하고 있던 오대가신들의 몸이 그
자리에서 회전하기 시작했다. 주변의 대기가 무섭게 빨려들고 다시 밖으로
터져나온다. 거대한 폭풍이 일어나며 사방의 모든 것을 쓸어버린다. 강기
의 폭풍이고 심검의 폭풍이었다. 자신의 몸을 무기로 삼아 백무천이 만든
화룡들을 부숴나가기 시작했다.
"크윽!"
하나의 화룡이 사라질 때마다 백무천의 몸이 움찔거렸다. 자신의 의지와
상반되게, 화룡이 스러지면 그 타격은 자신이 받는 무공. 최고의 무공이라
여겼던 신의 무공이 가진 약점이었다. 백무천의 입가에서 피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심적 타격에 의해 내상마저 입고 있는 거였다.
"아느냐! 우리의 무공은 네놈에게 내리는 경고일 뿐임을……."
마지막 일성을 끝으로 남궁일몽의 몸이 백무천을 향해 돌진해들었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오직 부서진 화룡들이 내지르는 괴성만이
남궁세가의 하늘에 울려 퍼졌다. 거의 절반 이상의 화룡들을 부숴버린 그들
이 한 명씩 재로 부서져 내렸다. 오십 년 전 천하를 지배했던 최고의 절대
자들, 가문을 지키기 위해 자식들마저 버렸던 그들. 영원히 남궁세가를 떠
나지 않겠다는 듯, 재가 되어 사라졌다.
다시 세워질 세가의 뿌리가 되고 대지가 되기 위해서였다.
자신들의 재는 양분이 되어 세가를 더욱 강하게 키워줄 것이다.
"커억! 우엑!"
바닥으로 내려선 백무천이 연신 피를 토해냈다. 온몸에서 오한이 밀려드는
것 같았다. 그들의 힘은 상상을 초월했다. 신가만이 최고라는 자신의 생각
을 송두리째 바꿔버리고 말았다. 여섯 명이 동시에 자신에게 달려들었다면
지금 남아 있는 사람은 자신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밀려왔다.
그리고 남궁일몽이란 사람의 마지막 말, 자신에게 내리는 경고라 했다. 이
건 시작일 뿐이라는 말인 게다.
"잘못했소이다, 노인장. 기회가 생겼을 때 잡지 못하면 다신 오지 않겠소
이다."
어쭙잖은 자존심일 뿐이다. 세상은 그렇게 단순한 곳이 아니다. 기회가 생
겼을 때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못하면 패배자가 되는 게 세상인 것이다.
"가자!"
몇 명 남지 않은 부하들을 향해 명령을 내린 백무천이 몸을 날렸다. 지금
사라지고 없는 자들이 언젠가는 나타나겠지만 문제될 게 없다. 그땐 자신들
이 더 높은 곳에 있을 테니.
남궁세가가 불타고 있는 그 시간, 하북에 있는 팽가도 검붉은 화마에 휩싸
여 있었다. 그 불길을 응시하고 있는 두 사람이 있었다.
팽무도와 강구두. 그런데 두 사람의 기도가 달라져 있었다. 온몸에서 엄청
난 기운이 쏟아져나오며 사방을 향해 무섭게 몰아치고 있었다. 무공을 잃었
던 자의 모습이 아니었다. 얼마 전에 비해 더욱 강해진 모습들이었다. 팽인
덕과 가신들이 자신들의 내공을 두 사람에게 물려주고 팽가와 마지막을 함
께 하고 있었다.
"가자!"
"네, 어르신!"
불타는 팽가를 쳐다보던 팽무도와 강구두가 몸을 날려 사라졌다. 그들이
가는 방향, 석숭이 있는 북경이었다.
* * *
강호일통.
지난 백 년간 유지되어 오던 양맹체제가 끝나고 드디어 강호무림이 하나로
통일되었다. 과거 천마맹이 있던 자리에 아직은 철목승이라는 거인과 강호
상 어딘가에 숨어 있는 천사맹이 남아 있지만 그들이 제천맹의 무림통치에
문제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의 제거는 시간문제일 뿐
이라는 게 강호인들의 지배적인 시각이었다.
하루하루 커져가는 제천맹의 힘은 하북팽가와 남궁세가를 제거한 후 육 개
월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과거 천무맹의 위상에 접근해가고 있었다.
제천맹주 제갈수연.
여인의 몸으로 이 시대의 절대자가 되어버린 인물, 세상을 뒤엎을 만한 세
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천하를 아우르는 절대적인 무공이 있는 것도 아닌
그녀가 강호무림의 이인자가 된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강호인들은 그녀의 이인자 세월이 그리 길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구파일방의 끊임없는 견제 속
에서도 지금의 위치까지 올라왔는데 제천맹이란 막강한 세력이 있는 그녀가
이인자의 지위에 만족할 리가 없을 것이란 생각이었다.
"앉으세요, 백랑!"
제천맹의 가장 깊숙한 곳인 제갈수연의 침실.
자리옷으로 갈아입은 제갈수연이 방 안으로 들어서는 백무천을 화사한 미
소로 맞이하고 있었다.
"무슨 일로 이 야심한 밤에 나를 부른 것이오."
백무천의 목소리에 불만이 가득 서려 있었다. 제천맹의 맹주가 되면서 두
사람의 관계가 더욱 소원해졌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서로가 서로를
피하게 되었고 오가는 모든 대화 또한 공적인 사항밖에 없었다. 지금에 와
서는 그녀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아이! 백랑도! 요즘 바빴다는 거 아시잖아요."
그런 백무천의 심정을 알고 있다는 듯 눈웃음을 치며 아양을 떨고 있다.
"허! 당신의 그런 모습을 보면 어느 쪽이 진짜 모습인지 알 수가 없어."
"둘 다 저예요."
야망을 가진 제갈수연과 사랑을 가진 제갈수연, 서로 별개의 모습이 아니
다. 야망을 위해 사랑을 버리는 행위는 어리석은 자들이나 하는 짓이다. 진
정 뛰어난 사람은 야망 속에 사랑을 감출 줄 알아야 하고 사랑 속에 야망을
숨길 줄도 알아야 한다. 사랑과 야망은 같이 키워야 하는 것이다.
"백랑은 우리가 성공했다고 보세요?"
"제천맹의 맹주면 성공한 게 아닌가?"
그러나 제갈수연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직은 아니라는 말이었다. 검제 담
운천이 있는 한, 영원히 이인자일 수밖에 없다. 타인에겐 대단한 자리일지
몰라도 그녀에게는 아니었다. 자신은 인간이 아니었다. 잘 길들여진 노예
중의 한 명일뿐이었다. 담운천과 독대를 할 때 뼈저리게 느낀 사항이었다.
"수연?"
제갈수연의 마음을 읽었는지 백무천의 표정이 굳어졌다. 너무 급하게 몰아
치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애당초 계획은 기다리기로 했었다. 백오
십 노인이 앞으로 살면 얼마나 살겠냐며. 그런데 제갈수연은 더 이상 기다
리지 않으려 한다. 시간을 앞당기려 하고 있는 것이다.
"백랑! 오십이 넘어서 혼례를 올리면 남들이 비웃습니다."
"당신과 이 방에서 같이 아침을 먹기 위해서라도 빨리 끝내야 하겠구려."
천하제일이 되어야 혼례를 올린다는데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어차피 사랑
하는 여인이고 그녀가 원하는 일이니 해주어야 한다. 그게 두 사람을 위한
길이고, 미래를 위하는 길인 것이다.
'북경으로 가주세요.'
갑자기 제갈수연이 전음으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자가 천자의 자리를 노리는 거요?'
백무천이 경악스런 표정으로 제갈수연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말이 맞다면
엄청난 일이 일어날 수 있음이다. 일개 무인이 천자의 자리를 노리다니 말
도 안 되는 상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 파멸의 무덤을 파는 행위인
게다.
'그자와 계속 연계되어 있으면 우리도 끝장납니다.'
제갈수연이 가장 우려하고 있는 점이었다. 그럴 리도 없겠지만 만일 담운
천이 황제가 된다면 자신은 영원히 그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할 터이고,
실패한다면 역모의 가담자로 같이 취급될 것임이 자명한 사실이다. 또한 당
금 황제의 시해에도 담운천이 관련되어 있는 것 같지 않은가. 강호무림보다
그쪽이 더 급한 상황이었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하오.'
'일단 현 황제 측근에 최대한 연줄을 만드세요. 석숭과 별로 관계가 없는
상층부의 인물로요.'
살아남기 위해서는 담운천과 제천맹이 무관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길밖에
없고, 그 방법은 제천맹의 실권자 중 한 명이 그들을 도와야 한다는 것이다
. 또한 단순히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리고 석숭과도 접촉을 해야 해요.'
'무슨 소리요?'
백무천의 얼굴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변했다. 석숭은 자신들을 거의 원수
로 생각하고 있다. 그가 가장 친했던 자들을 전부 몰살시킨 자신들이 아닌
가. 그럼에도 제갈수연은 그를 만나 협상을 하려 하고 있다. 너무 위험한
발상인 것이다.
'그도 우리의 도움을 거절하지 못합니다. 이제부턴 담운천과 싸워야 하니
까요.'
비록 과거에는 적이었지만 지금은 서로 협조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 담운
천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설사 원수라 할지라도 손을 잡아야 한다는 말이었
다.
'담운천이 날 찾지 않을까?'
제갈수연의 말은 이해할 수 있겠는데 문제는 혈맹의 정보력이었다. 인정하
기 싫지만 혈맹의 정보력은 과거 제갈수연이 데리고 있던 밀천각보다 더 위
였다. 그런 자들의 눈을 피해 북경에서 활동한다는 게 거의 불가능한 일이
아니겠는가.
'감숙성에 가서 내상을 당하고 오세요. 거의 일 년 정도 치료해야 할 정도
로.'
'좋소, 내일 북경으로 출발하도록 하겠소. 그럼…….'
내상까지 당하고 오라는 제갈수연의 말에 그제야 백무천도 일의 심각성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단순히 천하제일이 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서도 담운천을 제거해야 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곳에서 자고 가세요."
이제는 사랑 속에 야망을 숨겨야 할 시간이다. 제갈수연이 요염한 미소를
지으며 백무천을 쳐다보았다.
"연매!"
감격스런 표정의 백무천이 제갈수연을 와락 껴안았다. 두 사람의 몸에서
뜨거운 열기가 흘러나오며 방 안 가득 흘러넘쳤다. 사랑의 열정이었다.
* * *
하남성에 있는 제천맹에서 야망자들의 사랑이 불타고 있는 그 밤에, 뇌룡현
에 있는 한 골짜기에서는 그 야망자들에 의해 모든 것을 잃어버린 슬픈 사
랑이 흐르고 있었다.
세 사람.
대월산을 출발한 소살우와 소운이 혈가의 후예가 잠들어 있는 곳까지 왔던
거였다. 이곳에 온 지도 상당한 시간이 지났지만 백산의 상태는 전혀 차도
가 없었다. 여전히 붉은 눈동자를 하고 무심한 하늘만 쳐다보고 있었다. 무
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있는 본인 이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백랑! 당신은 오늘도 말이 없군요."
호리병 모양으로 사방이 꽉 막힌 곳의 분지, 그 분지의 중앙에 있는 연못
가에서 벌거벗은 백산의 몸을 씻겨주며 소운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온몸
가득 삶의 상처가 가득하다. 늙어버린 얼굴 위로 다시 화상의 흉터가 자리
했고 그것들이 온몸으로 이어지고 있다. 어디 한 곳 정상적인 곳이 없다.
그런 백산의 몸 위로 물을 조금씩 끼얹어가며 씻겨주고 있는 소운의 손길은
정성스럽기만 했다.
"오늘은 수염 좀 깎아야 되겠어요. 당신은 먹은 게 전부 그리만 가는 모양
이에요."
이미 얼굴의 형태라 말할 수 없지만 수염은 자라고 있었다. 백산이 살아
있다는 흔적 중의 하나였다. 대소변을 가리지는 못하고 있으나 생리적인 현
상은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었다. 길어나는 수염, 머리카락 등등이 그녀에게
희망을 갖게 해주는 매개체인 것이다. 사랑하는 님이 살아 있다는, 사랑하
는 님에게 자신이 필요한 사람이라는 그런 생각이 하루하루를 견디게 해주
는 원동력이었다.
백산의 몸을 전부 씻긴 소운이 그를 안아들고 혈가의 후예가 있는 동굴로
움직였다. 자신과 백산의 거처였다. 백산을 돌보지 않는 시간에는 혈가의
역사를 읽으며 그들의 삶을 생각해보곤 했다. 단지 그들의 무기를 이어받은
것뿐인데 그들과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 같았다.
"형수님! 이것 좀 드십시오."
동굴 밖에서 소운을 부르는 소살우의 손에는, 막 구웠는지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산새 한 마리가 들려져 있었다. 갈수록 야위어가는 소운이 걱정되었
다. 그녀 또한 백산이 먹고 있는 속명회혼단으로 연명하고 있었다. 남편이
정신을 잃고 있는데 자신만 포만감을 느끼며 잠이 드는 게 싫다는 것이었다
.
말은 그렇게 했지만 실질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백산에게 약 먹이는 날
짜를 맞추기 위해서였다. 속명회혼단의 효과가 십 일 정도 지속된다 하였지
만 정확한 날짜는 알지 못한다. 결국 다시 먹여야 할 시기를 알기 위해서는
같이 복용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자신이 배가 고플 때가 백산에게 약 먹일
시간이라는 거였다.
"무공은 진전이 있어요?"
소살우가 내미는 고기는 쳐다보지도 않고 무공에 관한 이야기를 꺼낸다.
이미 백산과 모든 것을 함께하기로 했다. 사 년 뒤에도 그가 깨어나지 못하
면 소살우의 손을 빌리는 게 아니라 직접 보내줄 것이다. 아울러 자신도…
….
"도련님! 앞으로 이곳에 오지 마세요. 연초에 한 번만 오세요."
소살우에게 풍뢰곡으로 자리를 옮기라는 말이었다. 이곳에 있으면 무공에
전념하지 못한다. 언제나 백산과 자신에게 신경을 써야 하기에 무공 진전이
될 리가 없다. 그래서 하는 말이었다.
"형수님!"
"사 년 뒤의 약속을 잊지 마세요. 벌써 육 개월이나 허송세월했어요. 가슴
속에 있는 주머니는 잊으신 건가요? 백랑은 저 혼자서도 충분해요, 아셨죠?
"
"알겠습니다, 형수님."
소살우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곳에 있으면 무공을 익히지 못한다는 걸
자신도 알고 있다. 그러나 차마 갈 수가 없었다. 의식도 없는 형님과 그를
간호하는 형수님, 자신이 떠나버리면 부서져버릴 것만 같았다. 다시 이곳을
찾았을 때 부서지고 없으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에 떠나지 못하고 있었던
거였다.
"도련님! 저도 약하지 않습니다. 세상 누구보다 강한 여인입니다."
소운이 방긋 미소를 지었다. 사랑. 자신을 강하게 해주는 것이다. 천영 언
니가 그랬고, 추렴 언니가 그랬다. 그리고 님이 그랬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린 사람들이다. 목숨마저도 기꺼이 버린 사람들이다. 그
게 사랑의 힘인 게다.
"알겠습니다, 저도 강해지겠습니다. 누구보다 강해져서 오겠습니다."
다시 한 번 두 사람을 돌아본 소살우가 못 속으로 몸을 던졌다. 풍뢰곡으
로 갈 것이다. 형님이 무공을 익혔던 그곳으로 가서 무공을 익힐 것이다.
최고가 되지 못하면 죽는다는 각오를 가지고 노력할 것이다.
"여보, 나 잘했지요? 천영 언니만큼은 아니어도."
백산에게 가볍게 입을 맞추며 얼굴을 붉혔다. 님은 듣지 못하지만 처음으
로 여보라는 말을 해보았다. 어색할 거라 생각했었는데 너무 자연스럽게 흘
러나온다. 마치 수십 번을 연습했던 것처럼.
"이젠 정말 우리 둘만 남았어요. 신혼 같지요?"
소살우가 떠나도 세월은 속절없이 흘렀다. 못 두 개가 전부인 조그마한 공
터에 낙엽이 쌓이고 비가 오고 겨울이라고 알려줄 만한 흔적도 없이 시간이
흐른다.
하늘에 있는 보름달을 몇 번이나 보았는지, 밤하늘을 날아가는 철새는 또
얼마나 보았는지, 언제나 백산을 품어 안고 하늘을 쳐다봐서인지 그게 마치
습관처럼 되어버렸다.
"여보, 오늘은 같이 목욕하고 산책하자."
소살우가 없기에 이젠 백산 혼자 목욕시키지 않는다. 두 사람이 같이 못에
들어서 서로 씻겨주고 있다.
"좀 세게 문질러요! 얼굴이 늙었다고 힘까지 없는 거예요?"
힘없이 늘어진 백산의 주먹을 잡고 자신의 몸 이곳저곳을 문질러본다. 여
전히 꽉 쥐고 있는 주먹에서는 애명환 소리가 흐르고 아릿한 악취마저도 나
오고 있는데 절대 펴지 않는다. 부인의 몸을 씻겨주는데도 주먹을 쥐고 있
다.
그러나 님의 손길이다. 님이 자신을 만져주고 있는 것이다. 흉 지고 투박
한 손이 자신의 온몸을 주무르고 있다. 그 손길이 좋았는데, 못생긴 얼굴이
었지만 그 웃음이 좋았는데…. 지금은 아무런 말도, 아무런 표정도 없다.
"오늘도 역시 말이 없군요. 당신은 목석이에요, 목석. 이 고독의 바다 씨,
산책이나 가요."
정해진 그녀의 일과였다. 백산을 목욕시키고 난 후 그를 업고 안쪽을 돌아
다니는 것, 눈 오는 날 딱 한 번 업어주고는 이제 그는 거의 매일 업혀 있
다.
"당신은 갈수록 가벼워지는 것 같아요."
백산을 등에 업은 소운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 이곳을 열 바퀴
정도 돌고 나면 산책이 끝나고 잠을 잘 것이다. 아침에 깨어날 때면 언제나
이 사람의 코를 만져보고 맥을 짚어보는 게 가장 먼저 하는 일이다. 따뜻
한 콧김과 뛰는 맥박소리가 들리면 그때서야 안심을 하며 하루의 일과를 시
작한다.
"어? 저건! 한 장이 더 있었네."
절벽 아래쪽 바위틈에 깊숙이 박혀 있는 철판을 발견한 소운의 얼굴이 환
하게 밝아졌다. 오백여 장 있던 철판을 얼마나 읽었는지 모른다. 이제 거의
외울 정도가 되었는데 새로운 철판이 한 장 더 있는 거였다.
"이거나 한번 볼까?"
재빨리 철판을 뽑아든 소운이 자신들의 숙소인 동굴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랜만에 흥미로운 물건을 발견했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소운이 발견한 그 철판.
혈가의 후예가 마지막 자신의 이야기를 적어두었던 바로 그 철판이었다.
팽무도가 던져버렸던, 파멸안의 운명이 적혀 있었던 바로 그 철판.
동굴로 돌아와 백산을 내려두고 철판을 읽어 내려가던 소운의 얼굴에 한줄
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백산의 정신이 들게 할 방법이 있었다. 소령에게 속
죄할 방법이 적혀 있었던 거였다. 팽무도가 말하지 않았지만 그녀도 이미
알고 있었다. 소령이 납치되는 순간에 할아버지가 자리에 없었다는 걸, 강
시가 되어버린 할머니를 만나기 위해 천영 언니와 소령을 버리고 떠났던 것
이다.
"서둘러야겠어요. 다른 도련님들은 전부 준비를 하고 있을 거예요. 이루어
내지 못하면 죽는다는 각오로 말이에요."
처연한 눈으로 백산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 * *
혈광마겁(血光魔劫).
지난겨울, 붉은 혈광을 풍겨내던 광인들이 저지른 혈겁을 세인들은 혈광마
겁이라 칭했다. 전쟁의 막바지에 등장한 그들은 강호무림인들에게 경각심을
주기에 충분한 사항이었다. 천무맹과 천마맹의 존재로 인하여 다른 마세들
이 준동할 여력이 없다 여겼었는데, 광인들의 등장은 강호무림인들의 그런
사고를 여지없이 깨트려버렸다.
더군다나 그들의 배후가 오십 년 전에 혈겁을 저질렀던 백살마대의 단주와
부단주였고, 남궁세가와 하북팽가의 사주를 받았다는 사실이 알려졌을 땐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자중의 세월을 보내고 있다 했던 그들이 혈겁
의 원흉이란 말이었기에, 과거에 저지른 죄악도 부족해서 또다시 그런 만행
을 저질렀다는 사실이었기에, 팽가와 남궁세가의 멸문을 당연하게 받아들였
다.
아직 전쟁의 후유증이 완전하게 치유되지 않은 강호무림에 제천맹주 제갈
수연의 일성이 다시 한 번 강호전역을 강타했다.
"남궁세가와 팽가의 잔당들은 아직 소탕되지 않았다. 과거 천마맹이 있던
그곳에 다시 천하를 도모하기 위해 철혈전신 철목승과 같이 힘을 기르고 있
다. 악의 씨앗을 이대로 방치할 것인가. 나 제천맹주인 제갈수연은 그들의
뿌리를 뽑아 강호의 광명을 찾아올 것이다. 다시는 혈광마인 같은 악인이
탄생하지 않도록 신명을 다해 그들을 처단할 것이다. 모여라. 강호무림의
평화를 원하는 자들은 전부 감숙성으로 모여라."